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망이 좋아 구름도 쉬어가는 백운산.. 백두대간 5 (중재-육십령)


 

                                                                             2007. 9.  30. 흐리고 비 찔끔 
 

                                                                                  꼭지(아내)와 둘이서 
 

                                                                         일출 06:19 / 일몰 18:12 / 음력 8.20

 



                                    월경산과 봉화산, 그 뒤로 고남산과 수정봉까지의 지나온 길이 눈물겹도록 아련하다.


 


 


 

구간별 산행기록 
 

06:25 중기마을

07:05 중치(중재)

07:53 중고개재

09:25-09:50 백운산

11:03 선바위고개(무령고개 갈림길)

11:15 영취산

11:50 논개 생가 갈림길

12:05 덕운봉 갈림길

13:20-13:35 바위전망대 휴식

14:07 북바위

14:35 민령(깃대봉 1.3km)

15:20 깃대봉

15:30-15:40 깃대봉 샘터

16:15 육십령 
 

총 산행시간 : 9시간 50분 (20.47km) 
 

▣ 대간종주 거리 : 중재-육십령 19.07km / 누적거리 101.12km

                            중기마을-1.4-중재-1.8-중고개재-2.55-백운산-3.45-영취산-2.9-

                           큰바위전망대-1.7-977봉-3.6-깃대봉-3.07-육십령 
 

▣ 접근(하산)거리 : 1.4km (중기마을-중치)

▣ 총 산행거리      : 20.47km / 누적거리 116.91km

▣ 식수위치          : 깃대봉 샘터


 

▣ 교      통 : 자가운전 (서대구-서상I.C-육십령) 135km / 1시간 50분소요

▣ 차량회수 : 육십령-중기마을25,000원 (박상희 서상개인택시 010-9963-0094)


 


 

산행개요 (중재-백운산-영취산-덕운봉-깃대봉-육십령) 
 

오늘 진행하는 중재에서 육십령구간의 대간길에는 참으로 사연이 많다.

무령고개 북쪽의 장수군 대곡리 주촌마을은 ‘주논개’가 태어난 곳이며

남쪽의 함양군 지곡리는 조선의 성리학사에 큰 업적을 남긴 동방5현의 한 사람이며

함양선비의 자존심이라 일컫는 정여창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정여창은 김종직의 조의제문으로 발단이 된 무오사화(1498년 연산군4년)에 연좌되어

유배지에서 죽었으며 그 뒤의 갑자사화에 또 다시 연루되어 부관참시라는 끔직한 일을 당하기도 했다.

그의 고택이 현재 함양군 지곡리에 보존되어 있다. 
 

덕유산에서 지리산에 이르는 백두대간 주위에는 어디한 곳 빨치산의 흔적이 없는 곳이 없다.

백운산과, 그 아래 지지계곡도 옛날 빨치산들의 활동무대였으니 무령고개에 얽힌

빨치산 처녀와 국방군 대위의 애틋한 사랑이야기는 지나는 대간꾼들의 심금을 울린다.

 

영취산을 내려와 우거진 산죽밭을 벗어나면 시야에 들어오는 논개의 생가가 있는

장수군 대곡리의 풍경이 정겹고 충절의 여인 논개를 떠올리게 한다.

오늘은 논개에 대한 얘기들을 나누며 대간길을 이어가고자 한다. 
 

이번 코스는 중치(중재)에서 백운산을 지나 영취산, 덕운봉까지는 대간등산로의

정비가 완료되어 편안하게 진행할 수 있었고 가끔 이슬비가 오락가락하여 걷기도 좋았다.

백운산에서는 멀리 덕유산과 지리의 주 능선까지 마음 것 조망을 즐길 수 있어서

지난번 우중산행에 대한 아쉬움이 말끔히 씻어지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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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 쓰고 걷는 편안한 대간 길 
 

한 줄기 소나기가 내린 후에 생기는 황홀한 무지개처럼 그러한 아름다움을 볼 수 있을까?

우중산행에서 우리가 늘 꿈꾸는 것은 비가 그치고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운무사이로

주위의 산군들이 서서히 고개를 들 때, 그리고 맑은 하늘이 비치고 멀리까지 깨끗한 조망이

시야에 들어올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산행을 하면서 그러한 풍경을 기대할 수는 있어도 실제 그러한 풍경을 접하기는 매우 어렵다.

