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세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속리산 천황봉

 

 


  쌍용계곡의 피서객

 

  섭씨 35도 전후의 찜통더위가 며칠째 기승을 부리는 2005년 7월 24일 일요일, 23명의 등산객을 태운 관광버스(목동 G산악회 주관)가 중부내륙고속도로 문경새재인터체인지를 빠져 나옵니다. 꼬불꼬불한 2차선의 지방도로를 타고 가은(加恩)을 지나 한참을 들어가자 도로변에 간간이 주차되어 있는 차량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무더기로 주차된 차량이 진행을 더디게 합니다.


  알고 보니 맑은 물이 흐르고 있는 도로 옆의 개천(용암천)에서 많은 사람들이 피서를 즐기고 있는 쌍용계곡(32번 지방도)을 통과하고 있는 중입니다. 물가에 텐트를 쳐 놓고 물놀이를 하고 있는 사람들의 팔자가 매우 좋아 보이는데, 이 모습을 바라보는 등산객들의 입에서 탄성이 절로 나옵니다. 오늘 무더운 날씨에 백두대간을 타려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계곡에 앉아 저토록 편안하게 하루를 보내는 피서객을 보면서 부러움이 앞섭니다. 

 

 


  밤치∼문장대

 

  오늘의 산행코스는 백두대간 제11구간(화령재∼늘재) 제21소구간(갈령삼거리∼속리산∼늘재)입니다. 그러나 21소구간의 거리가 워낙 길기 때문에 위쪽의 밤치∼늘재구간은 다음코스에 포함시키고 아래쪽의 갈령∼피앗재구간은 이미 답사했으므로 오늘 구간에서는 제외됩니다.


  32번 지방도로에서 49번 지방도로를 만나 북쪽으로 진행하다 왼쪽으로 접어들어 동물들의 이동통로를 지나자마자 산행들머리인 밤치(밤티재)에 도착합니다(10:15).


  단체로 기념사진을 찍은 후 왼쪽의 오르막을 향해 힘든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헐벗은 묘지 1기를 지나자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다행히도 오늘은 바람의 도움을 다소 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갖습니다. 두 번째 묘지를 지나 이어지는 부드러운 흙 길을 걷노라니 발바닥으로부터 포근한 감촉이 전해집니다.


  가는 밧줄을 잡고 전망대에 오른 후 오르내림을 반복하고 보니 촛대처럼 생긴 바위를 지나 너럭바위에 오릅니다. 활짝 핀 원추리 주위를 맴돌고 있는 벌 한 마리가 꽃에 앉기를 기다리며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지만 야속하게도 벌은 내 마음을 몰라줍니다. 직벽에 걸려있는 밧줄을 잡고 오르니 두 번째 밧줄이 기다리고 곧 이어 세 번째 밧줄을 힘주어 댕기니 큰 바위가 솟아있는 능선입니다.

             

                                      안개낀 속리산 조망(1)

 

                          안개낀 속리산 조망 (2)

 

                          밧줄 오르막 구간

 

                 

  연무(煙霧)로 인해 주변의 조망은 할 수 없지만 너무나도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그 동안 땀으로 범벅이 된 심신을 한결 위로해 줍니다. 지금까지 이처럼 시원한 바람을 맞아본 기억이 거의 없습니다.


  갈 길이 멀어 언제까지나 퍼지고 앉아 바람을 친구로 삼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바위틈새에 걸려 있는 밧줄을 잡고 첫 번째 개구멍을 내려선 다음, 그야말로 배낭을 맨 몸을 비틀어 겨우 통과할 수 있는 두 번째 개구멍 바위를 빠져나와 굵은 밧줄을 잡고 내려선 후 다시 가는 밧줄을 잡고 오릅니다.

 

                          첫번째 개구멍 바위(내리막 모습)

 

                        개구멍을 통과 한 후 뒤돌아본 모습

 

                              좁은 개구멍 바위

 

                                    험한 바윗길

 

 

  한동안 바위에 걸려 있는 밧줄구간으로 사람을 시험하더니 어느새 산죽 밭이 이어지고 반쯤 색이 바랜 산죽 사이로 말나리가 화사한 꽃을 피우고 있어 지나가는 발걸음이 가벼워집니다.


