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리산 산행기(속리와 환속의 경계에서)

일 시 : 2006년 11월 4일 (토)
장 소 : 충청북도 보은군 내속리면 속리산 법주사 및 속리산
동 행 : 없음.
준 비 물 : 기본 준비물
산행코스 : 매표소 -> 법주사 ->저수지(11:35)->목욕소->세심정->복천암->용바위골휴게소->보현재->
문장대휴게소->문장대(13:30)->문수봉->청법대->신선대(휴게소)(14:10)->입석대->
중식(14:25)->비로봉->천황석문->천황봉헬기장->천황봉(15:30)->상환석문->상환암->
세심정(16:40)->목욕소->법주사 ->공원터미널(17:40)
교통소요 : 07:50 청주행 우등고속 09:12 청주고속터미널도착 09:20 속리산으로 출발 10 :35 보은
11:00 속리산 공원도착 * 서울막차 18:40

주말, 제한적인 여유밖에 없는 이번의 주말에는 토요일의 단 하루를 적절히 활용하여 보내어야 한다. 일요일은 청주센터의 여직원의 결혼식에 가보아한다.
지난 주는 치악산을 다녀왔으니 이번 주는 역시 국립 공원중에 하나를 택하여 보리라, 강원도를 갔다왔으니 이번에는 충청도로 방향을 바꾸어 보니 월악산도 있고 소백산도 있다. 소백산을 가보리라고 도면을 펼쳐드니 이번 아직은 아니다. 구인사를 거쳐 동주를 하려면 산속에서 하루를 보내어야 할 것 같다, 다음으로 미루고 최후의 낙점은 속리산으로 결정하였다
속리교라는 작은 다리가 소요산의 자재암 입구에 있으니 속리산은 그 진리여행의 심도는 딱히 무어라 표현을 하지 않아도 오늘의 이 여행길은 무척이나 좋은 결과와 보람을 남겨 줄것이다.

아침에 서두르니 조반을 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어 그냥 도시락과 김치를 챙겨주는 아내에게 일만 원의 지원을 받아 부랴 부랴 전철을 향하니 오늘의 일기가 좀 불순할 것만 같아 보여 내심은 조금 불안하다
터미널에 도착하여 바로 출발하는 청주행 우등고속에 승차하여 숨을 가다듬으니 오늘 진리여행의 시작이 된다.
내려가는 길가는 아침햇살에 긴 밤 지새운 들판의 물안개가 사라진다. 한 편의 그림만 같아 보인다.
이름모들 길녘, 한적한 연못에는 가을이 뒤늦게 비추인다. 온통 바춰보이는 울긋불긋함이 그리고 건녀편의 그 작은 산록이 연못에 그대로 담기어져 있다.
이제는 이 가을을 아주 이별을 하여야 하는 아쉬움과 그리고 낯선 곳을 가는 설레는 마음을 안고 가는 길이다
저편에는 가을 걷이 끝난 농부가 떠나 버린 평야에는 기러기가 주인이 되어 제방길 끄트머리까지 무리를 지어 날아가는 모습이 이 가을의 한가로움을 가득히 묻혀내어 보여준다
아 정말 한가로운 곳, 그리고 정녕 한가롭기 그지없다

혼자 가는 나그네
가야할 속리산 가는길이
멀기도 하여라
건너 편 창 가의 새악시
홍조는 객창에 곱게 물든다

9시 12분에 고속터미널에 도착한 차량, 기사분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시외버스터미널로 급한 걸음을 옮겨 겨우 화장실가는 여유를 만들고 이어 20분 속리산행버스에 탑승하니 아까 같이 버스에 내리신 초로의 부부로 보이는 산님들도 동승을 하신다.
몇 몇 산님들의 복장차림으로 보니 이 차량의 절반을 채우신다. 속리산으로 가시는 산님들이 많은 모양이다.

보은 속리사!
이 지명은 아주 오랫적부터 귀에 익숙한 지명이다. 속리산의 법주사는 대략 7년전에 사원들을 인솔하여 한 번 다녀온 경험이 있다. 그러나 그때의 기억이 전혀 나질 않는다.

감천냇가 갈대밭은 끝이 없고
뚝방길 철새 이 가을 노래하네
굽이도는 마을에는 그리움 스며들고
느티나무 갈바람에 낙엽지우네
보은길에는 노란 은행 가로수가
연신 이어지고 그 은행길은 끝이 없구나

