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리산(俗離山) 산행 Photo 에세이

<2003.6.9~10/법주사-비로산장-세심정-중사자암-문장대-천황봉-상고암-세심정-법주사



*. 속리산 가는 길  



내 아내는 몸이 약하다. 아픈 아내의 전송을 받으며 속리산을 향하고 있다.

1년에 한두 번 만나는 전국 등산 사이트 최고라는  '한국산하' 10회 모임이 속리산에 있기 때문이다. 병약한 아내를 두고 먼 길을 가다 보다니 울적한 마음이 몇 자를 끼적이게 한다.

  

  
나는 모든 여자를 좋아한다.  

   남자이니까.

   그 중에 가장 사랑하는 여자가 아내다.

   남편이니까.

   나는 어머니를 그리워한다.

   세상에서 제일 처음 만난 여인이요, 그 아들이니까.

   나는 산을 좋아한다.

  산은 나를 항상 불러 주니까.        

   나는 Korea를 누구보다 사랑한다.

   산이 많은 나라요, 그 산을 닮은`사람들이 살고 있는  
         Korea는 나의 조국(祖國)이니까.

   오늘 내가 먼 산을 향하고 있는 것은.

   나처럼 산을 좋아하는 '한국의 산하'의 우리들을

   속리산에서 만나기 위해서다.  




*. 한국 최대 등산 사이트 '한국의 산하'



   한국에 산이 많아 행복한 것처럼 '한국의 산하' 사이트가 있어 나의 하루하루는 더욱 행복하다.

가고 싶은 산이나, 가고 싶어도 벼르기만 하는 한국의 산하를 '한국의 산하'(http://www.koreasanha.net/)' 사이트를 열기만 하면 그 모든 것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운영자, 관리자의 노고도 그렇지만, 전국의 '한국의 산하' 가족들이 올리는 산행기가 이를 더욱 풍성하게 하고 있다.



   - 산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우리 산하의 아름다움을 알리기 위하여 "한국의 산하"를 운영합니다. "한국의 산하"의 가족과 또는 함께하고 싶은 이들과 산을 찿고자하는 아마추어를 위한 정보입니다.

국토의 70%가 산인 우리나라 대부분의 관광여행지는 산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한국의 산하를 운영하면서 우리 산하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그 아름다움을 여기서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운영자  김성중 올림



  오늘은 우리나라 산과  '한국의 산하'로 인연하여 만나 거기에 산행기를 올리는 작가들이 올해로 10번째로 속리산에서 모이기로 한 날이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오는 반가운 이들을 만나러 산으로 간다는 것은 얼마나 낭만적이고 즐거운 일이냐.

만나서는 반갑기만 하고 ,헤어지기를 아쉬워하고 섭해 하는 오늘은 우리 '한국의 산하' 가족의 날이다.



  *.말티고개 이야기

      

속리산 법주사를 향하여 가는 사람들이 꼭 넘어야 하는 고개가 말티고개다.

원래 '박석(薄石)고개'라 하던 것을 세조 이후 말티고개라 불리게 되었다.

  - 옛날 세조 대왕이 고질병인 피부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법주사를 찾아 올 때  박석고개에 이르렀더니, 고개가 너무 가파른 12굽이의  길이라서 임금이 타고 오던 연(輦)으로는 도저히 넘어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말로 바꿔 타고 넘었다 하여 말 '馬(마)' 고개 '峙(티:치의 옛말)', '말티 고개(馬峙)'라 부르게 된 것이다.  

속리산의 관문이라는 해발 600m, 길이 430m의  열두 구비 말티고개를 넘어 세조가 다시 연(輦)을 타고 가다가 상판리에 당도하니 삿갓과도 같고 편 우산과 같은 모양의 잘 생긴 소나무 한 그루 밑을 지나가게 되었다.

왕이 이를 보고 "소나무 가지에 연(輦)이 걸린다."고 말하자, 신기하게도 이 소나무가 밑가지를 번쩍 들어서 왕의 연을 무사하게 지나가게 하였다.

세조가 이를 기특히 여겨 벼슬을 내리니, 그로부터 '정이품송(正二品松)' 또는 '연걸이 소나무(輦掛松)'으로 불리어지게 되었다.

이 소나무가 수령이 600년이요, 그 높이가 16m, 둘레가 4.5m나 되는 천연기념물103호인 정이품소나무다.  