  이윽고 오늘 산행구간 중 가장 힘든 코스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바위사이를 요리조리 뚫으며 연결되던 등산로가 그만 커다란 바위 앞에서 멈추어 버리고 맙니다. 그 대신 올려다보는 바위에 걸려 있는 굵은 밧줄이 사람의 간담을 서늘하게 합니다. 그렇지만 연약한 여성들도 통과하는 이곳을 필자가 지레 겁을 먹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쉼 호흡을 한번하고 스틱을 짧게 조정하여 팔목에 건 다음 어머니 젖 먹던 힘을 동원하여 사지(四肢)에 힘을 주자 어려운 첫 번째 관문을 통과합니다. 제일 첫 오름이 어렵고 그 다음 두 번째 홈통을 통과하는 것이 만만치는 않지만 서당개도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데 벌써 본격적인 산행경력이 3년 반이 지난 필자가 이를 극복하지 못하면 말이 아니지요. 두 번째 고비를 넘자 이번에는 내리막에 외나무다리가 비스듬히 걸려 있습니다.


  이 구간을 가볍게 통과한 경험이 있는 독자들은 필자가 너무 과장되게 표현한 것이라고 비난을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바위를 타는 릿지산행을 전문으로 하는 분들에게는 누워서 떡을 먹는 것보다도 쉽겠지만 필자는 오로지 보통사람들을 기준으로 하는 말이니 너무 나무라지 말기를 바랍니다.   

 

                          힘든 밧줄구간을 올라온 후 뒤돌아본 모습

 

                                            뒤돌아본 바위지대

 

                                 맨 뒤에 보이는 봉우리는 관음봉

 


  맞은편에서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오는 등산객을 만납니다. 어린이에게 문장대까지 가는 데 험한 길은 없느냐고 물어보니 세 군데 정도 힘든 길이 있다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가보니 오르막이 다소 가파르기는 해도 지나온 길과 비교하면 그리 힘들지 않습니다. 문장대가 빤히 올려다 보이는 곳에서 접근하는 등산로는 이외로 부드러워 콧노래가 나올 지경입니다. 넓은 헬기장에서 숲 속의 사잇길을 빠져 나오니 문장대로 오르는 큰길과 만납니다.


  문장대의 바위봉우리 아래에는 그 전에는 한자로 씌어진 작은 표석뿐이었는데 언제부터인지 사람의 키보다도 더 큰 규모의 돌에 한글로 쓴 표석을 세워 놓았군요. 철 계단을 밟고 문장대(1,054m) 위로 올라서니(12:40) 속리산 최고의 전망대라는 찬사가 무색할 정도로 사방이 연무로 인해 선명한 조망을 할 수 없는 점이 아쉽습니다. 제대로 보이는 것은 서쪽의 관음봉과 방금 지나온 능선뿐이며 천황봉 방면의 능선은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오늘 통과한 백두대간 구간은 속리산국립공원 내에서는 묘봉(874m) 및 상학봉(861m)코스와 더불어 가장 어려운 등산로라고 생각됩니다.

 

                          문장대 정상으로 오르는 철계단

 

                                  큰 문장대 표석

 

                                예전부터 놓여 있던 한자로 된 작은 표석

 

 

                          큰 표석 뒷면에 새겨져 있는 안내문

 

                                       문장대 정상의 조망 (1)

 

                                       문장대 정상의 조망 (2)

 

                  문장대 정상의 조망 (3) - 앞쪽은 관음봉, 뒤로 희미한 것은 상학봉과 묘봉

 

                                                 문장대 장상의 조망 (4)

 

 


  재미있는 바람의 이름

 

  지나온 바위 능선에서 맛보았던 시원한 바람이 자꾸만 생각나는 무더운 여름입니다. 여기서 잠깐 바람의 종류를 한번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바람은 그 세기에 따라 이름이 달리 붙습니다. 약하게 솔솔 부는 '가는바람(솔바람)', 아주 약하게 부는 '실바람',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부는 '날바람', 눈꽃을 날리며 잔잔하게 부는 '눈꽃바람', 보드랍고 화창한 '명지바람'이 있습니다.


  또한 좁은 틈으로 세게 불어오는 것은 '황소바람'이고, 큰 나무가 온통 움직이고 사람이 걷기 어려울 정도의 바람은 '센바람'이며, 가는 나뭇가지가 부러지고 사람이 걸어다닐 수 없을 정도의 바람은 '큰바람', 건물에 피해를 주는 바람은 '왕바람', 간간이 나무뿌리가 송두리째 뽑히는 정도의 센바람은 '노대바람'이라고 합니다.


