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천년 이무기처럼 함부로 구불텅 거리며 오르락 내리락 하는 능선길엔

털벙어리 장갑으로 어한을 하느라 하였건만 수도산 자락을 훓고온 바람은 매섭기가 칼날이 따로 없다.

등짝엔 땀이 흥건히 괴어 장마비를 맞은겄 같이 고의 적삼이 축축하지만 얼굴과 손가락은 나뭇가지가 스치기라도 할량이면 얼음침을 맞는 듯 따끔하다.

예전에 희미하던 송곡령 십자로 안부는 이제는 세도가 문전처럼 길이 확연해 수가야의 높아진 관심을 대변한다.

소금장수 도붓꾼처럼 단지봉 오름길을 콩심는 시늉을 내며 오르노라니 꼴에 두어번 면식이 있는 길이라고 길라잡이를 자청한 객의 속내가 편하지만은 않아 봉충 다리에 울력 걸음이 진저리가 난다.

단지봉 헬리포트를 마악 올라서는데 저쪽 지리산에 붉은 안개가 무리지어 수상하게 감돌더니 곧이어 마차 바퀴같은 둥근 태양이 용암이 끓어 오르듯

힘차게 솟구친다.

뒤따라 오시는 이원호 선생님께 급각히 통기를 놓으니 선생님의 옥안도 태양처럼 불그레 달아 오른다.

하지만 몸을 반도 빼올리기전에 얄미운 구름이 유세하듯 찍자를 놓는 바람에  일출의 장관은 허무하게 끝이 나고 만다.  우째 이런일이,,


 


 

자정이 넘도록 이생각 저생각으로  방구들을 밀고 다니다 어느새 까무룩히 잠이 들었나, 번쩍 눈을 뜨고 습관적으로 시계를 보니 새벽 2시가 넘었다.

대구의 원호님과 향골 가야 정류장에서 3시에 마나기로 이미 선약이 있은터라  부랴부랴 걸망 살림을 꾸리는데 곁은 아직도 비몽사몽으로 제정신이 아니다.

똥마련 년 국거리 썰듯 엄벙덤벙 나선길이 결국은 새로 구입한 양휘항을 빼먹었고 약속 장소에 선생님이 먼저 와서 기다리게 하는 결례를 야기하고 만다.   가야에서 예약한 택시로 수도암을 찾으니 선생님은 끝내 거금의 택시비를 부담하사 객과 곁을 더욱 부끄럽게 한다.

신새벽의 수도암은 고요한 정적에 파묻혀 일행들의 발자욱 소리만이 대웅전 앞마당에  떨렁거리며 흩어져가고 초겨울의 바람은 옷매무새를 더욱 단속하니 자연 성실한 불자인양 신심이 절로인다.

곧장 날등으로 선불 맞은 멧톧처럼 씩씨거리며 치고 오르니 낯익은 청암사 길이 뚜렷이 따라붙고 두어번의 오르막을 가진 지능선은 수도산으로 길을 조인다.


 

찬서리에 구슬픈 소상강의 기러기 울음소리가 운치있는 수도산 정상은 잘 달궈진 놋화로의 불씨를 헤쳐 놓은것 같은 거창 읍내의 야경이 보석처럼 반짝이는데 새벽 야기를 오래 참기 힘들어 정상비만 가만히 쓸어 보고는 단지봉으로 발길을 돌린다.

낮이였다면 수도산에서 보는 가야산의 자태가 참으로 황홀 할텐데 아쉽기 그지 없는 일이 아닐수 없다.

낙엽이 두툼히 깔린길은 종주꾼 이외는 왕래가 잦지 않아 마치 빙판위에 참기름을 엎질러 놓은듯 미끄러워 자꾸만 걸음이 엇나가는 통에 은근히 한출첨배의 식은땀이 등을 타고 흐른다.

수제 마을에서 두 번이나 올랐던 심방 갈림길을 지나치면서 길은 다시 오르막으로 바뀌어 단지봉으로 무리져 가는데 가끔씩 길이 낙엽 아래로 사라져 명색 향도라는 놈이 우왕좌왕 경황이 없어 선생님과 곁에게 면목이 서지 않는다.  송곡령 이후길은 누군인지는 알수 없으나 잡목  제거를 깨끗이 해놓아 단지봉으로 쉽게 올라서게 만들어 놓았다.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말씀 전한다.


 


 

청석령 지나거다 초하구 어드메오

호풍도 차도찰샤 궃은비는 무삼일고

뉘라서 내행색 그려다 님계신데 보낼꼬 .


 

이시는 봉림대군 즉 효종이 삼전도의 치욕을 당한후 삼학사(오달제,홍익환,윤집) 와 함께 심양으로 볼모로 끌려 가면서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지은 시이다.  훗날 소현세자의 석연치 않은 죽음으로 왕위에 오른 후 송시열의 북벌론에 크게 힘입어 군비를 확충하고 이완을 장군을 선봉장으로 삼아 일로매진 했으나 두차례의 큰 전쟁으로 피폐해진 재정과 날로 강성해지는 청의 기세에 밀려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1659년 가뭄이 전국을 메마르게 할 때 41세의 한참 나이로 붕어하고 만다.

