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 따라 고양산, 심학산, 정발산산행/ Photo 에세이
(2007.5월4, 6일/ 고봉산- 심학산- 정발산/ 나 홀로 산행)

*. 산 이름 속에 묻혀 있는 사연 
 
이름은 우리들의 얼굴이다.
우리들은 이름 석 자로 인하여 만나는 사람의 성씨(姓氏)를 알게 되고, 같은 성 씨(姓氏)끼리의 돌림자는 그 파(派)와 항렬은 물론 태어난 시대까지 짐작하게 한다.
그뿐인가. 이름 속에는 지어주신 부모나 조부님의 바램까지 숨어 있다. 개인의 이름이 이러한데 우리들의 옛 조상들은 산악숭배 하는 분들이었으니 산 이름이 어떠하겠는가.
그 산 이름 속에는 산의 모습, 이 나라의 역사와 겨레의 얼, 그 고장에 얽힌 전설이나 서민들의 애환 등등이 서려 있을 것이다.
석 자 이름에서 산(山) 자를 빼고 나면 달랑 2 자뿐이지만, 우리나라 산 이름은 뜻글자인 2자 한자어라서 그 속에는 많은 뜻을 내포하고 있다.
산을 제대로 알려면 산을 이해하여야 한다. 산을 이해하려면 산 이름 속에서 깃들여 있는 산의 역사를 찾아보려는 마음이 필요하다. 산에 얽힌 전설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산에서 그 전설을 품고 있는 것에 산 이름도 있지만 산사(山寺)도 있다. 이것이 산꾼이 산만을 보고 산사(山寺)를 그냥 지나치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
그래서 산을 사랑하는 분들이여! 다시 한 번 옛 선인들의 말을 들어보자.
-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니라.

*.조용한 설레임
  젊어서는 그냥 산이 좋아 다니다가 나도 산을 사랑하는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산을 사랑하다 보니 그 산을 이해하게 되고, 산을 알려고 노력하다 보니 그것을 그림과 글로 기록하고 싶었다.
글을 쓰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그냥 보고 마는 것을 글로 해석하여 주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쓰고 있는 글이 항상 'xx산 산행 Photo 에세이' 였다.
요즈음 나의 산행이나 여행은 기록하기 위한 그 자료 수집을 위해 떠나고 있다. 
그것은 한없이 고된 작업이지만 아무도 모르게 묻혀있었던 역사적인 진실을 내가 처음 발견할 때의 기쁨이란 경험한 자 아니면 어찌 알랴.
이렇게 기록한 것이 어연 500여 편이 훨씬 넘어서 주위에서는 그 '산행기'나 '해외여행기'가 언제 나오냐고 성화다.
그래도 나의 갸륵한 저축으로 만난 목돈이 제 갈 길을 가지 않고, 컴퓨터가 되다가 카메라가 되고 해외여행이 되곤 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언젠가는 내 글을 탐하는 어느 누가 있어 나를 부르겠지-'하는 기다림에 살아왔다.
주 5일제가 정착되어 가는 이 나라에서 오래 전부터 오로지 '산행기', '해외투어여행기', '섬 여행기', '문화답사기'만을 써온 이 노시인의 글이 만약 외면당한다면, 먼 훗날이라도 경제적으로 성공한 나의 후손이 있을 것이고 그때에라도 내 글을 문자화해 주겠지- 하였다.
그런데 얼마 전 부르는 곳이 있다. 방송국'이었다. 그래서 다음 글은 그 첫 출연의 내용으로 준비한 글과 그림들이다.

*. 고양시를 왜 고양시(高陽市)라고 했을까
채널4로 방영되는 'C&M 한국경기케이불TV 경기방송'은 경기도 주민을 상대로 하여 방영하는데 KBS, MBC, SBS 세 방송국처럼 경기도를 몇 개의 지국으로 나누어서 함께 유기적으로 운영되는 방송국인 것 같다.
산(山) 이야기를 중심으로 방영될 나의 출연은 시청자의 대부분이 고양시와 파주시민이 위주일 것 같아서 그 자료 준비차 고양시 일원의 산을 요즈음 찾아 다니고 있다.
  고양시와 파주시는 우리나라 전체로 볼 때 동고서저(東高西低)의 바다로 향한 지대여서 산이 몇 없고 높이가 낮지만 대신 평지에서부터 치오른 산이어서 그 늠름한 모양도 그렇지만 한강을 향한 평야나 서해를 바라보는 전망이 일품이다.