보은터미널에 10시 35분에 도착한 버스는 잠시 머물다가 바로 속리산으로 출발한다.
이 버스는 중간 중간 작은 간이 정류소를 거쳐 보은까지 왔지만 계속 그럴것이다는 짐작으로 창가를 내려다 보니 저족 산 중턱엔 성벽이 보인다.
바로 삼년산성이니 과거 시절 신라의 이 중원위 전초기지였을 것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이 산성은 470년(자비왕 13)에 축성하였는데, 3년이 걸렸다고 하며, 신라는 이곳을 백제 공격을 위한 최전방기지로 삼았다. 그래서 그 이름을 삼년산성이라고 하기도 하고, 일설에는 이곳지명이 삼년군이었기에 삼년산성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들 한다.
차는 금새 그 모습을 뒤로하고 좀 더 가니 속리사 입구의 굽이진 산길이 이어진다, 고갯길이지만 단풍의 아름다움이 곳곳에 풍요롭다.
고갯길을 마무리하니 탁트인 경치, 아마도 여기가 속리산 입구인가 보다하는 짐작을 하는 차에 정이품송이 스친다.
천연기념물 제103호. 지정사유 노거수. 법주사(法住寺) 소유. 수령은 600년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나무의 크기는 높이 15m, 가슴높이의 둘레 4.5m, 가지의 길이 동쪽 10.3m, 서쪽 9.6m, 남쪽 9.1m, 북쪽 10m이다. 이 나무가 차지한 면적은 1158.3m2이다.
1464년 조선조 세조가 속리산 법주사로 행차할 때 타고 있던 가마가 이 소나무 아랫가지에 걸릴까 염려하여 “연(輦)걸린다”고 말하자 소나무는 스스로 가지를 번쩍 들어올려 어가(御駕)를 무사히 통과하게 했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세조는 이 소나무에 정2품(지금의 장관급) 벼슬을 내렸다고 한다.
예전의 모습과는 사뭇다르다 최근 뉴스에서는 자목‘네 아들’을 분가(分家)시킨다고 한다. 내년 3월 정부대전청사 옆 천연기념물보호센터와 속리산 인근 소나무공원에 옮겨 심을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를 위해 10월 31일 큰 뿌리는 잘라내고 잔뿌리의 생장을 돕기 위한 ‘뿌리 돌림’ 작업도 무사히 마쳤다.
앞에는 한 그루의 작은 소나무가 보인다.
정이품송의 모습이 예전의 우람한 모습이 아니라 가지마다 받침대를 하고 있는 모습이 안타까워 보이는 것도 잠시 버스는 벌써 속리산 입구의 터널에 산님들을 내려놓는다.
11시 정각무렵이다.
여기가 두 번째 들르는 국립공원속리산이다.
속리산이라는 산명을 얻게 된 연유를 삼국유사의 ‘관동풍악발연수석기’에 의거하면 속리산은 원래 구봉산이라 불리어오다가 지금의 전라북도 김제군 금산사에서 고승인 진표율사가 신라 혜공왕 2년에 미륵장육산을 주조하여 봉안하고, 금산사에서 지금의 속리산으로 가는 도중에 소달구지를 탄 사람을 만났다. 그 소들이 율사 앞에 와서 무릎을 꿇고 울었다. 그 소에 탄 사람이 내려서 ‘이 소들이 어째서 스님을 보고 우는 것입니까? 그리고 스님은 어디에서 오십니까?’하고 물었다. 율사는 ‘나는 금산사의 진표라는 승인데 내가 일찍이 변산의 불사의방에 들어가 미륵지장의 두 보살 앞에서 친히 계법과 진생을 받아 절을 짓고 오래 수도할 곳을 찾아서 오는 길입니다. 이 소들은 겉으로는 어리석으나 속으로는 현명하여 내가 계법을 받은 것을 알고 불법을 중히 여기는 까닭에 꿇어 앉아 우는 것입니다.’하였다. 그 사람이 이 말을 듣고 나서 ‘짐승도 이러한 신앙심이 있는데, 하물며 사람이 어찌 신앙심이 없겠습니까?’하고 곧 낫을 들어 스스로 머리를 잘랐다. 율사는 자비스런 마음으로 다시 머리를 깎아주고 계를 받게 하였다.

그들은 속리산 골짜기에 이르러 길상초가 난 곳에 표시를 하고 명주(지금의 강릉)를 거쳐 금강산에 가서 발연수를 창건하였다 한다. 이에 진표율사로 인하여 소달구지를 탄 사람이 지극한 신심으로 세속을 여의고 입산한 곳이라 하여 세속 속(俗) 과 여욀 리(離), 뫼 산(山) 자로 속리산이라는 지명을 얻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속리는 속세를 떠남이고 돌아옴은 환속이다.
나그네의 걸음도 그러한 것인가? 떠남과 돌아옴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여 보아야 겠다.

예전 모습은 많이 사라지고 좀 더 정갈한 모습이 다가온다. 각종 기념품가게도 정돈이 잘 되어 있고 식당들도 예전과 같지 않고 잘 정비된 모습이다. 다행이다.
인공폭포가 보인다. 상당한 높이인데 처음보는 장면이다 . 수량이 풍부하여서인지 아름답게 보인다. 젊은 친구들이 연신 사진기를 그 쪽으로 돌린다.
깔끔하게 정리된 눈에 익은 입구쪽을 지나 매표소에 도착하여 다른 국립공원의 1,600원보다는 상당히 더 비싼 돈을 치르고는 드디어 오늘의 산행을 시작하였다
저 앞에 법주사 일주문이 호서제일가람이라는 명필을 달고 우쭉 서 있다
일주문은 기둥이 한 줄로 되어 있는 데서 유래된 말이다. 사찰에 들어가는 첫 번째 문을 독특한 양식으로 세운 것은 일심(一心)을 상징하는 것이다. 신성한 가람에 들어서기 전에 세속의 번뇌를 불법의 청량수로 말끔히 씻고 일심으로 진리의 세계로 향하라는 상징적인 가르침이 담겨 있다.
바로 일주문이 우리네 속가 중생에게는 진리의 여행 시작점이 되는 것이다. 두 손을 모으며 들어선다.
여기서 부터가 법주사 경내인것이다.
이 절의 개조(開祖)로 알려진 의신(義信)이 일찍이 불법을 구하러 천축(天竺:인도)으로 건너가 그 곳에서 경전(經典)을 얻어 귀국하여 나귀에 싣고 속리산으로 들어가 553년(신라 진흥왕 14) 이 절을 창건하였는데, 법(法)이 안주할 수 있는 탈속(脫俗)의 절이라 하여 법주사라는 명칭이 붙여졌다고 한다

법주사(法住寺) 입구 수정교(水晶橋) 앞에는 비각(속리산사실기비)이 보인다. 그리고 큰 비석도 같이 보인다.
비각안에 있는 비의 크기는 높이 1.63m, 너비 0.65m이다. 1666년(현종 7)에 송시열(宋時烈)이 이야기를 짓고 명필 송준길(宋浚吉)이 글씨를 써서 세웠는데 비문의 내용은 속리산 수정봉(水晶峰) 위에 있는 거북바위의 내력을 쓰고 미신을 타파할 것을 주장한 것이다.
역시 옆의 수정교 앞에 벽암대사비(지방유형문화재 71호)가 남아있어 대사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이 비는 조선 현종(1664) 때 건립된 벽암대사의 비로 글씨는 선조의 손자인 낭선군 이오가 썼다고 한다.
작은 다리를 지나 금강문을 지나면 법주사의 가람이 한 눈에 들어온다,