청의 문물을 받아 들이고 청과 우호적이였던 소현 세자가 왕이 되었다면 조선은 강국의 기틀을 마련할수 있었다는 얘기도 있으나 이는 다음에 하기로 하자.

각설하고 인조반정을 전후해 훈도시국(일본)에서도 공주의 출생이 있었는데 이 공주가 점차 성장하매 빼어난 자색과 더불어 남다른 재주가 견줄대가 없도록 뛰어나  왕이 손안의 보물로 여겨 사랑함이 극진 했는데 공주의 나이 16세가 되자 그는 부왕께 아뢰기를,

“소녀는 일찍부터 천하를 경륜할 재주를 가진 영웅이 아니면 결혼을 하지 않기로 굳게 마음을 먹었는데 지금 우리나라에는 그런 장부가 없으니 바다 건너 조선으로 가보려 합니다.”

놀란 왜왕이 백방으로 만류했으나 철석같은 공주의 뜻을 꺾지 못하고 마침내는 허락하고 만다.

“네뜻이 정 그렇다면 가기는 하되 아직은 연소하니 길을 조심하고 몸을 보중하라.”

길게 읍하고 물러난 공주는 그길로 조선으로 왔으는 머리를 깎고 여승의 행색으로 조선 팔도를 발섭하며 영웅을 구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한양까지 오게 되었다.


 


 

그때 마침 바깥 나들이를 나왔던 봉림대군에게 우연히 눈에 띄게 되었다.

대군은 말없이 손짓으로 공주에게 따라오라 이르고는 대궐로 환궐하니 공주도 무슨 생각이서인지 절에간 색시처럼 곱게 따라 나선다.

봉림은 대궐 한적한 곳에 공주의 거처를 마련해 주고는 머리를 다시 기르라 분부하니 공주 또한 순순히 따랐다.

공주의 매색이 워낙 뛰어나고 학문이 출중할뿐더러 행동거지가 참해 사람들의 칭찬이 자자한데 일년이 지난 어느날 대궐의 말을 관리하던 하인놈이 사추리에 비파 소리를 퉁기며 가래톳이 서도록 달려 와서는,

“마마, 마마께옵서 아끼시던 천리마와 함께 후원에 거처하던 여승의 종적이 묘연하옵고  방안에 서찰 한 장만이 있더이다.”

하는데 놈의 얼굴엔 노랗게 외꽃이 피어 가히 목불인견이다.

그러나 봉림은 별로 놀라지도 않고 피봉을 벗겨 내용을 감하니,

‘이몸은 왜국 공주의 몸으로 천하 영웅을 구하던 중 다행히 대군의 눈에 들었으나 일년을 두고 마마를 살펴 보건데 작은 나라의 영웅은 되겠으나 큰나라의 영웅은 어렵겠삽기에 천리마를 빌려 떠나오니 혜량하소서.’

뭐 대충 이런 내용이다.

대군은 심히 괴이하게 여겼으나 그후 어디서도 공주를 봤다는 사람이 없어 중동무이 되고 말았는데 얼마후 병자호란이 터져 형님인 소현세자와 함께 호지인 심야으로 끌려가 눈앞에서 삼학사가 성수만세를 외치며 몽둥이로 맞아 죽는 광경을 목도하며 반청 의지를 불태운다.


 

일출을 다보지는 못했으나 단지봉에서의 조망은 참으로 근사하다.

무었보다 눈앞의 가야산이 마악 터지려는 연꽃 봉우리처럼 단아하고 멀리 지리산과 덕유산 또한 장중하게 다가서 곁은 입이 함지박으로 벌어진다.

간단한 김밥과 선생님이 준비하신 오징어 회로 소주 한잔을 곁들여 얼요기를 하고는 좌일곡령으로 나서는데 선생님의 말씀 마따나 어이해 봉우리인 좌일곡령이 이름을 바로 가지지 못하고 고개로 되었는지 알쏭달쏭 하기만 하다.

좌일곡령의 조망은 수도산에서 단지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의 갈래가 가장 약여하게 드러나는 곳으로 쉬어 가기에도 좋아 핑계김에 또 한참이나 노닥거리다 목통령 긴능선을 밟아 나선다.

잘 정리된 길은 산행의 수고를 덜어주고 간간히 뵈는 주왕 성님의 표지기 가 미상불 반갑다.

목통령 역시 예전의 희미했던 길이 번듯한 사거리 길로 바뀌어서 몇 년전 개금에서 어렵게 올라왔던 때와는 천양지차라 세월의 무게를 실감한다.

목통령 이후길은 점차로 고도를 높이며 분계령으로 나서는데 이제껏 왔던 번듯한 길과는 달리 잡목이 우거진 거친길로 수도 -가야 전 구간중 가장 힘드는 길목이다.


 


 

선생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발아래를 챙기면 머리가 난감이고 머리를 건사하면 발이 울부짖는다니  명쾌한 혜찰이 아닐 수 없다.