  그런데 왜 고양시를 고양시(高陽市)라고 한 것일까?
고양시는 한강 유역을 점령하려는 삼국 시대의 격전지로 예부터 군사의 요충지였다. 그래서 고양시의 산은 국토를 지키는 방패와 같았다.
-이 고양시는 고구려가 지배할 때에는 이름이 달을성현(達乙省縣), 신라와 고려 때에는 고봉현(高烽縣)이라 하였다. 그 고봉현을 태종 때(1403년)에 고봉현(高峰縣)에 덕양현(德陽縣)을 더하여서 그 각각 한 자씩을 따서 고양현(高陽縣)이라 부르기  시작하였다.
더 쉽게 말하면 구 일산에 있는 고봉산(高峰山)의 '高'(고)를 따고 행주산성이 있는 德陽山(덕양산)의 '陽'(양)을 따서 고양(高陽)이라 한 것이다.

*. 고봉산(高峰山) 전설

  고양시에서는 가장 높아서 일산 어디서나 보이는 100m의 높은 통신 철탑이 있는 중산 뒷산이 고봉산[해발 208m]이다.
고봉산을 오르는 길은 중산마을 국민은행연수원 쪽, 차로도 오를 수 있는 수연약수터 쪽 사당골과 만경사(萬景寺)를 향한 성석골의 잣골을 위시해서 그 외에도 많은데 신기하게도 산 정상 부근에 있는 영천사까지 아스팔트 따라 휴일에도 차로 오를 수가 있다.
  나는 찻길을 피해서 풍동 쪽 차도 옆 정자를 지나서 새로 조성하고 있는 자동차 운전면허장을 우측에 끼고 멋있는 자동음성방송기기가 설치되어 있는 산길을 들머리로 오르고 있다.
정상 높이(208m)가 서울 남산(262m)보다 낮은 산이라서 등산 가방도, 스틱도 두고 그냥 등산 조끼 하나만  입고 왔다.
그런데 고봉산은 어제 오른 파주의 심학산과는 달리 제법 가파른 오르내림이 만만치 않은 산이다. 군 시설 통신탑 때문에 정상 208m까지는 못가고 164.52m의 헬기장 높이까지밖에 가지 못하였지만 제법 등산하는 기분이 난다. 마주치는 사람도 부럽게 모두 배낭을 지고 오가고 있다.
  고봉산은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은[北高南低] 산이라는데, 나는 그 남쪽에서 북쪽을 향하여 가파른 산을 타고 오르고 있다.
옛 문헌에는 이곳에 고봉산성이 있었다 하고, 그 정상에 높이 5m, 둘레가 약 120m의 석축으로 쌓은 봉수대(烽燧臺)가 있다 하는데 아무리 찾아도 그 비슷한 곳도 없는 것을 보니 그것들은 일반인 출입금지 구역인 저 통신탑의 구역 내에 있는 것 같다.
  그 봉수(烽燧)와 연관되어 낙랑공주와 호동왕자를 연상케 하는, 고구려 왕자와 이곳에 살던 미녀 한주(韓珠)아가씨와의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가 전하여 온다.
-고구려로부터 되찾은 이 고장을 백제가 다스리던 시절 개백현[고양시]에는 미모가 뛰어나기로 이름난 한주(韓珠)라는 아가씨가 있었다.
어느 봄날 한주 아가씨가 나들이 나갔다가 얼굴이 준수하게 생긴 청년을 만나서 둘은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청년은 백제에게 빼앗긴 이 한강 유역을 회복하기 위해 변복을 하고 숨어든 고구려의 태자였다. 
한주 아가씨와 결혼을 굳게 언약한 왕자는 고구려에 돌아가서 아버지의 뒤를 이어 보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고구려 22대 안장왕(安藏王)이었다.
한(韓) 처자와 약속한 대로 안장왕은 여러 차례 군사를 일으켜 백제를 공격하다가 뜻대로 되지 않자, 을밀 장군에게 결사대 20명을 주어 한주를 탐하는 이 고장 태수를 죽이고 사랑하는 여인 한주(韓珠)를 구하게 하였다. 한주를 구한 을밀 장군은 높은 산에 올라 국경에서 기다리고 있는 안장왕에게 봉화를 올려 구함을 받아 둘의 사랑은 꽃 피우고 결실을 맺게 되었다. 그 봉화를 올린 곳이 고봉산이었다.
  이런 전설을 두고 향토학자들이 고양시와 파주시에 있는 지명과 연관하여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逢日川’(봉일천)은 왕을 만난 날이라 해서 逢日川(봉일천)이요, 옛날 이 고장에 있던 '王逢‘(왕봉)이라는 지명은 임금 ‘王’(왕), 만날 ‘逢’(봉)으로 위 전설과 일맥상통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고봉산(高峰山)'의 '高峰'(고봉)도 ‘高逢’(고봉)과 음이 같아서 고구려 '高', 만날 '逢'으로 고구려 왕을 만났다는 위 전설에서 이름이 유래한 것이 아닌가 하는 민간어원설(民間語源說)도 있다. 민간어원설이란 비과학적이나 민간에 전해 오는 이야기를 말하는 것이다.
  고봉산을 태미산이라고도 하였는데 그에 대한 전설도 있다.
- 옛날에 심학산[파주]과 고봉산[고양]에 각각 두 장수가 살고 있었다.
고봉산 장사는 몸집이 크고 성격이 불같이 급한 반면에 심학산 장사는 고봉산 장사보다는 체구가 작고 심약한 장사였다.
그 체구를 믿고 고봉산 장사가 심학산 장사를 만나면 항상 무시하고 놀려대는 것이었다. 심학산 이 육산이라서 그렇다고 생각한 장사가 고봉산의 바위들을 심학산으로 옮기며 산을 꾸미고 있는데 고봉산 장사는 이를 빈중대며 계속 놀려 대는 것이 아닌가.
이에 격분한 심학산 장사가 불같이 화가 나서 옮기던 바위를 고봉산 장사에게 힘껏 던져서 그를 쓰러뜨렸다. 그래서 고봉산 정상이 움푹 파이게 되었는데 이를 멀리서 보면 이마에 테를 두른 것 같이 보인다 하여서 고봉산을 사람들은 태미산이라고도 하였다.




