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에 그리움이 싹트거든 비봉산에 올라보라...


어느산 : 비봉산(경북 의성군 금성면 소재)

언제 : 2007년 1월 14일

누구랑 :  오랜 친구 규영이와 한철이

닐씨는 : 맑고 하늘에는 구름 한점 없이 푸르름


길이 끝나는 곳에 암자가 있다는 정찬주님의 말이 생각나는 하루 옛 기억을 더듬으며 팔공산으로 갈려고 길을 나서는 데 전화벨이 울린다.

혹이 하나 붙었는데 팔공산 가겠나. 탑리로 가자는 제안이었다.

전화 한 통화에 목적지는 팔공산에서 탑리 수정사로 목적지가 바뀌게 되었다.

수정사에는 오랜 추억이 살아 있는 곳이다.

지금부터  30년전 1976년 겨울 고등학교 1학년때의 일이다.

그해 겨울 우리는(규영이와 한철이) 산속이 부처님을 찾아 탑리 수정사를 찾아 가게 되었다.

혹한의 추위에 탑리역을 내리니 어둠이 엷게 덥혀 낯선 방문객의 마음을 바쁘게 만들었다.

늘 산속의 절을 찾을 때는 고난과의 전쟁과도 같은 고통을 감내하며 내 스스로의 신앙심에불을 지피고 있을 때였으니까 땅거미 정도는 아무른 장애가 되지 않은 듯 했다.

요즈음 같이 가로등이라도 있었으면 그렇게 고생을 안했을 텐데 시간이 지날수록 까만 밤은 길조차 모르게 만들었고 급기야는 답사자 조차도 방향감각을 잃고 허허 벌판을 해매기 시작했다.

 

칠흙같이 어둔 밤 들판을 난 작은 길은 어둠 앞에서는 아무른 길 역할을 하지 못했다. 이리 넘어지고 저리 넘어지면서 시간은 자꾸 흘러가고 자정이 지나서야 산문에 들어섰는데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산길을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며 어깨위로 급습해오는 무서움을 달래며 허기진 배를 쥐고 두려움에 떨었다.

산속에 보이는 희미한 불빛을 찾아 도착하니 새벽...

모두들 부등켜 안고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법당에 들어가 부처님전에 삼배를 올리고 3박4일을 보낸 기억이 생생한 화면처럼 지금도 머리에 남아있다.

그 길을 꼭 30년이 지난 오늘 다시 가는 감회가 새롭기만 한데 오늘을 부처님이 아니라 산을 찾아가니 세월의 무게에 마음도 변할 수밖에.....

신녕에서 갑티제를 넘어 30여분 달리니 빙계계곡 가는 길을 지나 의성쪽으로 달리니 수정사란 팻말이 눈에 들어온다.

그때는 왜 길을 잃고 해맬 수밖에 없었는지 알려주기라도 하듯 굽이굽이 돌고 돌아 가음을 거쳐 수정사로 향했다.

 

나중에 안일이지마나 한철이의 고향이 가음이었다.

한철이는 가음이 고향이지만 수정사에는 그때 가보고 한번도 가보지 않았다고 했다.

수정사 가는 길은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고 있었다.

도로가 새로 뚫리고 주위에 민속촌도 생겼고 넓은 주차장까지 생겨 산꾼들에게 꽤나 알려진 산임을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비봉산은 금성산과 마주하고 서있는 600여 고지의 얕은 산이다.

초입에 들어서면 꼭 변산의 내변산을 온 듯한 착각일 들 정도로 바위의 모양이나 산새가 비슷하게 생겼음을 느낄 수 있다.

물이 귀하기로 유명한 의성인지라 금성산에 얽힌 전설 또한 물과 연관이 있다.

 

전설은 이렇다.

금성산 정상에 묘를 쓰면 자손이 부귀영화를 누리나 의성에는 비가 오지 않는다는 전설이 있어 그 누구도 묘를 쓰지 못하게 주민들이 막는다고 했다 . 실제 이곳에 묘를 쓰고 부자가  된 사람이 있는데 주민들의 강요로 묘를 이장시켰다고 한다.

실제 그해 그심한 가뭄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나라에서 저수지의 개수가 가장 많은 곳이 이곳 이라고 한다.

수정사 입구 주차장에서 오른쪽이 비봉산이고 왼쪽이 금성산이이다.

주차장에는 이미 안내산악회의 차들이 주차되어 있었다.

비봉산으로 올라 금성으로 내려와도 좋고 금성산을 올라 비봉산으로 내려 와도 좋은 환형태의 산세를 취하고 있다.

