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산


 

        *산행일자:2009. 4. 15일(수)

        *소재지  :경기 의왕/수원

        *산높이  :백운산567m, 모락산385m

        *산행코스:계원대 옆 반도아파트-모락산-백운공원 고개-공원묘지

                        -백운산-광교헬기장-북수원톨게이트-1번국도

        *산행시간:9시34분-15시(5시간26분)

        *동행    :나홀로

 


 

   고스락에 앉아 흰 구름과 같이 노니는 신선들을 알현하려면 얼마나 높이 올라야 할까?

산마루에 흰 구름이 항상 같이 한다하여 백운산(白雲山)으로 불리는 산만도 “한국의 산하” 사이트에 총 아홉 산이 실려 있습니다. 이 중 인천의 백운산이 가장 낮은 해발256m이고 높게는 함양의 백운산이 산 높이가 1,279m에 이르니 어느 높이 이상이라야 구름 속의 신선을 만나볼 수 있다고 딱 잘라 말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제 오른 의왕의 백운산은 장마철을 빼고는 흰 구름이든 먹구름이든 산마루에 걸터앉은 어떤 구름도 저는 별로 보지 못했습니다. 이름이 좋아 백운산이지 구름도 쉬어가지 않는 이 산을 꼭대기까지 오른다고 신선을 만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함양과 광양의 두 백운산처럼 해발 1,200m가 넘는 고산도 아니고, 정선과 횡성의 백운산처럼 백두대간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구름들을 붙잡을 수 있는 것도 아니며, 포천의 백운산처럼 경기도 최고봉들인 화악산과 명지산, 그리고 국망봉이 가까이 있어 흰 구름을 꿔올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의왕의 백운산은 산 높이도 600m가 채 안 되는 낮은 산인데다 주위의 산들도 다들 고만고만합니다. 이 산 정상에 군부대가 자리한 것도 따지고 보면 이 산이 백운산으로서 이름값을 할 만큼 충분양의 흰 구름을 불러 모으지 못했기에 대신 들어앉은 것입니다. 그나마 저 아래 백운저수지 조차 없었다면 산마루에 군사기지만 달랑 보이는 이 산을 신선들이 노닌다는 흰 구름의 백운산으로 부르기가 더 민망했을 것입니다.


 


 

  의왕의 백운산도 어제는 모처럼 이름값을 했습니다.

한반도 남단 전역에 펼쳐진 온난 전선이 비구름을 만들었는데 다행히도 이 고마운 전선이 여기 백운산을 비껴가지 않아 모처럼 이 산에도 구름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물론 신선이 좋아하는 흰 구름은 아니었지만 지난 몇 달간 너무 가물어 온 산하가 힘들어하던 중이어서 백운의 흰 구름보다 단비를 몰고 올 비구름이 몇 십 배 더 고마웠습니다. 이날 오후에 비가 틀림없이 내린다는 기상청의 예보를 듣고도 이를 무릅쓰고 백운산을 오른 것은 모처럼 이름값을 한다고 기뻐하는 이 산의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보고 싶어서였습니다. 기상청이 약속한대로 정오를 넘기자 이산에 몰려든 비구름이 급작스레 불어난 몸무게를 이겨내지 못하고 이내 빗방울을 뿌려대기 시작했습니다.


 

  그토록 기다렸던 단비였건만 저는 10분을 참아내지 못했습니다. 

옷이 비에 젖자 빠른 속도로 한기가 느껴져 산 오름을 잠시 멈추고 준비해간 비옷을 꺼내 입었습니다.  사람은 항온동물이어서 변온동물처럼 바깥기온의 변화에 맞추어 체온을 조절할 수 없기에 옷을 입거나 벗어 대응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방수복을 꺼내 입은 것도 저체온증을 막기 위해서였기에 이 산의 신령께 무례를 저지른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온 몸으로 기꺼이 비를 맞고 있는 다른 산식구들보기가 영 미안했습니다. 때 맞춰 막 돋아난 연록색의 연약한 새 잎들도 온 몸으로 비를 맞고 있었고, 아직은 잎이 우거지지 않아 비를 가릴만한 곳을 찾아 몸을 숨기기가 쉽지 않은 새들도 점점 굵어지는 비를 고스란히 맞으면서도 푸념하거나 저처럼 유난을 떨지 않았습니다.


 

  아침9시34분 계원대 옆 반도아파트의 사각정에서 하루산행을 시작했습니다.