  움직이는 모양에 따라서 구분을 해 보면 '솔바람'은 솔(松) 사이를 불어오는 바람이 아니라 아주 느낌이 작게 올 정도로 가는 바람을 뜻하며, '살바람'은 살살 부는 바람이 아니라 봄철에 부는 아주 찬바람입니다.


  기상청에서는 바람의 종류를 그 세기에 따라 12가지로 나누어서 이름을 붙이고 있는 데, 풍향계가 움직이지 않을 정도의 가장 약한 바람은 '실바람'이고, 깃발이 휘날릴 정도의 바람은 '산들바람', 길거리의 종이 조각이 날릴 정도는 '건들바람'이라고 합니다. 초속 17m가 넘으면 '큰바람'인데 이를 포함하여 '노대바람'과 '싹쓸바람'은 태풍권입니다(자료 : 월간 산, 2005년 6월호, p.184에서 발췌인용).


  오늘 우리가 맞았던 시원한 바람은 아마도 '산들바람'이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문장대∼입석대∼천황봉

 

  문장대에서 내려와 안부에 위치한 가게 안을 살펴보니 산악회 중간대장인 O씨와 또 한사람의 등산객이 막걸리 잔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나를 본 O대장은 막걸리 한 잔을 마시겠느냐고 묻습니다. 필자가 잠시 뜸을 들인 후 고개를 끄떡이자 순식간에 한 사발의 막걸리가 앞에 놓여집니다. 술을 못하는 필자가 약 2년 전 이곳에 와서 막걸리 한 잔을 먹었지만 알코올의 함유량이 적고 또 맛이 매우 좋아 경업대를 거쳐 법주사로 하산하는 데 전혀 지장이 없었기에 그 때의 경험을 회상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의 막걸리는 이미 색깔부터 달라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한 모금 마셔보니 알코올의 함유량도 훨씬 많은 듯 독한 기운이 온 몸에 퍼지는 것 같습니다. 가게의 주인이 바뀌었는지 아니면 막걸리를 제조하는 방법이 달라졌는지 모를 일입니다. 하는 수 없이 반잔만 마시고는 나머지를 O대장에게 건네 줍니다.


  가게를 나와 천황봉방면으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한 구비를 돌아가니 G산악회 선두그룹이 식사를 끝내고 막 자리를 정리하는 중입니다(13:15). 방금 도착한 우리들(3명)은 후미가 올 때까지 기다려 이곳에서 식사를 하기로 하고는 자리를 폅니다. 후미대장을 맡은 산악회 M고문을 비롯한 4명이 도착하자 각자 도시락을 꺼냅니다. 평소 도시락을 싸오지 않는 필자도 오늘은 가지고 왔는데 먹을 만합니다. 후식으로 참외까지 깎아 먹으니 금상첨화(錦上添花)로군요. 갈 길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는 데 너무 시간을 소비한 것 같아 서둘러 일어섭니다(14:00).


  사람이 많이 다니는 국립공원 구간이라 이곳의 길은 매우 잘 조성되어 있습니다. 한 구비를 돌아가는 길에는 계단과 철책이 설치되어 있어 등산객의 안전을 도모합니다. 그러나 해발 1,005m인 문수봉은 위치를 알지도 못한 채 지나친 후 사람들이 쉬고 있는 휴게소에 도착하니 신선대(1,016m)입니다. 옆의 바위에 올라서니 보이는 것이라고는 뿌연 안개뿐입니다. 


  막걸리 생각이 난다는 M고문이 한 주전자의 당귀막걸리를 놓고 필자이게 한잔 마시기를 권하지만 이미 문장대에서 먹은 반잔의 알코올이 아직도 남아 있어 사양합니다. 그러나 향기가 좋다는 말을 듣고 혀끝에 대 본 순간 한약재인 당귀 향의 냄새가 코끝을 진동시킵니다.

 

                                        신선대 이정목

 

                              신선대에서 바라본 가야할 방향의 바위봉우리

 


  신선대를 지나 한 구비를 돌아가니 삼거리입니다. 오른쪽으로 내려서면 경업대를 거쳐 법주사로 하산하는 길입니다. 경업대 주변의 암릉과 그곳에서 올려다보는 입석대의 풍광은 속리산 등산로 중 가장 빼어난 아름다움을 제공하는 곳입니다. 필자는 천황봉으로 가기 위해 앞의 오르막으로 진행합니다. 오른쪽에 보이는 큰 바위를 카메라에 담은 후 산죽 밭을 통과합니다. 오른쪽 큰 바위절벽사이로 바라보이는 안개 낀 경치는 여기가 바로 속세를 떠난 곳임을 실감합니다.

