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파랑길에 몽돌의 합창 소리가 들린다.

일산해변에서 새벽 일출

 


비소식과는 무관하게 우리는 일산해변에서 일출을 기다린다. 잔잔하게 부서지는 백사장, 마을 앞으로 펼쳐지는 반달 모양의 백사장이 600m에 이르고 넓이가 40m에, 수심이 1-2m로 얕고 완만하여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 나들이하기에 좋은 곳이다. 해수욕장 개장 중에는 울산조선해양축제가 열리고, 해송의 시원한 그늘 속으로 대왕암공원과 연결되어 산책코스와 어우러지는 해수욕장이다.

일산해수욕장을 지켜주는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 사이로 떠오르는 일출을 바라보며 우리의 발걸음이 시작된다. 아름다운 해변을 뒤로하고 중심가로 들어서면서 작은 어촌으로 생각하던 우리의 생각이 여지없이 빗나가고 만다. 번화가의 중심상권은 강남이 무색할 정도로 화려하고 활기가 넘친다.

오십여 년 전 만해도 조용하던 포구에, 일진광풍이 일면서 경천동지할 일이 벌어지고 만다. 신라시대 이곳으로 유람 온 왕이 일산(日傘)을 펼쳐놓고 즐겼다는 일산동(日山洞)은 울산광역시 동구에 속하는 행정동이다.

울산이라는 도시 자체가 현대로 인해 잉태되고, 인구 17만의 동구는 현대중공업이 발전하면서 생겨난 도시라 할 수 있다. 홈풀러스교차로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아 방어진순환로를 따라가면, 오른쪽으로 현대중공업이 시작되고 왼쪽으로는 번화가와 배후도시의 아파트들이 이어진다.

해변가를 중심으로 방어진순환로를 따라 전개되는 현대중공업은 그 크기를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담장의 길이가 5km에 부지런히 걸어도 1시간이 족히 걸리는 거리다.

현대중공업 앞

 


현대호텔 울산과 울산대학병원, 현대백화점이 있는 중심가를 지나며 현대중공업 직원들의 보금자리가 펼쳐진다. 우리나라 경제를 좌우하는 울산의 자부심이 모여 있는 곳, 중심가의 활기 넘치는 모습이 자랑스럽다. 안산삼거리에 도착해서야 현대중공업 담장도 끝이 난다.

현대중공업으로 인해 번화가를 지나온 우리는 해안가를 찾아 봉대산을 넘는다. 정상을 오르는 중간에 남목마성(男牧馬城)을 만난다. 말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1~2m 높이의 돌로 쌓은 담장이다. 조선시대에는 전국의 섬이나 해안가를 중심으로 200여 곳에 말을 기르던 방목장이 있었는데, 남목마성도 그중에 한 곳이다.

남목마성

 


완만한 분지를 이루는 목장의 억새밭 사이로 봄의 전령사인 진달래가 함박웃음을 터트린다. 서울에서는 영하의 날씨로 몸을 움 추리는데, 따듯한 남쪽나라의 훈풍이 어느새 꽃망울을 활짝 열고 있다.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은 아름답습니다." 이정표에 새긴 표어가 아니라도 우리 모두가 지키고, 가꾸어야할 자연유산이다. 삭막한 공장과 도심에서 일상의 피로를 풀어주는 봉대산이야 말로 울산시민들에게는 허파와 같은 존재로서, 심신을 단련할 수 있는 소중한 곳이다.

봉수대

 


정상에 올라서면 거대한 원형 돌탑처럼 보이는 봉수대가 반겨준다. 높이가 6m에 이르는 꼭대기는 움푹 파인 네모난 방이다. 봉수대 앞의 바다 쪽으로 튀어나온 암반에 오르면, 남북으로 길게 이어지는 해안선과 망망대해가 장쾌하게 펼쳐진다. 또한 이곳은 노송과 어우러지는 경관이 뛰어나고, 거대한 크레인과 대형 선박이 바다 위에 떠 있는 현대중공업 전경이 내려다보이는 곳이라, <메이퀸>의 촬영지로 선정된 곳이다.

주전봉수대와 봉화사는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 봉화사가 있기에 봉수대 주변 환경이 잘 보존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정상에서 해안가로 이어지는 길은 급경사 비알 길이다. 협곡으로 이어지는 계단길이 고통의 해안로를 지나는 전주곡임을 아무도 모른다. 한여름에는 아름다운 야생화로 어우러질 월남정에 도착하여 배낭을 풀어놓는다. 도토리묵에 찐 계란까지, 주섬주섬 쏟아내는 먹거리가 훌륭한 안주감이다.

"지압로"로 명명된 돌 자갈길은 귀가 즐겁다. 걷는 내내 서걱거리는 몽돌 소리가 귀를 간질이고, 파도에 뒹구는 몽돌의 합창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무수한 세월 속에 돌 자갈 굴리는 자연의 소리가 이어지는 동안, 거친 바위들이 몽돌로 변하여 반질반질 윤기를 더하는 자장가는, 거칠고 메마른 우리의 심사를 조용히 잠재우기에 안성맞춤이다.

해파랑길 이정표

 


거친 풍랑 속에서도 옹골차게 버티고 선 노송 한그루, 바위 틈새에 뿌리를 박고 독야청청 천수를 누리는 모습은 모든 일을 쉽게 포기하고, 편안함에 안주하는 우리에게 크나 큰 교훈을 안겨준다. 철조망으로 차단한 해안가를 개방하면서도 잔재물들이 방치되어 있는 위험한 구간을 지나며, 몽돌의 매력이 고통의 길로 바뀌고 만다.