정이품 소나무는 기네스북에도 오른 나무로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나무다. 그 근처에 있는 치마를 입은 듯한 정부인소나무(천연기념물 352호)와 결혼식을 올린 소나무이기 때문이다.

  법주사 매표소에 이르는 길은 대가람(大伽藍)답게 백년 이상이 넘는 소나무, 단풍나무, 떡갈나무들의 나무숲 터널이었다.

'호서제일가람(湖西第一伽藍)'이라는 현판이 있는 일주문까지 오리(五里)나 되어서 '오리 숲'이라고 하는 곳이다.



*. 속리산 이야기  



속리산은 우리나라 8경 중에 하나로 소백산맥 줄기 가운데에 위치한다.

묘봉(873m), 관음봉(986m), 문수봉(1,031m), 비로봉(1,032m), 천황봉(1,057.7m), 길상봉,  보현봉,  수정봉(489.5m)의 8개 봉(峰)과

문장대(1,054m), 배석대, 신선대(1,016m), 입석대(1,022m), 경업대, 학소대, 봉황대, 산호대  8개 대(臺)와 8개의 석문(石門)이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속리산에는 9개의 봉우리가 있어 구봉산(九峰山)이라고 하여오다가 신라 때부터 속리산(俗離山)이라 불리어왔다.

신라의 성현 최치원(崔致遠)은 속리산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道不遠人 人遠道(도불원인 인원도)

山非離俗 俗離山(산비리속 속리산)              

- 崔致遠



도리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는데

산은 세속과 떨어지지 않는데

세속은  

산과 떨어지고            

사람은 도를 멀리하고 사네              

-ilman 시조역




  한문으로 俗離山(속린산)을 번역하면 '俗(속)은 山(산)을 離(리)한다.'가 된다.

세속이 산을 떠났다는 뜻이니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세속과 떨어져 있는 산이란 말과 다르다는 이야기에 나도 공감한다.

그러나 결국은 산이나 세속이 서로 떨어져 있다는 뜻에는 뿌리를 같이 하고 있지 않은가.

속리산의 어원을 다음과 같이 푸는 전설도 있다.



  -신라 때 진표율사가 이 산에 도착하였더니 들에서 논밭을 갈고 있던 모든 소가 무릎을 꿇는 것이 아닌가. 농부들도 이에 감격하여 속세를 버리고 머리를 깎고 스님을 따라 산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세속을 버렸다 해서 속리산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속리산이 있어 법주사가 있고, 법주사가 있어 속리산은 더욱 명산이 되었다.



*. 법주사 이야기

'법이 머무는 곳 '법주사는 충북 일원의 사찰을 관활하고 있는 제5교구 본산이다.

절 이름을 법주사(法住寺)라 한 데에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전설이 전하여 온다.



  -신라 진흥왕 14년에 천축국(인도)에 가서 불법을 구하고 돌아온 의신조사가 흰 나귀에 불경을 싣고 절을 지을 자리를 찾아다니고 있었다. 나귀가 지금의 법주사 터에 이르러 제 자리를 맴도는 것이었다. 의신조사가 이에 느낀 바 있어 이곳에 절을 지으니 오늘날의 법주사다.

                                                                                     -동국여지승람

  -미륵보살과 지장보살을 친견하고 금산사를 중창한 진표율사는 어느 날 밤에 '구봉산(속리산)으로 가 미륵불을 세워라.'라는 계시를 받았다.

구봉산으로 가는 도중 회인에서 쉬고 있는데 수레를 끌고 오는 황소가 진표를 보자 그 앞에 멈추고 무릎을 꿇으며 머리를 숙이며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진표율사는 '이 소들은 겉으로는 어리석어 보이나 속으로는 현명하여  내가 계법을 받은 것을 알고 우는 것입니다. 하였다. 주인이 그 말을 듣고 낫을 들어 스스로 머리를 자르고 대사의 계를 받았다.

속리산에 길상초가 난 곳에 표시를 해두고 금강산에 들어갔다. 금강산에 도를 닦으러 온 제자 영심, 유종, 불타 등에게 길상초가 난 곳을 찾아 절을 세우게 하였다. 이렇게 세워진 절이 길상사요 지금의 법주였다.

                                                                           - 삼국유사

  

이와 관련된 듯한 그림이 속리산 마애석불 아래쪽에 있다. 짐 실은 말을 끄는 사람과 말 앞에 꿇어앉은 소를 새겨 놓은 암각화가 있으니 지나치지 말고 보고 올 일이다.