*. 영천사(靈泉寺) 이야기
  영천사는 큰절의 암자보다도 작은 절집으로 마당이 그대로 등산로인데 신도들이 그 마당까지 차를 몰고 와서 주차장으로 쓰고 있었다. 내가 찾은 시간이 마침 점심시간이라서 고맙게도 불자가 아닌 내가 모처럼만에 점심 공양에다가 주지스님으로부터 보이 차까지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다음은 영천사 주지 스님으로부터 녹취한 이 절의 역사 이야기들이다.
-약천사는 1962년에 최수철 스님이 창건한 절입니다. 소승이 26년 전 주지로 왔을 때에는 현 대웅전 옆 요사체 사이에 토굴과 작은 집 하나뿐이었지요. 그때에 이 땅이 국민은행 부지여서 그동안 애로가 참 많았답니다.
최스님(법호 미상)이 어느 날 꿈에 부처님으로부터 '토굴 옆을 파면 좋은 물이 나올 것이다.'라는 현몽을 받고 그 곳을 팠더니 영험하게도 그 물맛이 전국에  명수로 알려지게 되었지요. 그래서 이 절의 이름을 영묘할 '영(靈)' 샘 '천(泉)', 영천사(靈泉寺)라 하게 되었답니다.
그 후에 소승이 삼성각(三聖閣)을 지을 때 조선 백자가 나온 것이나, 그때 아주 오래된 느티나무가 넘어져 있던 것을 탁자를 만들어 보관하고 있지요. 이를 보면 이 절의 역사가 조선 시대로 한참 거슬러 올라갈 터인데 안타깝게도 그 자세한 이야기가 역사 속에 묻혀 버리고 말았습니다.
  약천사에서 300m를 내려오니 삼거리 갈림길에 이정표가 있어 장사바위 0.33km, 중산배수지2.1km라고 가르쳐 주고 있다.
그 장사바위에 얽힌 전설을 고양에 30년 이상 살았다는 마침 나물을 뜯으러 온 60객 박 씨가 있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이 산 아래 아파트가 서기 전에는 그곳에는 습지가 많았습니다. 그 이유는요, 요  위로  올라가서 보실 장사바위 때문이랍니다. 장사바위는 두 바위로 구성되었는데 잘 보시면 두 바위는 남녀가 운우지락(雲雨之樂)을 나누는 모습입니다. 남녀가 거시기 하니 산 아래가 습하다 이거지요.
그 고봉산 장수바위는 위에서 말한 태미산 전설에 나오는 고봉산 장사와 같은 장사가 아닐까.
고봉산 정상은 통신탑 있는 곳이 민간인 출입금지이고 그 외 다른 지역은 높은 소나무가 무성하여서 전망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장수바위로는 동남쪽이 툭 트이어 있으니 보고 그냥 지나치지만 말고 직접 올라가 전망을 즐겨야 할 일이다.
장수바위 안부에는 만경사가 450m요, 수연약수터가 400m라는 이정표가 서 있다.
또 다른 약수터를 지나 수연약수터로 하산하다 보니 커다란 검은 천막 구조물이 있어 길을 돌아가게 한다.
수연배드민턴장이었다. 그 앞에 공터는 주차장이었고 그 바로 아래가 약수터였다.
거기서 나무층계를 오르니 헬기장이 나타나는데 어디서인가 불경을 외는 확성기 소리가 난다. 초파일을 앞두고 있어서 길가를 연등으로 장식한 만경사(灣景寺)였다.
만경사는 영천사보다 더 사세가 빈약하여서 요사체 하나에 대웅전 하나뿐인 절이었다. 그래서 석가모니불은 물론 따로 모셔야 할 아미타불, 지장보살, 관세음보살 등을 좁은 대웅전 안에다가 다 모신 절이지만 대웅전을 여러 층계 위에 높이 모신 것과 양쪽으로 있는 느티나무 고목은 이 절의 오랜 역사를 말하여 주고 있었다.




