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서산 산행기(051022)

 

어제는 너무나 피곤해서 늦게 귀가한 남편을 반길 새도 없이 그저 쓰러져 잠이 들었다. 아침에 누군가 얼굴을 살살 건드리는 느낌에 잠을 깨어 보니 남편이 휴대폰 줄로 간질이고 있다. 깨어 보니 8시. 오늘은 아이들도 모두 학교를 쉬는 날이라 마음 놓고 늦잠을 자고 싶었는데 길이 멀다면서 빨리 일어나라고 재촉한다.

원래는 맹구 삼남매를 모두 데리고 갈 생각이었으나 맹구와 맹순이는 학원을 가야한다고 거부하고, 형과 누나가 가지 않겠다고 하자 누워서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리던 막내도 가고 싶지 않은 눈치다. 남편도 오늘은 산이 높다면서 그냥 두고 가자고 하여 결국 우리 둘만 출발하였다.


   오늘의 목적지는 충남 보령시 청소면, 청라면과 청양군 화성면 그리고 홍성군 광천읍, 장곡면에 걸쳐 있는 오서산이다. 오서산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100대 명산에 드는 산으로 가을에 억새로 유명한 곳이다. 그 전부터 남편은 오서산에 가자는 소리를 수십 번 쯤 했는데 드디어 오늘 갈대맞이를 하러 가게된 것이다. 

  

   불타오르는 가로수들 사이로 유성을 지나 계룡산 입구 박정자 삼거리를 지나면 이내 금강을 왼쪽으로 끼고 공주시로 향한다. 언제나 이 도로를 지나면서 가지는 느낌이지만 공주를 끼고 도는 금강은 마치 서울을 흐르는 한강과 닮았다. 하지만, 한강은 이미 너무나 많은 건물과 사람을 양쪽 어깨에 짊어지고 힘들어 하고 있음이 역력하지만 아직 공주를 흐르는 금강은 그렇지 않다. 적당한 사람과 적당한 건물을 어깨에 메고 여유로움과 풍요로움을 간직한 채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오늘도 어제처럼, 그리고 내일도 오늘처럼.

  

   여러 상념에 빠져있는 사이 청양을 지나고 출발한 지 2시간이 못되어 광천읍 상담마을 오서산 입구 주차장에 이르렀다. 넓은 주차장에는 벌써 승용차가 꽉 차있고, 관광버스 2〜3대까지 주차되어 있다. 여기 저기 산을 오를 준비를 하는 등산객들 사이에는 단체산행을 온 듯한 일행들도 많이 있다. 누군가는 산행을 할 때 주차장에 있는 차량이 적으면 아주 기분이 좋다고 하였는데. 아, 오늘은 주말의 계룡산처럼 남들 엉덩이를 밀고 올라가는 산행이 될 지도 모르겠다는 불안감이 엄습한다.


   주차장 입구에 커다란 등산로 안내도가 서 있다. 오늘의 산행코스는 <상담마을 주차장→정암사→정자→정상>으로 하고 하산은 갔던 길 그대로 내려오는 것이다. 주차장 가에 저마다 생강(아마 생강을 주로 재배하는 모양이다), 골파, 당근, 감 등을 벌여놓고 죽 늘어선 시골 할머니들 사이를 지나 도랑 위에 철골로 만든 좁은 다리를 건너 마을길을 따라 휘돌아가니 바로 오서산으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정암사 바로 밑 삼거리까지는 완만한 언덕길이다. 사람들의 숫자가 벌써 만만치가 않다. 아마도 가을 억새를 즐기러 온 사람들이리라. 금방 쉰질바위 가는 길과 정암사 가는 길로 갈라지는 삼거리에 닿았다. 그곳에서 우측으로 정암사까지는 콘크리트로 포장이 된 넓은 길인데 경사가 너무 심하다. 원래 오르막길에 약한데다가 오늘따라 몸이 심하게 좋지 않아 올라가는 것이 힘겹다. 하는 수 없이 지그재그로 걸어 보았다. 어릴 적 언덕길을 자전거로 오를 때 써먹던 수법이다. 지그재그로 오르니 힘이 훨씬 덜 든다. 그렇게 한 발, 한 발 천천히 오르니 정암사다.

