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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학동매표소에서 갓걸이재까지는 약 60분, 외삼신봉까지는 약70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고 상불재까지는 휴식시간을 포함하여 약 210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된다.

 

갓걸이재에서 외삼신봉까지는 10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된다고 보면 된다.

 

외삼신봉 아래에 도착하니 빗방울이 더욱 거세어 지고 체온이 급감함을 느낄 정도로 강풍이 분다.
지난 3월26일에도 쌍계사에서 출발하여 봉명산방을 경유하여 삼신봉을 오르려다 입산통제기간이라서 정상에 오름을 포기한 적이 있다.
그 목마름을 해갈하기 위하여 삼신봉을 벼뤄서 찾아 왔건만 불순한 일기는 나에게 마음을 열어 주지 않는다.
지리산의 주능선은 커녕 짙은 산안개는 가시거리가 10미터도 채 안된다.
외삼신봉에서 내삼신봉까지는 약 25분 간의 시간이 소요되고 독바위까지는 약 80분, 상불재까지는 약 100분의 시간이 소요된다.

 

외삼신봉에서 부터 상불재까지의 산행로에는 산죽군락지가 많고 그 분포도는 절반이상이라고 보면 된다.
우기철에 산죽숲을 헤쳐 나갈려면 하의도 오버트라우져를 입는 게 저체온증을 예방하는데 효과적이다.

 

내삼신봉에서 독바위 입구까지는 약 60분 간의 시간이 소요된다.

 


 

독바위(쇠통바위) 들머리에는 절벽에서의 추락 등 안전사고를 예방하기 위하여 철조망과 나무 등으로 막아 출입통제를 하고 있다.
이 곳에서 상불재까지는 약 25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된다.

 


 

상불재에서 불일폭포까지는 약 80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된다.

 

불일폭포 직전의 언덕위에 있는 불일암으로서 최근에 중수한 비교적 자그마한 암자이다. 불일암의 경내에서는 불일폭포의 쏟아지는 물소리가 세속을 절로 잊게 만드는 듯이 또렷하고 장엄하게 들린다.

 




위 설명문은 이해를 돕기 위하여 불일폭포 전망대의 설명문과 불일암 앞의 설명문을 합친 것이다.

불일폭포

불일폭포는 지리산 10경의 하나이다. 높이 60m, 폭 3m의 지리산 유일의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거폭으로 상하 2단으로 되어 있는 폭포이며, 위쪽에 있는 소(沼)가 학연이다. 계절에 따라 수량의 차이는 있으나 연중 단수의 고갈은 없다.
폭포 밑에는 용추못과 학못이 있어 깊은 자연의 신비를 안겨주기도 한다. 떨어지는 물소리는 탄금의 소리가 울리고 고려시대 학이 날아오르는 모습에 비쳐 자청색이 영롱해서 놀았다는 청학봉, 청학동이라고 이름지은 봉과 골이 있으며. 남명 조식의 시와 정재규, 서산대사의 시들이 있어 곱고 아름다운 신비경을 보여주는 곳이다.
여름철 거대한 물줄기를 흘러 보내지만 겨울철이 되면 그 물줄기가 그대로 얼음이 되어 버려 빙벽 등반가들의 훈련장소로 각광 받고 있다. 폭포의 오른 쪽에는 옛 불일암터가 있다. 83년 건물이 완전히 없어지고 지금은 터만 남아 있으며, 보조국사 지눌이 이 절에서 수도했다고 한다.


 


 


 


 


봉명산방(鳳鳴山房)

1978년 10월1일 변규화씨가 불일평전에 정착하여 가꾼 집과 정원이 특이하다. 정원에는 한반도의 모양새를 한, 반도지(半島池)로 불리는 조그마한 연못 이 있다.
오두막집 언덕에는 많은 돌을 쌓아 만든 아기자기한 돌탑군(群)이 있는데 소망탑으로 불리고 있다.


 



지난 3월26일에도 쌍계사에서 출발하여 봉명산방에 도착하여 '변규화'님과 잠시 대면했었다. 그 때는 탐방객들이 주문한 감자전 등을 부치느라 바쁘신 탓으로 간단한 안부인사만 여쭈었었고, 삼신봉이 입산통제기간이라서 정상에 오르지 못하여 산행후기를 남기지 않은 아쉬움이 많았으므로 당시를 회고하며 그 때의 사진을 뒤늦게나마 남겨 본다.