 

                                      경업대 삼거리를 지난 길목의 바위 봉우리 

 

                                   바위 옆으로 보이는 안개낀 산

 


  다시 사람의 키를 훌쩍 넘는 산죽 밭을 지나자 입석대 이정표가 이방인을 반겨줍니다. 그러나 이정표 있는 곳에서 입석대의 모습은 찾아 볼 수 없어 속리산의 명물 하나를 가까운 곳에서 눈으로 보지도 못하고 지나치는 것은 아닌지 조바심이 납니다. 왼쪽으로 이어진 계단을 오르면서 뒤돌아보니 바로 그기에 입석대의 웅자(雄姿)가 속리산을 지키고 있습니다. 겉모양은 전통사찰의 당간지주(幢竿支柱) 같기도 하고 광개토대왕비 같기도 하지만 엄청나게 큰 네모난 돌이 기둥처럼 버티고 서서 영겁의 세월동안 하늘을 받히고 있습니다. 대자연이 만들어낸 신비스러운 힘에 감탄을 거듭하면서 발걸음을 재촉합니다.

 

 

                    철계단을 살짝 비켜서서 돌아본 입석대의 위용 

 

                                      철계단을 오르며 뒤돌아본 입석대

 

 


  키를 넘는 산죽과 잡풀이 우거진 포근한 등산로는 왼쪽으로 휘어지면서 바위봉우리를 보여주다가 다시금 오른쪽으로 방향을 돌리는 데 흡사 초원지대를 연상시키는 길입니다. 이정표가 없어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비로봉(1,025m)을 우회한 것 같습니다. 다시 오른쪽 법주사로 하산하는 길을 지나 석문을 통과한 후 고개안부에서 휴식을 취합니다. 후미그룹 7명이 다 모였습니다.

 

                 키를 넘는 산죽밭이 이어지는 등산로

 

                        바위사이를 내려가는 O대장

 

                         속리산의 기암

 

                                                 안개낀 속리산

 

                       바위봉우리(비로봉 인듯?) 밑으로 조성된 포근한 등산로 

 

                                                속리산의 기암

 

                                    큰 거북바위 처럼 보이는 기암

 

                                              석 문


  자연히 7월의 폭염에 관해 이야기를 주고받습니다. 한 남성등산객이 냉장고에서 단단히 얼려 가지고 온 500mm 생수병을 꺼냅니다. 보냉(保冷)이 되는 물질로 감싸 둔 탓에 얼음이 그대로 남아 있어 눈으로 보기만 해도 갈증이 해소되는 것 같습니다. 무더위에 지친 한 여성등산객이 물병을 달라고 하더니 시원하다고 하면서 물병을 앞가슴에 갖다 댑니다. 이 광경을 목격한 필자가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그 물병 팔자 한번 좋습니다. 나도 이 순간만은 물병이 되고 싶습니다."
  이 여성이 물병을 다시 원래의 주인에게 넘겨주는 데 이제 보니 얼음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를 받아든 남성이 한마디 거듭니다.
  "이놈이 여인의 가슴에서 잠깐 놀다 오더니 완전히 녹아 버렸습니다."


  이런 농담을 주고받으며 다리를 쉰 후 통나무계단을 오르니 전망바위입니다. 말이 전망바위이지 주변의 전망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그 대신 시원한 바람은 정말 죽여줍니다. 문장대 오름 길의 바위 능선에서 맞았던 바람보다 오히려 더 시원한 것 같습니다. 차라리 산행을 중단하고 이곳에 자리를 깔아 놓은 채 시간을 보낸다면 참으로 행복할 것이라는 엉뚱한 상상도 해 봅니다.


  이곳에서 조금 더 가니 드디어 속리산의 최고봉인 천황봉(1,058m)입니다(15:47). 반듯한 정상표석 옆에는 나이 지긋한 여성 몇 명이 속세를 떠난 듯 말 한마디 없이 조용히 앉아 있습니다. 최고봉에 올랐음에도 보이는 것이라고는 짙은 안개구름뿐입니다. 그래도 지금까지의 주변 전망은 희미하기는 해도 그 형체는 보였지만 이곳에서는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습니다. 속리산의 산신(山神)은 속세의 삶에 찌든 우리들에게 그 진리를 가르치고 있는 모양입니다.