개략적인 문화재를 법주사 홈페이지를 참고하여 정리하여본다
능인전 앞에 국보 제64호로 지정된 석연지(石蓮池)가 있다. 높이는 200㎝, 전체 둘레는 665㎝에 이르는 이 거대한 조형물이 어떠한 용도로 쓰였는지는 불확실하다. 다만 연꽃 모양으로 조성된 연못이라는 뜻에서 연지라고 부른다.
금동미륵대불에께 참배를 하였다
절 왼편으로 커다랗게 서 있는 이 미륵불은 여러 번 옷을 갈아입은 전력이 있는 기구한 사연을 안고 있다.
신라 혜공왕 때인 776년, 진표율사가 금동미륵대불을 처음 지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조선시대에 들어와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할 때 몰수되었는데, 1964년에 시멘트로 다시 불사를 했다. 1990년에는 붕괴 직전의 시멘트 대불이 청동대불로 다시 태어났다. 2000년 들어 원래 제 모습을 찾아주자고해서 금동미륵불 복원 공사를 했다. 3mm 두께로 황금을 입히는데 모두 80kg이 들어갔다. 완공법회시에 기이한 일들이 있었다는 영험담이 최근에 전해온다
마애여래의상(磨崖如來倚像)은 능인전 옆의 추래암(墜來岩) 암벽에 새겨진 고려시대의 마애불상으로서 현재 보물 제216호로 지정되어 있다.
범종각은 팔상전의 동쪽 정면에 있는 앞면 3칸, 옆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1976년 종무소를 허물고 그 자리에 새로 지었다. 안에는 범종(梵鍾)·운판(雲板)·법고(法鼓)·목어(木魚) 등이 있다. 이 네 가지의 법구(法具)가 불당 앞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이를 ‘불전사물(佛前四物)’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 네 가지 법구들은 각각의 용도와 의미를 지닌다. 먼저 범종은 지옥에서 한없는 고통을 겪고 있는 중생들을 위해, 운판은 하늘을 나는 날개 달린 짐승들을 위해 모두 이 소리를 들음으로써 영원한 해탈심을 느끼게 한다. 또한 법고는 땅 위에 사는 네 발 달린 짐승들을 위해, 목어는 물 속에 사는 생명들을 위해 울린다.
대웅전의 이 절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다.
신라 때 창건했을 무렵에는 대웅보전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에는 미륵장륙상을 모신 용화보전이 있어 미륵신앙 도량인 법주사의 중심 역할을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기록에 의하면, 1624년(인조 2)에 중건하였고 이후 잦은 중수를 거듭하였지만, 조선 중기의 양식을 잘 갖추고 있어 보물 제915호로 지정되었다.
원통보전은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의 정사각형 1층 건물로, 지붕은 중앙에서 4면으로 똑같이 경사가 진 사모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으로 꾸몄다. 건물 안에는 앉은키 2.8m의 금색 목조 관세음보살상을 모시고 있다. 관세음보살상은 머리에 화관(花冠)을 쓰고 있으며, 얼굴에는 자비로운 웃음을 머금고 있다.
그 뒤편에는 희견보살상(喜見菩薩像)이 있고 다는 방향으로는 금동 미륵대불 오른쪽이다. 우리나라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보살상이 서 있다. 흔히 희견보살상(喜見菩薩像)이라 부르는 이 보살상은 두툼한 판석과 커다란 그릇을 머리에 이고 있는 모습의 입상이다.
그러나 일설에는 가섭존자의 상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대웅보전에서 팔상전에 이르는 앞마당에는 신라시대의 걸작 쌍사자석등(雙獅子石燈)이 있다. 국보 제5호로, 높이 3.3m에 이르는 팔각석등이다.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55호로 지정되었다. 우리나라 유일의 목조 5층탑으로, 높이는 22.7 m이다. 법주사는 553년(신라 진흥왕 14)에 창건되었고, 팔상전은 정유재란 당시 불에 타 없어진 후 선조 38년(1605년)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인조 4년(1626년)에 완성된 것으로, 1968년의 해체 복원 공사를 거쳐 현재의 모습을 하고 있다. 벽의 사방에 각 면 2개씩 모두 8개의 변상도(變相圖)가 그려져 있어 팔상전이란 이름이 붙었다.
오늘은 일본관광객들이 모여서 안내자의 설명을 열심히 경청을 하고 있었다.
금강문을 통해 깨뜨릴 수 없는 불법의 세계를 지나면 천왕문(天王門)을 만난다. 앞면 5칸, 옆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앞면 3칸에는 판문(板門)을 달아 출입하도록 하였고 양쪽의 끝 칸에는 문이 아니라 작은 판창(板窓)을 달았다. 대개 사찰의 금강문은 앞면 3칸 정도의 규모인데, 이처럼 5칸을 마련하고 양옆에 판창을 댄 법주사의 경우는 매우 특이한 경우로, 국내의 천왕문 중 규모가 가장 크다. 현재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46호로 지정되어 있다. 안에는 사천왕상을 봉안하였는데, 동쪽 세계를 관장하는 지국천왕(持國天王)은 손에 비파를 들고 인간 감정의 기쁨의 세계를 총괄한다. 서쪽 세계를 관장하는 광목천왕(廣目天王)은 용과 여의주를 들고서 노여움의 감정을 주관하고, 남쪽 세계를 관장하는 증장천왕(增長天王)은 칼을 들고 사랑의 감정을 주관하며, 끝으로 북쪽 세계를 다스리는 다문천왕(多聞天王)은 탑 또는 큰 깃대를 들고 즐거움의 감정을 주관한다.이처럼 인간사를 관장하고 있는 사천왕은 착한 일과 악한 일을 적절한 시기에 판단하여 그에 따른 상과 벌을 내린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천왕문에 들어서는 사람들은 두려운 마음으로 최대의 공경을 올리곤 한다.
금강문을 들어서면 바로 좌우에 당간지주(幢竿支柱)와 철확(鐵)이 마주 보고 서 있다.
이 쇠솥은 높이 120㎝, 지름 270㎝, 두께 10㎝의 거대한 규모로서 철확이라고도 부른다. 본래는 강원 옆 공양간 주위에 있었던 것을 옮겨 놓은 것이다. 3,000명 정도가 먹을 수 있는 장국을 끓일 수 있다고 하는데 가람 곳곳에 있는 거대한 석조물통 및 항아리와 함께 번성했던 법주사의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유물이다.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143호로 지정되어 있다.

