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산


 

             *산행일자:2007. 12. 14일

             *소재지  :경기포천/강원화천

             *산높이  :백운산904m, 도마치봉937m, 흑룡봉774m

             *산행코스:흑룡사입구-흑룡봉-도마치봉-백운산-광덕고개

             *산행시간:12시19분-17시32분(5시간13분)

             *동행    :나홀로

 


 

  하루해가 저무는 저녁시간에는 괜스레 마음이 바빠져 맑은 날이면 언제고 볼 수 있는 해넘이에 그리 자주 눈길이 가지 않습니다. 그래도 작정하고 서녘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해넘이를 볼 뜻이라면 산보다는 바다가 훨씬 낫겠다 싶습니다. 산에서는 곧바로 다가오는 어둠에 쫓겨 하산 길을 서둘러야 하기에 느긋하게 낙조를 관조할 여유가 없지만, 바다나 바다와 가까운 강 하류에서라면 일몰 뒤에 곧바로 엄습해오는 어둠에 갇히더라도 산속에서처럼 길을 잃고 헤맬 위험이 전혀 없어 느긋하게 한 자리에서 저녁노을을 끝까지 지켜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제껏 몇 번이고 저녁시간에 서해에서 까까운 임진강변의 반구정을 찾은 것도 서해로 침잠하는 태양이 전신을 불태워 내보이는 장렬한 해넘이를 마음 편히 지켜볼 수 있어서였습니다.


 

  어제는 경기도 포천에 자리한 백운산의 능선 길을 걸으며 해넘이를 보았습니다.

여느 산행 때와는 달리 백운산에서 광덕고개로 내려가는 능선 길을 여러 번 밟아본 터라 어둠이 산속을 몽땅 먹어 삼키더라도 길을 잃을 염려가 없어서인지 무섭거나 초조하지 않았습니다. 백운산 능선 길에서 나뭇가지 사이로 넘나본 해넘이는 임진강변에서 맞이한 그것보다 화려하거나 장엄하지는 않았지만 해넘이의 감흥을 느껴보기에는 조금도 모자람이 없었습니다. 해넘이의 감흥은 유종의 미에서 비롯된다는 생각입니다. 어둠에 싸였던 온 세상을 밝히고자 바다를 박차고 하늘로 떠오르는 해오름이 감동을 주는 것은 힘차게 하루를 시작하는 장대한 기상에 있다면, 해넘이의 감흥은 온몸을 불살라 마지막으로 빛을 내보여주며 하루를 장렬하게 맺는 유종의 미에 있습니다. 해넘이의 아름다움은 태양광선이 두꺼운 대기층을 통과하며 남아 있는 장파장의 적외선이 우리 눈에 전해져 만들어지는 저녁노을의 화사함에 있는 것이 아니고, 다음 날 아침 떠오르는 태양에 자리를 넘겨주고자 주저하지 않고 어둠속으로 장렬히 사라지는 당당함에 있는 것입니다. 저는 어제 결코 화사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추하거나 초라하지 않은 해넘이에서 태양의 당당함을 보았기에, 광덕고개로 내려서는 발걸음이 한결 가벼웠습니다.


 

  오후 12시23분 흥룡사 입구의 주차장을 출발했습니다.