 


 


변규화선생님의 얘기를 쓴 '최화수'님의 [지리산통신] 칼럼에서 퍼온 글

불일평전 오두막에는 '봉명산방(鳳鳴山房)'이란 휘호가 걸려 있다. 소설가 정비석 선생이 이곳을 찾아 붙여준 이름이다.  고려말 학자 이첨이 지리산을 찾아와 지은 시에 '산 중의 산'이라 하여 '봉황명(鳳凰鳴)'이라 쓴 구절이 있다. 거기서 따와 '깨달음의 완성'이란 뜻으로 '봉명산방'이란 이름을 지었다. 불일암, 불일폭포, 불일평전의 '불일(佛日)은 보조국사가 이곳에서 수도정진, 깨달음을 얻은 것을 기려 국왕이 '불일(佛日)'이란 시호를 내린 데서 유래한다.
'지리산 통신' 가족인 '돌쇠'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이곳을 '봉명공화국'으로 일컫는다. 이 봉명공화국의 왕궁은 오두막집이다. 억새 이엉에다 벽 전체가 나무로 된 나무집이다. 자세히 보면 흙벽에다 디딤나무를 붙인 다음 그 위에 한 자 길이의 짤막하고 가느다란 나무를 촘촘하게 붙여 놓았다. 뜰에는 우리나라 지도 모양의 연못인 '반도지(半島池)', 돌을 쌓아올린 석탑군의 '소망탑(素望塔)'이 있다. 아기자기한 돌탁자와 나무의자 등이 봉명공화국다운 모습이다.
불일평전을 이처럼 소박하고 아름답게 가꾸면서 신선처럼 살고 있는 봉명산방 방주는 변규화(본명 변성배)님이다. 덥수룩하게 기른 수염이 트레이드 마크인 그는 지리산의 이름난 털보들 가운데 한 명이다. 그가 이 오두막에 정착한 것은 지난 78년 10월1일이다. 어언 23년의 오랜 세월을 하루같이 변함없이 살고 있다. 그는 이 오두막에 정착하기 앞서 불일폭포 위쪽의 상불(上佛)에서 10년 가까이 토굴생활을 했다. 그러니까 그의 실제 산중생활은 30년이 넘는다.
변규화님은 경남 거창 출신으로 정상적인 학교 생활과 사회 진출의 과정을 밟았다. 성균관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한 그는 공군에 입대하여 36개월을 복무하고 만기제대했다. 그리고 일반기업체에 입사, 평범한 샐러리맨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지난 60년대 초 미모의 규수와 결혼, 남부럽지 않은 '서울 생활'을 누렸다. 그의 부인은 대단한 미인이자 이름난 인텔리 여성으로 사회생활을 적극적으로 했고, 사랑스러운 아들도 한 명 두었었다.
그런 그가 어째서 서울 생활을 뿌리치고 지리산중으로 뛰어들었을까? 이 의문에 대해 그는 뜻밖의 이유를 들려준다. "이상한 일이었다. 내가 다니는 직장은 되는 일이 없었다. 회사 자체가 얼마 못가 파산하고는 했다. 나 스스로를 깊이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가끔 찾아왔던 불일암(불일폭포 위의 작은 암자)에 공부를 하러 오게 됐고, 상불에서 토굴생활(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도정진)을 했다. 그러다 이 오두막에 인연이 닿아 아주 머물게 됐다."
그는 지리산에서 '공부'하는 동안 지리산이 너무 좋아졌고, 자신의 삶터가 곧 지리산이라는 하나의 깨달음을 얻었다. 그가 토굴에서 10년을 '공부'하여 깨친 것이 지리산의 자연 속에서 자연처럼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는 청담 스님 등 이름난 고승 아래서 공부를 하느라 스님 생활도 3년 동안 했다. 하지만 그는 종교가 아닌, 지리산의 자연세계로 귀의했고, 불일평전 '봉명산방'에서 영원한 자연인으로 살게 된 것이다.
"사회에서 조직생활을 하는 데는 인간의 본성에 맞춰 살아가기가 어려운 법이다. 사회생활을 통해서 명예나 풍족한 생활을 누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명예나 돈을 떠나면 인간은 자연처럼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나는 명예보다 자유를 택했고, 물질적인 풍족보다는 자연세계의 정신을 선택했을 뿐이다." 사실 신선세계가 별 것이겠는가. 깨끗한 물, 맑은 공기, 아름다운 숲과 더불어 마음을 비우고 살면 그것이 곧 무릉도원이자 신선세계일 것이다.
불일평전 오두막에는 한번씩 그의 서울 부인이 다녀가고는 했다. 그녀의 뛰어난 미모와 세련된 서울말씨가 산꾼들 사이에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미인박명이라고 했던가. 서울 생활을 계속하던 그의 부인은 지난 86년 먼저 저 세상으로 떠나고 말았다. 아들 변성호는 어머니를 잃은 충격을 안고 불일평전 아버지에게 왔다. 그는 이곳에서 청년으로 성장, 원광대를 졸업한 광주의 규수와 결혼했다. 그 아들 부부는 봉명산방 별채에서 살며 불일평전의 대를 잇겠다고 했었다.
하지만 불일평전 2세는 서울로 떠나갔고, 지금은 변규화님 홀로 살고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는 결코 혼자가 아니다. 지리산의 자연세계가 언제나 그와 함께 있다. 지난 주말 찾아간 필자 일행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여기 있어보니까 산이 불쑥불쑥 자라나!" "예?" "저기 봐요. 나무들이 저렇게 자라니까 산이 자라는 것이나 같지!" "...!" 우리 일행은 과연 변규화님다운 말이라며 감탄했다. 그렇다. 그는 지리산과 말동무하기에도 너무나 바빠 이 산을 결코 떠나지 못하고 있다.