낙엽에 미끄러지는 오름길이 장딴지에 옹심이를 일게 하지만 그래도 바로 오른편 아래에서 눌러붙는 개금 마을의 정겨운 풍경과 의상봉에서 깃대봉을 거쳐 두리봉으로 마중 나오는 헌걸찬 능선을 보는 맛이 일품이다.

분계령 전위봉에서 보는 가야산은 불국정토의 수미산처럼 크게 솟아 있어 그 위엄이 사해를 덮고도 남아 과연 천하대찰 해인사가 안주하기엔 제격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선생님은 명당에 이르면 어김없이 객 부부를 산중에 넣어 주시는 수고로움을 마다 않으시며 금슬을 돋워 주시니 이 은혜를 어이할꼬,,


 


 

10년을 심양에서 비분에 찬 세월을 보내다 대군은 마침내 고국땅으로 돌아오게 된다.

청의 세조가 귀향 잔치를 베풀어 마지못해 참석 하였더니 음식이 모두 고국에서 즐기던 겄인지라 대군이 유구무언으로 놀라는데 청세조가,

“어려워 말고 많이 들라. 가는 마당에 내가 부정한 음식으로 그대를 시험 하겠는가. 그리고 황후가 꼭 그대를 뵙자하니 한번 만나 봄이 어떨꼬 ”

대군이 잔치가 파한후 세조를 따라 궁궐 깊숙한 황후의 거청에 당도하니 선녀와 같이 아리따운 황후가 반갑게 맞는다.

대군이 얼떨떨해 몸둘 바를 몰라 하는데,

“이 사람을 알아 보시겠습니까?”

10년을 들어 보지 못한 조선말에 놀라 고개를 드니 어라 10년전 천리마를 도적질한 여승이 아닌가.

그리고는 천리마를 타고 심양으로 와 마침 사냥하던 세조의 눈에 들어 세자빈이 되었다는 저간의 사정을 설파하고는,

“왜 제가 그때 대군께서 작은 나라의 영웅 밖에 되지 못한다고 한 연유를 여쭈리다.  그건 밤에 주무실 때 문고리를 걸고 잤기 때문입니다.  천하를 경륜할 기재라면 철환이 빗발치는 전장에서도 봄뜰을 거니는 것처럼 여유로워야 하거늘 대군은 있지도 않은 적을 경계하여 문을 잠그니 천하 영웅이라 하기엔 부족하였습니다.”

왕후는 아미를 살짝 찌푸려 근심어린 표정을 짓더니,

“이제 고국에 돌아 가시면 필경 조선의 군왕이 되오리다.  그러나 한때의 원한을 생각해 백성의 인정을 돌보지 않는다면 천하의 병폐가 될터인즉 백성을 아들같이 사랑하사 명군이 되소서.”


 


 

청산유수같은 왕후의 말에 지난날의 의문이 봄눈 풀리듯 하였으나 그렇다고 10년의 사무친 원한이 가시는 건 아니였다.

               

어찌한면 날랜군사 십만명을 얻어서

추풍에 구련성을 깨뜨리고

크게 부르짖어 오랑캐를 짓밟고

노래하며 춤추며 백오경에 돌아올꼬.


 

대군이 고국으로 돌아 오면서 지은 시이다.

그리고 공주의 예언대로 소현세자가 비명횡사하자 보위에 오른 효종은 송시열과  김상헌 이완을 등용해 북벌에 총력을 기울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659년 가뭄으로 나라가 타들어 갈 때 백성의 고초를 근심하며 붕어 하고만다.

북벌은 효종 개인의 원한으로 인해 파생되었다기 보단 치우계의 피가 흐르는 우리 한민족의 거대한 용틀임이라 보는겄이 옳을 겄이다.


 


 

분계령으로 떨어졌다 두리봉으로 오르는 길은 보기보단 가파르지 않아 쉽게 올라 설수 있다.

언젠가 다른님의 산기에서 두리봉 표지석을 본적이 있는지라 선생님과 같이 열심히 찾았으나 강원도 포수로 오리무중이고 맞은편 봉우리의 삼각점만 확인하고 말았다.

건너편의 가야산의 웅자가 지척으로 다가섰지만 길은 여전히 만만하지가 않아 부박령 못미처 깔비가 푹신한 곳에서 점심상을 편다.

참치캔을 안주삼아 소주 한잔을 반주로 들고는 토생원의 진수성찬을 든다.

잠시 쉬었다가 부박령을 지나고 완만한 길을 지난길은 변강쇠의 새벽 좆처럼 발딱 일어서 가야산으로 치닫는데 금방 점심을 마친 다리는 천근 만근으로  꼼짝을 않아 어르고 달래어 겨우 상왕봉으로 올라선다.

상왕봉 바로 아래 물매가 완만한 처마에서 바라보는 걸어온 능선길의 파노라마는 참으로 장관으로 다가선다.

한참이나 써언히 구경하다 선생님과 함께 정상석에서 사진을 찍고 산행을 마무리한다.

해인사 주차장엔 유산객들이 인산인해로 북적이고 남산 제일봉 찬바람을 타고 내려오는 초겨울의 산 그림자는 홍류동 계곡을 첨벙이며 다가서드라.

참으로 긴 하루였다.


 


 

               2006년 11월 19일 난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