주전봉수대에서 북쪽으로 3km 떨어진 주전초등학교 앞에는 이득등대가 있다. 어린이 미끄럼틀을 겸하고 있는 등대야말로 기발한 작품이다. 해안가에 설치한 해맞이 조형물 앞에서 사진 찍는 여유를 즐기며 주전항의 아름다움을 만끽한다. 오륙 도에서 시작한 해파랑 길이 수많은 어항을 지나오며 갖가지 모양의 등대를 만난다. 그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등대가 바로 주전항을 밝혀주는 탑 모양의 등대다.

동구에서 유일한 어촌마을인 주전항을 상징하는 명소로 탄생한 벽화는 높이가 5m에 길이가 179m인 주전항 북방파제에 방금 물질을 끝내고 뭍으로 올라오는 해녀의 반신 부조상이 압권이다. 해산물을 채취하는 해녀, 돌미역을 말리는 모습 등 주전항의 풍경을 타일벽화로 그려놓은 방파제 끝자락에 조성한 붉은색 탑 모양의 등대와 빨강, 노랑, 파랑, 녹색으로 색깔을 입힌 4개의 Y자형 테트라포드가 조화를 이룬다.

주전마을

 


주전항

 


어항의 방파제를 지탱하는 테트라포드는 발이 4개 달린 구조물로 중심의 무게가 밑에 있기 때문에 강한 해일에도 견딜 수 있는 가장 안정적인 모습이다. 한 개의 무개가 무려 64톤에 이르며, 표면이 둥글고 삼발이 사이로 물이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기 때문에 물의 저항을 덜 받는다. 방파제 구경 나온 사람들이 테트라포드에 올라가는 것을 좋아하지만, 삼발이 사이로 한번 빠지면 나올 수 없다고 하니 조심하는 것이 상책이다.

전통적인 농어촌마을인 주전마을은 정조 때부터 주전(朱田)이란 지명을 사용하고 있는데, 실제로 이곳의 땅이 붉은 빛을 띠고 있다고 한다. 붉은색 탑은 감은사지의 3층 석탑이 아니면 불국사의 석가탑을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 항구의 방파제에 설치한 등대를 보면 바다에서 항구 쪽으로 오른쪽에 붉은 등대를, 왼쪽에 하얀 등대를 설치하여 선박이 항구로 접안할 수 있도록 정해놓은 해상 규칙이라 한다.

"주전바다에 가면 모나고 비뚤어진 마음도 둥그러지고, 차르르 차르륵 결고운 소리로 어두운 밤에도 몽돌을 깨우며, 주전바다에서 노닐던 하얀 언어들이 물안개 피어오르는 해변가를 가득 수놓는다." 고 노래한 주여옥 시인의 시편을 뒤로하고 주전마을을 떠난다.

울산12경에 속하는 몽돌해변은 주전 항 북쪽으로 펼쳐진다. 1.5km에 이르는 강동항까지 까만색 몽돌이 가득하다. 크기도 제각각이어서 사각사각 밟히는 소리가 정겹고, 앙증맞은 돌 사이로 흐르는 자장가 소리에 취해 시간가는 줄을 모른다. 손아귀에 쏙 들어오는 조약돌하나를 집어 들고, 몽돌해변의 추억을 소중하게 간직한다.

몽돌해안

 


어물동마애여래좌상 입간판이 있는 곳이 어물항이다. 행정동이 강동동인 어물항은 멀리 삼국시대부터 독립된 행정구역으로 신라 파사왕 때 이곳에 현치를 두고, 농소, 방어진, 감포까지 관할구역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범죄 없는 마을 어물동 구암마을에서 금천교를 지나 당사동으로 들어서면 예쁜 화장실이 보인다. 월드컵을 개최하며 변하기 시작한 화장실문화가 내적인 청결함을 지나 외적인 아름다움까지 더 하고 보니, 우리의 의식수준이 한 단계 격상된 모습이다.

당사동에서 정자 항까지는 고통의 구간이다. 푸른 물결이 암초에 부딪치며 포말을 일으키고 아슬아슬한 벼랑에 낚시 대를 드리우는 강태공을 바라보는 눈은 즐겁지만, 자갈길을 걸어가는 두 다리는 죽을 맛이다. 울퉁불퉁 자갈을 밟는 발바닥에 경련이 일고, 급격히 소진되는 체력으로 몸의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기 일쑤다. 그래도 가야 한다. 고통의 순간이 지나고 나면, 행복의 나래가 펼쳐지는 정자항이 손짓하기에.

정자항

 


고래가 힘차게 비상하는 등대모형이 있는 방파제에서 바라보는 정자 항은, 인천의 소래포구와 대명포구와 같이 방문객으로 발 디딜 틈이 없고, 신바람 난 상인들의 호객행위로 수라장이다. 오랜 전 마을 한가운데 24그루의 느티나무와 정자가 있어서 정자(亭子)라는 지명을 얻게 되었다는 곳. 울산의 북쪽 끝자락에 있는 정자 항은 울산시민들이 즐겨 찾는 산책코스와 먹거리 촌으로 명성이 높은 곳이다.

정자항의 주요 어종은 문어와 가자미인데, 최근 수온 변화로 울진, 영덕의 중심 어종이었던 대게를 정자 앞바다에서도 잡을 수 있게 되면서, 대게전문점들이 성시를 이루고 있다. 이곳은 선사시대부터 고래가 회유했던 곳으로, 고래잡이의 전진기지로 활용되기도 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