지난주 목요일 반년가까이 허리에 찬 보호대를 풀고 나서 어느 산을 오를까 많이 고심했습니다. 욕심 같아서는 몽가북계의 능선 길을 걸어 추락사고로 중단한 한북화악지맥 종주를 이어가고 싶었지만 아직은 무리인 것 같았고, 이산들보다 많이 낮은 이천의 문수산을 올라 한남앵자지맥에 첫발을 들일까 생각해보았지만 이 또한 군부대 옆을 지나며 초병들과 승강이를 하는 것이 내키지 않아 미뤄두었습니다. 집에서 가까우면서도 한 번 다녀와 길 잃을 염려가 없고 그리 높지도 않으며 험하지도 않은 산을 고르다가 의왕의 모락산과 백운산을 이어 오르기로 하고 산본 집을 나섰습니다. 들머리에서 모락산 주능선에 오르는 길이 가팔라 스틱 덕을 단단히 보았습니다. 두 달 전부터 두 손 모두 스틱을 잡고 산행한 것은 혹시라도 미끄러져 간신히 치유한 허리를 다시 다치지 않을까 염려해서인데 이제는 많이 익숙해져 그 덕을 단단히 보았습니다. 사각정에서 완만한 길을 오르다 4-5분 후 산신각을 지나서부터는 가파른 통나무 계단 길이 시작됐습니다. 반시간 넘게 비알 길을 올라 능선 길의 작은 바위 사인암에 다가서는 것도 겁이 났습니다. 어린아이들도 쉽게 오르내리는 나지막한 사인암에 겁을 집어 먹은 것은 지난 가을 바위에서 떨어져 척추를 몇 군데 분질러먹는 사고를 당해서인데 바위에 대한 병적인 공포심을 어떻게든 극복하지 못한다면 옛날처럼 처 혼자서 종주산행을 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10시36분 해발385m의 모락산을 올랐습니다. 

사인암에서 20분 남짓 남서쪽으로 뻗어나가는 능선을 따라 걸어 오른 정상에서 태극기가 휘날리는 것을 보자 이 산을 충(忠)의 산(山)으로 불러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종대왕의 넷째 아들 임영대군이 단종을 쫒아내고 왕위에 오른 수양대군의 불충에 반감이 생겨 이 산에 올라 중국의 옛 수도인 낙양을 사모하며 소일했다 하여 모락산(慕洛山)의 이름을 얻은 이 산의 정상에 백제시대 한성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석성인 모락산성이 축조되었으며 이 성은 당시 백제의 주성인 풍납토성의 배후거점 성으로 큰 역할을 해냈다 합니다. 이토록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인 이 산을 후손들도 그냥 보아 넘기지 않았습니다. 한국전쟁이 한창 진행 중인 1951년 두 번에 걸친 모락산 전투에서 우리 국군은 중공군을 격퇴시키고 1번국도와 47번국도의 병참선을 확보해 수도서울을 재탈환했습니다. 정상의 바위는 진안의 마이산처럼 자갈이 듬성듬성 박혀있는, 이 근처 산들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역암이어서 신기했습니다. 정상에서 내려가 모락산전승기념비가 세워진 갈림길로 되돌아갔습니다.


 

  11시38분 백운동산 고개 마루로 내려섰습니다.

전승기념비 갈림길에서 백운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남동쪽으로 뻗어나가 오른 쪽 길로 내려섰습니다. 철선울타리를 두 번 넘어 능선 길을 이어가다 가파른 내리막길로 한참 동안 내려가 능안마을/오메기 양쪽으로 길이 갈리는 안부오거리에 내려섰습니다. 안부에서 바로 앞에 보이는 봉우리를 지나 왼쪽으로 난 길이 경사가 완만했고 겨우 내내 헐벗었던 넓은잎나무들의 가지 끝에서 연록색의 나뭇잎들이 부지기수로 돋아나 이를 본 제 발걸음도 가벼웠습니다. 산불감시초소를 지나 고개 마루로 내려선 후 왼쪽 아래 백운동산의 표지석을 사진 찍은 후 다시 고개마루로 올라와 왼쪽 백운산들머리로 들어섰습니다. 남동쪽으로 이어지는 백운산 줄기를 따라 걸어 헬기장과 송전탑을 지나 공원묘지에 이른 시각이 11시56분이었습니다. 


 

  12시57분 해발567m의 백운산에 올라섰습니다.

공원묘지에도 어김없이 봄이 찾아왔습니다. 묘지 앞의 향나무(?) 잎들이 몰라보게 푸르게 변했고 묘역 위의 벚꽃들은 만개한지 벌써 며칠이 지난 것 같았습니다. 공원묘지를 지나며 수많은 사람들에 회자되는 T. S. 엘리어트의 시(詩) “황무지(荒無地)”가 자연스럽게 떠오른 것은 이 시의 첫 장이 “사자(死者)의 매장(埋葬)”으로 시작되는데 공원묘지가 바로 사자(死者)들이 떼로  매장(埋葬)된 곳이기 때문입니다.


 

         死者의 埋葬                                    The Burial of The Dead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April is the cruellest month,

  라일락꽃을 죽은 땅에서 피우며          Breeding Lilacs of the dead land,

  추억과 욕망을 뒤 섞고                       Mixing memory and desire

  봄비로 활기 없는 뿌리를 일깨운다.     Stirring dull roots with spring rain. 

  .......                                                 ......


