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 삼정산 7암자를 찾아서

<2006.8.20. 흐리고 가끔 비. 靑山>  

 경남 함양시 마천면과 전북 남원시 산내면의 도경계를 이루는 연하천 삼각고지부터 실상사가 위치한 남원시 산내면까지 이어진 이 능선에 3개의 사찰과 4개의 암자가 있다. 이 능선은 삼정산을 품에 안고 길게 능선으로 뻗어 내려 백무동 계곡의 물과 합수되고 뱀사골에서 내려온 물줄기와 함께 임천강을 이룬다.

 7암자를 찾는 첫 걸음은 실상사인데 왕방울만한 눈과 큰 코가 해학적인 목장승과 석장승이 반겨준다. 둥그렇게 튀어나온 눈이 일품인데 이 지방에서는 벅수라고 부른다. 재물과 건강을 염원하여 세워졌다고 한다.

 실상사는 증각대사 홍척(洪陟)이 당나라에 유학 갔다가 자장율사의 문하에서 선법을 배운 뒤 세운 절이라 한다. 호국 사찰로 국보 1점과 보물 11점을 보유하고 있다. 일본이 흥하면 실상사가 망하고 일본이 망하면 실상사가 흥한다고 하는데 보광전 안에 있는 범종의 일본 열도 지도 얘기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실상사 3층 석탑>

 

 신라 흥덕왕 3년(828년) 흥척국사가 개창한 최초의 선종 가람이다. 창건 초에는 지실사(知實寺)였으나 구산선문이 분파 대립되던 시기에 하나의 종파 이름으로 홍척의 존칭인 '실상선정국사'의 앞머리를 따서 실상사라 부르게 되었다. 창건 당시에는 웅장하고 화려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나 지금은 대부분 불타고 요사 1채와 전각 3동만 남았는데 증축 공사가 한창이다.

 약사전에 있는 여래불이 천왕봉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으며 그 너머로는 일본 후지산이 일직선상에 놓여 있다고 하니 극일 사상을 불어 넣기 위한 선조들의 민족혼을 느낄 수 있다.

 보광전 앞의 두 기의 3층 석탑은 처마의 풍경과 어울려 삼정산과 절묘하게 어울려 가람의 배치를 안정되게 한다. 두 탑은 보물 37호로 지정되어 있다.

 수철화상 능가 보월탑과 탑비는 보물 33호와 34호인데 극락전 오른쪽에 서있는 탑인데 수철화상의 사리를 모셔 놓았다고 한다.

 철제여래좌상의 특징은 광배가 없고 좌대도 없다. 일설엔 일본으로 흘러가는 땅의 기운을 막기 위해 도선국사의 풍수지리설에 따라 일부러 맨땅에 불상을 세운 것이라고도 전해 오며, 나라에 좋은 일이 있을 때면 땀을 흘린다고 한다.

 

                                         <석등>

 

 보광전 앞에는 아름다운 석등이 서 있는데 보물 제 35호이다. 계단을 올라 보광전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한 것이 특이하다.

 실상사의 배치는 너무도 자연 친화적인데 해우소와 부도 그리고 옛기와로 쌓은 돌무더기와 연못이 별로 꾸미지 않은 모습으로 들판에 위치하여 수수함을 느끼게 한다.

 


 

<약수암>

 

 삼정산 능선을 따라 오르지 않고 산길과 임도를 통하여 조금 가면 약수암을 만난다. 보물 제 421호인 약수암 목조 탱화를 보유하고 있는데 나무에 불상을 조각하여 만든 탱화이다. 정조 6년 제작한 것으로 원만한 불사의 보습과 배치 구조, 정교한 세부 조각들이 조선후기 목조탱화의 기준이 되는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된다고 한다. 누각 옆에는 약수가 솟는데 그래서 약수암이라 지어진 이름이며 1937년에 한 불자에 의해서 중수되었다.

 가람의 위치와 탱화 보관 건물이 너무도 주변 경관과 잘 어울려 멋있다. 본래 암자란 큰 절에 소속된 규모가 작은 절을 말하고 암자의 스님을 암주나 감원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구름과 안개에 묻힌 약수암의 넓은 터가 안락하고 대나무 숲의 정취가 지리산 계곡에 묻힌 암자를 찾는 나그네의 발길을 붙잡는다.

 쉼 없이 솟아나는 약수를 조롱박으로 한 모금 마시며 하릴없이 짖어대는 멍멍이가 적막을 깬다.

