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신선지맥종주제1-2구간


 

종주에 필요한 5만분의1 지형도도엽명 : 충주


 

일시 : 2008. 8. 23(흙의날) 비


 

누가 : 신경수


 

어디를 : 막다른 길인 충북 괴산군 감물면 매전리 증자동을 들어가는 도로 고갯마루인 양산목고개에서 올라 19번국도 누릅재에서 올라온 등고선상 730봉에서 괴산군 장연면과 감물면의 경계를 따라 박달산으로 올랐다가 장연면 오가리와 송덕리를 잇는 913번 지방도로 송치재까지 백두신선지맥 약7.7km 


 

朴達산(△825.4) : 괴산군 장연면, 감물면


 

구간거리 : 7.7km  지맥거리 : 7.7km


 

구간시간 7:30  지맥시간 5:50  휴식시간 1:20  하산시간 0:20


 

토요일 전국적으로 오전에 비가 한두차례 오고 오후부터는 맑겠다는 예보에 충실하기 위해 시간대별 예보를 보니 서울지방은 아침 9시가지 비가 오고 경북이나 충북은 아침 6시까지 비고 오고 그치겠다고 한다


 

예천의 매봉지맥은 길이 좋으니 마눌과 같이 갈 때 쓰기 위해 아껴두고 전번에 하다만 백두신선지맥을 이어가기 위해 괴산으로 방향을 잡는다


 

6시50분 동서울터미널에서 첫차를 타고 2시간도 안되어 괴산에서 내려 전번에 소주를 안파는 올갱이해장국집에서 또 눈치보며 김치찌개를 시켰는데 이번에는 별 짜증을 안내고 선선히 내어온다


 

하여간 맛한번은 끝내주는 집으로 아마도 돼지고기를 최상급으로 쓰는 모양이라 비계건 껍질이건 오돌오돌한게 그 씹히는 맛이 보통이 아니라 국물까지 남김없이 처분을 하고 시내버스 터미널로 이동하는데 오늘이 아마도 괴산의 무슨 축제를 하는지 마라톤 행렬이 끝없이 이어지며 다 지나갈 때까지 기다린다


 

택시요금 조금 절약하기 위해(괴산군 감물면에는 개인택시 2대가 영업을 하고 있음) 감물가는 버스편을 알아보니 10시에나 있다니 할 수없이 택시를 타고 괴강교를 건너 오른쪽으로 34번국도를 타고 갈읍리에서 좌회전하여 맹이재를 넘어


 

매전저수지 앞에서 우회전하여 무심사를 가르키는 팻말을 따라 양산목고개에 내려 간단히 산행준비를 하는데 꾸물꾸물하던 날씨가 드디어 심술을 부리며 부슬비를 하염없이 뿌려댄다


 

아 서글퍼라

일기예보를 믿고 왔건만 6시부터 갤거라는 날씨는 9시가 넘었는데도 그칠줄 모르고 오히려 부슬비까지 뿌려대니 이거 여기까지 와서 안갈 수도 없고 등산화를 샌달로 갈아신고 배낭카바하고 비옷입고 일단은 무장을 하고 조금 가다보면 햇빛이 쨍하겠지 하는 기대를 가지고 풀 무성한 경운기길을 따라 오르는데 금방 온몸이 젖어든다


 

양산목고개 : 9:40


 

전번에 시간이 많이 남아 더 갈것인가 말것인가로 앉아서 하염없이 선택의 기로에서 고민하던 장소를 지나 잘 가꾼 묘에서 길이 없을 것 같지만 오른쪽을 잘보면 산길 흔적이 보이고 바로 그곳으로 오른다


 

 : 9:50


 

길 흔적 따르다 길은 없어지고 무조건 오를 수 있는 루트를 만들어가며 오르면 지도에는 없는 풀 무성한 임도가 나온다


 

임도 : 10:00


 

오른쪽 왼쪽 어느쪽으로 갈것인가는 산의 형태에 따라 결정을 해야한다

오른쪽은 절벽같은 산사면 아래로 이어지니 오르기가 어렵겠고 좌측으로 가다 등성이를 도는 지점에 오른쪽으로 짧은 절개지를 오르면 잡목 사이로 길 흔적이 나온다


