식장산 산행기 (051210)

               

   아침에 일어나니 눈발이 가느다랗게 날리고 있다. 쌓일 것인지 아니면 그칠 것인지 가늠되지 않는 아주 애매한 양이다. 아들 기말고사에, 시부모님 이사에, 밀린 업무에 정말 정신이 없는 한 주였다. 정말 오늘 만큼은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끝도 없이 자고 싶은 생각뿐이다.


   그런데 남편이 가까운 식장산에 다녀오자고 한다. 대전에 살면서 언젠가 한번쯤은 꼭 올라가보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던 차였기에 자고 싶은 욕구를 떨쳐버리고 따라나선 시간이 오전 10시 30분쯤이다. 날씨가 추우니 아이젠을 준비하고 등산잠바에 아들 파카까지 껴입었다. 눈이 내리고 있으므로 차를 두고 택시를 탔다. 택시를 타고 나니 남편이 카메라 충전을 하지 못하였다고 안타까워한다. 그러나 어쩌랴, 남은 것만으로 사진을 찍을 수밖에.


  택시기사가 차림새를 보더니 자기도 어제 수통골에 다녀왔는데 눈이 많더라면서 꼭 아이젠을 하고 올라가라고 연신 당부를 한다. 오락가락하는 눈발을 헤치고 가다보니 어느덧 세천유원지다.


   식장산(598m)은 대전광역시 동구 판암동, 세천동, 산내동 일원과 충청북도 옥천군 군서면에 걸쳐 위치한, 오랜 세월 대전과 대전 사람들을 지켜온 산이다. 삼국시대에는 백제와 신라의 국경을 이루었다고 하고, 자락이 넓고 물이 좋아서 옛날부터 만인을 살릴 수 있는 땅이라는 기록이 있으며, 어떤 장군이 식장산에 많은 군량을 숨겼다는 등 많은 전설이 숨어있기도 하다.

  

   식장산(食藏山)이라는 이름에 관하여는 삼국시대에 백제가 이곳에 성을 쌓고 군량을 많이 비축해 두었다는데서 유래했다는 전설과 효성이 지극한 부부가 연로한 어머니의 밥을 철없이 뺏어 먹는 어린 아들을 이 산에 파묻으려고 땅을 팠더니 끝없이 먹을 것이 나오는 화수분 같은 밥그릇이 나왔고, 나중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그 밥그릇을 다시 이 산에 묻었다고 해서 식장산으로 부르게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후자의 전설은 약간 과장되어 있기는 하지만 지나치게 자식에게만 사랑을 쏟아 붓고 부모에게는 무관심한 요즘의 우리들이 새겨들어야 하는 교훈적인 전설이라는 생각이 든다.


   대전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한 우리 부부에게는 개인적으로 식장산에 대한 추억이 있다. 결혼해서 맨 처음 전세로 마련한 아파트가 그 때 막 신축하여 입주가 시작되었던 판암동에 있는 주공아파트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판암동 주공아파트 앞길로 해서 세천공원까지 왔는데, 우리가 살던 아파트는 여전히 남아 있지만 그 주변 환경은 너무도 변하여 그 당시의 흔적을 전혀 찾을 수가 없다.

  

   아파트 뒤쪽으로 경부선 철로가 있고, 그 철로를 건너 식장산 자락을 따라 개심사 가는 길목에 약수터가 하나 있었다. 주말이면 그 철로를 건너 약수를 뜨러 가곤 했었는데, 대전에 다시 내려온 지 5년이 지났건만 한 번도 그곳에 찾아가본 적이 없다.

  

   세천공원 앞에서 내려 골목길을 잠시 걸어가는데 빙판이라 무척 미끄럽다. 그런 길을 100m 가량 걸어가니 세천공원이다. 세천공원은 식장산 동북쪽의 울창한 수림에 쌓여 있는데 그 일대가 생태보전림으로 지정되어 있고, 봄이면 벚꽃이 장관을 이루며 저수지와 늪지대가 있어 호젓한 산책로로 이보다 더 이상 아름다운 곳은 드물다고 소문이 나있는 곳이다. 공원 안으로 쑥 들어가니 둑이 만들어져 있고 둑으로 폭포처럼 물이 흘러내린다. 둑 옆으로 세천저수지를 따라 올라가는 길이 있다.


