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15일 일요일

관악산 입구- 성주암- 보덕사- 약수암-관악정- 삼성산성지- 호압사-호암산 석구상- 한우물- 불영암-

뒤로돌아 삼성산주능선 -반월암 - 삼막사- 염불암-안양예술공원--보장사- 마애종

 

성주암

관악산 줄기에 세 성인이 수도하셨다는 삼성산(三聖山)내 신라 문무왕 17년(서기 677년) 원효성사(元曉聖師)께서 창건하여

 수도하셨던 곳이라 성주암이라 하고 뒷산은 (聖住山)이라 불러왔다.

고려 충숙왕8년(서기1321년)부터 6년간에 걸쳐 각진국사(覺眞國師)에 의하여 중창되었으나

이후 퇴락되어 절터와 가람의 흔적만 남아 있다가 서기 1897년 안만월(安滿月)스님이

이곳에 조그만 암지를 지어 유지되던중 서기 1966년 송혜담(宋慧潭)스님이 옛 사찰의 모습으로 복원하고자 터를 정리하여

1971년 대방(大房)의 석조건물로 세웠고

이어 현주지 종연(宗演)스님에 의해 1981년부터 3년동안에 대웅전(大雄殿)이 이룩되었다.

강당(講堂)과 승당(僧堂)및 종각(鐘閣) 건립등의 불사가 계속 추진중이다.

 

약수암

약수사(藥水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에 속해 있는 사찰로서

서울시 관악구 신림10동 318번지소재 삼성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삼성산에 위치하고 있지만, 母山인 관악산의 이름을 붙여 관악산 약수사로 부른다.)

조선조 세종대왕3년에 무명대사가 창건하였으며,

그 후 1880년(고종17년)에 명성황후가 법당을 중창하였으나 1923년 화재로 전소되어 영원대사가 중창하였으며

1998년 설법전 중창하였다. 가람의 배치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왼쪽에 응향각이 있고 정면은 설법전이 있으며

동쪽으로 삼성각이 있다. 댕웅전은 정면3칸, 측면2칸의 팔작지붕으로 법당안에는

본존불인 석가모니불과 좌우에 지장보살과 관음보살상이 모셔져 있다.

약수암 설법전은 법당의 규모가 커 수행도량으로 부족함이 없으며

삼성각앞에서의 서울시내 야경이 좋을 듯하다.

 

삼성산 성지

삼성산은 1839년 기해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한 앵베르(Imbert, 范世亨, 1796~1839, 라우렌시오) 주교를 비롯하여

모방(Maubant, 羅伯多祿, 盧, 1803-1839, 베드로) 신부와

샤스탕(Chastan, 鄭牙各伯, 1803~1839, 야고보) 신부의 유해가 안장되었던 곳이다.

삼성산의 유래 또한 설이 구구하다.

보통 원효, 의상, 윤필의 세 고승이 신라 문무왕 17년(677년)에 조그마한 암자를 짓고 수도에 정진하던 곳이 삼막사의 기원이며,

아울러 삼성산의 산명도 이 세 고승을 승화시켜 삼성산(三聖山)이라 칭했다는 설이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다.

삼성산은 1901년에 위의 세 순교자의 유해가 발굴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1970년에 사적지로 조성되었다.

1836년 이래 조선에 들어와 활동하던 모방 신부와 제2대 조선교구장 앵베르 주교, 그리고 샤스탕 신부 등 3명의 프랑스 선교사들은

기해박해가 일어나면서 앵베르 주교가 8월10일에,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가 9월 6일에 각각 자수하여

 포도청과 의금부에서 문초를 받은 후 1839년 9월 21일(음 8월 14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순교 후 선교사들의 시체는 20여 일간 새남터 모래사장에 버려져 있었는데,

그동안 신자들은 이들의 시신을 찾기 위해 여러 차례 노력하였고 몇 명의 신자들은 체포되기까지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 바오로 등 몇몇 신자들은 마침내 세 순교자의 시신을 거두어

노고산(마포구 노고산동)에 안장할 수 있었다.