지난번 봉화산구간에서는 요행(?)을 바랐다가 조망은커녕 하루종일 비만 홀딱 맞았다.

그래서 아름다운 대간길을 눈을 감고 걸은 것과 같았으며 그 아쉬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좋은 날만 골라서 산행을 할 수는 없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겠지만 그날 하루하루의 산행에서 자신에게

만족할 줄 알아야할 텐데 언제쯤 그러한 경지에 이를지 의문이다.

그래서 어느 분이 대간꾼에게 백두대간진급기준을 만들어 놓았는지 모르겠다. 
 

날씨는 약간 흐리기는 해도 비온다는 예보는 없었는데 토요일 저녁이 되자 금방 마음이 변해

일요일에는 흐리고 5mm 정도의 비가 내린다고 한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또 비?? 5mm가 올지 50mm가 올지 어떻게 믿어? 
 

차는 육십령에 주차해놓고 택시로 중기마을에 도착하니 약간의 이슬비가 내리고 있다.

중재로 가는 임도길에 떨어진 알밤을 주워 한 주머니 가득 넣고 중치에 올라서니 인천번호의 웬 무소가

꼭대기에 올라앉아 쉬고 있다. 꼭지 왈 “일찍 알았으면 여까지 좀 얻어 타고 올긴데..” 역시 꼭지다운 생각이다.

그렇게 걷는 것이 싫으면서 대간에 따라나서는 그 심보는 무엇인지??


 



                                                                    ▲중치 오르는 코스모스 꽃길


 

 

                                                                                       ▲중치 
 

드디어 산문이다.

대간선배들의 표시기가 맨 먼저 반겨준다. 고마운 리본들...

대간길에는 아무리 리본이 많아도 탓할 수는 없다. 특히 비 내리는 야간에는 그 하나하나가

생명의 등불이 되기 때문이다. 이슬비가 조금씩 내리지만 배낭커버만 쉬우고 진행한다.

오늘은 어떤 풍경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꼭지가 끝까지 잘 갈수는 있을까?

산죽길 그 좁은 통로에서 멧돼지를 만난다면?

약간의 긴장감속에 여러 가지 생각들이 꼬리를 문다. 
 

여름날에는 무척이나 짙은 녹음이었을 굴참나무숲은 서서히 가을빛으로 물들어가고 있다.

잎은 단풍도 들기 전에 말라서 떨어지고 있고 그 낙엽들이 푹신한 융단처럼 산길을 수놓고 있어서

걷기가 더욱 편안하여 동네 공원의 오솔길을 산책하는 기분이다.

가끔씩 나무사이로 중기마을 풍경이 시야에 들어오고 그 뒤로는 구름이 산허리에 걸리어 있다.

심호흡을 크게 한다. 산속의 식물들이 뿜어내는 정기는 언제나 신선하여 인간의 마음을 정화시켜준다.


 



                                                                                  ▲중기마을의 조망

 

 



                                                  ▲중고개재의 4거리 안부, 이곳에서도 중기마을로 하산할 수 있다.

 

 

 

                                           ▲우산을 쓰고 걸어도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는 공원 산책로 같은 대간 길

 


 

꼭지 왈 “대간길이 이 정도는 되어야지.”

지난번에 너무 고생을 시켜서인가 오늘은 꼭지의 중얼거림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굴참나무와 상수리나무가 가득 메우고 있는 백운산 가는 길은 넓고 조용하기만 하다.

불청객이 왔다며 울어대는 새소리도 들리고 가끔은 거미줄이 이마에 다라 붙는다.

그러나 지난번 봉화산구간에 비하면 고속도로와 다름이 없을 정도이다.


 

중고개재를 지나면 백운산까지 고도가 높아 꼭지에게 무척 힘든 구간이 될 거라 걱정했지만

등산로가 너무 잘 정비되어 있고 크게 가파른 길이 없어 오늘은 혼자서도 잘 오른다.

약간 빗방울이 굵게 내리는 지라 우의대신에 우산을 쓴다.

잡목이 없어서 그런지 진행하는데 크게 불편함을 느끼지 못한다.


 

바로 그때 산님 한분이 내려온다. 서로 눈이 마주치고 그분도 반가움에 인사를 건넨다.