*. 심학산(尋鶴山, 193m)의 전설
  일산신도시의 이산포인터체인지를 지나 자유로를 타고 오두산 통일전망대를 가다가 임진강과 한강합류지점인 교하(交河) 우측에 멋진 8각정자가 있는 산이 예부터 경기 5악의 하나라는 심학산(尋鶴山, 193m)이다.
-경기5악으로는 일반적으로 화악산(1,468.3m), 운악산(945m), 감악산(675m), 관악산(632m), 송악산(488m)을 꼽는데 이 고장 사람들은 관악산과 송악산은 각각 서울과 북한 개성에 있는 산이어서 그중 하나를 빼고 심학산(193m)을 넣어 말하는 것이다.
-이 산은 폭 50m의 자유로의  둑이 생기기 아주 오래 전 한강 가에서 한강'물'을 '막'아주는 산이라 하여 '수막산(水莫山)'이라 불리다가, 홍수 때마다 물에 깊이 잠기는 산인지라 깊을 '深'(심), 큰 산 '岳'(악) 심악산(深岳山)이라 하였다.
그러다가 숙종 무렵에 왕궁에서 기르던 학이 도망치자 신하들이 곳곳에 수소문하여 찾아다니다가 심악산(深岳山)에서 찾았다 해서 그 후로는 찾을 '尋'(심), 학 '鶴'(학) 심학산(尋鶴山)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 이야기는 교하에 두루미 철새 도래지가 있는 것을 보면 황당한 이야기만은 아닌 것 같다.

 
고양시는 비옥한 일산평야에 있는 도시라서 주변에 산도 드물지만 산이 있어도 그리 높지가 않다.
주변에 가장 높은 산이 김포공항 뒤 부평의 계양산(395m)이요 다음이 고봉산(208m), 심학산(193m), 덕양산(124.8m), 정발산(88m) 순이다.

  심학산 등산 코스는 여럿이 있지만, 산과 절을 아우르기 위해서 들머리가 심학초등학교에서 시작되는 '심학산약천사' 길로 오르는 것이 정코스 같았다.  