법주사에서

청하 권대욱

호서 제일가람 일주문 우뚝하니
내 마음 둘 데 없어 한 걸음 옮겼도다
세상을 떠남이 속리이니 언제 환속인가

금강문 저 곳 가면 극락인가
도솔천 멀다더니 여기 사천왕문일세
석가스승 팔상도가 이곳에 흔적있고

미륵부처 미소는 그저 말씀 없으니
희견보살 묵언은 관세음 대자비라
당간지주 저 끝에는 구름빛 상서롭네

범종각엔 중생구제 묘음 들리고
휘돌아가는 바람에는 진리가 담기니
이 길 가면 언제 돌아 올 것인가.


동남아에서 파견된 산업근로자로 보이는 젊은이들이 많이 보인다.
그네들교 불교문문화권이이서인지 이곳 사찰에는 오늘따라 상당히 많은 숫자가 보인다.
예전에는 우리의 어르신들이 서독등지에 산업 근로자로 간호사로 어부로 파견되어 소중한 삶을 이어갔다는데 이네들의 경우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검은 피부, 어눌한 우릿말, 그래도 부처님의 법에는 사생중생이 평등하니 친근감을 만들어 보려고 노력을 하여 본다.
약 30여분간 머물다가 바로 저수지 방면으로 걸음을 옮겼다, 수정교 약간 왼쪽냇가에는수 많은 작은 돌탑이 보인다. 무슨 염원이 저토록 많을까...
수정교를 지나 오르니 차츰 단풍이 아름다운 포장 도로가 나온다, 저수지가 보이고 아름답게 조각된 연꽃이 난간을 장식하고 있는 돌다리, 그리고 넓은 공터에 카메라를 유혹하는 단풍이 곱게 물든 쉼터가 나온다.

금강송의 우람함이 돋보이는 속리산이다. 절 입구에서도 여러 그루의 대단한 위용을 보았지만 이 산에는 아름드리 소나무-금강송-가 상당수 보인다.
정이품송의 이런 범주의 소나무와 마찬가지 일것이다라는 짐작을 하면서 바라본다.


속리산 법주사에서 복천암으로 올라가는 중간에 좌우 양옆으로 울창한 노송이 즐비하게 서 있고 사이 사이에 절벽과 괴석이 솟아 있는 사이로 가을빛에 젖어든 맑은 물이 잔잔히 흐르고 있다. 그 냇물에 10여인이 편히 쉴 수 있는 평평한 바위가 있고 그 아래 깊지도 않고 그렇다고 얕지도 않은 웅덩이가 있는데 ‘목욕소’라 부른다. 물론 여기에는 간략한 안내문이 세워져 있다.
여기에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조선 7대왕이던 세조께서 속리산에서 피부병에 대한 요양도 할겸 고승들에게 국운의 번창을 기원하는 법회도 갖도록 하였다. 특히 복천암에는 당시 유명한 학조대사와 신미, 학열등 법사들이 모여들어 대법회를 열었다. 세조는 법회 중 쉬는 시간을 이용하여 여러 신하를 물리치고 홀로 산책을 하다 이 웅덩이 앞에 이르러 갑자기 목욕을 하고 싶었다. 발이 시리도록 찬물이었다. 세조는 자신의 모습이 비치는 맑은 물에 심취하여 눈을 지그시 감고 천천히 목욕을 시작했다. 그때였다. 세조 앞에 미소년이 나타나더니
“마마 소생은 월광태자올시다. 약사여래(중생을 질병으로부터 구해주는 부처)의 명을 받아 왔습니다. 대왕의 병은 곧 완쾌될 것이니 너무 고심치 마옵소서”
하고 사라졌다. 세조는 깜짝 놀라 눈을 뜨니 미소년이 서 있던 곳에 커다란 바위가 우뚝 솟아 있었다. 너무나 신기하고 신비스러운 일이었으나 세조의 마음은 가볍기만 하였다. 세조가 목욕을 마치고 옷을 입을 때 보니 그렇게도 흉칙하던 종기가 깨끗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세조가 목욕을 하고 병을 고쳤다 하여 ‘목욕소’라 부르게 된 곳이다.
그렇다면 세조의 병은 상당한 고질병-백라병-이였을 것이다. 오대산에도 이처럼 세조가 목욕으로 피부질환을 고쳤다는 이야기가 있으니 참으로 세조대의 불교중흥이 다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시대의 흐름이 이런 작은 못에도 전해오니 참으로 역사의 흐름의 대단한 줄기인것이다.