  그래서 법주사는 미륵도량이다.  경내에는 거대한 미륵입상이 있는데 이 미륵입상에는 사연도 많다.

   -처음에는 신라 때 진표율사가 금동미륵대불을 조성하였는데  대원군이 경복궁 축조에 자금을 마련한다고 당백전 화폐를 주조하기 위해 불상을 강제로 몰수해 간 것이다.

그 후 그 자리에 박정희 장군과  이방자여사의 시주로 1964년에는 시멘트로 만들어졌으나 붕괴 직전의 것을 청동미륵보살로 모셨다가 개금불사를 시작하여 2002년에 신라 때 본래의 금동미륵대불로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이에 동원한 인원만도  5,500여 명이요, 소요된 금만도 80kg이었다.

    

법주사는 미륵신앙의 요람으로 살아 있는 문화재의 박물관 같은 절집이다. 여기서 최소한 놓치지 말고 보아야 할 것은 국보 3점과 보물 12점이다.

그 중 팔상전(捌상殿,국보5호)은 법주사를 대표하는 자랑스러운 민족 유산으로 통일신라 시절에 제작 되었다는 현존하는 유일의 5층 목탑(木塔) 이다.
  두 마리 사자가 8각 석등을 떠받치고 있는 쌍사자석등(국보 제5호)이다.

두 앞발로 석등을 받치고 있는데 머리에 갈기와 몸과 다리의 근육까지 표현한 신라 석등의 걸작이다.
사자와 불교는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일까? 전통적으로 사자는 왕의 상징이다. 가비라성의 왕자였던 석가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고 사자의 강력한 이미지는 불교 수호신과도 연관 되어 불교에서 사자가 자주 등장하는 것 같다.

이 석등과 동시대 작품으로 알려진 석련지(石蓮池 국보 64호)는 시대를 넘어 우리 민족의 자랑이라고 할 수 있는 신품(神品)이다.

8세기 신라 시대에 제작되었다는 이 석연지는 이름 그대로 돌로 만든 작은 연꽃으로  옛날에는 여기에 물을 담아 연꽃을 키우던  것이다. 그 모양도 그렇지만 그 연잎에 조각된 천인상(天人像)과 보상화문 무늬가 화려하다.

이 자랑스러운 유물에 취하여 사진에 담다보니 남들보다 30분이나 지나서 산행 길에 들어섰다.



*. 문장대 가는 길

     매표소에서 이정표를 보니 문장대는 6.7km, 천황봉은 6.6km이다. 길은 1시간 10여분이나 오르는 아스팔트길인데, 옛날에는 상수도 보호지역이라고 길과 계곡 사이에 높게 쳐놓은 철조망이 보기 싫게 계속 막아져 있더니 오늘 보니 그걸 다 치워버리고 산뜻하게 로프울타리로 고치었다.    
목욕소(沐浴沼)를 지난다.

세조가 나라의 번창을 기원하는 법주사 대법회에 왔다가 냇가에서 목욕을 하고 있었다. 이 때 한 미소년이 나타나 대왕의 피부병이 곧 완쾌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목욕을 마치고 보니 소년 말대로 몸의 종기가 씻은 듯이 없어졌다. 그 소년이 약사여래의 명을 받고 온 월광태자였다. 그 후로 이곳을 목욕소라 부르게 되었다.

  속리산에는 휘파람새가 많았다. '휘휘휘 휘호-'하고 나도 휘파람 새 소리를 흉내하여 따라 하니, 소리가 더 크게 다가오는 것이 요놈이 따라오다가 숲 사이로 날아간다. 새는 숲 ''사이에 산다하여 '새'라고 하였는가.  
숲 사이에 떠드는 소리가 들리며 물소리가 요란 거기가 바로 세심정(洗心亭)이었다. 그런데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세심(洗心)이라는 말과는 달리 여기는 세심휴게소이어서 파라솔과 의자가 식사나 막걸리를 걸치고 가라는 상혼(商魂)만이 무성한 곳이니 안타깝게도 세심(洗心)이란 이름과 속리(俗離)란 이름을 무색하게 하는 곳이 되고 말았다.
세심정은 갈림길이다. 오른쪽 산길을 따라 0.6km에 비로산장/상고암 2.4km/신선대 2.7km/천황봉 3.1km로 가는 길이다.

