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편의 “우생순”을 꿈꾸는 봅슬레이더들(백덕산)


 수,목(水,木)날 티브이에선 강원지방에 30~60미리의 눈이 내렸다고 호들갑(?)을 피워 난 또 설국의 아기자기한 데자뷰에 빠져들고 있었다.  하여 인터넷 서핑을 하였고 일요일에 백덕산을 예약했다는 ‘봉산인’들의 카페를 찾아 노크를 했는데 이미 만석이라. 미친 척 메시지를 띄웠고 금요일 저녁때 전통을 시도했더니 회장님께서 ‘불편한 자릴망정 좋다면 오라’고 승낙을 하지 않겠는가.

 

일요일, 새벽을 몰아내며 버스(26번 자리를 내 줘 황송했다)에 올랐는데 비발디의 사계 중에 “겨울”편 바이올린 협주곡까지 선물(해설을 곁들어)해 주고 있었다. 헌데 겨울 분위기에 막 젖어들려는 참에 7~8분의 연주는 끝나버렸다. ‘뭔가 더 있겠지’ 하는 나의 기대는 기대일 뿐 버스는 문재터널 주차장에 서고 눈밭에, 흰 설국에 우리를 퍼낸다.

아쉽던 겨울분위기를 이제 맘껏 포식하라는 심보였다.

 

봉산인들을 처음으로 따르는 난 그들의 발 뒤굽치에 눈길을 멈추며 가파른 산행을 시작하고 있었다. 스패츠와 아이젠에 의지한 나는 30여분 눈길을 더듬다보니 이마에 땀이 송송 맺고, 그 ‘헉헉’대는 소리를 늘씬한 몸짱 삼나무가 에워싸 지켜보고 있는 거였다. 훤칠한 키를 아스라이 하늘에 닿았는데 이파리하나도 없는 맨몸으로 수많은 잔가지를 뻗혀 서로가 엉킨 체 어지럽게 파란 하늘에 거미줄을 치고 있었다.

 

하도 많은 몸짱의 그들에 식상하며 30여분을 눈 카펫 길을 오르니 삼나무 대신 누더기 옷을 걸친 가문비나무가 떼거지로 몰려온다. 삐쩍 말라 영양실조라도 걸린 듯 제 멋대로 휘어졌는데 하얀 피부가 갈라지고 터서 그대로의 멋을 뿜어낸다. 그들에 취해 어느새 1125고지에 닿았다. 오른편으로 사자 산을 오르는 길목이지만 입산 통제란다.

 

그대로 암릉을 향하는데 춥지도 덥지도 않은 날씨 탓에 눈발은 무르지도 얼음알갱이도 아닌 미세한 가루눈이라. 그들은 나의 발아래서 ‘뽀드득 뽀드득’신음소리를 내며 신경을 곧추세우게 한다.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내는 소리 - 그 신음에 몰두하다보니 일도일념에 드는가 싶다. 어지간히 때껍짝 끼지 않았다면 행선(行禪)중에 돈오(頓悟)하지 말라는 법도 없으련만 세속에 문드러질데로 문드러진 내겐 어림 반 푼도 없는 해괴망측이려니-.

허나 모를일, 이곳은 적멸보궁이 자리한 정토의 산세(법흥사)가 아닌가 말이다.

 

완만한 능선에서 그런 생각에 발길을 옮기는데 흰 솜이불을 치켜들고 검녹색 산죽이 비웃기라도 하는 듯 이죽거린다. 아니 잊을만하면 나타나서 비아냥댐은 오늘 산행이 끝날 때까지 줄곧 이어지고 있었다. 고얀 것들!

당재를 지나 작은당재에 이르는 길목엔 허허한 나목들을 거느린 아름드리 졸참나무가 헬 수 없을 나이만큼 위세를 떨치고 있었는데 허우대완 달리 속은 텅 비워있기 십상인지라 나이 먹음의 허무를 실감케 한다. 짐짓 그들 옆에 고사목 되어 살점 다 뜯기고 뼈골만 남은 앙상함이 나무 같지 않음이라. 죽음은 곧 자연이라 그 주검마저 아름답다.

 

이따금 우뚝 선 푸른 잣나무가 흰눈 밑이 옥토임을 증좌하고 있었다. 1275고지, 삼거리에 들자 꾀 넓은 흰 카팻분지에 인해(人海)들로 오색찬란하다. 시침이 2자에 모아지기 직전이라. 어디서 와 모였는지 모두가 기갈 채우느라 소음공화국을 만들고 있음이였다. 난 내친김에 정상을 향했다. 정상을 오르는 길목은 암릉인지라 쌓인 눈도 가늠키 어려워 그 많은 사람들이 오르고 내렸건만 눈두덩에 빠지기 일쑤였다.

 

정상(1348.9m)에서 조망한 사위는 가히 먹물 묻힌 붓 한 자루로 화선지에 죽죽 그어대고 점 찍어댄 장대한 묵화병풍밖에 없었다. 서쪽에 젖꼭지처럼 오돌한 선이 치악산이고 또 오대산, 희미한 선이 소백산이란다. 먹물선과 점 이외엔 그 흔한 산골마을 하나 그리지 않았다.  하늘은 꾀 푸르고 햇살은 뉘엿거리고 있었는데  간밤에 누가 거울을 빻아 가루를 뿌려댔는지, 아님 다이아몬드 광석가루가 눈에 섞여 내렸던지 가까운 능선자락에서 무수히 발광하고 있는 것은 무슨 조화인가?