 

  공원묘지에서 15분쯤 올랐다가 조금 내려가자 오른 쪽으로 오메기가는 길이 갈렸습니다.

길가의 키가 훤칠한 소나무들을 사진 찍은 후 이어가는 백운산 길은 엄청 가팔랐습니다. 오름 길에서 만난 빗방울이 점점 굵어져 배낭과 옷이 금방 젖어들고 급작스레 한기가 느껴졌습니다. 된비알 길을 막 올라서서 발걸음을 멈추고 비옷을 꺼내 입은 후 선채로 도너츠를 꺼내 먹었습니다. 20분 가까이 더 걸어 백운산에 오르자 빗줄기가 약해지고 안개가 걷히기 시작했습니다. 이 비를 맞으며 한남정맥을 종주하는 두 산객에 사진을 찍어준 후 지지대 고개로 향했습니다.


 

  13시54분 광교헬기장에 다다랐습니다.

백운산 정상에 자리한 군사기지를 왼쪽으로 돌아 미군부대 헬기장으로 내려갔습니다. 하산 길의 시멘트계단 길도 오랜만에 비를 맞아 시원해 하는 것 같았습니다. 백운산에서 남서쪽으로 뻗어 내려가는 산줄기는 지지대고개를 거쳐 김포의 문수산으로 이어지는 한남정맥으로 4년 전에 한 번 종주한 길인데다 길도 넓게 잘 나있고 곳곳에 표지목이 서 있어 안개가 짙게 끼었어도 조금도 걱정되지 않았습니다. 밧테리를 갈아주라는 메시지가 계속 떠 더 이상 사진 찍기를 포기하고 메모를 남기고자 했으나 쉬지 않고 내리는 비로 이 또한 여의치 못해 이번 산행기는 부실을 면키 어렵겠다 싶었습니다. 정상 출발 한 시간이 다 되어 광교헬기장에 올라서자 4년 전과 마찬가지로 지지대고개 길을 열어놓지 않아 이번에도 몰래 이 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잘 다듬어 놓은 이 길을 언제까지 묶어둘지 모르겠지만 아무리 넓은 길이라도 열려있어야 비로소 길이 됨을 관계당국에 고언을 드립니다.


 

  15시 정각 1번국도가 지나는 의왕버스정류장 앞에서 하루산행을 마쳤습니다.

광교헬기장에서 지지대로 이어지는 넓은 길을 비를 맞고 걷는 사람은 저 혼자였지만 쉴 새 없이 내리는 빗소리가 참으로 리드미칼하게 들렸고 이 비를 맞는 나뭇잎들도 그새 푸르름을 더해 생기가 돌았기에 이들과 묵언의 대화를 나누며 걷는 저 또한 활기가 넘쳤습니다. 영조 때의 지리학자 여암 신경준 선생은 “길에는 주인이 없다. 그 위를 가는 사람이 주인일 뿐이다.”라고 말씀하셨다 합니다. 이 말씀은 길은 어느 누구에게나 똑같이 항상 열려있어야 한다는 길의 개방성을 강조한 것으로 모든 기회가 모든 사람들에 동등하게 열려있는 민주사회가 아니고서는 실현되기 힘든 말씀입니다. 미국이 독립을 선언하기 6년전인 1770년에 산경표의 기초가 되는 동국문헌비고를 편찬하신 여암선생이 얼마나 선각자이셨던가는 이 말씀 한마디로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왼쪽 아래로 청련암 길이 갈리는 안부에서 조금 더 걸어 범봉에 올라섰습니다. 얼마 후 내려선 수의사거리에서 오른쪽 의왕 길로 내려설까 하다가 그냥 지지대고개로 향했습니다. 1번 국도에서 영동고속도로로 들어가는 진입로를 통과해야 지지대고개에 이르기에 북수원 톨게이트가 바로 아래 보이는 절개면 위에서 톨게이트 오른쪽의 진입로 갓길로 내려섰습니다. 차들이 쌩쌩 달리는 이 길을 통과해 지지대고개로 가는 것이 무리다 싶어 그냥 갓길을 따라 걸어 약 10분 후에 1번국도 앞 버스정류장에 다다랐습니다.


 

  백운산을 오르내리며 맞은 4월은 제게는 하나도 잔인하지 않았습니다.

이번에 내린 단비로 메마른 대지에 뿌리박고 있던 산속의 생명체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고 일어나 다 같이 생명을 찬미하는 노래를 부르는 듯 했습니다.  그래서 T. S. 엘리어트가 읊은 그대로 라일락꽃을 죽은 땅에서 피우며 추억과 욕망을 뒤섞고 활기 없는 뿌리를 일깨운다 해도 4월이 잔인하지 않은 것은 제가 오른 백운산은 T. S. 엘리어트가 황무지의 심볼로 여긴 황량한 도시 런던이 아니고 하느님이 만드신 나무들이 뿌리내려 살고있는 산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산으로 가는 길이 모두에게 열려 있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