나는 좌측 길로 들어섰다. 0.5km에 있다는 복천암과 중사자암과 문장대를 둘러보기 위해서다.

  복천암 막 못 미쳐 다리 하나가 있는데 '이 뭣고 다리(是心마橋)'다. 한자를 순서대로 읽으면 이(是), 마음(心), 무엇(마), 다리(橋)니 절 앞에 있는 다리 이름을 장난삼아 지었을 리는 없을 것이고 화두(話頭)로 지은 이름이리라. 불자들이 말하는 선문답처럼-.



↑갔다가 ↓오고

→로 갔다 ←로 가고

?하다가 !하고

!하다가 ?하더라.

이 뭣고

묻는 이들아

뭣고가 뭣고지 뭣고

-이 뭣고




  옛날에 복천암을 찾았을 때는 정진 중이어서 출입금지더니 오늘은 출입이 가능하다. 그도 그럴 것이 매표소에서 입장료를 3,000원씩이나 받으면서 출입금지를 해서야 되겠는가.  

  복천암(福泉庵)은 법주사 암자 중 가장 큰 암자로 그 위치가 속리산의 배꼽에 해당하는 곳에 있다.

복천암은 성덕왕 때에 창건된 암자로 세조와의 전설이 어린 암자다.



  -세조는 이 암자에서 신미(信眉)와 학조(學祖)라는 두 고승과 함께 약수를 마시면서 3일 동안 기도를 드린 뒤, 계곡 아래에 있는 목욕소에서 목욕을 하였더니 피부병이 나았다.  고질병을 고친 암자는 불은(佛恩)이라하고 이 암자를 중수하여 주고, 만년보력(萬年寶歷)이라고 쓴 사각옥판(四角玉板)을 하사하였다. 경
내에서 볼 거리로는 샘과 함께 위 두 대사의 두 부도(충북유형문화재 제12호, 제13호)가 있다.

세조가 피부병을 앓게 된 이유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하여 온다.



   - 수양대군이 어린 왕 단종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하였을 때다. 꿈에 단종의 어머니인 형수 현덕왕후가 현몽하여서 세조 얼굴을 향하여 침을 뱉었는데, 침이 튄 그 자리에 피부병이 생겼다는 것이다.



  용휴게소에 이르니 뜸뿍새가 울고 있다. 끄르르르- 하는 새소리 같지 않은 소리였다.

이제부터는 찻길이 끝난 오름길이다.

중사자암(中獅子庵)에 이르니 등산로에 빗겨 있는 절이라선가. 뜰에는 잡초가 무성하고 삐뚤어진 층 계 옆 축대 밑에 연분홍 모란꽃이 하늘하늘 피어있다.

절 마당 끝에는 커다란 마당바위가 있고 그 끝에서 속세를 바라보며 비석 하나 서 있다.
풍우에 글이 모두 마모된 비신이 사자모양 얼굴의 거북 등을 타고 서있다. 그래서 절 이름이 중사자암인가 보다.

중사자암은 성덕왕 19년에 창건된 암자로 법당 안에는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과 후불탱화(後佛幀畵)가 봉안되어 있는 문수보살이 상주하는 문수도량(文殊道場)으로도 유명한 암자다.

신라 성덕왕 때에는 상, 하 사자암이 더 있었는데 지금 남아있는 것은 중사자암뿐이란다.

화장실 앞으로 오솔길이 있어 가보니 아까 오르던 길이 나타나더니 냉천골휴게소가 길을 막아선다.

날씨는 유난히 맑고 한여름이건만 시원한 바람이 불어 주어서 등산하기로는 최적의 날씨 이지만 정상이 가까워 올수록 길은 가팔라지고 따라서 피곤은 겹쳐 갔다.

  이런 나를 두꺼비 한 마리가 물끄러미 힘겨운 나의 등반을 지켜보고 있었다.

내 경험으로는 여기서 정상은 멀지 않았다는 표지다.



새소리 계류소리

바람소리 따라서

내 어머니의 역마살이

벼르던 속리산 길.

나는요

산 속에 갇힌

행복한 포로랍니다.




  하늘이 점점 낮아지더니 하늘과 능선이 맞붙는 곳에 층계가 있다.

그 위가 옛날에 문장대 정상휴게소가 있던 자리로 법주사에서 5.8km 거리다.