 

발길을 돌린다. 예의 나도 아까 질펀한 오찬파티장 갓자락 바위 밑에 방석을 깔았다. 2시를 훨씬 지나치고 있었다.

한사코 마다했던 보온병(무겁다고)의 인삼차가 따뜻하니 오장육보가 온기에 안도한다. 어거지로 떠민 아내생각이 나서 문자메시지 한 통을 선사했다.

 

먹골재 쪽으로 몸뚱이를 튼다. 1225고지까지는 거대암석마을이어 눈두덩길이 초긴장이라. 行禪한답시고 일념으로 내 딛다보니 1180고지까지 안산했겄다. 허나, 아뿔싸~! 숨겨진 눈요기 거리는 이제부터였다. 대구에서 온 청년 십여 명이 봅슬레이드 경주를 하느라 신명이 나 있었다. 100m는 거뜬할 S자를 연이어놓은 내리막길이 봅슬레이드 경기장이라.

 

갓길로 비켜 덩달아 즐기다 은근히 시샘이 솟더니 슬슬 만용끼가 발끈거린다. 비닐방석을 꺼내 4단 접이를 2단접이로 펴서 비닐봉지(작아서)에 넣곤 엉덩이에 깔았다. 두 발을 힘껏 굴러 쳐들기 무섭게 미끄러진다. 그 가속력을 어쩌질 못하고 설벽(雪壁)으로 돌진했다. 일어나 털고 보니 겨우 S자 한 코스도 돌파하지 못했다. 오기로 다시 엉덩이를 방석에 얹는다. 갸우뚱 뒤뚱거리다 또 설벽 가이드라인을 뭉개버렸다.  헌데 그 친구들 S자 서너 개는 식은 죽 먹기라. 젊음은 좋은 거! 그 친구들은 작정을 했던지 비닐비료포대로 두 명씩 짝지어 완주를 하고는 다시 기어오르곤 하는 거였다.

 

어슬렁어슬렁 내려오면서 즐거운 상상으로 풋풋 웃는 나였다. 그래 맘껏 즐겨라. 즐기다보면 훌륭한 봅슬레이더가 되지 말란 법도 없잖은가. 얼만 전 장비도 없이 미국까지 건너가 봅슬레이드 경주에서 주최 측 장비를 대여하여 입상했다는 신나는 소식이 떠올랐다. 그렇다. 어떻게 해서든 달인이 되면 되는 게다.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는 성적을 내면 누군가는 그걸 모티브로 영화를 만들어 우리들에게 또 한 편의 “우생순(우리 생에 최고의 순간)”을 선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그새 너댓시간 동안에 몸뚱이를 그렇게나 살찌울 수가 있었을까? 들머리에서 만났던 삼나무들이 통통하게 살을 붙이고 키도 훨씬 키운 체 도열해 있지를 않는가! 나는 우쭐하여 그들을 사열하며 콧노래를 불렀다. 그들의 전송을 받으며 먹골 날머리에 가까이 왔었는데 뜬금없이 거석상이 내 앞을 가로막는다. 고개 들어 보아하니 어디선가 낯익은 모습이라.

 

한참을 골 굴리다보니 영화(라파누이)에서, 스냅사진에서 보았던 멀리 남태평양의 이스트 섬에서 떵떵거렸던 거석 상-모아이(Moai)인지라. 헌데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꼬?

하 궁금하여 그가 버티고 서있는 길목안을 기웃해 보니 산 밑에 바짝 붙은 초라한 집엔 인기척이 없다. 살피니 마당의 눈 위엔 인적은 없고 짐승 발자국만이 한가하다. 주인은 언제 뭣 땜에 가출 했을꼬? 다시 모아이를 쳐다보니 얼굴에 수심이 역역하다. 졸지에 망부석이 되 버린 게다. 그렇더라도 낸들 무순 방책이 있을 리 없어 슬금슬금 발을 땠다.

 

무거운 몸 버스에 부리고 있으니 셔츠에 벤 땀이 식어 가는지 한기가 돋는다. 그 때 회장 왈, 음식이 다 됐으니 목을 축이란다. 버스 옆에 급조한 노천주방에서 무우와 오뎅을 잡아먹은 수제비 한 사발을 받아들었다. 근데 이 걸쭉한 퓨전음식의 맛이 별미라. 더구나 그 놈이 뱃속을 후벼 들어 시장기와 추위까지 몰아내니 영양가도 보통은 넘겠다 싶었다.

 

나른한 몸 버스에 파묻고 오늘산행을 되새김해 본다. 첫걸음부터 버스에 오르기까지 흰 카펫으로 단장한 길을 언제 걸었는지 오늘 아니곤 기억이 없다. 아니 종일 눈 덮이지 않은 땅을 본 적도 없다. 명실상부한 설국의 하루였다.

 

“걷는 것만큼 멀리 있던 풍경들이 내 눈 앞으로 다가옵니다. 그 풍경은 이야기를 잉태하고 그 얘기는 다시 우리를 걷기의 역사 그 현장으로 인도 한다” 고 갈파한 레베카 솔닛을 생각한다.

새벽을 달리기를 네 시간, 산에 들여 놓은 발걸음 한 걸음씩 옮기길 다섯 시간동안에 백덕산은 자기의 가슴을 활짝 열고 숱한 이야기 거리를 내게 안겨 주었고, 그 이야기는 다시 내 입으로, 기록으로 역사가 되어 우리를 다시 오게 함인 것이다.

회장님 후의에 감사드린다.  

                     08. 01.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