  속리산(俗離山)은 사람이 사는 세상(俗)을 떠난(離) 산(山)입니다. 세상이 싫어 속세를 떠나 와서(離俗) 주변 경관이 보이지 않는 다고 불평을 하는 것은 속리산의 속살을 일반 대중에게 함부로 보여주지 않으려는 산신의 뜻을 거역하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니 이 상황을 그대로 묵묵히 받아들이는 도리밖에 없지요.


  속리산에 내린 빗방울은 한강과 금강 그리고 낙동강으로 나뉘어져 흘러내린다고 하여 삼파수라 불린다고 합니다.  

 

                                                  속리산  천황봉(해발 1,058m)

 


  천황봉∼피앗재∼만수리

 

  천황봉에서 내려서는 길은 급경사의 비탈길입니다. 시간이 점점 늦어지는 것을 우려한 O대장이 먼저 앞서 가고 필자가 그 뒤를 따릅니다. 그러나 아무리 발걸음을 바삐 옮겨도 젊은 산행대장을 따라가기란 불가능한 일입니다. 잘 못 하다가 페이스를 잃을 경우 낭패를 당할 우려가 있기에 뒤 처지고 맙니다.


  오른쪽 대목리(대목골)로 하산하는 삼거리를 지나 계속 능선을 타고 가다가 묘지 1기가 위치한 공터에서 오른쪽으로 내려섭니다(16:13). 능선이 아니라 사면으로 연결되기에 매우 조용하고 아늑한 길입니다. 일반적으로 살아 있는 나무에는 푸른 이끼가 끼는 데 한 고사목에는 하얀색의 이끼가 끼어 있어 이채롭습니다.

 

                                  흰 이끼가 낀 나무

   

                                       보기에는 그럴듯한 버섯

 

                                         안개가 걷히자 보이는 마루금

 

                                바위산의 풍모를 보여주는 모습

 


  어느새 산길은 다시 능선으로 연결되는데 천황봉에서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던 것이 안개가 걷히면서 하늘이 조금씩 열려 햇볕을 비추기 시작하니 산의 하늘 금이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전망대바위에서 바라본 산세도 웅장한 바위산의 풍모를 여지없이 확인시켜 줍니다.


  천황봉을 지난 다음부터의 백두대간 길에는 이정표도 거의 없어 현재의 위치를 파악하기도 어렵습니다. 한 두 차례 능선의 북동쪽 조망이 보이다가는 곧 사라져 버립니다. 조그만 산봉우리를 몇 차례나 넘고 또 넘지만 피앗재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한 마디로 진과 맥이 쑥 빠지는 백두대간 길입니다. 천왕봉에서 출발한 지 2시간 20분만에 5.8km의 거리를 내달아 드디어 피앗재에 도착합니다(18:10). 오랜만에 서 있는 이정표를 뒤로하고 오른쪽 만수계곡방향으로 하산을 서두릅니다.

 

                                         피앗재 이정표

 


  하산 길은 계곡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돌멩이가 많은 너덜길이 자주 나타나 속보로 걷기도 쉽지 않습니다. 오후 여섯시가 지난 시각이라 계곡은 벌써 어두워지기 시작합니다. 얕은 계곡에는 물 한 방울도 흐르지 않으니 이상한 일입니다. 한 동안 장마가 계속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물이 없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임도 입구에서 후미그룹을 기다리는 S산악회장을 만납니다. 연일 계속되는 폭염으로 인하여 7명의 등산객이 산행을 취소했다고 하는 데 이래가지고는 원가도 건지기 어려울 것만 같아 보기에도 안쓰러울 지경입니다. 싱싱한 고추가 자라고 있는 고추밭을 지나자 마을 입구입니다(18:40).


  후미대장인 M고문 일행이 오기를 기다리며 옆의 계곡으로 내려가 땀을 씻는데 생각보다도 물은 맑아 보이지 않습니다. 오늘 산행에 8시간 25분(점심시간 45분포함)이 소요되었습니다. 산행코스를 다시 한번 정리하면 밤치/문장대/신선대/입석대/천황봉/피앗재/만수리입니다.