그때 인심 좋은 상점 주인이 주는 신선초, 곤달리. 당귀잎, 참나물로 쌈을 싸서 걸쭉한 동동주에 안주해 먹었는데 그 휴게소가 철거된 것이다.  옛날에 문장대를 찾던 이에게 낭만이 있던 자리라 그 빈 자리가 마음에 텅 빈 자리 같았다.



*. 문장대 이야기

    



  문장대는 본래 큰 암봉(岩峰)으로 하늘 높이 치솟아 구름 속에 감추어져 있다하여  '운장대(雲藏臺)'라 하던 곳이다.

세조 임금이 속리산에서 복천암에서 감로수를 마시며 요양하고 있을 때 꿈속에서 월광태자(月光太子)가 나타나 "인근의 영봉에 올라가  기도를 하면 신상에 밝음이 있을 것"이라 현몽하는 말을 듣고 오륜삼강(五倫三綱)을 명시한 책 한 권이 있어 세조가 그 자리에서 하루 종일 글을 읽었다하여 문장대(文藏臺)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정상은 35평 정도로 50여 명이 휴식할 수 있는 하나의 커다란 바위로 비나 눈이 오면 가두어 둘 수 있는 움푹한 곳이 수석에서 말하는 호수석이 여럿이다.

누구든지 이곳을 세 번 올라오면 극락에 갈 수 있다니, 나는 오늘이 4번째라 극락은 맡아놓은 당상이로구나 하였다. 이런 이야기는 전망이 뛰어난 데서 생긴 말 같다.






  

바위라서 시야를 막아주는 나무가 한 구루도  없어서 서쪽으로 관음봉, 묘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의 마루금에서 시야를 오른쪽으로 돌리니 저 멀리 천황봉을 향한 능선이 봉과 봉으로 이어져 가고 있다.

앞에 약간 커다란 봉우리가 문수봉이고, 그 다음이 신선봉에 비로봉이 오늘의 목적지 속리산의 정상인  1,058.4m 천황봉이다.



천황봉 주능선에서니 다음 목적지 신선대까지는 1.1km, 천황봉까지는 3.4km이지만 능선길로 이제부터는 탐승 길이거니 했는데 그게 아니다.

다시 시작되는 오르막길이다가 내리막길이고 그리고 다시 오르막 길이다.

사람이 골짜기에 있으면 人+谷= 俗인데, 사람이 산에 있으면 人+山=仙 신선이 된다. 골짜기를 버리고 문장대에서 신선대를 향하는 길에 있으니 나도 신선이 아닌가.

신선대 가는 길 같은 절경과 절승을 대할 때마다, 내가 젊어서부터 사진을 찍어온 것이 오늘 같은 날을 위함인 것 같아서 행복하다.

다시 또 올 수 없다고 느껴지는 아무나 올 수 없는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문수봉은 오뉴월 신록에 정상이 가림 채로 보더니 거기서 얼마 안 간 곳에 청법대가 있다.



  -옛날 어느 고승이 속리산의 절경에 취해 넋을 잃고 가다가 그만 길을 잃고 헤매고 있었다. 그런데 봉우리에서 독경소리가 들려와서 바라보니 부처 형상과 흡사한 바위였다 . 그래서 청법대(聽法臺)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 한다.

그 경치에 나도 넋을 잃고 있는데 갑자기 내 앞을 막아서 빤히 나를 내려다보는 것이 있다. 신선대휴게소였다.

이상하게도 속리산 산 속의 휴게소는 거의가 다 찾아가는 명승지의 길목을 막고 있다. 명승지가 먼저가 아니라 휴게소가 먼저다. 세심정이 그렇더니 냉골휴게소도 그랬다.

. 신선대휴게소 의자 아래에 정상석이 있고, 거기서 건너다 보이는 신선봉은 도포 입고 두건 쓴 옛 선비 모습을 대하는 것 같다.

사고로 핼기를 기다리는 산악대장이 있어 가지고간 막걸리를 나누는데 휴게실 아주머니가 빈대떡해서 한 잔 하라 권하지만 일행보다 늦은 사람이 어지 지체할 수 있을까.

거기서 법주사까지는 1시간 30분이 걸린다 한다.

  

  여기서 내 이야기를 천황산으로 향하던  6년으로 돌려야겠다.