이로부터 4년 뒤인 1843년에 그들의 유해는 박 바오로 등에 의해 다시 발굴되어

과천 땅이던 관악산의 한 줄기인 박씨 선산에 안장되었는데, 이곳이 곧 지금의 삼성산이다.

이때 신자들은 훗날을 위해 그 이장 연도와 세 순교자의 이름을 아직 마르지 않은

회 반죽에 글을 써서 자연스럽게 마르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

1886년경에 시복 판사를 맡았던 푸아넬 신부가 이 무덤을 확인하였고

 1901년 10월 21일에는 제8대 조선교구장 뮈텔(Mutel, 閔德孝, 1854~1933, 아우구스티노) 주교가 지켜보는 가운데

유해가 발굴되어 용산 예수 성심 신학교로 옮겨졌으며,

같은 해 11월 2일에는 다시 명동 성당 지하 묘지로 옮겨지게 되었다.

명동 대성당 묘역 안에 남아 있던 성인 유해 일부를 다시 삼성산으로 가져와 무덤 안에 안치하였다.

이들 3명은 1857년에 모두 가경자로 선포된 데 이어 1925년에는 복자품에 올랐으며,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호압사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본사인 조계사의 말사이다.

1407년(태종 7) 왕명으로 창건되었다. 당시 삼성산의 산세가 호랑이 형국을 하고 있어서

과천과 한양에 호환(虎患)이 많다는 점술가의 말을 듣고 산세를 누르기 위해 창건하였다고 한다.

 호갑사(虎岬寺) 또는 호암사(虎巖寺)라고도 하였다.

 조선 후기까지의 연혁은 거의 전하지 않고,

다만 1841년(헌종 7) 4월에 의민(義旻)이 상궁 남(南)씨와 유(兪)씨의 시주를 받아서 법당을 중창한 기록이 있다.

1935년 만월(滿月)이 약사전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건물로는 약사전과 요사가 있고, 약사전 내에 약사불과 신중탱화가 모셔져 있다.

 

 삼막사

신라시대에 원효·의상 스님 및 윤필 거사 등 세 분의 성인이 창건한 삼막사는

그 뒤로도 9~10세기에 도선 국사가 머물면서 절의 터전을 더욱 굳건히 하였다.

고려시대 말 조선시대 초에 이르러서 지공·나옹·무학 등의 세 고승에 얽힌 사적이 전하고 있으며,

당시 서울 외곽 지역의 4대 사찰 가운데 하나로 꼽힐 정도로 비중있는 사찰이었다.

최근에 와서는 금당인 육관음전에 여섯 분의 관음보살상을 봉안하는 등 관음신앙을 현양하고 있다.

2003년 11월 18일에는 전 조계종 총무원장 정대(正大) 스님이 이곳 월암당에서 입적하였다.

금당인 육관음전에 봉안된 육관음상은 다른 사찰에서는 잘 보기 어려운 존상이므로

참배와 더불어 법당 안에 마련된 각각의 설명문을 눈여겨보는 것이 좋다.

경내 뒤쪽의 언덕에 고려시대에 세운 삼층석탑이 있다.

현재 삼막사에서 가장 오래된 유물인데, 나무에 가려 쉽게 눈에 띠지 않으므로 주의 깊게 보아야 한다.

종두법을 시행한 지석영의 형인 지운영이 이곳에 머물 때 꿈에 관음보살을 본 뒤 새긴 삼귀자 석각은

 월암당 옆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 가면 있다.

삼귀자 석각을 지나서 가면 조선시대 후기에 봉안한 마애삼존불상이 모셔진 칠보전이 있다.

 마애불은 조선시대 후기에서는 그다지 흔하게 조성되지 않았으므로, 당시 마애불상의 좋은 자료가 된다.

 칠보전 옆에는 남녀근석이 있다. 이를 통해 우리나라 재래 민속신앙의 한 면을 볼 수 있다.

 

 염불암

 936년(고려 태조 19) 태조 왕건(王建)이 창건하여 안흥사라고 했다.