초행길 인듯 중재가 얼마 남았냐고 묻는다. 2시간쯤 가야 된다고 했더니 3시30분에 육십령에서 출발했는데

오늘은 복성이재까지 진행한다고 한다. “네에~~~??” 꼭지의 입이 딱 벌어진다.

꼭지가 한번더 뒤를 돌아본다. 32km 꿈의 거리?

비가 찔끔찔끔 내리는데도 불구하고 구름은 하늘 높이 솟아있어서 멀리까지 조망이 트인다.

다행이다. 약간의 오름길이 이어지고 숨이 턱밑에 차오를 즈음 작은 암반에 올라선다.

뒤를 돌아보니 지나온 대간길이 막힘없이 한눈에 들어온다.

 


 

                        ▲월경산과 봉화산, 그 뒤로 오똑한 고남산과 수정봉에서 고리봉까지의 지나온 대간 마루금이 아련하다.

 



                                                                    ▲백운산을 오르며 바라본 장수방향

 

 

 

                                                                      ▲멀리 지리산 주능선의 마루금

 


 

아~~! 감격이다.

지리산 천왕봉에서 반야봉, 만복대에 이르는 대간길이 아스라이 손에 잡힐 듯이 다가온다.

멀리 통신안테나가 보이는 것을 보니 저기가 우중에 진행하였던 고남산인가 보다.

아~ 아~ 저 뒤쪽은 만복대.. 그리곤 바래봉..

그 우측으로는 수정봉, 그래 저 밋밋한 봉우리는 한(?)많던 봉화산인가 보다.

대충 눈대중을 하며 설명을 하니 꼭지도 저 길을 우리가 걸어온 길이냐며 감격해한다.


 

금방 설치한 것으로 보이는 번쩍번쩍한 스텐으로 된 계단을 올라서니 더 환상적인 풍경이 펼쳐진다.

지리산 주능선이 하늘금을 그으며 한눈에 조망되는 곳, 잘 다듬어진 묘가 두기 있다. 그래서 더욱 조망이 좋은가 보다.

그뿐이 아니다. 곧 이어 올라서니 <수고하셨습니다>라는 백운산정상을 알리는 이정목이 인사를 건넨다.

지금까지 대간을 걸으며 사람대신 이정목에게 인사받기는 오늘이 처음이다.

답례를 해야지. “네~ 고생이 많으시네요.~^^* ”

 



                                               ▲백운산 오르는 길에 번쩍번쩍하는 스텐으로 최근에 새로 설치한 계단

 

 

 

                                                              ▲아무리 바라보아도 아름다운 지나온 대간길


 


 

                                                           ▲꼭지에게 <수고하셨습니다>인사하는 이정목

 

 

 

                                                 ▲천왕봉에서 반야봉, 만복대에서 바래봉까지 이어지는 지리산의 마루금

 


 


 

지리산 최고의 조망대 백운산


 

드디어 최고의 전망대라고 하는 백운산, 흰 구름도 조망에 넋을 잃고 쉬어가는 곳이다.

흐린 날씨임에도 운무가 높이 올라 덕유산과 지리산, 지나온 대간길이 파노라마처럼 조망된다.

덕유산 서봉에서 남덕유산, 월봉산, 황석산으로 이어지는 마루금 또한 환상적이지만

유람하듯 흰 구름이 둥실둥실 떠가는 풍경은 참으로 여유로워 보인다.

정상부에는 지리산 주능선을 담은 백운산조망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백운산 정상부

 

 

 

                                          ▲운무에 살짝 가려있는 가야할 덕유산 서봉과 남덕유산, 우측은 황석산 라인 


 

 

                                                          ▲조망안내판과 천왕봉에서 바래봉까지 이어지는 지리산


 


 

                                                                             ▲황석산, 기백산 방향

 

 

 

                                                         ▲백운산 정상석과 가야할 덕유산까지의 대간 길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조망을 즐기며 이곳에서 아침을 먹고 백운산을 내려선다.

아쉬움이 남아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겨우 옮기니 활짝 핀 구절초와 쑥부쟁이가 위안을 준다.

말끔히 정비된 키가 큰 산죽사이로 대간길은 이어지는데 전기톱소리가 요란하게 들리고

작업하시는 분들이 보인다.


 

젊은 분은 없고 모두 60대의 나이가 지긋하신 여자 분들이다.

