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리산 산행기 (060114)

  

   드디어 남편이 일주일 내내 노래를 부르던 속리산(사실은 겨울 산행의 백미라 할 수 있는 한라산과 덕유산도 함께 노래를 불렀으나 여건상 가장 쉽게 갈 수 있는 곳이 속리산이다) 산행을 감행하기로 하였다.

  

   대전 동부터미널에서 6시 30분 첫차를 타고 잠깐 깊은 잠속으로 빠져들었는데 어느덧 버스는 속리산 주차장에 서 있다. 어제 내렸던 비는 그쳤으나 사방은 안개로 자욱하다. 그 자욱한 안개 속에서 희미하게 속리산의 그림자가 보인다. 그 그림자를 보면서 걷다보니 속리산 입구 매표소다.

   

   속리산(俗離山)은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과 괴산군, 경북 상주시 화북면에 걸쳐 있는 높이 1,058m의 산으로, 최고봉인 천황봉(天皇峰)을 중심으로 비로봉(毘盧峰 : 1,032m),  문장대(文藏臺 : 1,054m) 등 9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어 구봉산(九峰山)이라 불렸던 적도 있었다고 한다.

   

   속리산이라는 이름과 관련해서는 신랑 헌강왕 때 고운 최치원이 이곳에 와서 남긴 “道不遠人 人遠道 山非離俗 俗離山(도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는데 사람은 도를 멀리 하고 산은 속세를 떠나지 않으나 속세는 산을 떠나는구나)”라는 시구가 유명하다. 과연 대문장가 다운 절묘한 표현이다.

   

   오늘의 코스는 <주차장 → 법주사 → 세심정 → 천황봉 → 문장대 → 상주 화북> 으로 모두 15km에 이르는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속리산 종주코스라 할 만한다.

   

   입구에서 법주사까지는 여느 절과 마찬가지로 잘 생긴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는 예쁜 산책로다. 나이를 많이 먹은 아름드리 나무들 사이로 걷다보면 마치 세월을 거슬러 과거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는 착각에 빠지곤 한다. 그런 착각에 빠져있는 사이 어느 틈에 법주사다. 법주사 경내로 들어가기 위하여 계곡 사이로 가로 놓인 다리를 건너다보니 오른 쪽 계곡 아래에 무수히 많은 돌탑들이 놓여 있다. 어느 누가 얼마 동안 쌓은 것인지 넓은 계곡 빼곡히 키 작은 돌탑들이 빈틈없이 쌓여져 있다. 얼마나 간절한 바람으로 저 돌탑들을 쌓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자 저절로 숙연해진다. 마치 그 바람이 내 가슴 속으로 스며들어오는 것처럼. 

 

(법주사 입구 계속의 돌탑)  

  

   법주사에서 세심정까지도 여전히 길이 넓고 좋다. 오른쪽으로 계곡이 계속되는데 마치 이른 봄처럼 푹한 날씨 때문에 얼음 밑으로 녹아 흐르는 물소리가 청아하다. 어쩌다 동행이 된 어린 대학생들의 맑고 고운 목소리들이 그 물소리와 섞여 저절로 기분이 좋아진다. 

  

   세심정에서 길은 두 갈래로 갈려 왼쪽으로 가면 문장대, 오른쪽으로 가면 천황봉이다. 문장대까지는 전에 한 번 가본 적이 있는데 오늘은 예정한 대로 천황봉으로 가는 오른쪽 길을 택한다. 천황봉까지는 길고도 먼 길이다. 그래도 뭐랄까, 산이 험하다거나 경사도가 심하지 않아 그렇게 괴롭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오르다가 가끔씩 뒤를 돌아보면 자욱한 안개 속으로 멀리 산의 형상이 희미하게 보일 뿐, 사방으로 시야가 꽉 막혀 버렸다. 아무리 걸어도 안개가 걷힐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중간에 눈길이 나타나 아이젠을 하고 계속 올라 천황봉을 바로 눈앞에 두었을 무렵, 앞서 가던 남편이 갑자기 탄성을 내지른다. 갑자기 눈앞의 나무들이 아주 가느다랗게 눈꽃 같기도 하고 얼음꽃 같기도 한 것들을 줄기마다 매달고 있다. 뭐랄까. 가지들을 시럽에 담갔다가 뺀 것 같다고나 할까. 분명 눈꽃은 아니다. 잠시 눈꽃으로 착각했던 남편은 이내 이것이 상고대라고 한다.