한참을 오르니 오른쪽으로는 공사 중이라는 팻말과 함께 통제되고 있는 암자로 가는 길이 보이고 바로 올라가는 길로는 세심정(洗心亭) 휴게소라는 이정표가 보인다. 여기부터가 속리산 오름길의 시작인 모양이다. 조금을 더 가니 음악 소리가 들리고 아주 큰 규모의 세심정이라는 휴게소가 보인다. 세심정(洗心亭)이라면 정자의 이름인데 마음을 씻는다는 의미가 있을터인데 그런 안내문은 없어 보인다.
다만 앞의 냇가 단풍이 무척이나 고웁고, 절벽을 마주한 경치 좋은 곳임에 분명하다. 삼거리인데 아마도 우측으로 가면 천황봉(天皇峰)이 나올 것이다.
오늘의 여정은 문장대가 먼저 이기에 복천암 방향으로 오름길을 택하여 천천히 걸음을 옮기니 상당히 많은 산님들이 보인다. 이곳의 산님들의 언어는 경상도 사투리가 많이 섞여 보인다. 아마도 단체로 오신 산님들로 짐작이 되어진다.
복천암은 산길의 오른쪽에 위치하고 암자로는 큰 규모로 보인다. 입구의 공터에는 무슨 회사의 워크샵 진행 중 산행과정이 진행되는 모양이다 수십 명이 질서 정연히 도열하여 안내자의 말을 경청하고 있는 것같다. 복천암에 들리는 것은 생략하고 오름길을 계속하였다.
오름길이 오늘 날씨로는 적당한 온도이건만 여전히 땀의 흐름은 계절을 구별하지 않는다. 숨이 차오른다.
오늘 아침을 서둘다가 먹지 못한 후유증이 오는 모양이다. 연신 수통의 신세를 지게 된다.
간혹 불어오는 산바람이 땀을 식혀주기에 망정이지 오름길이 그리 쉬운 길은 아니다.
용바위골 휴게소가 보인다. 시원한 물줄기가 음료수를 냉하게 하여준다.
그리고 나에게 컵라면이라도 한 그릇이라도 들고픈 유혹이 은근하게 다가온다. 그리고 막걸리 딱 한 잔만 하고 싶은 치미는 유혹도 슬그머니 고개를 든다.
피곤함이 이렇게 까지 유혹을 불러 일으키며 나태의 나락으로 잠시의 편안함을 미끼로하여 다가오는 것이다. 참자 참아, 다행히 혼자 산길을 오를때는 곡차를 마시지 않은 습관이 유혹을 물리쳐준다.
오름길의 낙엽교목들에는 기생식물들의 자람이 보인다. 양지바른 곳에 위치한 나무들의 군락에는 겨우살이의 푸른 잎새들이 상당수 보인다.
한번 사진기를 대어보려다 내 사진기의 성능으로는 괜한 낭비다 싶어 슬그머니 거둔다. 다음에 좋은 카메라가 있을때는 시도하여 보아야겠다.
돌바위가 많이 보인다. 뒷편의 전망이 시원스레 보인다, 이제는 급경사길인모양이다.
이름 모를 준봉들이 빼어난 모습을 자랑하고 소나무가 그 웅장한 바위위에서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하고 수백을 넘었을 만한 커다란 상수리나무계통의 고목에도 이제는 낙엽으로 변한 잎새들을 덜어내고 초연한 자태를 보여준다. 작은 안내문이 하나 보인다. 보현재라고 한다. 이 산에도 역시 불교식의 지명이 많다. 그러고 보니 바로 아래로 내려가는 경사길의 정상이다. 이십여미터 아랫길을 다시오르니 이제는 멀리 보이는 전망을 사라진다. 급경사임이 짐작된다.

여기서 문장대는 이제 약 1.3km 정도라는 이정표를 보니 다리에 힘이 다시 솟는다.
쉬어가시는 분들이 식사를 하시는 모양이다. 간식을 드시는 분도 보이고, 나그네도 잠시 앉아 피로를 풀 겸하여 쉬어가려다가 발걸음을 바로 옮겼다. 명확하지 않은 산행시간과 거리, 산행의 난도를 짐작컨데 오늘 막차를 타려면 시간에 쫓길것 같아서 중식은 문장대에 오른 후에나 하기로 작정하였다는 것을 다시금 상기하고 발걸음을 서둘렀다.

가파른 돌계단길이 연이어 진다, 저 위에 많은 분들이 하산하는 모습을 보니 이쯤이 문장대와는 지척인 모양이다. 산 길 주변의 바위에 걸터앉아 단감을 꺼내고 한쪽씩 두 분께 나누어 주었다. 조금전에 본 워크샵 참여 일행인 모양이다. 고마움을 표시하는 젊은이들이다.
잠시의 쉼을 뒤로하고 오르니 시원한 바람이 앞을 가로 막는다. 앞의 인파들을 대신하여 큰 빗돌이 눈에 들어온다, 경상북도 라고 음각된 빗돌, 이 속리산이 경상도와 충청도의 경계로구나!
문장대 휴게소는 그야말로 인산인해의 경지인것 같다, 어느 자리하나 틈이 있는곳이 없다. 국립공원의 휴게소라서인지 많은 분들이 쉬어가는 모양이다,
여기는 문장대까지 올라오셨가다 바로 하산하시는 분들이 많다고 한다. 문장대를 세번 오르면 극락간다는 속설이 전해지고 있으니 가히 그 짐작이 간다.
높은 철탑이 보이는 문장대로 향하여 문장대라고 큰 안내석 앞에 섰다.
비석의 뒤에는
道는 사람을 떠나지 않았는데 사람이 道를 멀리하였고
산은 世俗을 떠나지 않았는데 世俗이 산을 떠났네
하여 이름 붙여진 俗離山 문장대 1054m
구름 속에 갈무리 져 雲藏臺라 하다가
世祖가 이곳에 올라 시를 지었다하여 文藏臺라 했으니
우러러 宇宙의 장대함을 보고
구부려 品類의 繁盛함을 살핀다는 奇妙의 極致
頂上에는 알이 부화한 둥글게 파인 곳이 있으니
태초 生命 탄생의 神秘를 일러 주도다
동쪽으로 칠형제봉 문수봉 신선대 비로봉 천황봉이
이어졌고 서쪽으로 관음봉 묘봉이 솟았으며
비껴서 낙영산과 도명산이 다가선다
남쪽 아늑한 곳에 법주사를 앉혀 法脈을 잇게 했으니
빼어난 기품 浩然의 氣槪여
造物主의 조화여 오! 仙界의 아름다움이여!