 약수암을 지나 도마 마을을 가는데 고사리 밭과 수수, 호박 넝쿨, 옥수수, 결명자차 등이 평화로운 시골 정취를 듬뿍 보여준다.

 고즈넉한 시골길을 걸으며 구름에 가린 삼봉산과 백무동 계곡을 가끔씩 바라본다. 인간이 산에 묻히면 많은 상념과 시름을 잊고 살 수 있다는데 그것은 산이 주는 무한함과 세속을 떠날 수 있는 자연의 품이기 때문인지 모른다.

 지리산은 민족의 기상과 애환이 서린 곳이며 우리 역사에 비극적인 빨치산의 흔적이 묻혀 있는 곳이다. 그들이 은신했던 산죽비트, 바위비트, 굴 비트가 곳곳에 위치해 있다. 당대의 고승 109명이 도를 닦던 영원사와 상무주암, 문수암, 삼불사로 이어지는 등산로는 천왕봉과 임천강을 바라볼 수 있는 천하절경의 조망터이다.


 

<삼불사>

 

 경사가 심한 산길을 올라 다다른 삼불사(三佛寺)는 비구니 사찰로 토굴이라 불리는 토담집과 법당 그리고 산신각이 있다. 천왕봉을 바로 조망할 수 있는 곳에 위치하며 전방이 확 트여 심신수련암자로는 제격인 듯하다.

 스님이 내 놓은 삶은 감자에서 인정미를 느끼고 절집을 지키는 사나운 멍멍이의 컹컹거림이 한적한 암자의 적막을 깬다.

 슬레이트 건물과 비대칭적인 암자의 배치가 의외적으로 다가오지만 삼정산 자락 느긋한 위치에 묘향대 처럼 다가와 인상적이다.  


 

<문수암>

 

 삼불사를 지나 능선을 가로 질러 가면 바로 문수암(文洙庵)에 닿는데 삼정산 자락 1100고지에 위치해 있다. 토굴 같은 법당 뒤에는 임진왜란 때 마을 주민 1,000명을 피난시켰다는 천인굴(일명 천용굴)과 샘이 있다.

 석간수를 담아 놓은 큰 단지와 토굴에서 부는 바람으로 더위를 식힌다. 홀로 채소 재배하며 해우소를 정갈하게 관리하시는 스님의 모습이 카메라 앵글로 잡히니 암자의 모습과 너무도 잘 어울린다.

 새순이 터져 나오는 야생 당귀의 청초함에서 지리산의 자연을 느껴본다.

 문수암에서 가파른 오르막을 10분정도 가면 평탄한 길이 이어지고 고개 넘어 안부 삼거리가 나오는데 커다란 나무 그늘이 있어 오가는 산꾼들의 쉼터로 제격이다.

 


 

<상무주암>

 

 오른쪽으로 조금 더 가면 상무주암이 나오는데 수량이 풍부한 샘이 있다. 보조국사 지눌이 오랫동안 수도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상무주암의 상(上)은 부처님도 발을 붙이지 못하는 경계를 말하고 무주(無住)란 머무름이 없는 자리란 뜻이다.

 머물 곳도 없는 진리의 자리라는 너무도 난해한 법어적 문구와 수행 스님들이 나그네들을 반기지 않는 닫힌 문을 바라보며 심오한 불교적 의미에 암자를 지나친다.

 


 

<삼정산 정상표석>

 

 상무주암을 지나 오르막에서 한참 땀을 흘리면 삼정산(1,182m)에 이른다. 삼정산 능선에서 가장 조망이 좋고 고도가 제일 높은 곳이다. 구름에 묻힌 정상에서의 조망은 너무도 허전하지만 후일 다시 오리라 다짐하며 정상석을 만져본다.

 삼정산은 천왕봉에서 동서로 길게 뻗은 주능선과 만복대에서 바래봉을 지나 덕두산까지 서북릉을 포함한 지리산 전체를 모두 볼 수 있는 뛰어난 조망터이다. 흔히 북쪽 전망대라 일컬을 만치 사방이 트여 있고 시야가 좋으며 천왕봉과 서북능선을 한꺼번에 볼 수 있다.

 비티재에서 영원사로 가는 길은 평탄하고 내리막이다. 우중에 걷는 지리산 자락은 많은 숲 냄새와 야생화의 향기로 머리가 맑아진다.

 이끼와 바위손 그리고 이름 모를 야생화와의 만남은 우중에 제격이다. 선명한 자태를 뽐내는 아름다운 생명체가 있어 지리의 산길은 힘들지 않다.