  

(안개 속에 보이는 천황봉, 그리고 상고대)


   천황봉 주변은 온통 상고대다. 자욱한 안개 속에 피어있는 상고대의 몽환적인 모습,  그 모습 속에 1,058m라고 표시한 천황봉 표지석이 그저 무심하게 서 있을 뿐이다. 주위는 더욱 짙어진 안개로 어디가 어딘지 전혀 가늠할 수가 없다.


   이제 문장대 쪽으로 길을 잡는다. 남편은 저녁에 대전에서 약속이 있다면서 서둘러 하산해야 시간을 맞출 수 있다고 하더니 그 때부터 펼쳐지는 상고대의 장관에 정신을 빼앗겨 시간 가는줄 모르고 자꾸 걸음을 멈춘다.

 

 

 

 

 

(천황봉에서 문장대까지 펼쳐지는 은빛 물결)

  

   처음에는 아주 엷게 나타난 상고대가 문장대 가까이 갈수록 더욱 진해지고 아름다워진다. 남편은 연신 감탄에 또 감탄을 거듭한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남편이 무척 낭만주의자란 생각이 든다. 나 또한 이런 풍경은 처음이다. 그러던 어느 순간 안개가 한 쪽으로 몰려가더니 온 산이 환해진다. 그리고 꿈결 같은, 아니면 어느 크리스마스 카드에서 본 것 같은 환상적인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문장대가 가까와지자 안개는 걷혀가고)

  

   언젠가 어느 책에서 ‘인생은 언제나 예측불허, 그래서 인생은 더욱 큰 의미를 갖는다’라는 문구를 읽은 적이 있다. 물론 이는 인생에서 의도하지 않았던 뭔가 곤혹스런 만남을 의미한 것이긴 하였지만, 바로 이런 순간, 아무도 예측하지 않은 이런 풍경을 만난 이 순간에도 딱 들어맞는 문구인 것 같기도 하다. 그저 그런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우리 인생에서 이런 아름다움의 극치라 할 수 있는 색다른 풍경과 만날 수 있어 인생이 그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 풍경에 잔뜩 취하여 어질어질한 상태로 문장대까지 간다. 문장대에 이르니 올려다 보이는 문장대도 상고대에 휩싸여 한 폭의 그림이다. 그 그림 속에 왁자지껄하게 소란스러운 사람들도 그대로 그림이다. 문장대 휴게소에 들어가 국수 한 그릇씩을 먹고 나오니 어느새 해까지 뜨고 파란 하늘도 드러나 있다.

  

(상고대에 둘러싸인 문장대의 모습)

  

   가파른 계단을 올라 문장대에 올라선다. 우리가 오늘 거쳐온 천황봉, 비로봉, 신선대가 차례로 펼쳐져 있다. 문장대는 3번 오르면 극락에 갈 수 있다는 속설이 있는 곳인데, 원래 하늘 높이 치솟은 바위가 흰 구름과 맞닿는다 하여 운장대(雲藏帶)라 하였으나 세조가 이곳에서 글을 읽었다고 하여 문장대로 바뀌었다고 한다.

  

   산의 정상은 천황봉이지만 사람들은 문장대를 더 좋아하는 것 같다. 언제나 이곳에는 사람들로 분주하다. 사방을 둘러보니 과연 한국8경의 하나라는 이름답게 절경이 펼쳐진다. 어느 한 곳 하나 버릴 곳이 없는 혼자보기 아까운 풍경들이다.

  

 (문장대에서 바라본 천황봉)

 

   문장대 휴게소에서 화북까지의 하산길은 돌계단이 많고 군데군데 아직 눈이 있어 미끄러웠지만 아기자기하고 예쁜 길이다. 나는 듯이 내려오니 시어동 매표소, 이것으로 오늘 산행은 끝났다. 산행이 끝났지만 아직도 내 마음은 천황봉과 문장대 사이의 은빛 상고대 물결을 따라 꿈결 속에 걷고 있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