   눈발이 가느다랗게 오락가락 하다가 이내 그쳐버린다. 겨울철 세천저수지는 황량하고 쓸쓸하다. 게다가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서인지 망도 설치해놓아 전망도 그다지 좋지는 않다. 그래도 역시 저수지를 따라 걷는 길은 그냥 산길보다는 운치가 있다. 길은 그냥 평지처럼 이어져 있다. 눈도 그다지 많이 쌓이지는 않아 다소 미끄럽기는 하지만 그런대로 걸을만하다. 그렇게 한참을 가니 갈림길이 나온다.

  

   오른쪽 오르막길로 가야하는데 올려다보니 제법 눈이 많이 쌓인 것이 보이고 한 두 사람 멈춰 서서 아이젠을 매고 있다. 우리도 각자 아이젠을 매고 올라가기 시작한다. 올라간다고 해봤자 길은 아주 완만한 오르막길이다. 눈이 조금씩 쌓인 것을 제외하고는 보통의 산책길이라고 할 만큼 길이 좋다.

  

   이제 올라갈수록 바닥에 쌓인 눈이 많아진다. 몇 차례 눈이 내리기는 했지만 그 양이 적어서 산 아래에서는 그 맛을 느낄 수가 없더니 산 위에 올라오니 소담스럽게 쌓인 눈 맛을 알겠다. 온 산이 눈으로 하얗게 덮여 있고 특히 군데군데 계곡의 바윗돌 위에는 하얀 솜이불을 덮고 있는 것처럼 포근하기만 하다. 그러나 나무들은 눈꽃을 제대로 피워내지 못하고 있다. 아마도 눈이 충분히 내리지 않은 까닭이리다.

  

   산이 참으로 순하다. 마치 무슨 일이 있어도 지나치게 흥분하지 않고 그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 이 고장 사람들의 성격을 닮았다. 아니, 이 고장 사람들이 이 산을 닮았다고 하는 것이 옳겠다. 그러나 이번에 신행정수도와 관련해 이 고장 사람들이 모여 과격하게 집회를 하는 것을 보니 사람들의 인심도 옛날과는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순한 이 산의 정기가 세태와 경제적 이해관계에 밀려버린 듯해 잠시 서글퍼진다.  


   그렇게 한참을 평지 같은 길을 걸었다. 때때로 길 사이로 흐르는 개울에 걸쳐 있는 돌다리를 건너기도 하면서. 독수리봉과 고산사가 갈라지는 갈림길이 나온다. 양쪽 다 제법 경사가 있어 보이는 길이다.

  

   남편은 우선 독수리봉까지 갔다가 되돌아 내려와서 고산사로 해서 산내 쪽으로 하산하잔다. 그 곳에서 독수리봉까지는 제법 경사가 있다. 경사로를 한참 올라가니 독수리봉(586m)이다. 독수리봉은 제법 넓은 운동장처럼 되어 있고, 그 운동장 가로 의자가 몇 개 놓여있다. 표지석은 없고 독수리봉임을 알리는 막대가 하나 외롭게 서 있다. 독수리봉에 서서 내려다보니 자욱한 안개 속에 수 없이 많은 봉우리들이 구비구비 펼쳐져 있다. 꿈처럼 아득한 풍경이다.


    (식장산 독수리봉)

  