 

임도가 휘도는 산등성이 : 10:05 10:10 출발(5분 휴식)


 

가시 초지 잡목 사이로 그런대로 길이 있어 별 어려움 없이 한동안 오르면 이번 추석을 대비해 벌써 말끔히 벌초된 묘에 이른다


 

 : 10:20


 

길은 여기까지고 이후 길 전혀없고 가시 잡목을 헤치다 풀 무성한 묵은 묘를 만나게 된다


 

묵묘 : 10:30


 

이후로도 지독한 가시 잡목들을 헤치다 보면 길 흔적이 보일락말락하고 어느 정도 오르면 뚜렷한 길 형태가 생겨나며 아마도 감물면 백양리 점터골에서 오르는 좌측에서 오는 길과 만나고 이후 길이 좋아지고 오른쪽으로 잠깐 가면 등고선상 670m 둔덕이다


 

역으로 종주시 매우 조심해야 할 지점인 것이다


 

등고선상 670봉 : 11:25 11:35 출발(10분 휴식) 


 

이후 좋은 길을 따라 하염없이 오르면 ╣자길이 있는 잘 관리된 헬기장인 등고선상 730봉 정상이다 이정철주에 “좌측 ╣자길로 내려가면 느릅재50분 직진하면 괴산의명산 박달산 정상 40분”


 

이때 느릅재 방향에서 뭔가 부스럭거리더니 젊은이 한명이 비가 좀 그쳤다고 생각했는지 오르다가 잠깐 멈칫하더니 얼굴을 드러낸다


 

메모하고 있는 나를 보더니 산꼭대기에 웬 허연다리가 보여 깜짝 놀랬다고 하며 멈칫거리는 그를 먼저 보내고 마저 메모하고 뒤를 따라간다


 

등고선상 730봉 헬기장 : 12:00

 

 

여기서부터는 길이 더 좋아지고 산책을 즐기듯 오르는데 가끔씩 암릉이 나타나 재미를 더해준다 약간의 공터인 쉬어가기 좋은 조망도 터지는 등고선상 810봉에서 앞서 가던 젊은이가 무엇이 궁금한지 기다리고 있어 또 한마디 한다


 

“어디서 오셨어요?”

“요 아래 매전리에서요”

“아니 그것이 아니고요”

“아 예 서울에서 아침 첫차로 왔습니다 어디 느릅재에서 올라오세요?”

“예 느릅재에 차를 세워놓고 올라 왔는데요 저는 괴산의 명산 35산을 오르고 있는 중입니다 괴산의 산들은 길찾기가 상당히 어려운데 혼자서 오셨네요”

“하하 찾다가 못찾으면 그만이지요 뭐ㅎㅎㅎㅎㅎ”

 

 

등고선상 810봉 : 12:25


 

저는 속도가 느려서 그러니 먼저 올라가시라고 권하고 천천히 으르니 조망 엄청 좋은 박달산 정상은 산불자동감시카메라 밑 오석정상석에 “박달산825m 충북 괴산 느릅재2.5km 추점리3.4km”


 

“대한민국국기게양대 33대 단군00왕국 진산으로 구구절절”이라 씌인 스텐국기게양대엔 망가진 국기가 비를 맞아 휘감겨있는 모양새와 임금의 이름을 누군가 훼손하여 알아 볼 수가 없게 만들어 놓아 영 보기가 안좋았으며 진한 비구름속이라 주변으로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 나쁜 짓을 누가 했을까? 