우리를 위해 땀 흘려 일하시는 분들, 지나가기가 민망하지만 “수고 하십니다.”라는

어설픈 인사말로 그 미안함을 억누르며 지나간다.

그분들의 노고가 있어 오늘 이렇게 편안하게 대간길을 걸을 수 있는 것이다.


 

장의자가 4개 최근에 설치되어 있는 둔덕을 내려서니 선바위고개다.

선바위는 보이지 않고 <←영취산 0.4Km , ↓무령고개 0.7km, →백운산 3.2km> 라는 이정목이

우뚝서서 반겨준다. 무령고개에 가면 야영장과 샘터가 있어서 대간 종주자들이 즐겨찾는 곳이라고 한다. 
 

 



                                                                          ▲잘 다듬어진 산죽길

 

 

 

                                                                             ▲가야할 대간 길

 

 

 

                                                                          ▲가을 빛이 맨 먼저 스며드는 곳 


 


 

                                                                            ▲장의자가 있는 쉼터

 

 

 

                                                                        ▲무령고개 갈림길인 선바위고개

 

 


 


 

산죽에 뺨 맞고, 구절초향기에 취하고..


 

영취산에는 정상석대신 돌탑과 이정목이 반겨준다. 영취산은 금남호남정맥의 분기점이며

동쪽은 낙동강, 서쪽은 금강, 남쪽은 섬진강으로 흐르는 3강의 분수령이다.

잡목으로 별로 조망이 없으나 어차피 운무 때문에 조망이 되지 않는다.

5.16부터 10.15까지 백운산에서 덕운봉까지 백두대간 등산로 정비사업을 한다는

프랭카드가 바람에 나부끼고 있다. 영취산을 내려서니 장안산방향으로 팔각정자가 시야에 들어온다.

언젠가 나도 금. 호남정맥 저 마루금을 밟고 있겠지. 그런 날이 나에게도 찾아올까? 
 

 



                                                      ▲돌탑과 이정목이 정상석을 대신하고 있는 영취산

 

 

 

                                                              ▲등산로 정비사업을 알리는 프랭카드



 

                                                                          ▲장안산 방향의 팔각정자 
 

 

 

                                                    ▲잔잔하게 부서진 나뭇조각이 깔려있는 길.. 역시 대간??

 


 

영취산에서 30분여분 작게 부서진 나뭇조각들을 깔아놓은 푹신한 길을 걸어

산군들의 조망이 아늑하고 억새가 하늘거리는 안부에서 올라서니 <논개생가>를 알리는 이정표가

부서진 채 땅바닥에 나뒹굴고 있다. 그 옆에는 이정목을 다시 세울 때 사용할 나무기둥이 두 개 놓여있다.

이정표는 없으나 덕운봉 갈림길로 짐작되는 작은 암반에서 잠시 휴식하고 걸음을 옮긴다.


 

이곳부터는 등산로 정비가 되어있지 않아 생긴 그대로의 키큰 산죽이 진행을 방해한다.

산죽이 우거지고 어른 키보다 커서 진행하기가 어렵지만 이 길은 그렇게 20여분이나 이어진다.

우중에는 진행하기가 더욱 힘들 것 같은 구간이다.

가끔은 함양군 서상인터체인지와 대진고속도로가 시야에 들어오고

좌측으로는 대곡호와 논개생가가 있는 주촌마을이 낮게 드리워진 운무 아래로 평화롭기만 하다.


 

 

 

                                                                ▲정비되지 않은 생긴 그대로의 산죽길

 

 

 

                                                                                ▲서상방향의 조망

 

 

 

                                                                                    ▲깃대봉 가는길


                                                                           ▲깃대봉 가는길에 뒤돌아본 풍경
 

 

 


 

                                                                                ▲20여분 산죽과의 전쟁

 

 

 

                                               ▲이곳 암반에서 점심을 먹고 뒤돌아본 함양 괘관산과 서래봉 라인 

 


 

20여분 산죽과의 전쟁을 치르고 안부에 올라서니 쉬어가라며 암릉의 전망대가 걸음을 멈추게 한다.

이곳에서 점심을 먹는다. 오늘은 김밥대신 꼭지가 찰밥으로 도시락을 준비해 왔다.

생각보다 맛이 좋다. 다음에도 이렇게 해달라고 꼭지에게 주문한다.

