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7.16. 기장군 기장읍,일광면

코스 기장군청-환경위생관리소-마을-봉대산-아파트-기장군청-기장경찰서-일광해수욕장-학리-군부대-이동리-군부대입구-온정

 깃털단독

  

지루하던 장마가 끝나고 곳에 따라 한줄기 소나기 일기예보가 있었지만 하늘에 검은 구름 사이로 해가 비쳤다가 숨기를 반복한다. 지난번 해안선 답사 8차에서 신앙촌 정문에서 통제로 해안선을 잊었기 때문에 기장군청 뒤 보호수와 폿살경기장과 테니스장을 지나 논두령으로 해서 월전 방향 길을 따른다.

  

잠시 후 봉대산 산행안내도를 읽어 보니 약2.5km코스로 가볍운 마음으로 공사 부지를 돌아 등산로를 만난다. 경사도가 낮은 등산로를 따라 능선 100고지와 죽성리 이정표를 지나고 봉대산으로 가다가 신천마을과 봉대산 갈림길에서 봉대산 정상으로 오른다.

  

70세 가량 남자 산책객을 만나 신앙촌이 어디 있느냐고 하니 건너편 절 같은 큰 건물을 가리킨다. 신앙촌은 천부교를 신앙으로 믿으며 경내에서 자치생활을 하므로 부지가 아주 넓다고 한다.

  

봉대산 일원도 대부분 신앙촌 부지라고 한다.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로 해안선이 세계 어느 나라 못지 않게 아름다워 잘 가꾸고 보존하여 세계 관광화 하여야 한다. 쉼터,둘레길, 자전거, 드라이브 코스를 개발하는 종합발전계획을 수립하여야 할 것이다.

  

우선 해안선에 무질서한 건물과 콘크리트로 망가진 것을 일제정비 하고, 사유지라도 공익목적 필요성이 있는 것은 구입하는 등의 종합발전계획을 수립하여야 한다. 신선이 노닐던 곳이라던 부산 신선대 해변이 부두와 해군작전기지의 거대한 콘크리트 벽으로 해안절경을 망가뜨린 대표적인 사례다.

  

또 다른 산책객에게 신앙촌이 사유지란 명분 아래 철조망을 치고 외부와 차단시켜 놓은 것은 너무 지나치다고 하였더니 쓰레기를 마구 버리는 사람이 많아 철조망을 치고 통제를 한다는 궁색한 변명을 늘어 놓는다.

  

다른 산책객은 '신앙촌이 기장에 들어오기 1970년대 월전에서 학리가는 해안선 따라 도로가 있었는데 신앙촌이 들어서고 나서 부터 막아버렸다. 해안선 길을 차단 시켜 놓고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를 일이며 기장 발전을 저해한다는 원성이 대단하다. 국회의원 등 정치가들도 표를 의식하는지 소극적이여 선량한 주민들은 어떻게 할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라고 한다.

  

봉수대에 올라서니 기장남산봉수대 복원사업을 한다고 포크레인이 봉수대 원형을 잡고 있다. 울산에서 왔다는 인부는 쉼터 '텐트에 쉬었다 가라'고 한다. 봉대산 일원을 봉수대 정비로 공원화 할 계획이라 한다. 봉수대에 올라서니 동해안 해변과 신앙촌 전체 그리고 걸어왔던 해안선과 가야할 해안선이 아름답게 그려진다.

  

체육공원에서 봉대산(228.2m) 정상에 오르니 삼각점과 정상석은 없다. 밋밋한 정상을 조금 되돌아 나와 무양마을과 문화원 갈림길 이정표와 산죽길을 지나 안부 문화원과 우신네오빌아파트 갈림길에서 아파트 방향으로 내러 편백림 조성터와 작은 저수지를 만난다. 원점회귀하여 기장군청 앞에서 MTB켈리(1코스70km, 2코스 30km) 코스 안내도를 읽어보고 죽성교를 건너 기장경찰서 앞에서 9차 코스를 이어간다.

  

차량이 많이 다니는 장안 기장간 국도 확장공사를 하고 있는 곳을 따라 일광해수욕장 입구 삼성천 산책로를 지나 넓은 해수욕장에 들어서니 해수욕객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하고 상점들은 손님 맞이에 열중이다. 학리 방향으로 잘 조성된 데크산책로 길을 따라 정자에 이른다.

  

산 정상에서 자주 보던 삼각점이 요즘 해변에 자주 설치되고 있다. 삼각점 옆 정자에 앉아 점심을 즐기는 노부부는 삼성대를 알련가! 고려말 정몽주,이색,이숭인 등 세 성인이 유람하였다고 전해지는 곳 말이다. 삼성대는 정자 전망대인지 군부대 전망대인지 정확한 표지가 없어 아쉽다.

  

정자에서 군부까지 아름다운 절경에 파도가 쉼 없이 밀려와 갯바위에 부셔져 하얀 포말을 일으킨다. 푸르고 못해 검게 보이는 시원한 바다에서 불어 오는 갯냄새에 오감을 맞기고 바닷물에 손발을 당근다. 학리활어판매장을 지나 해안선을 따라 7508부대3대대 정문에 멈춘다. 내 나라 땅이면서 더이상 갈 수 없는 곳이다.

  

휴전선이 있는 것도 아니다. 군부대와 신앙촌이 철저히 통제를 하기 때문이다. 길을 막고 우회길을 터 놓거나 하는 성의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부대 무장 군인 2명이 길을 막으며 총부리를 겨누어 '해안선 답사 여행 작가인데 부대 내 탐방을 신청합니다.'라고 하였더니 군부대는 들어갈 수 없으니 되돌아 가라고 한다.

  

너무나 서운하고 화가 치밀어 오르지만 총뿌리에 기가 죽지 않을 장사가 있겠는가!  원래 땅 위에는 길이란게 없었지만 걸어가는 사람이 있어 길이 터인 것이다.  걸어가는 사람이 있기에 해안로가 하루 빨리 터이기를 희망하며 바닷가 상여집을 지나 이천에 이른다. 이천의 옛 지명은 '이을포(伊乙浦)' 소설가 오영수(1914-1979)의 소설 '갯마을(1953년)'의 무대다.

  

소설의 배경인 강송정(江松亭)과 느티나무, 당집 등이 남아 있다. 표지석에 적힌 소설 속 한 구절이 향수를 자극한다. '상수도 징용으로 뽑혀가고 말았다. 허전했다. 생각 끝에 해순이는 전 남편의 제삿날 다시 갯마을을 찾았다. 그녀는 갯마을이 더 좋았다.' 판화가인 오윤(1946-1986)이 오영수의 장남이다.

  

민중화가로 불린 오윤은 소설 '갯마을'의 주인공 해순이의 느낌을 던져주는 독특한 작품을 여러 편 남겼다. '오영수갯마을 문학비'를 보고 강송교를 건넌다. 유리공장 축대 해변을 지나니 무질서하게 난립한 폐건물들이 막아 차도로 우회하여 간다. 해변 포장마차에서 때 늦은 라면을 먹고 갯바위 사이 돌미역과 다시마를 따는 가족 텐트 피서객 들 틈에 바닷물에 발을 담그며 동심으로 돌아가 본다.

  

이동수산을 지나 동백리입구에서 해동성취사 기도도량과 용주사 절을 지나 온정마을에서 걷기를 접으니 좌천에서 기장을 운행하는 188번 버스가 와 다음 구간을 기약한다. 선비들의 애환과 포구 사람들의 일상 그리고 우리나라 해안선을 보면서 많은 의미를 남기는 포구길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