(박찬선 글짓고 김정홍 글쓰다)
이 표지석 뒤에 새겨져 있는 글귀는 속리산의 이름풀이와 주능선을 압축적으로 묘사해주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구절 만큼이나 처음 가본 속리산의 대단한 마루금의 풍경은 정말 감동적이 아닐 수 없다.
철계단을 올라 전망대에 서니 넓직한 전망대가 나온다, 빙둘러 안정망을 설치한 모습, 여기에 운해가 들이차면 정말 아름다운 봉우리로 보일 것이 분명하다. 그 이름을 운장대로 함이 어떠할런지...
북쪽으로 보니 묘봉을 뒤로 하고 관음봉이 성큼 다가온다, 관세음보살을 상징하는 관음봉에도 산님들의 작은 그림자가 보인다. 고개를 돌리니 아름다운 산능성이 보이고 다니 천황봉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늘어선 영봉들이 관음봉의 수려한 모습을 반대로 하여 죽 늘어져있다.
올망 졸망한 형제봉의 모습들이 감탄사를 자나내게 한다. 관음봉은 법주사 북쪽 계곡 안쪽에 있는 봉우리로 문장대 서쪽으로 큰 골 건너에 있다. 관음이란 관세음보살을 말한다. 보살은 대자대비하여 중생이 고난중에 열심히 그 이름을 외면 구제하여 준다는 보살이다. 나무관세음보살마하살!
문장대에서 서쪽을 바라보면 보이는 봉우리이다. 이 봉우리 역시 진리여행을 하는 나그네의 마음을 더욱 벅차게 한다.
기념 촬영을 하고 다시 휴게소로 내려와서 잠시의 쉼을 가지면서 식사를 하려고 하지만 장소가 마땅치 않아 천황봉 가다가 적당한 곳에서 취하리라는 생각으로 가지고 능선길을 출발하였다.
산님들이 이제는 반대편에서 보인다. 한참을 가니 문수봉이 나오고 그리고 험한 암릉을 계속 지나니 우뚝한 청법대가 보인다 . 이 곳은 암릉들이 도봉산의 정상부나 초대능선 처럼 연이어져 있다. 청법대는 문장대 왼쪽으로 신선대와 사이에 있는 봉우리이고 문장대에서 신선대쪽으로 향하다 문수봉을 지나 뒤를 돌아 바라다 보면 잘 볼 수 있다. 나도 지나는 길에 뒤돌아 보면서 촬영을 하여 보았다.