암반을 내려서니 바로 두 번째 만나는 논가생가 이정표.. 특이하게도 땅에 바짝 엎드려 있다.

두꺼운 철판으로 원래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 같다.

<←육십령6.5km, →영취산 6.5km, ↓논개생가 2km, ↑경남 옥산리 3.5km>

유사시에 좌우 양쪽으로도 탈출할 수 있는 곳이다.


 



                                                                 ▲질서,, (논개 생가를 알리는 두번째 이정표) 


 


 

                                                                ▲서상읍내와 대진고속도로의 풍경

 

 

 

                                                                                           ▲북바위

 


 

곧이어 우측으로는 대진고속도로 서상I.C와 시골마을 서상읍내의 조용한 풍경이 시야에 들어온다.

20여분 진행하니 등로 좌측으로 약간 비켜난 곳에 북바위가 나오는데 아쉽게도 운무가 가득하여 조망이 없으나

이곳에서 내려다보면 논개의 생가와 집 안방까지도 훤하게 보일 것 같은 곳이다.

그 옛날, 논개는 가끔 이곳에 올라 마음을 달랬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충절의 여인 주논개


 

논개는 관기가 아니다.

논개는 임진왜란 때 큰 공적을 남긴 위대한 장수인이다.

그러나 논개와 그녀의 가계, 성장과정, 그리고 신분에 대해 정확히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논개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621년 어우당 유몽인이 저술한 “어우야담”에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문헌에는 논개의 가계와 성장과정에 관한 기록이 전혀 없기 때문에

그녀에 대해 많은 억측과 이론이 제기되어 왔다.


 

그러던 중 1700년대 초에 진주 사람들이 논개의 순절을 포양하도록 계청하였던 바, 조정에서는

그녀의 가족을 찾아 포상하라는 윤허가 있었다. 경상우병영에서는 경상도 일대에 관문을 띄워 사문했으나

논개의 흔적을 찾을 길이 없어 포상하지 못했다. 그 뒤 꾸준히 논개 사적 조사가 진행되어

1700년대 중반부터 권적의 “경상우병사 증 좌찬성 최공의 시장”, “호남절의록”, “호남상강록”, “호남읍지”,

“동감강목”, “일휴당실기“, ”매천야록“등의 문헌과 고노상전 200년의 구전설화등이 쏟아져 나오면서

논개의 가계와 성장과정 등의 행장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를 정리해보면 논개는 이름, 호는 의암, 성은 신안 주씨이며,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주촌 마을에서 아버지 주달문과 어머니 밀양 박씨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특이하게도 논개는 4갑술(갑술년, 갑술월, 갑술시-1574.9.3밤)의 사주를 타고 태어났다.

아버지 주달문은 딸아이의 사주를 짚어보고 계집애지만 크게 될 인물이라고 기뻐하였다.

이름을 논개라고 지은 것은 딸을 술시에 낳았으니까 개를 놓은 것과 같고, 거꾸로 읽으면

‘놓은 개’, 즉 ‘논개’가 되므로 그렇게 이름 붙이면 역신도 시샘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논개의 생가가 있는 장수군 대곡리 주촌마을

 


 

논개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영특하여 부모의 가르침을 잘 따랐으며 나이에 비해 성숙하였다.

가난했지만 화목한 가정이었다. 논개 나이 다섯 살 되던 해에 뜻하지 않게 아버지를 여의었다.

의지할 곳 없던 모녀는 한 마을에 사는 숙부 주달무 집에 몸을 의탁하게 되었다.

그런 어느 날, 숙부는 노름으로 돈을 탕진하고 이웃 마을에서 밥술깨나 먹고 사는

김풍헌에게 찾아가서 조카를 민며느리로 몰래 팔고 달아났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논개 모녀는 부랴부랴 외가로 일시 피신했으나 김풍헌의 제소로

장수 관아로 끌려가 재판을 받게 되었다. 이때의 재판관은 최경회 현감이었다.

최 현감이 자초지종을 캐보니 달아난 숙부 주달무에게 죄가 있다는 것을 알고 논개 모녀를 무죄 방면했다.

그러나 갈 곳 없는 두 모녀를 최 현감은 내아에서 잔심부름을 하면서 지내도록 배려했다.

이런 운명적이 인연으로 최경회와 논개는 만나게 되고 최 현감집 식솔이 되었다.