 

                                      탐스러운 고추밭

 


  쓰레기를 줍는 등산객  

 

  천황봉을 지나 대목리로 하산하는 길목에서 흰색의 큰 비닐봉투를 들고 있는 등산객이 쓰레기를 줍는 것을 목격합니다. 이분은 후미그룹으로 오면서 점심식사를 함께 했던 L씨입니다. 사람들은 이 사람이 왜 봉투를 배낭에 넣지 않고 귀찮게 손에 들고 다니는 지 의아하게 생각했습니다. 같이 산행을 하다가도 어느 순간 홀로 뒤 처지다가 금새 다시 우리를 앞질러 가기도 합니다.


  필자는 이분이 산나물을 채취하는 줄로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사람들이 보지 않는 틈을 이용해 등산로주변에 버려진 쓰레기를 수거하고 있습니다. 오늘처럼 무덥고 또 먼 길을 걸어야 하는 날 그냥 쓰레기 버린 사람들을 욕하면서 지나가도 그만일 텐데 일일이 주워 담는 그 정성이 정말 산을 사랑하는 산사나이입니다.


  그것도 남에게 드러내 놓고 하는 것이 아니라 무슨 일을 하는 지 모르게 선행을 하고 있으니 정말로 존경심이 우러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필자와 비슷한 연배인 것으로 생각했으나 M고문에게 확인해본 결과 금년 63세라고 하니 한참 위입니다. M고문에 의하면 이분은 산에 올 때마다 항상 쓰레기를 줍는다는군요.


  이분의 선행(善行)을 널리 알리고 싶은 생각은 간절하지만 드러내기를 좋아하지 않는 당사자의 성품을 고려해 M고문으로부터 확인한 실명을 공개하지는 않겠습니다. 두툼한 쓰레기 봉투를 들고 앞서가는 뒷모습의 사진 한 장을 겨우 찍었습니다. 현재 김포에서 과일가게를 운영하고 있으며 1개월에 한번 실시하는 동네산악회를 꾸려 나간다고 합니다. 이렇게 음지에서 산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한 우리의 미래는 밝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산을 찾는 사람들이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지 않는 일입니다.      

 

                               흰색의 큰 쓰레기 봉투를 들고 가는 L씨의 뒷모습

 

 

 

  속리산의 야생화  
    
  오늘 산행 중 여러 종류의 야생화를 만났습니다. 밤치에서 문장대로 오는 길목에는 원추리, 말나리, 바디나물, 산수국 등이 아름답게 피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문장대에서 천황봉에 이르는 곳에는 말나리가 등산로 곳곳에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으며 산꿩의 다리와 산수국도 보였습니다. 


  천황봉에서 피앗재에 이르는 길에도 원추리가 지천으로 피어 동반자가 되었으며 도라지꽃도 목격되었습니다. 그리고 등산로 전 구간에 걸쳐 철이 지난 까치수영이 끝 부분만 꽃을 남긴 채 시들어 가고 있었습니다.  

 

                                                          원추리

 

                                                      말나리

 

                                                       산수국

 

                                                         바디나물

 

                                                       산꿩의 다리

 

 

  더덕에 담근 술

 

  귀경길의 버스안에서 필자의 맞은편 자리에 앉은 O대장이 산행 중에 채취한 더덕을 꺼내 빈 소주병 두 개를 들고 뿌리를 다져 부드럽게 하더니 큰 물병에 집어넣고는 소주를 붓습니다. 그리고는 팔이 아플 정도로 한참동안 흔들어서 소주의 색깔이 뿌옇게 변하자 앞에서부터 한잔씩 돌리기 시작합니다.


  소주에 더덕을 넣으면 별로 취하지 않는다는 유혹에 한잔 마셔보니 생각보다는 더덕의 향내가 거의 없고 맛도 소주 그대로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확실히 취하지는 않은 것 같아 두 번째로 잔이 돌아올 때 한잔을 더 마십니다. 예로부터 공짜라면 양잿물도 마신다는 속담이 있듯이 몸에 좋다는 더덕 술을 보고는 그냥 지나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집에 도착해 거울을 보니 눈동자가 많이 충혈되어 있고 얼굴의 색깔도 붉어져 있습니다. 더덕에 홀려 술이라는 것을 잠시 동안 망각하고 두 잔이나 마신 것은 술을 잘 하지 못하는 나의 실수였던 것입니다.


  무더운 여름날 결코 만만하게 볼 수 없는 백두대간 속리산 구간(15.5km)을 무사하게 통과한 것을 보람으로 느끼면서, 한 밤중에 아내가 차려주는 국수그릇과 마주 앉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