오늘 우리들 '한국의 산하' 모임에 늦게나마 참석하기 위해서 여기서 부터 비로산장 길로 하산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 천황봉 가는 길

  신선대도 1,016m 라. 내리막길이 시작되는데 지금까지의 돌길을 버린 흙길로 오솔길 양옆에 산죽이 연속된다. 그러다 보니 분명히 길은 길인데 도저히 서서는 그냥 지나갈 수 없는 그래서 앉은 자세로 포복하듯이 지날 수 있는 석문을 간신히 벗어났더니 거기가 바로 해발 1,003m라는 입석대(立石臺)다.

   속리산에서 느끼게 되는 좋지 않은 경험 또 한 가지는, 이정표가 있을 곳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카메라를 메고 촬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기록하고 다니면서 왠만한 것은 절대로 그냥 지나치지 않는 사람인데 입석대에 이르기 전에 있다는 문수봉, 청법대를 지나친 것이다. 비로봉도 그렇게 지나쳐 버리고 말았다.

  입석대를 지난다.  

임경업 장군이 7년 간의 수도를 마치면서 내공을 시험하기 위해 누워 있던 바위를 번쩍 들어올려 일으켜 세웠다는 전설의 바위라서 한 번 더 뒤돌아보게 한다.

  이정표가 길 안내를 하고 있었다. '→천황봉1.1km, →법주사4.6km'




  

천황봉(1057.7m)은 속리산의 최고봉으로 유명하지만  천황봉의 삼파수(三波水)도 유명하다. 천황봉에 떨어지는 빗물이 동쪽으로 흘러가는 것이 낙동강을 이루고, 북서쪽이면 한강, 남쪽이면 금강으로 흘러 그 수원(水源)이 되기 때문이다.

문장대에서 보던 까마득한 천황봉에 오르니 문장대가 이제는 먼 산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문장대에서의 전망이  장쾌한 능선을 바라보는 기쁨이라면, 천황봉에서 보는 봉들은 수석 같아 멋있다.

등산하는 노인에는 2가지 타입이 있다.

이 나이에 그 높은 정상을 위험하게 왜 꼭 가냐 하며 중간에서 되돌아서 계곡에서 일행이 다녀올 동안 노는 사람들이 있다.

또 하나는 '지금 정상에 안 오르면 다시 또 올 수 없는 곳이니 무리를 해서라도 가자.' 하는 사람들이다. 후자에 속하는 것이 이 사람인데 거기에 따른 고충이 많다.

남이 점심을 할 때 그걸 행동식으로 하며 따라 잡으려고 기를 쓰지만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일행에게 폐가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같이 단독 산행을 하지만 단독산행에도 애로가 많았다. 벼르다가 마는 것이 그 하나요, 비용이 몇 배 더 추가되는 것이 흠이다.

  천황봉에서 그대로 직진하여 4시간 정도 걸으면 원래 계획하였던 장각폭포, 금란정을 지나 상오리로 내려가게 된다.

그러나 청주행 버스를 타려면 거기서 택시를 불러 타고 간다 해도 청주에서 하루 밤을 유하여야 할 시간이기 때문에 세심정으로 다시 원점 회귀 산행을 할 수밖에 없다.

  천황봉에서 상고암 쪽으로 가다보면 배석대(拜石臺)가 있다.



  -신라 진평왕 때 덕만공주(뒤에 선덕여왕)과 법승(法昇)왕자가 이곳에 올라와 경주 쪽을 향하여 매일 아침 나라의 번창과 왕실의 평온을 위하여 절을 올릴 때였다.

이를 본 바위가 함께 절을 하다 바위가 되었다 해서 절 '拜(배) '돌 '石(석)',  '배석대(拜石臺)'가 되었다는 바위다.

'→법주사 4.6km/←0.2km상고암' 이정표가 있다. 이 지점에서 피곤하여 그냥 갈까 하다가 언제 다시 오랴 하는 마음에 상고암(上庫庵)을 들렀다.

절 이름에 고간 '庫(고)'자가 이상해서 알아보니, 옛날 법주사를 지을 때의 자재 창고였던 곳이 후에 암자가 된 곳이다. 중고암(中庫庵), 하고암(下庫庵)이 더 있었으나 지금은  상고암(上庫庵)만 남은 것이다.

상고암은 신라 성덕왕 19년에 창건한 암자로 속리산에서 제일 높은 위치에 있는 법주사에 딸린 암자다.  여기서는 법주사 전경이 한 눈에 보인다.

인기척에 극락전 법당 문을 열고 합장 인사하는 처사 한 분이 있다.

이 분을 보니 갑자기 아내 생각이 난다.