이 청법대에는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는데 옛날 어느 고승이 속리산 절경에 영혼을 잃고 방황하던 중 이 봉우리에서 불경 외우는 소리를 듣고 제 정신을 차렸다 하여 청법대라 부른다고 한다.
속리산의 능선길은 조릿대가 무척이나 많다, 한라산도 원주의 치악산에도 그러하듯이 가슴높이까지 자라곳 있다.
앞을 바라보니 희미하게 신선대가 보인다. 신선대 휴게소가 아득하게 보이는 길을 따라가니 드디어 신선대에는 산님들의 휴식공간임을 알려준다
시간을 보니 이제 두시가 넘어섰다
법주사에서 동북쪽으로 약 5.7킬로미터지점, 경업대 바로 뒤, 입석대와 청법대 중간 지점에 위치한 암석 덩어리의 산봉우리다. 아득한 옛날 속리산에서 절경에 혼을 빼앗긴 고승이 청법대에서 불경 소리를 듣고 멀리 남쪽 능선을 바라보니 산봉우리에 백학이 수없이 날아와 춤을 추고 그 가운데 백발이 성성한 신선들이 앉아 놀고 있는데 그 모습은 고승이 평생 원하는 선유세계인지라 황급히 청법대를 지나 신선들과 놀고자 그곳으로 달려 갔으나 막상 당도하여 보니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지라 크게 실망하고 아쉬워 하면서 그 자리를 떠나 다음 봉우리로 가서 다시 이곳을 보니 여전히 주위에는 백학이 놀고 신선들이 담소를 하는지라 고승은 아직도 자신이 신선들과 만날 수 없음을 깨닫고 다시는 그곳으로 달려갈 엄두도 못냈다고 한다. 그리하여 신선들이 놀던 봉우리를 ‘신선봉’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에는 표지석이 잘 다듬어져 놓여 있고 그 앞에서 경상도 분들 부부와 교대로 기념촬영을 하였다. 식수를 마시고는 입석대로 출발하니 이제는 다리가 조금씩 피로하다는 신호를 보내준다. 암릉군을 지나 갈림길에서 조망을 한 번더 하고파서 윗길을 택하니 정상부에는 식사를 하기 좋은 넓은 바위가 나온다.
까마귀가 어울어져 날아다닌다.
배낭을 풀고 내친김에 등산화끈도 풀고, 조끼를 벗으니 한기가 감돈다. 신선대에서 약 15분정도의 거리를 지나온 셈이다.
이곳이 입석대인 모양이다
조선 인조때 (1623~1634)에 임경업장군이 이 곳에 이르러 6년 동안 몸과 마음을 단련하며 장군의 기상을 닦고 있었는데 어느 정도의 단련이 그의 체력한계가 되는지를 알길이 없었다. 그는 그것을 시험해 보고자 했으나 기준조차 알 길이 없어 매우 당혹하게 여겨오고 있었는데 하루는 석굴에 않아 정신을 통일하고 있는데 그 뇌리에 홀연히 형체는 보이지 않고 목소리만이 들려왔다. 임경업이 정신을 모아 그 말을 들으니「마주 바라다보이는 석벽에 올라가 그 옆에 누워있는 돌을 비석처럼 세워놓으면 그 힘을 측정할 수 있으리라」하는 내용이었다.
임경업은 곧 경업대에서 마주보이는 곳에 올라가 커다란 돌을 일으켜 세우는데 아직도 힘이 부족했다. 이에 임경업이 그 힘이 모자람을 깨닫고 다시 열심히 체력을 단련하기를 1년 마침내 7년째 되던 해 반석(盤石)위에 돌을 세우는 데 성공을 했다. 그 후부터「돌을 세웠다」고해서 입석대(立石臺)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대단한 능력, 역사적인 전설이니 그럴듯하다. 호국의 의지가 보이는 전설이 서린 이곳에서 묵묵히 혼자서 식사를 하고 마무리하던차에 역시 이 길을 들어선 젊은이 셋이서 길을 묻는다.
도면을 보여주면서 개략적인 안내를 하여주고는 나도 배낭을 챙겨 대구사람들로 보이는 그 들의 뒤를 뒤따라 작은 석문을 통과하여 다시 계단을 올라서서 입석대를 촬영하여 본다. 이 곳에는 석문이 무척 많아 보인다.
조릿대가 울창한 능선길을 지나 다시 오름길을 마무리 하니 비로봉이 나온다.
석수의 형상들, 묘한 형상들이 수도 없이 보인다.
아름다운 곳이라는 표현이 정말 모자라는 곳, 이 아름다움이 가슴에 하나 둘 저장이 되어진다.
산능성이에 이런 넓은 평야(?)가 있을까 싶다.
뒤돌아 보니 멀리 문장대의 날렵한 자태가 보인다. 다시 석문을 하나 지나게 된다. 반대편에서 젊은 친구가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혼자 산행을 한다고 한다.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혼자 산행을 즐긴다고 한다. 헤어진 이 지점이 아마도 천황석문인가 보다. 저쪽 태양이 비추이는 쪽에 천황봉이 보인다.
삼거리길이 보이는 걸 보니 여기서 이제는 상당한 지척이다. 오른쪽의 하산길에는 산님들이 하나 둘씩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모습이 보인다. 정상을 밟고 내려가는 그 기분에 저 발걸음은 무척이나 가벼울 것이다
천황봉헬기장이 나타나고 여기는 넓은 곳으로 전망이 매우 좋다. 지나온 봉우리들이 질서 정연하게 도열하고 있다.
경상도 가는 길목인가, 이정표가 저 아래를 가르킨다. 조릿대와 관목의 숲을 헤치면서 약 600미터를 더 올라가니 드디어 천황봉의 정상이다.
천황봉에 도착하니 시간이 벌써 3시 반이다. 하산길은 두시간 반 정도 소요된다고 하니 남은 시간이 별로 없어 걱정이된다
천황봉의 표지석은 1058 m라고 명기되어 있다.
뾰쪽한 바위들이 모인 가운데에 오래되지 않은 표지석이 시원스러운 모습을 보여준다. 일전에 다녀온 동두천의 소요산 의상대와 비슷한 모습을 보여준다.
시원한 산바람이 불어온다, 온통 땀으로 적셔져 있는 내의에 바람이 스치니 한기어린 시원함이 온 몸을 감싼다.
조끼의 작크를 채워 채열방출을 방지하여 본다. 조금은 나아진 듯 하다
뒤돌아 본 조망에서 다시 도면을 꺼내놓은 봉우리와 도면을 대조하여 영봉들을 기억에 하나 둘 저장하여본다.
법주사에서 동쪽으로 약 5.7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한 해발 1058미터의 속리산 최고봉으로 동쪽으로 흐르는 물은 낙동강의 근원이 되고, 남쪽으로 흐르는 물은 금강의 근원이 되며, 서쪽으로 흐르는 물은 한강의 근원이 된다고 하는데 이를 삼파수라 한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이 산마루에 옛날엔 대자재천왕사라는 사당이 있었다고 한다.
천왕신이 해마다 가을 10월 범의날이면 법주사에 내려가서 45일 동안 머무르다가 상봉으로 도로 올라오는데 그 동안에 이 산 아래 사는 모든 주민들까지 그 신을 맞이하여 음악을 잡히고 정성껏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하산하시는 산님들의 표정이 무척이나 맑아 보인다. 연세 지긋하신 어르신이 만면웃음을 띄우신 채 즐거운 인사를 보내 주신다. 늘 고마우신 산님들의 아름다운 마음씨이다.
오늘 산행의 보람이 이곳에 모두 집중되어 기억에 남을 것이다. 지금 이 시간대에 여기 모이시는 분들은 문장대 방면에서 오시는 분들 일거라는 추측이 충분하기에 오늘 산행의 종점인 봉우리인 것이다.
속리산의 주봉은 천황봉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천왕봉이었던 것이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천황봉으로 바뀐 듯 하다. 대동여지도를 비롯하여 구한말에 만들어진 실측지도에도 천왕봉으로 표시되어 있다.
하늘이 성큼 눈 앞에 다가오고 지나온 속리산의 영봉들이 한 눈에 펼쳐진다. 저쪽 경상도, 그리고 남쪽의 방면도 조망이 시원하여 한 눈에 들어온다.
아름다운 산하, 내 조국의 이 아름다운 산하는 영원히 이 모습을 간직한 채로 우리 후손들에게 물려 주어야 한다.
젊은 친구에게 기념 사진을 부탁하고 임무 교대하여 나 역시 그 이들의 기념 사진을 찍어주었다.
태양이 구름빛에 가리워 약간은 어두운 느낌을 자아낸다.

속세의 갈림길

청하 권대욱

늦가을빛이 곱다기에 새벽길 홀로 나섰건만
속세가 어디 인줄을 모르고 길을 나섰다네
길을 떠나면 벗어남이라니 떠난 곳이 속세라네
산길을 더듬으니 전설이 서리고 역사도 흐르고
백두대간자락이 이리로 흘러가니 나그네길 일세

법주사 미륵님은 말 없이 굽어보시는 세상이지만
돌탑에 스며든 그 숱한 정성은 이 물 따라 흐르네
물가에 잠겨든 이 가을은 어느 세월을 노래할 것인고
금강송이 우람하니 근심의 그늘이 자취마져 없어지고
목욕소 흐름이 멈춘 곳엔 불보살 자애 서렸구나

이 마음을 씻어 보낸 세심정 그 물결이 꿈만 같아
복천암 지나가니 세속 잔 때 번뇌로 남았으니
문장대 극락가는 그 길 가면 이 맘 맑아지리
묘봉 앞엔 관음봉이 저쪽이니 서방정토 일세라
형제봉은 일곱이니 무슨 전설 깊이 서렸는고

문수사리보살 머물렀으니 이곳이 문수봉 일런가
속세떠나 이 산에서 청법하여 청법대라 하였는고
지나온 보현재는 저 아래 이건만 그곳도 도량일세
신선대 홀로 우뚝하니 인연설법 모두 마쳤을꼬
님의 뜻이 이곳에 서림이니 능선바위 높고 높구나