2003년 10월에 백운산을 오른 후 네 번을 더 정상을 밟았지만 이제껏 산 밑에서 시작해 계곡과 능선을 타고 정상을 오른 적이 한 번도 없어 이틀 후에 인근의 국망봉을 올라 한북정맥 길을 이어갈 종주산행에 대비해 산행여건을 탐색해볼 겸해서 이 산을 다시 찾았습니다. 출발이 늦은 만큼 차도 건너 광덕산과 박달봉까지 올라보겠다는 계획을 접고  도마치봉을 거쳐 백운산 정상에 오른 다음 광덕고개로 하산하는 짧은 코스를 밟기로 마음을 굳힌 후 백운계곡 길로 들어섰습니다. 신라시대 도선국사께서 창건하셨다는 이 절의 발자취를 알아볼 수 있는 그 흔한 안내판도 보이지 않는 흥룡사가 그 이름을 계곡 오른 쪽에 높이 솟은 백운산의 흥룡봉에서 따온 것이 분명하다면 이 봉우리 또한 반야용선을 타야 다다를 수 있는 극락정토의 멧부리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백운2교를 건너 계곡 옆길로 몇 분을 걸어 오르자 환경을 보호하자는 취지로 녹음된 멘트와 음악이 스피커를 통해 자동적으로 울려나왔습니다. 외관이 아름다운 또 다른 다리를 건너 대피소에 이르자 넓은 바위 위를 흐르는 계곡의 맑은 물이 새파란 겨울하늘처럼 냉랭해 보였습니다. 왼쪽으로 백운산 길이 나있는 삼거리에서 계곡을 건너 오른 쪽의 산등성으로 들어섰습니다. 가파른 오름길을 덮고 있는 하얀 눈이 내뿜는 냉기는 아직은 참을 만 했습니다. 소나무 몇 그루가 서 있고 맨살을 그대로 드러내 보인 무명봉에서 흥룡봉에 오르는 능선 길에 오른 후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산 오름을 계속했습니다. 계곡삼거리를 출발해 13시31분에 하얗게 눈이 쌓인 649봉에 도착하기까지 50분 동안 오름길만 계속됐습니다.


 

  14시3분 해발774m의 흥룡봉을 올랐습니다.

649봉에서 깊숙한 안부로 경사가 급한 길을 따라 바쁘게 내려섰다가 꽤 높아 보이는 흥룡봉을 향해 산 오름을 이어갔습니다. 능선을 경계로 좌측사면에는 쌓인 눈이 녹지 않고 그대로인데 오른 쪽 사면은 거의 다 녹아 태양열의 위세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돌가닥 길을 지나 흥룡사3.2Km/도마치봉2.7Km의 표지목이 서있는 헬기장에 올라서기까지 오름길이 길고 가팔라 깔딱고개를 오르는 것 같았습니다. 헬기장 바로 위의 흥룡봉은 표지봉이 서 있는 암봉으로 바로 아래가 깎아지른 절벽이어서 동남쪽의 화악산과 국망봉 뿐만 아니라 흥룡봉에서 도마치봉에 이르는 산줄기 오른 쪽에 희멀건 암벽이 자리하고 있어 조망이 일품이었습니다. 백운계곡 깊숙이 자리한 취선대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는 향적봉에 오르는 길이 생각보다 험하고 더뎠습니다. 흥룡봉에서 내려다 본 백운계곡이 참으로 깊고 장대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흥룡봉에서 안부로 내려섰다가 암릉길을 오른 쪽 아래로 우회하는 길이 선명하지 못하고 끝에 가서 경사가 급해 다시 능선 길로 올라서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2개봉을 더 넘어 올라선 향적봉에는 하얀 눈의 헬기장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15시45분 해발 937m의 도마치봉에 올라섰습니다.

향적봉에서 안부로 내려섰다가 몇 개의 암봉들을 왼쪽으로 우회했습니다. 그동안 내린 눈이 녹지 않고 그대로 남아 왼 쪽 우회 길에서 눈이 제법 많이 쌓인 겨울 산의 제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우회 길이 끝나고 마지막 비알 길을 올라 넓은 헬기장의 도마치봉 정상에 올라서자 서북쪽 하늘에 진하게 낀 먹구름 띠가 나타나 일기예보대로 밤사이 눈이 내릴 것 같았습니다. 넉 주 전에는 싸락눈만 듬성듬성 보였던 헬기장에 그동안 내린 눈과 골바람을 타고 올라온 골짜기의 눈들이 그대로 쌓여 있었습니다. 배낭에서 커피를 꺼내 마신 후 한북정맥 길을 따라 백운산을 향해 북진을 서두른 것은 흥룡사에서 5.9Km를 걸어 여기 도마치봉에 오르는데 3시간이 넘게 걸린 제 발걸음으로는 5.2Km 떨어진 광덕고개에 다다르기 전에 어두워질 것이 분명한데다 포성까지 들려와 마음이 다급해졌기 때문입니다. 백운산으로 향하는 능선 길은 그동안의 오름 길과는 달리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정맥 길답게 길도 넓었고 눈도 많았습니다.