아내가 불자(佛者)라서 불전을 놓고 가고 싶다고 일 만원을 드리고 돌아섰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나는 아내에게 지은 죄가 많은 사람이다.

젊어서는 치매와 중풍 든 아버지를 둘째 며느리인 아내에게 맡기고도, 집안에서 남편 몫과 아내 몫의 일을 분명히 가르며 살았다.

술을 목숨을 걸고 마시고 다니면서 등산, 낚시, 사진, 비디오, 햄(Ham)에다가 역마살까지 갖추어 내 위주로 살아온 사람이다.

현실에 안주하기보다 항상 떠돌았고, 늙어서는 문학을 합네- 하고 언제나 컴퓨터 앞에 살지마는 이름 없는 무명작가라,  글로 인한 소득 하나 없이 글만 쓰듯이 그렇게 돈만 쓰며 다니는 사람이다.

절 입구를 자세히 보니 커다란 거북이 한 마리가 그 앞에 마애불상을 우러르고 있다. 마애불상도 다섯 분이나 모신 암벽이었다.

산을 올라갈 때에는 힘이 들어서 '천천히-'요, 내려올 때는 위험해서 또 '천천히-'다.

그러나 천천히 가는 것이 멀리 간다는 속담처럼 삼환석문에 이르렀다.

석문을 지나서 만나게 되는 것이 상환암(上歡庵)인데 출입금지 간판이 나를 섭섭하게한다.  "참배객 이외에는 출입을 금합니다."



  -.조선시대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에 여기 와서 백일기도로 그 뜻을 이루었고, 세조가 선왕의 유적을 3일간 추모한 끝에 기쁘고 즐거운 마음(歡心)에 '길상암(吉祥庵)'이란 종래의 이름을 임금 '上(상)' 기쁠 '歡(환)', '상환암(上歡庵)'으로 고쳤다는 곳이다.

그냥 가기 아쉬워서 올라가서 행여나 들킬세라 사진 찍고 물을 담고 줄행랑을 쳐 쫓기듯이 내려왔다.

그러다 보니 그 근처의 학소대도 은폭동폭포도 지나치고 만 것이다.

이제 그렇게 벼르다가 온 속리산과 나와의 이별을 이제는 고할 때다.

비로산장이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 임경업대로의 하산 길





   다시 오늘 산행으로 돌아와서 경업대 하산 길 이야기를 해야겠다.

문장대서 천왕봉 길은 문수봉 →신선대→입석대→비로봉을 바라보며 다가가는 능선길이라면, 신선대에서 세심정까지의 하산 길은 경업대를 지나면서 입석대→비로봉의 능선을 우러러 보며 가는 환상적인 길이다.

이 길에서 가장 볼거리가 경업대(慶業臺)다.

병자호란의 격동기를 살던 임경업 장군은 최영 장군과 함께 무속 신앙에서 받드는 신으로 수많은 설화가 전하여 온다.

경업대는 임 장군이 독보대사를 스승으로 모시고 7년 동안 무예를 익히고 수련을 했다는 곳이다. 장군이 물을 마셨다는 관음암의 샘을  '장군수'라 하고,  10년 수도 기간을 채우지 않고 떠나는 임 장군을 괘씸하게 여긴 독보대사가 도술로 반쪽으로 갈랐다는 바위가 관음암으로 이어지는 길이라는 둥 곳곳에 장군의 전설이 전하여 온다.

비로산장(毘盧山莊)을 지난다.

옛날에는 노인 부부가 살았는데 지금은 그의 딸이 운영한다는 이곳에 나는 두 번이나 잤다. 지금은 두 아이의 엄마가 된 두 딸이 초등학교  저학년일 때요, 두 번째는 단독 산행을 할 때다.

  고희를 넘긴 나이에다가 다리보다 숨이 가빠하는 몸인데다가 산에 가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욕심으로 하여 ;회식이 끝나기 전에는 꼭 돌아오겠다는 생각대로오늘도 한국의 산하' 모임에 2시간 이상이나 늦었다.

세심정에서 다행히 차편이 있어 현장에 도착했더니 이제 막 마감을 하는 자리였다.

내가 무어라고 변명하였겠는가.

"늦어 미안합니다, 그러나 이해하여 주세요. 여러분은 자동차로 따지면 2,000CC 급이라면 나는 500CC 급, 그것도 중고차거든요.


  ** 위 글은 '월간 문학저널' 7월호에 실릴 작품이오니 무단 전재를 삼가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