  

   정암사는 아주 자그마한 소박한 절이다. 비구니 사찰로 백제 무왕 때 창건된 유서 깊은 절이다. 주위의 아름드리 느티나무 고목은 절의 역사를 증언하는 듯 높고 크다. 본당은 극락전. 아마도 석가모니를 모신 집은 아닌 모양이다. 물이라도 한 잔 마시고 싶었는데 마땅한 약수도 보이지 않는다. 극락전 앞 안내판에는 우리나라 산 중 ‘북쪽에는 묘향산, 동쪽에는 금강산, 서쪽에는 구월산, 남쪽에는 오서산‘이라고 누군가 오서산을 아주 크게 평가하였다고 기재되어 있다.


   원래 오서산(烏棲山, 790.7m)은 말 그대로 옛 부터 까마귀와 까치가 많아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하지만 요즘 산행에서는 까마귀를 찾아보기 힘들다고 하는데 실제로 오늘도 까마귀는 단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또한 오서산은 백두대간 금북정맥이 서해안에 가까워지면서 곧 바다 속으로 가라앉아 버릴 것처럼 낮아졌다가 서해안 바로 옆에서 치켜세운 고봉으로 이런 까닭에 ‘서해의 등대’라고 불려지기도 한다.


   정암사에서 나와 다시 등산로로 접어든다. 정암사에서 능선으로 빠지는 등산로는 절벽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다. 그 길을 돌아서니 까마득하게 펼쳐진 좁은 급경사 오르막길이 우리를 기다린다. 길은 좁고 경사는 심하고 사람들은 줄을 지어 몰려오고. 나처럼 오르막길을 힘겨워하는 사람에게는 최악의 산행길이다. 혼자서 한 발 한 발 내딛는 것도 힘겨운 일인에 뒤에서 끊임없이 사람들이 밀려올 때는 숨마저 턱턱 막히는 느낌이다.

어쩔 수 없이 간간히 한쪽으로 나무를 안고 비켜선 자세로 쉬면서 올라갈 수밖에 없다. 길은 오르막길이 죽 이어지다가 중간에 10여m 정도의 평탄길이, 다시 오르막길이 죽 이어지다가 다시 그 정도의 평탄길이 있는 식으로 되어 있다. 마치 거인을 위해 만들어 놓은 계단과 같다고나 할까? 이렇게 서너 번을 되풀이 하다가 어느 틈에 시야가 탁 트이면서 바위가 나타나고, 그 위로 산 위에 연필로 한 줄 죽 그은 듯한 긴 능선이 나타난다.


   바위 위에 올라서서 산 아래를 내려다보니 멋진 풍경이 기다리고 있다. 지금까지 오르막길을 오르느라 흘렸던 땀방울들이 나를 기다리는 저 능선길과 아래쪽에 펼쳐진 풍경으로 모두 다 보상을 받는 느낌이다.


   산 아래 쪽으로는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세상이 다 보인다. 집들과 들판과 강과 다리와 저수지, 그리고 저 멀리 흐릿하게 서해바다까지. 무엇보다 손을 올리면 바로 닿을 것 같은 시리도록 푸른, 오늘따라 구름조차 한 점 없는 저 가을하늘까지. 순간 ‘아! 이래서 이 산이 명산이라는 거구나!’하는 깨달음이 든다. 게다가 저 위에는 억새군락이 기다리고 있기까지 하다는 것이 아닌가!

  
 

(오서산에서 바라본 푸른 하늘과 서해바다, 들판, 그리고 마을)

 

   마지막 힘을 내서 열심히 올라가니 기대하던 능선길이다. 그런데 그토록 기대하던 억새는, 뭐랄까. 나는 너무 억새에 환상을 가졌었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봄에 계룡산 입구에 분분히 떨어지는 벚꽃 잎 같은 그런 분위기를 상상했었는지도 모르고. 아무튼, 잠깐 동안의 실망감이 스쳐지나갔지만 그곳에 억새는 있다. 상상했던 것보다 키가 작고 그 수도 적었지만, 아쉬운 대로 정상까지의 약 1km 남짓한 등산로 양쪽으로 계속 억새의 연속이다. 그리고 저쪽으로 보이는 바다를 향해 내리뻗은 산등성이 양쪽으로 이제 막 물이 오르기 시작한 단풍이 수줍은 새색시처럼 기다리고 있다.

  

   양쪽으로 들판을, 한쪽으로는 바다까지 내려다보면서 능선을 걷는다. 이곳에는 바람조차 머무는 듯, 올라올 때의 차가운 기운마저 사라지고 따뜻한 햇볕만 남았다. 잠시 잠깐의 실망감은 어느새 사라지고 행복이 억새들과 함께 밀려온다. 마치 새가 되어 하늘을 날고 있는 기분이다. 사람들도 모두 얼굴 한가득 행복을 담고 있다. 