논개는 잔심부름이 끝나는 대로 틈틈이 김씨 부인이 일러준 충효열의 뜻을 가슴 깊이 새겼다.


 

세월이 흘러서 논개 나이 17세가 되던 1590년 최경회가 담양부사로 재직할 때 두 사람은 부부의 예를 올렸다.

그 해에 최경회는 모친상을 당하여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 화순으로 가면서 논개를 고향 장수로 보냈다.

2년뒤 임진년(1592)에는 역사상 980여 회의 외침 중 가장 처참했다는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상중인 최경회는 전라우도 의병장이 되어 옛날 현감을 지냈던 장수에 들러 의병을 모집하고 논개도 만났다.

실로 2년 만의 해후였다. 최 의병장이 월강리 앞 들판에 의병청을 설치하고 의병들을 훈련시킬 때

논개는 동네 부인들을 모아서 의병들의 수발을 들었다.

최 의병장은 훈련된 500여 정예부대를 골자부대로 이름 짓고 무주 쪽으로 진격한 뒤 무주 우지치전투에서

첫 대승을 거두고 여세를 몰아 산음, 지례, 개령, 성주등 경상도 일대를 누비면서 가는 곳마다 승리를 거두었다.


 

1592년 10월, 1차 진주성 전투를 승리로 이끌게 된 데에는 최경회가 이끄는 호남 출신 의병들의

성 외곽에서의 맹활약이 크게 주효했던 것이다. 최경회는 그간의 의병활동 공로를 인정받아

1593년 4월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영전되어 진주성으로 입성했다.

그 소식이 장수에 머물고 있던 논개에게도 들려왔다.


 

논개는 벅찬 가슴을 억누르고 한시 바삐 진주로 떠날 채비를 서둘렀다.

남복으로 변장을 하고 진주로 가는 도중에는 많은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오랜만에 논개를 본 최 병마절도사는 한없이 반가웠지만, 회포를 나눌 겨를이 없었다.

10만이 넘는 왜군이 진주성으로 몰려오고 있다는 첩보를 접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대비책을 강구하느라 동분서주해야 했던 것이다.


 

6월 19일, 드디어 왜군은 10만여 대군을 사방으로 나누어 진주성을 본격적으로 공격해왔다.

11일간의 피비린내 나는 혈투 끝에 진주성은 무너지고 7만에 가까운 민관군의 시체가 산을 이루었다.

성은 아수라장으로 초토화됐다. 최경회, 김천일, 고종후 등 진주성 3장사는 성이 함락된 데 대한 책임을 지고

왕이 계신 북쪽을 향해 하직인사를 올린 후 도도히 흐르는 남강에 투신 순국했다.


 

한편 전투가 한창일 때 논개는 성안에서 수발을 열심히 들었지만, 성을 빠져나가

후일을 도모하라는 최경회의 엄명에 성을 빠져나와 외진 곳에 은신하면서 전황을 살폈다.

성이 함락되고 최경회가 순국했다는 소식을 접한 논개는 무엇인가 비장한 결심을 했다.

마침 칠월 칠석에 왜군이 촉석루에서 진주 관기들을 불러놓고 전승 축하연회를 갖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논개는 이때를 놓칠세라 마음에 다지면서 관기들 틈에 끼여 연회장까지 들어갈 요량으로 관기들이

촉석루에 들어가는 시간과 길목 등을 정확히 알아두었다.

그러고는 몸에 지니고 있던 금붙이로 여름옷 한 벌을 곱게 장만하고 가락지 등 필요한 물건도 구입했다.


 

드디어 그날이 왔다. 논개는 관기처럼 곱게 단장하고 시간에 맞춰 길목에 서 있었다.

논개는 관기들이 촉석루를 향해 들어갈 때 뒤에서 천천히 따라 가다가 발길을 돌려 촉석루 아래

강가의 바위 쪽으로 내려갔다. 연회장으로 가면 정체가 탄로 날 위험성이 있으니 조금 떨어진 곳에서

요염한 자태를 드러내어 상대방을 유인해 보자는 계략이었다.


 

연회장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분위기가 무르익어 갔다.

술에 취한 왜장들이 문득 강가의 바위 쪽을 내려다보았다. 웬 선녀처럼 아름다운 젊은 여인이

강가의 바위 끝에 서서 자기들을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는 것이었다.