*. 심학산약천사의 지장보살

  심학산약천사(尋鶴山藥泉寺)는 일제 시대였던 1932년에 법성사(法成寺)란 이름으로 한 대처승에 의해 창건된 자그마한 절이었다. 그러다가 13년 전 조계종 포교원 연구부장을 역임한 허정(虛淨)스님이 주지로 부임하면서 약천사(藥泉寺)로 개명하고 지장(地藏祈禱) 참회도량으로, 내가 옛날에 와 보던 절이 아닌 것 같다고 착각할 정도로 사세를 넓히었다.
-이 절 좌측에는 조선시대부터 유명한 약수터가 있는데 한창 보완 공사 중이었다. 이 샘으로 인하여 절 이름을 지장보살을 상징하는 '藥'(약)과 약수터의 샘을 의미하는 '泉'(천)을 따서 약천사(藥泉寺)라 개명한 것이다.
아스팔트가 끝난 곳이 심악산약천사이고 그 앞이 주차장인데 직진하여 종무소를 지나  절의 앞마당에 이르러 보니 2층에 요즈음 새로 건립한 지장보전(地藏寶殿)이 우람하고 화려하게 서 있다.
초파일이 가까워서 마당은 연등으로 가득한데 마당 끝에 포대화상, 사자 상 등 석물들이 막 뻗어나가는 이 절의 사세를 엿보게 한다.
  그런데 저 마당 끝 갈라진 시멘트 층계 위로 올라가보니 간판도 퇴색하여 글자도 잘 보이지 않는 산신각 같은 조그마한 당우가 있다. 대웅전이었다.
하도 이상해서 절집 스님에게 그 물어보았다.
-우리 허정 주지스님은 지장기도를 오래하여 오신 스님이지요. 석가모니의 부탁을 받고 그 입멸 후부터 미륵불이 오실 때까지 육도(六道)의 중생을 화도(化導)하는 부처가 지장보살입니다.
우리 스님이 이 절에 주지로 오신 어느 날 밤 꿈이었습니다. 지장보살이 나타나시어서 현몽하시더랍니다. '내가 살 집을 크게 지어라.'
그래서 대웅전보다 먼저 이렇게 지어놓은 것이 지장보전(地藏寶殿)이랍니다. 대웅전도 중창하기 위해서 발원 중이지요.
                                           -수안(修岸) 스님으로부터 채록

*.찝차가 다릴 수 있는 능선
약천사에서 능선까지는 200m밖에 안 되는 완만한 오름길이었다.
그 능선에서 서쪽으로 600m를 가면 서패리 정상 전망대요, 왼쪽으로 1.2km를 가면 동패리였다.
10여 년 전에 왔을 때는 교통호가 있더니 지금 능선은 찝차가 다닐 수 있을 정도로 넓게 꾸며 놓은 등산로라기보다 산책길이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최신 운동 시설이 설치되어 있었다.
  어느 쪽으로 먼저 가야 한다? 차를 약천사에 두었으니 원점 회귀해야 하는데 좌측 길도 우측 길도 왔다 갔다 해야 할 판이니-.
이럴 경우에는 자칫하면 생략할지도 모르는 곳을 먼저 들리는 것이 상책이다.
'동패리가 내려다 보이는 데까지만 다녀 오자.'하고 가는데 능선길이 평지길 같다. 파주시에서는 나무로 길가에 꽃밭을 만들어 방금 핀 철쭉꽃밭은 물론 각종의 꽃을 심어 놓아 나를 위해 만들어 놓은 길 같아서 상쾌하기 그지없었다.



이 산은 사유지인 모양으로 밀성 박씨들의 깨끗한 무덤들이 산재하여 있기도 했고, 교통호가 파여 있어 아직도 군의 작전 지역인 모양으로 군 벙커도 있어서 분단의 아픔을 실감케도 하는 곳이었다.
 멀리 교하 지역 아파트가 흐린 날씨 속에 흐릿하게 보이는 지점인 운동시설 500m의 동패리 4거리 이정표 앞에서 발길을 돌린다. 여기서부터 1.4km에 그 멋진 팔각정자가 있는 정상이다. 길을 부드럽게 양쪽 언덕을 오르내리듯 순탄한 길이었다.
평탄한 길이 드디어 정상을 향한 오름길이 되는지점에 많은 대나무들이 서 있고 그 위에 운치있게도 팔랑개비가 돌고 있다.









