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백산

2012년 2월 11일(토)

 

희방사 - 연화봉 - 비로봉 - 비로사

 

겨울만 되면

날 오라 하고

또 찾아 가게 되는 산

소백산

 

36년 전 1976년 1월 말

처음 겨울 소백산을 찾은 후

거의 매년 겨울이면 찾아 간

소백

 

내게 소백은 하얗다.

 

 

희방폭포 앞 옛 식당 있던 자리. - 희방폭포 옆으로 오르던 길이 폐쇄되고 이길로 올라야 함

 

희방폭포 - 우측으로 오르던 길은 폐쇄 됨

 

 

연화봉 정상

 

연화봉에서 바라 본 제 1 연화봉과 비로봉

 

 

연화봉에서 바라 본 천체관측소와 제 2 연화봉(새로운 시설이 들어 서고 있음)

 

 

 

 

 

 

 

 

 

 

삼가동과 금계호

 

 

 

비로봉

 

 

 

 

비로봉과 주목 군락지(좌측)

 

 

연화봉-비로봉 능선

 

비로봉 정상

 

어의곡과 국망봉 가는 길

 

비로봉-국망봉 능선

 

 

비로사 길로 내려서며 올려다 본 비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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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백산 1976

 

부산 울산에서는 겨울이 되어도 눈이 거의 오지 않아

눈 덮힌 산을 오를 수가 없었다.

 

1976년 1월 말 어느 토요일

청량리행 야간열차를 타고 일요일 새벽 1시 반쯤 풍기역에 내렸다.

역 앞 여인숙에서 나온 여러명의 아줌마 호객꾼들,

1인당 5백원씩 방 하나 2천원 주고 들어가 잠시 눈을 붙인다.

 

5시 반 일어나 역앞 식당에서 돼지국밥으로 아침을 먹고

희방사역(지금의 소백산역)까지 비둘기호를 타고 갔다.

6시 조금 넘은 시각, 희방사역에 내려 바라 본 마을 수철동

아직 어둠에 잠겨 너무나 고요하다.

마을과 들판을 가로 질러 희방계곡으로 오른다.

따라서 소백산 등산은 희방사역에서 시작되었다.

 

상점과 식당들(가끔씩 이 식당에서 식사 하기도 함)이 있는 입구(지금은 철거되어 위 주차장으로 사용)를 지나 희방폭포 앞 식당가(지금은 철거 되고 없음)를 지나면 본격적인 소백산 산행이 시작된다.

지금과 같은 아무런 시설이 없이 가파른 곳에서는 여지없이 미끄러지고 뒹군다. 연화봉에서 비로봉까지 이 길로 가면서 만나게 되는 등산객은 겨우 10-20명 정도이다. 일기가 나쁘면 거의 없다.

 

겨울등반 코스는 희방사, 비로사 코스가 일반적이고, 국망봉까지 가는 등산객은 거의 없었다. 우리는 희방사-연화봉-비로봉-국망봉-초암사를 즐겨 탔었는데 비로봉-국망봉 코스는 항상 럿셀을 해야만 했다.

 

단양쪽 코스(천동리코스,어의곡코스)는 당시 신단양이 생기기 전이라 구단양에서 고수동굴까지는 도로가 있었으나 천동굴(1977년 발견)은 발견과 개발 전이라 도로 사정이 좋지 못하고 대중 교통이 없어 천동리 접근이 어려웠다. 어의곡 코스는 어의곡리로 접근 할 수가 없었다.

설사 연화봉-비로봉-국망봉 능선상에서 천동리나 어의곡으로 코스를 찾아 내려간 들 차가 없어 구 단양(지금의 신단양이 아님)까지 갈 방법이 없었다.

따라서 그 당시 소백산 등산 코스는 단양쪽 보다는 풍기쪽에 있었다.

* 혹시 이 당시에 천동리나 어의곡쪽으로 동계에 소백산을 오르신 분은 글을 남겨 주시길...

 

그런데 사실 초암사나 비로사로 내려와도 큰일이다.

 대중교통이 불편해 초암사로 내려오면 배점리를 거쳐 순흥까지 걸어야 하고, 비로사로 내려오면 풍기까지 걸어야 했다. 버스는 거의 기대하지 않았다.

 

칼바람!!

너도나도 소백산 산행기에 칼바람 맞았다는 이야기를 올려 놓는다.

나도 칼바람을 많이도 맞아 봤지만 이건 아무것도 아니다.

폭설에 칼바람이 더해지면 이건 최악이다.

1978년인가 79년인가 연화봉에서 비로봉으로 가다 만난 폭설과 칼바람은

만들어져 있던 등로를 완전히 눈으로 묻어 버렸다.

이런 날씨에 등산객은 완전히 제로,

얼굴과 온 몸에 세차게 퍼 붓고 내려치는 폭설과 칼바람의 눈보라 속에서

길 찾기와 럿셀을 해 나가느라 이건 지옥이었다.

지금 같으면 기상청을 통해 위성사진, 산악기상을 확인하고 스마트폰으로 일기를 알고 가지만 당시는 이런 건 없었다.

중간에 탈출 할 수도 없어 비로봉까지 가서 비로사로 하산 할 수 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