태조는 후백제를 정벌하기 위해 남쪽으로 내려가던 중에 산 한켠에서 오색 구름이 영롱히 피어 오르는 것을 보고

사람을 보내 살피게 했는데, 도승(道僧) 능정(能正)이 좌선삼매에 들어 있었다.

그 뒤 태조는 능정의 법력(法力)을 흠모하여 이 절을 창건했다고 한다.

1407년(태종 7) 한양의 백호(白虎)에 해당하는 관악산의 산천기맥(山川氣脈)을 누루기 위해

 태종의 명으로 몇몇 절을 중창할 때 이 절도 함께 중창했다.

1857년(철종 8) 청조 도인(淸造 道印)의 화주로 칠성각을 짓고, 1904년 호남 보정(湖南 普正)의 화주로 중수했다.

 이어 1927년 주지 김성념(金聖念)이 거사 박정신(朴鼎臣)의 시주로 중수했으며,

1941년 대웅전과 칠성각을 중수했다. 1956년에도 대웅전과 삼성각을 중수하고, 요사를 세웠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과 용화전, 산신각, 칠성각, 독성각, 큰방, 요사채 2동이 있다.

 대웅전 뒷면에는 1964년부터 5년 동안 조성한 미륵석불이 세워져 있고,

대웅전 옆에는 높이 약 8m의 흰 팔각석탑이 세워져 있다.

이 팔각석탑은 최근의 것이기는 하나 각 면마다 불상을 조각한 작품이다.

또한 큰방 앞뜰에는 수령 600년 정도의 보리수가 있다.

 

 안양사

오늘날 안양시의 지명유래의 근원지인 안양사는

신라 효공왕 3년(990)에 고려 태조 왕건이 남쪽을 정벌하러 지나다가 삼성산에 오색구름이 가득 피어 오르자

이를 이상히 여겨 능정이란 스님을 만나 세워진 사찰이라 전해진다

. 안양이란 불가에서 아미타불이 상주하는 청정한 극락정토의 세계를 말하며

현세의 서쪽으로 10만억 불토를 지나 있다는 즐거움만 있고 자유로운 이상형 안양세계를 말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고여 최영장군이 7층석탑을 세우고 왕이 환관을 시켜 향을 보냈으며

승려 천명이 불사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어 옛 안양사의 규모를 짐작케해준다.

 이러한 사실을 증명하는 자료로 고려시대에 조성된 팔각원당의 부도와 귀부(경기도 유형문화재 제93호)가 있다.

 귀부는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이 글을 짓고 명필 이원부가 쓴 비문이 있었으나 현존하지 않는다.

조선 왕조실록에는 조선 태종 11년(1411년)에 왕께서 충남 온양으로 온천욕을 가던중에 안양사에 들렀다는 기록이 있고

안양사와 관련한 여러수의 시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마애종

 마애종이란 암벽에 새긴 종으로, 석수동 마애종은 남서쪽을 향한 암벽에 장방형의 목조 가구(架構)와 그 안의 종을 새긴 것이다.

 상단의 보(樑) 중앙에 쇠사슬을 달아 종을 걸어 둔 모양을 새겨 표현하였는데,

 용뉴(龍?)와 음통(音筒)이 확연하다.

상단에는 장방형 유곽(乳廓)을 2개소에 배치하였는데, 그 안에 각각 9개의 원형 유두(乳頭)가 양각되어 있다.

종신(鐘身)의 중단에는 연화문이 새겨진 당좌(撞座)를 표현하고 하단에는 음각선으로 하대(下帶)를 표시하였다.

종의 오른쪽에는 승려상을 조각하였는데, 긴 막대를 사용하여 종을 치는 모습이다.

목조 가구의 위쪽에는 3개소에 화반(花盤)을 표시하였다.

현존하는 마애종으로는 유일한 것으로서, 종의 세부 표현에 있어 청동제와 다를 바 없어 종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주변의 중초사지 유적과 연관성을 생각해 볼 때 고려시대 초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