 10여 년 전 내가 올라왔을 때에는 정상에 큰 소나무가 두 그루가 멋있게 서 있었고 거기에 군시설물이 있어서  철조망으로 둘러 막아 민간인 출입을 통재하던 곳인데 그 나무가 없어진 자리에 대신 세워놓은 정자가 팔각 정자이었다. 
정상이 가까워지면서 그 정자가 보이기 시작하는데 저 아래서 보던 멋있는 정자가 아니다.
그 정자에 올라보니 내 뒤에 오는 여인들은 뒤돌아보지도 않고 그 앞에 옛날에 굳게 닫혀 있던 문이 활짝 열려 있다.
길은 그 속으로, 그 옆으로 쇠철조망을 끼고 나무 계단이 너무나 멋지게 정상의 팔각 정자를 향하여 오르고 있다.
갑자기 운무가 몰아치더니 그렇지 않아도 흐린 하늘을 운무 속에 몰아넣기 시작한다.
망설이다가 집을 나설 때에 바람이 몹시 불기에 얼마 있으면 이 흐린 구름을 걷어 가겠지 하였는데 ,이제 보니 오히려 운무를 몰아오는 바람이었다. 비가 올 것 같다고 운동시설에서 운동하던 여인들이 급히 하산을 서두르고 있었다. 왼쪽 서패리 과수원 쪽을 향해서 또는 서패리, 수투바위 쪽을 향해서.
솔직히 말해서 심학산의 멋은  등산하는 즐거움보다는 정상 팔각 정자에 서서 북으로 두고 온 산하를 바라보는 것이요, 굽어서 임진강과 한강이 교하(交河)되는 모습과 한강의 도도한 물줄기를 보는 것인데, 오늘도 그 복이 나에겐 없는 모양이다.
나와 심학산과는 밑에서 바라보기만 해야 하는 인연인가 보다.

*. 정발산의 전설
  정발산은 왜 정발산이라고 하였을까?
산 이름 鼎鉢山(정발산)을 한자만으로 보면 발이 셋 달린 솥 ‘鼎’(정), 바리때(중의 밥그릇) ‘鉢’(발)이어서 산의 모양이 발이 셋 달린 솟과 같고 바리때 같을 거라고 생각되는데 문헌상에는 그런 기록은 없고, 정발산 산 이름으로 두 가지 설이 다음과 같이 전하여 온다.

-옛날 이 산 밑의 마두1리에는 정(丁)씨네 집성촌이 있었고, 마두2리에는 박(朴)씨들이 씨족촌(氏族村)을 이루고 살고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 산 이름을 정씨와 박 씨네들이 산다고 하여 정박산(丁朴山)이라고 부르다가 우리말 음편(音便) 현상에 따라 정발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음편이란 발음을 편하게 하기 위해서 자연적으로 음운이 바뀌는 현상을 말한다.
- 옛날에 정(丁)씨 성(姓)을 가진 판서(判書)가 있었는데 그 선산을 이 산에 모시기로 하였다. 그래서 이 산을 가꾸게 되고 그 후 이 산에 전과 달리 꽃이 만발하게 피게 되었다. '정'씨의 선영에 꽃이 만'발'하게 피게 되었다 하여 ‘정발산’이라 하던 것을 한자로 차자(借字)하는 과정에서 정발산(鼎鉢山)이라 쓰게 된 것이다.
  아내가 하던 말이 생각난다.
  분당에 있는 친구들이 일산의 호수공원에 들렸다가 정발산을 오르겠다고 먹을 것을 가득 준비하여 배낭에 지고 왔다가 높이 88m의 정발산에 올라가서는 화를 내더란다. 울릉도 성인봉은 해발 986.3m나 되면서도 겸손히 봉(峰)이라고 하는데, 88m의 정발산도 산이냐고.
  그러나 정발산(鼎鉢山)은 해발 88m의 낮은 산이지만 일산신도시 주민의 사랑을 받는 정발산중앙공원이다. 이 산 속에는 누구나 마음껏 퍼 갈 약수터가 몇 군데나 있고, 산 정상 근처에는 시민을 위한 운동시설과 그 운동장 그리고 멋진 팔각정 정자도 있다.
봄이면 꿩소리에 피어나는 진달래를 볼 수 있는 곳이며, 호수공원을 한 바퀴 돌아도 운동량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정발산까지 오르내리면 어느 산을 오르는 것보다 건강에 좋다고 자랑하는 우리 고양시민의 자랑이 되는 일산의 주산(主山)이다. 누가 있어 이론을 제기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