  
 
 
(춤추는 억새, 그리고 바다)

 

   이 멋진 장면을 음미하기 위하여 정상까지 천천히 걸어간다. 정상에는 표지석이 두 개나 있다. 표지석과 함께 사진을 찍기 위하여는 한참 순서를 기다려야 할 정도로 사람들이 많다. 정상을 지나 설명도가 있다는 곳까지 걸어갔으나 설명도는 사라지고 없다. 이곳에 서면 멀리 가야산과 칠갑산, 성주산도 시야에 들어온다는데 설명도 없이는 어디가 어딘지 전혀 가늠할 수 없다. 다만 어림으로 짐작할 뿐.

  

   그 부근 억새 풀밭으로 들어가 앉아 서해바다를 내려다보면서 푸른 하늘을 머리에 이고 점심을 먹는다. 흘린 땀의 양에 맞는 적당한 피로감과 눈 아래 펼쳐진 저 멋진 풍경에 취하여 그저 말없이 앉아만 있어도 기분이 그만이다. 아마 이런 행복감 때문에 산에 오르는 것은 아닐까?

  

   이제 발을 돌려 하산할 때다. 다시 정상을 지나 오서정 못미치는 곳에 쉰질바위 쪽으로 가라는 표지판이 있다. 처음 계획을 수정하여 쉰질바위 쪽으로 길을 잡는다. 그런데 올라온 길은 진짜 산길이었는데 이 길은 누군가 일부러 잘 닦아 놓은 넓은 임도다. 아주 좋은 산인데 무슨 쓰임새가 있어 닦아 놓은 길인지는 몰라도 어쩐지 이 길로 인하여 산의 품격이 아주 많이 손상되어 버린 느낌이다. 이런 임도가 구불구불 끝도 없을 것처럼 이어진다. 아주 빠른 속도로 내려오니 그 길과 다른 임도가 연결되는 삼거리가 나온다. 왼쪽으로 길을 잡고 다시 내려온다. 가다 보니 왼편으로 오서정에서 내려오는 산길이 연결되어 있다. 이제껏 지루하고 긴 임도를 따라 내려온 우리는 순간 차라리 저 산길로 내려올 걸 하는 생각도 하였다.


   한참을 더 가니 임도 오른쪽으로 상담마을 주차장 쪽으로 갈 수 있다는 이정표가  있고, 우리 앞서 가던 많은 사람들이 잠시 우왕좌왕하더니 이내 그 길로 내려간다. 우리도 임도를 버리고 그 길로 들어섰다. 그런데 그 길은 좁고 급경사의 내리막길이다. 임도에서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 줄 몰랐는데 좁은 길로 들어서서 한 줄로 내려가다 보니 제법 사람이 많다. 중국 사람들도 있고, 중학생들도 여럿 있다.


   우리 바로 앞에는 중국 사람들이 계속 큰소리로 떠들고, 저 앞 쪽에는 중학생들이 끊임없이 비명을 지른다. 급경사의 길은 미끄럽기만 하고 자칫 한 눈을 팔기만 하면 넘어질 판이다. 실제로 넘어지는 사람도 있다. 다리에 힘을 잔뜩 주고 한 발 한 발 긴장한 상태로 걸어야 하는데다가 마치 벙어리가 버버거리는 소리 같은 중국사람들의 말소리에 중학생들이 지르는 소리까지 합쳐져 정말로 정신이 하나도 없다.

  

   그런데 그렇게 정신없이 내려와 보니 금방 마을 입구다. 하산이 싱거워지는 순간이다. 다시 집집마다 생강이며 당근 등을 내놓고 팔고 있는 그 마을을 지나 주차장으로 돌아온다.   


   오늘의 산행은 억새를 보려는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그야말로 정신없이 한 산행이었다. 11월부터는 산불예방을 목적으로 오늘 우리가 오른 길은 입산통제가 되는 모양이다. 그래서 오늘 북새통이었겠지.

오서산은 최근에 우리가 간 산 중 지명도가 제일 높은 산이다. 산도 좋고 바다도 좋고 하늘도 좋고 억새도 좋았다. 몸이 다소 좋지 않았지만 산에서 내려오니 가뿐해졌다. 산이 나에게 준 치유라는 선물이다. 이런 행복감으로 일주일을 또 열심히 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