왜장들은 한눈에 반하여 금시라도 여인에게 달려가고 싶었지만 정체를 몰라서 망설이고 있었다.

돌연 육척장신의 체격이 장대한 왜장 하나가 논개쪽으로 다가가면서 자기에게로 오라며 소리쳤다.

논개는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손짓을 하면서 왜장을 유인했다.


 

왜장은 논개의 아름다운 자태에 매혹되어 자기도 모르게 논개 앞으로 다가갔다.

논개는 미소를 지으며 손에 가락지를 낀 팔을 벌려 기쁘게 맞이하면서 왜장을 껴안으며 도도히 흐르는

남강에 투신 순절했다. 논개가 살해한 왜장은 힘세고 용맹스럽기로 유명한 맹장 게야무라 로쿠스케였다.

논개가 순절한 바위를 후인들이 의암이라 이름 짓고 논개와 동일시하여 호가 되었다.


 

이상이 위에서 논의된 문헌, 설화 등을 집약해서 구성한 의암 주논개의 일대기이다.

앞으로는 논개의 가계, 성장과정, 신분 등에 관해서는 더 이상 우를 범하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

나아가 의암 주논개를 사랑하고 공경하는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은 첫째로 제 몸을 불살라서 주변을 밝히는

인애정신, 둘째로 패권주의에 맞서 끝내 항거한 의용정신, 셋째로 사대부도 아닌 아녀자의 몸으로

나라를 걱정하고 지아비를 사랑한 충열정신은 만인의 귀감이 되는 바,

그 위대한 교훈을 세상에 널리 홍보하여 어린이에서 어른에 이르기까지 본받게 하는 것이다.          

           -2001. 8. 20. 장수문화원장 김진영-  출처 : http://www.nongae.or.kr/


 

 

 

 

                                                                          ▲민령에 세워진 이정목

 



 

 

 

                                                                           ▲깃대봉 가는길의 억새군락지

 

 

 

                                                                        ▲대진고속도로 서상I.C방향의 조망

 


 

북바위를 내려서니 바람에 실려온 구절초의 향기가 코끝에 스며들고 억새는 바람에 춤을 추며 운치를 더한다.

꽃은 바람을 머금어야 아름다운 태를 지닌다고 했다. 억새도 마찬가지다.

<임도 0.8km / 깃대봉 1.3km> 이정목이 세워져 있는 민령에서 약간의 오름이 이어지고

우측 억새너머 서상읍내의 풍경이 계속 시야에서 떠날 줄 모른다.

운무가 낮게 드리워진 대간길, 가을빛이 드리워진 낙엽위를 걷는 꼭지의 뒷모습도 정겹다.


 

3개의 깃대가 세워져 있는 깃대봉, 덕유산의 조망이 좋다고 했는데 운무로 인하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조망안내판의 조망으로 대신하며 서둘러 내려선다.

10분여 내려서니 등산로 바로 우측에 샘터가 있고 장의자가 두개 놓여있다. 샘물은 콸콸 쏟아져나오는 것이

맛 또한 좋아서 지리의 임걸령샘과 비교해서 전혀 손색이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깃대봉이 가까울수록 운무가 더욱 짙게 드리운다.

 

 

 

                                                                                     ▲깃대봉 
 

 

 

                                      ▲임걸령 샘터와 비교해서 전혀 손색이 없는 맛이 좋고 콸콸 솓아져 나오는 깃대봉의 샘터


 


 

                                                        ▲마사토 흙을 깔아놓은 대간의 맨발지압등산로

 

 

 

                                                                    ▲오늘의 산행종점 육십령의 날머리

 

 

 

                                                                         ▲확장공사가 한창인 육십령 고개

 


 

깃대봉에서 육십령까지는 지루하고 먼 길이라고 했으나 지압할 수 있도록 부드러운 마사토 흙을

깔아놓은 곳도 있고, 급경사 없는 유순한 내림길이라 전혀 지루한 줄 모르고 육십령에 도착한다.

육십령에는 도로 확장공사가 한창이고 예전의 육십령표석은 보이질 않는다.

“이제 대간 일등병이다.”

아니지 육십령휴게소 할매막걸리를 먹어야지 일병진급을 시켜준다기에

만사 제쳐놓고 쪼르륵 달려간다.

“할매! 막걸리 한 병 주소.”


 

  - 끝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