비로자나불의 화신인가 세상을 굽어 살피시니
비로봉엔 어느 세월에 갈 것인가 제행무상이거늘
천황석문 좁은 틈새에는 저녁 햇살만 감돌구나
잔가지 조릿대는 솔바람에 흔들리니 산 길 나그네
홀로 가는 세속번뇌는 찬 마음을 실어 보내리라

하늘의 임금인가 저곳 천황봉 높고 높으니
경상도와 충청도가 예서 둘로 갈림이로구나
삼파수 물줄기 천리길이 예서 시작되었다네
홀로 눈을 들어 되돌아 보니 묘봉에서 관음으로
선선대 지나 비로봉 이어지니 예가 속리로다


아쉬움을 간직한 채 하산길에 나섰다. 헬기장에서 배낭과 옷차림을 정리하고 남은 단감 하나를 꺼내어 멀리 산록을 다시 빙 돌아보면서 그 맛을 음미하여 본다. 들꿈 처사님의 정성이 단맛으로 다가온다, 우리네 농부님의 정성은 이 산속에서도 그대로 느껴진다.
쉼터에는 몇 분의 산님들이 모여 즐거운 대화를 나눈다. 이 분들은 아마도 경상도에서 오신 분들 같다.
스틱을 꺼내고 장갑을 끼고 등산화의 끈도 다시 검정하고 조릿대가 허리 높이 까지 자라고 있는 좁은 숲길을 지난다. 오를 때에 본 상고암의 석문이 저 쪽에 보인다.
이정표를 보면서 상고암 방면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내려오는 길에는 상고암이 보이고 그 곳으로 가려니 거리는 가깝지만 제한된 시간이라 그냥 먼 그림자만 보고는 조릿
대의 숲이 연이어지는 하산길을 재촉하여 본다.
앞서 가던 젊은 아가씨들이 조심 조심 걸음을 하고 있다. 아까 정상에서 내려오는 모습을 보았는데 아직도 여기에 머물고 있는 걸 보니 다리에 힘이 다 뺘져 보인다. 라면을 들 때에는 그토록 쾌활하던 아가씨들이었던데 하는 안쓰러움을 뒤로 한 채 잘 다듬어진 바윗길을 내려오니 약간의 평지스러운 길이 보인다. 그리고 이어 상환석문이 나타난다. 이 산에는 석문들이 무척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기록에는 8대 석문이 있다고 하는데 오늘 경험으로는 대략 네 군데를 지난것같다.
상환석문 지나는 받침 바위에는 작은 글씨가 보인다. 어두워서 잘 보이질 않는다. 석문을 지나니 다시 급경사 내림길이 이어진다. 여전히 단풍이 아름다운 모습을 양 옆에서 그 자태를 자랑하고 있다.
산고양이가 조릿대가 우거진 곳에서 조용히 나를 응시한다.
오늘 이 산에서는 다람쥐의 모습을 전혀 볼 수 없었고 다만 청설모만 몇 마리 보였는데 이 얼룩무늬를 지닌 고양이를 보니 그저 반가울 따름이다.
카메라를 들이대니 이 녀석이 후다닥 언덕으로 사라진다.
내 마음이 정갈하지 못하여 그 녀석이 놀랐는 모양이다. 내림길의 왼쪽에는 학소대인지 무척 아름다운 절경이 보인다. 동해 두타산의 무릉계곡의 학소대와 비슷하게 보인다.
상환암 이정표가 다시 보인다. 약간 뒤돌아 약 100여미터지점인 모양이다. 그래도 하산을 결정하였다.
세심정(16:40)이 다시 보인다. 입산 때와는 다른 방향으로 하산을 하였기에 먼저 절구통을 상하로 나누어 물이 흘러내린다.
아마도 약수 인것 같은데 마시는 분들은 없어 보인다. 절구통을 소개한 작은 안내문이 보이지만 자세히 보지는 못하고 사진을 찍었지만 판독이 불가능하다.
많은 분들의 하산걸음이 분주한 목욕소를 지나고 단풍이 아름다운 산길, 금강송이 우뚝한 자태를 자랑하는 산길을 지나 석양에 물들고 단풍의 그림자가 가득 담긴 저수지를 지나니 다시 법주사의 일주문이다.
일주문 앞의 바위약수를 한 잔 마시고 작은 냇가의 갈대밭을 보면서 공원터미널로 향하였다.

말끔하게 정비하여 놓은 공원 입구의 넓은 잔디밭, 조각들의 모습, 다정한 가족들의 웃음, 연인들의 사랑 가득담긴 표정을 뒤로하고 걸음을 옮긴다.
시원한 공원 입구의 인공폭포에는 여전히 물소리가 들려온다. 포말을 내리 부어 웅장함을 자랑하는 폭포, 그리고 인근의 상가에는 산님들이, 그리고 법주사 참배객들이, 관광객들이 삼삼오오 모여앉아 토속주를 한 잔하는 모양이다.
어둠이 내리는 공원 입구의 긴 거리, 걸음을 서둘로 터미널로 가니 5시 반이 넘었다.
시간이 촉박한데 터미널 매표소에는 사람이 보이지 않아 당황스러웠는데 자동판매소 앞에 남자 직원이 대행하여 준다, 서초로 오기는 너무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하기에 동서울행을 올라 아침의 반대방향으로 긴 시간을 창가를 바라보며 서울로 출발하였다.
가져간 단감 하나를 깍아 음미하면서 이 단감을 보내주신 밀양의 들꿈 김현상처사님께 고마움의 마음을 가져본다.
차는 금새 정이품송 곁을 지나고 고갯길을 지나 나그네를 꿈속에 빠져들게 한 것같다.
푸근함이 남는 진리의 여행길..
속리산에서 보낸 하루는 이 가을을 하직하면서 속세와 진리의 공간을 하나로 인식하게 하는 날이었다내 마음에 남아 있는 번뇌의 때가 일주문을 나서면서 다시 고개를 들어보이건만 그래도 번뇌의 깊이는 많이 덜어진 것 같다.
내일은 일찍 다시 직원결혼에 참석하려고 청주에 간다는 생각을 마음에 담고 조용히 눈을 감아본다.이 길이 바로 환속의 길이로구나.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