   독수리봉에서 다시 돌아 내려와 고산사로 가는 길로 접어든다. 세천공원에서 독수리봉까지는 제법 등산객이 많았는데 이 길에는 눈 위에 발자국들이 찍혀 있어 사람이 지나다닌 자취는 알 수 있으나 정작 지나는 사람이 없다. 독수리봉에서 고산사로 가는 중간에 식장산 정상이 있다. 그렇다 보니 다시 길은 오르막길이다. 그러나 여느 산 보다는 길이 순하다. 가는 길목마다 바위들도 있고 운치가 있는 길이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발길을 멈추고 왼쪽을 조망한다. 숨이 탁 막힐 것 같은 환상적인 풍경이 눈앞에 있다. 살짝 내린 눈은 능선을 살린 채 나머지 부분을 살포시 덮고 있어 한 폭의 수묵담채화를 펼쳐 놓은 것 같다. 눈이 많이 내렸다면 온 산이 흰 눈으로 덮여 그 경계를 구분할 수 없을 텐데, 적당히 내린 눈이 이런 풍경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우리가 그림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 한참을 그 자리에 붙박은 듯 서 있었다. 그러나 나그네는 또다시 길을 가야 하는 법,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다시 정상을 향해 나아간다.

 

  (한 폭의 수묵화 같은 풍경)

 

   그렇게 능선을 따라 오르내리다 보니 커다란 철탑이 나타난다. 이것이 바로 시내에서 올려다보면 보이는 식장산 철탑이다. 철탑이 정상을 차지하고 있어 정상엔 정작 출입금지다. 먼저 보이는 철탑 두 개는 한국통신의 송수신탑이고, 저 쪽에 보이는 철탑 들은 TV 송수신을 위한 철탑이란다. 생활을 편리하게 하기 위하여 부득이하다지만 가뜩이나 정상을 차지하고 있는 것도 마뜩찮은 차에 모양마저 흉물스러워 더욱 보기 싫다. 그런데 남편은 그런 철탑이 웅장하고 멋있다고 한다. 그러니 알 수 없는 일이다. 판단은 보는 사람 각자가 하는 수밖에.


   계룡산 정상에 있던 철탑은 정상의 정기를 훼손한다 하여 바로 아래 부분으로 옮겼다는데 식장산 철탑도 부근으로 옮기고 산과 사람들에게 정상을 되돌려 주는 것은 어떨까?


   철탑을 돌아가니 해돋이 전망대다. 해돋이 전망대에는 국기봉이 있고 태극기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그리고 전망대 약간 아래쪽에 팔각정이 있다. 팔각정에서는 판암동(개심사) 가는 길과 산내동(고산사, 식장사) 가는 길이 갈라진다. 옛 추억에 젖어 판암동으로 하산하자고 졸라 보았으나 남편은 원래 예정대로 산내동 쪽으로 길을 잡아 내려간다.


   팔각정에서 식장사까지는 제법 가파른 길이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식장사가 보인다. 식장사는 암자같은 규모의 아주 작은 절이다. 절을 들르지 않고 그냥 지나쳐 내려오니 식장사 바로 앞에 콘크리트 포장도로가 나온다. 이제 아이젠을 벗는다. 마치 날아갈 듯 몸이 가볍게 느껴진다.


   그렇게 200m 가량 내려오니 고산사다. 고산사에는 담이 없고 그저 넓은 마당에 절 건물들이 여기저기 늘어서 있다. 고산사는 신라 정강왕 원년인 서기 886년 도선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식장산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절인데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0호로 지정되어 있다. 수양정진의 도량으로 이름이 높아 수많은 고덕대승(高德大僧)들이 이곳을 거쳐갔다고 하는데 마침 동안거 중이다. 기도하시는 스님들이 모두 득도하시기를. 고산사를 뒤로 하고 내려오니 바로 주택들이 밀집해 있다. 이토록 사람들 가까이 조용한 산사가 숨어 있다니. 신기한 일이다.

  

   오늘 우리는 식장산에 오르는 사람들이 주로 이용한다는 <세천공원→세천저수지→독수리봉→정상→해돋이 전망대→고산사> 코스를 이용하여 등산을 하였다. 발밑의 아이젠이 묵직했지만 그리 많지도 적지도 않으면서도 소담스럽게 쌓인 하얀 눈이 있어 즐거운 마음으로 다녀올 수 있었다.


   산은 순하고, 아름답고, 또 몽환적이었으며 그림 같았다. 한 폭의 그림 속을 그림의 일부가 되어 떠돌다 온 양 마음이 푸근하다. 이토록 아름답고도 깊은 산이 엎어질 듯 가까운 거리에 있다는 사실에 감탄, 그리고 감사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