 


 

<영원암>

  

 시야가 트이고 평안한 위치에 영원사가 있다. 영원사는 해발 920m에 있는데 예전에는 100칸이 넘는 큰절이었지만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다. 신라 진덕여왕 때 당시 고승이었던 영원대사(靈源大師)가 지었기 때문에 영원사라 불린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영원(靈源)이 8년간이나 수도하였으나 깨달음을 얻지 못하여 다른 곳으로 가려고 산을 내려가는데, 그 때 풀밭에서 물리지 않는 낚시로 육지에서 낚시를 즐기는 이상한 노인을 보았다. 그런데 그 노인이 풀밭에서 낚시를 하고 있는 것도 이상한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로 지껄이고 있었다.

 “2년만 더 낚시질을 하면 큰 고기가 낚일 터인데…….” 꼭 같은 말을 되풀이하며 낚싯대를 놓고 한숨을 쉬고 있었다.

 그 순간 영원은 번득 뇌리를 스치는 깨달음이 있어 다시 2년 간 더 수도하여 큰 깨달음을 얻고 절을 지었는데, 그것이 영원사였다. 후세 사람들은 그 노인을 문수보살의 화신이라고 생각하였다고 한다.』

 영원사는 여순사건 이후 반란군이 진압군에 쫓겨 절에 은거하였는데 주민들을 괴롭히자 불태워 없앴는데 1971년에 중건했다.

 재난으로 가람은 많은 유물을 갖고 있지 않다. 다만 청매스님의 방광사리탑과 조실 스님들의 부도와 각운대사의 필단사리 3층 석탑이 있다.


 

<도솔암>

  

 영원사를 지나 마지막 도솔암으로 가는 길은 힘든 오르막이다. 계곡과 바위 이끼의 미끄러운 돌길을 따라 1시간 정도를 가야 한다. 도솔암 가는 길은 지리산 능선의 벽소령으로 이어져 있고 능선을 따라가면 삼각지점의 형제봉에 다다른다.

 잘 쌓여진 돌 더미 위에 도솔암은 너무도 평안한 자세로 천왕봉을 향하여 자리를 잡고 있다. 처마에 매달린 청아한 풍경소리와 나무로 파서 만든 샘터는 운치를 더한다.

 높은 고지대여서 너무도 공기가 신선하다. 조망만 좋다면 지리의 모두를 볼 수 있다고 하는데 구름에 가린 시야가 야속하다. 절집의 주인은 암주(庵主)이거늘 주인을 알아보지 못하고 예의를 갖추지 않으니 꾸중도 당연하다. 하지만 중생의 부족한 심사를 도를 닦은 스님의 덕담으로 가르침을 주면 얼마나 좋을까?

 산에 오르면 늘 만나게 되는 암자에서 스님들과의 해후는 언제나 밝고 여유 있고 너그러워서 좋은데 지리산 삼정산 7암자를 순례하며 여러 모습의 세속을 본다.

 벼락에 맞은 돌배나무에 매달린 자연의 산물을 손에 들고 하산하며 8시간여의 발품으로 만난 7암자의 여운을 본다.

 높다란 산길에 정리해 놓은 암자 가는 길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으며 중생의 고뇌와 해탈은 거저 주는 것도 아님을 느끼게 한다.

 도솔암을 지나 삼정리로 향하는 순탄한 길은 계곡물과의 합주이다. 양정, 하정, 음정의 세 마을을 일컬어 삼정리(三丁里)라 부른다는데 너덜지대의 색다른 만남과 푸른 소나무 숲의 행복한 여정이 감미롭다. 시원한 물소리가 땀에 젖은 나그네를 부른다.

 발과 몸을 씻으니 날아갈 듯 행복하다. 비록 우중산행으로 만난 7암자였지만 지리산 자락에 묻힌 비경을 본 것은 두고두고 잊을 수 없다.

  

<암자 액자 현판>

  

* 지리산 실상사의 국보와 보물

백장암 삼층석탑

국보 제 10호

증각대사 응료탑

보물 제 38호

수철화상능가보월탑

보물 제 33호

증각대가 응료탑비

보물 제 39호

능가보월탑비

보물 제 34호

백장암 석등 

보물 제 40호

실상사 석등

보물 제 35호

철제여래좌상

보물 제 41호

살상사 부도

보물 제 36호

청동은 입사향로

보물 제 420호

삼층석탑 2기

보물 제 37호

약수암 목조 탱화

보물 제 421호

 

<7암자 순례 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