'鳳鳴山房'이란 휘호가 지금은 축담 옆에 다소곳이 기대어져 불일평전을 바라 보고있다.
기상악화로 탐방객들이 전혀 없는 탓에 변규화 선생님과 대좌하여 불로주 한 병에 감자전을 안주 삼아서 쉼터에 마주 앉아 대담을 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갖게 되었다.
"저 봐, 바람이 부는대로 나뭇잎이 흔들리지 않는가. 이 나무가 흔들렸다 저 나무도 흔들리지. 바람이 부는대로 흔들리니 살아갈 수 있지, 나무가 강해봐 부러지고 말지. 강하다고 좋은 건 아니야. 자연의 이치대로 사는게 도리이지..."
"여기 있으며 매일 달라지는 자연을 느끼며 살아 가...."
당연하고도 자연스런 철학을 뜸뜸하게 내 비치시다가 얼마전에 중수한 불일암의 18:30 저녁예불에 참여하시기로 했다며 쉬었다 가라며 18:15 경에 우산을 펼쳐들고 잔잔히 미소 지으며 손을 흔들며 불일암으로 향하시는 선생님의 뒷모습을 보면서 만수무강을 마음 속으로 빌어 드렸다.

 


 

불일평전에서의 소중한 추억을 간직하기 위하여 오래동안 휴식한 탓으로 지척에 있는 환학대에 오니 비가 내리는 흐린 날씨 탓으로 어둠이 빨리 찾아 내렸다.

환학대

고운 최치원이 학을 부르며 놀던 곳이라 하는 환학대이며 불일평전의 바로 아래에 있다.


 

지난 산행에선 국사암을 둘러 보지 않았기에, 이 번 하산 길에 국사암을 둘러 보기로 했다.
국사암에서 쌍계사를 가기 위해서는 국사암갈림길로 다시 나와야 하지만, 국사암에 잠시 들른 후에 콘크리트 포장길을 따라 내려 갔더니 쌍계사 매표소 위의 쌍계사 일주문 입구에 다다르게 되었다.
국사암도 어두워 진 탓으로 겉만 보고 오는 꼴이 되었지만, 쌍계사는 더 그러하겠거니 하고 쌍계사매표소를 통과하여 집단시설지구로 내려서고 말았다.

국사암(國師庵)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본사인 쌍계사의 말사이다. 722년(신라 성덕왕 21) 삼법(三法)이 창건하였다. 삼법은 의상(義湘)의 제자로, 당에서 육조 혜능(慧能)의 머리를 가져온 고승이다. 840년(문성왕 2) 진감국사(眞鑑國師) 혜소(慧昭)가 화개면에 왔을 때는 폐사로 있었다. 전설에 따르면 혜소는 화개면에 이르러 나무기러기 세 마리를 만들어 날려 보내 절터를 알아보았다고 한다. 이 때 한 마리는 화개면 운수리 목압마을에 앉고, 다른 한 마리는 국사암터에, 또 다른 한마리는 현재의 쌍계사터에 앉았다. 당시 목압마을에는 목압사(木鴨寺) 터가 있었는데, 이 목압사도 삼법이 지은 절로 추정된다.
혜소는 나무기러기가 앉은 곳에 쌍계사를 세웠으며, 삼법의 유지를 받들어 국사암을 중창하고 혜능의 영당을 이 암자에 세웠다. 이후의 연혁은 전하지 않고 단지 국사(國師)를 지낸 혜소가 머물렀다 하여 암자의 본래 이름 대신 국사암이라 불렀다는 말이 전할 뿐이다. 1983년 중창하여 오늘에 이른다. 건물로는 문수전과 명부전·염화실·산신각 등이 있다. 법당은 정면 6칸, 측면 4칸의 ㄷ자 건물로 율원(律院)으로 쓰인다. 건물 안에 있는 후불탱화에서 진신사리 2과가 발굴되어 쌍계사 고산이 스리랑카에서 모셔온 석가모니불 사리 3과와 함께 1990년 3월 15일 조성된 팔각구층석탑에 모셔졌다.
사찰 문 앞에 혜소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에서 싹이 나 자랐다는 느릅나무가 유명하다. 가지가 사방 네 갈래로 뻗은 거목으로, 사천왕수(四天王樹)라고 불린다.


 




  


벼루었던 삼신봉 산행이었고 기상악화로 지리산의 주능선의 조망은 물론 삼신봉 주능선의 아름다움 조차도 눈에 담지 못한 아쉬움은 있지만, 비가 고즈넉히 내리는 날의 仙界처럼 신비감이 도는 봉명산방에서의 '변규화'님과의 소중한 대담은 평생 잊지 못할 추억으로 자리매김한다. 나름대로의 수많은 산과 골들을 다녀 본 중에서 불일평전의 봉명산방은 내 영혼과 자연을 오버랩되게 만드는 최상의 이상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