 

  16시30분 해발 904m의 백운산을 올랐습니다.

도마치봉에서 1Km 걸어 삼각봉에 올랐다가 다시 1Km를 걸어 백운산에 이르기까지 길도 넓고 바닥 눈이 아이젠에 들러붙지 않아 발걸음이 빨랐습니다. 도마치봉 출발 40분 만에 올라 선 이 산도 다른 백운산들과 마찬가지로 산꼭대기에 항상 하얀 구름이 머문다하여 백운산(白雲山)의 이름을 얻었을 진데, 구름의 아름다운 변형인 하얀 눈이 겨울의 백운산 정상을 덮은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표지석 대신 삼각점만 달랑 박혀있는 백운산 정상에 올라 배낭을 삼각점 옆에 내려놓고 산 오름을 기념하는 사진 한방을 찍은 후 곧바로 자리를 떴습니다. 백운산에서 바라다 본 북쪽의 회현고개 길이 하얀 눈이 쌓여 있어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한동안 먹구름 속에 숨어 있던 태양이 얼굴을 내밀고 서산을 넘으며 해넘이를 준비했습니다. 30분가량 계속된 해넘이로 서녘하늘이 붉게 물들었고 급기야 태양 스스로도 붉어져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저녁노을의 상당부분을 시꺼먼 먹구름 띠가 먹어 삼켰다 하더라도 해넘이의 장렬함은 여전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내일의 태양에 자리를 넘겨주고자 곧이어 들이닥칠 어둠속으로 사라져버리는 해넘이의 마지막 광경을 지켜보며 자연의 변화는 이래서 위대하고 교훈적이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7시36분 포천군과 화천군을 경계 짓는 광덕고개로 내려서 하루 산행을 끝냈습니다.

해가 서산으로 완전히 넘어가자 라이트를 켜고 광덕고개를 넘나드는 차량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땅거미가 내려앉는 속도보다 제 걸음이 조금 빨랐던지 광덕고개로 내려서기까지 헤드랜턴을 켜지 않아도 됐습니다. 광덕고개에 내려서서 옷을 갈아입고 나자 그새 완전히 어두워졌고 추위가 느껴졌습니다. 이내 동서울행 버스에 올라탔기 망정이지 조금만 늦었어도 반시간가까이 길가에서 덜덜 떨며 버스를 기다릴 뻔 했습니다.


 

  산자락을 덮은 하얀 눈이 산행에 부담이 될 정도로 많이 쌓인 것은 아니었고 서울이 영하4도라는 날씨도 산행에 지장을 줄 정도로 추운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밤사이 눈이 좀 내린다 해도 이틀 후 국망봉을 올라 한북정맥을 밟는 종주산행이 그리 힘들 것 같지 않아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한해가 다해가는 12월 중순 주말을 하루 앞둔 금요일 저녁에 산길에서 지켜본 저녁노을이 잠시 저를 감상에 젖게 했습니다. 몇 십년간 사랑을 나눈 이와 함께 했던 삶의 애환들이 영상처럼 획획 저를 스쳐 지나갔습니다. 아쉽고 안타깝지만 다시는 재현할 수 없는 애환들을 붙들고 마냥 서러워 할 것이 아니라 이제는 과감하게 저 태양에 실려 서산으로 넘겨 보내고자 합니다. 추억을 묻은 자리에서 다시 움솟는 희망의 단초를 저는 장렬하면서도 단출한 해넘이에서 보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