우리는 수정사에서 출발하기로 하고 수정사 까지 차를 몰았다.

지난 기억속의 수정사는 다 허물어져가는 축대 위에 요사와 법당만 있었는데 불사가 많이 진행되어 제법 가람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우린 그 어린날의 생각을 떠올리며 법당에 들어가 삼배를 올렸다.

여전히 법당에는 겨울 찬 공기가 가득 메우고 있었지만 부처님의 상호는 자비스럽기만 했다.

30년전 그 부처님이 지금의 부처님인데 오늘은 얼굴도 보이고 눈매도 보이고 법당구석구석이 다 보인다.

그 만큼 속세에 물들어 버린 내 마음을 보는 듯 했다.

그때 철야 용맹 전진을 하면서 얼마나 발이 시럽고 추웠던지.

추우면 추울수록 더 크게 더 열심히 기도를 했던 기억이 나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런 맘이 생겼을까 하고 의문이 남는다.

등산로는 법당의 외쪽 계곡에서 시작이 되었다.

 

한적한 산길.

가을 낙엽들이 아직도 바스락거리고 있는 다정한 길이었다.

양쪽 산 비탈에 서 있는 잘생긴 소나무며 갈참나무들이 산길 내내 따라 올 거 같은 느낌에 행복감마져 들었다.

20여분 오르니 능선에 올라선다.

이곳에서 비봉산 정상까지는 솔향기에 취해서 오른다.

송이의 산지라 가을한철 입산을 금지 시킨다니 솔향이 오죽 그윽하겠는가?

그리 높지 않은 산인데 오르면 오를수록 산 아래 다가오는 풍경에 나도 모르게 햐~~~~하고 말을 토해 내고 만다.

그래, 바로 이거야. 이 산의 맛이 이거란 말이다.

우리는 산을 오르면서 내내 눈앞에 전개되는 풍경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시간 반정도 오르면 헬기장에 있고 정상석이 나온다.

비봉산 671M라고 적혀 있다.

 

멀리 동쪽으로 보현산이 보이고 팔공산이 쪽으로 펼쳐져 있고 서쪽으로는 태백의 준령들이 굽이 굽이 겹쳐져 흐르고 있다.

산아래를 보면 작은 산줄기가 골짝마다 오솔길을 내고 산으로 달려오는 모습은 무슨 말로 단어로도 표현할 수가 없을 만큼 가슴을 파고든다.

사방으로 뚫린 조망과 멀리 굽이굽이 펼쳐지는 조망을 보고 서 있노라면 세상의 모든 시름이 자기도 멀리 바라다 보이는 산굽이 속으로 달아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많은 산을 다녀보지만 이곳 비봉산 만한 조망을 보기가 쉽지 않다. 물이 귀해서 그런지 골짝 마다 저수지를 품고 있어 아름다움을 더 했다.

동서남북 어느 한쪽도 막힘이 없이 반지처럼 첩첩이 산을 두르고 서 있으니 말이다.

더 이상 올라 설수 없는 가장 높은 산에 온 듯한 착각마져 든다... 최순우님은 무량수전 배틀림 기둥에 서서 멀리 펼쳐진 태백의 준령을 보고 “사무치도록 그립다고 했는데” 무량수전 앞에는 한쪽만의 그리움인데 최순우 선생님이 이곳에 왔다면 그 무엇으로 그리움을 표현 했을까?

사방 천지 첩첩이 쌓인 산들과 산아래 펼쳐진 들판에 옹기졸기 앉은 농촌의 풍경은 한폭으리 그림으로 그린다고 쳐도 그 산맥을 바라보는 그리움은 무엇으로 그려 낼 수 있다는 말인가.  담아도 담아도 다 못 담고, 보아도 보아도 다 못 볼 그리움이 비봉산을 감싸고 있었다.

 

그것은 시리도록 아픈 그리움과도 같았다.

오늘 이 산길을 같이한 벗들도 내 마음과 같은지 먼 곳을 바라보며 좀처럼 움직이질 않는다.

30년만의 찾은 수정사에 대한 그리움이 비봉산에 서니 비봉산의 그리움으로 새겨진다.

이제 다시는 30년 뒤를 기약할 수 없지만 오늘 이 느낌이 앞으로 우리가 다시 지고 가야 할 세월의 무게를 이기는 작을 밀알이 되어 영원히 벗들의 가슴속에 간직되기를 바라며 발길을 돌렸다.

---

 비봉산 가는길

서울--중앙고속도로--군위에서 내려서--탑리 가음로로 가면 됨.(주위에 빙계계곡과 온천으로 유명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