 

안타까운 마음이라 집에 와 찾아보니 어럅셔 “단군 감물”이며 지금의 괴산군 감물면의 한자인 甘勿과 같은 글자인 것을 알 수 있었는데 이러면 그 임금글자를 훼손한 사람은 추측이 돼지만 반듯이 그런 것은 아니므로 뭐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누가 훼손했든지 간에 하루 속히 글자를 복구해야 우리 고대사의 일부라도 후손들에게 알려줄 수 있는 하나의 방편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단군조선에 대해 몇글자 적어보고 지나가고자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의 시조를 단군이라 알고 있으며 일제의 날조된 역사관에 의해서 그나마도 신화로서만 단군임금이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엄연한 역사의 도적행위나 마찬가지인 일인들이 우리의 역사를 왜곡시켜 우수한 자기들이 우매한 한국을 지배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인정시키기 위해 그리 만들었을 뿐이다


 

더구나 불과 2천여년밖에 안되는 고주몽 박혁거세 온조마저도 신화로 여기거나 아득한 원시시대처럼 느끼게 만들었으면서 같은 연대의 중국사나 서양사에 나오는 인물들은 실존인물이라고 느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작금의 우리 국사교육이 이런 사고를 고칠 수 있도록 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며 제1의 숙명적인 과제라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아래의 단군에 대한 글은 단기 4319년(서기1986년) 11월 고동영이 우리의 고대서인 "단기고사, 한단고기, 규원사화" 등을 토대로 "단군조선47대"라는 책을 저술하였는바 그 중에 일부를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여기에 옮겨 본 것이다   


 

우리나라는 나라명이 桓國(한국)이며 파내류산 즉 지금으로 말하자면 파미르고원이나 천산을 말한다 바로 그 산아래서 천해의 동쪽까지 즉 지금으로 말하자면 천해는 바이칼호이며 그 동쪽이라함은 만주와 지금의 우리나라를 말한다


 

남북 오만리 동서 2만리에 걸쳐있었다 여기에는 모두 12나라 아홉족속 즉 九桓이 살았다 즉 이들이 모두 한국사람들인 것이다


 

그 때는 법과 명령이 없어도 모든 삶은 이치에 맞도록 세상은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어떠한 공적인 일을 결정할 때 그를 대표할 사람이 필요하게 되어 12나라 아홉족속이 다 모여 桓仁을 桓花로 둘러쌓인 곳에 앉히고 높이 임금으로 추대하여 드디어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여기서 桓花는 槿花 즉 지금의 무궁화꽃을 말한다


 

그때가 BC7199년의 일이었으며 그후 桓仁시대가 열리며  BC3899년 까지 7세 역년 3301년을 이어왔다


 

혹자는 역년 63182년이라 하나 너무 오래전 일이라 자세히 알수는 없는 일이다


 

제1세 安巴堅  桓仁

제2세 赫  胥  桓仁

제3세 古是利  桓仁

제4세 朱于襄  桓仁

제5세 釋提壬  桓仁

제6세 邱乙利  桓仁

제7세 智爲利  桓仁


 

이때에 “우주의원리”를 밝힌 天符經은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다가 다음에 나라를 세우신 桓雄天皇이 배날나라를 세우면서 사슴 발자국을 보고 만든 鹿圖文으로 옮겼으며 이 천부경은 伏羲씨가 지은 桓易의 모체이며 여와와 주양을 거쳐 주나라때 周易이 되었다


 

또한 녹도문은 현재 경남 남해군 낭하리 계곡과 만주 길림성 경박호 선춘령과 부오소리의 암석에 그 때 새겨놓은 것으로 보이는 글이 아직도 남아있다고 한다  


 

桓國의 마지막 임금때 사람은 많아지고 물자가 부족해 삼위산과 태백산에서 인간을 널리 유익하게 할 수 있다고 여겨 지위리 한인의 아들인 환웅을 천거하여 “弘益人間”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


 

天符印 3개를 주며 3천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태백산 신단수 아래 신시를 열고 무리들이 桓雄을 임금(天皇)으로 추대하고 나라이름을 倍達이라 하였다


 

이래서 배날나라는 BC3898년부터 BC2334년까지 18세 역년 1565년간이다


 

제1세 桓雄 居發桓 : 천부경과 삼일신고를 백성들에게 가르치고

                               인간을 유익하게 할 수 있는 360여가지 일을

                               風伯 雨師 雲師에게 나누어 다스리도록 하였으며

                               역법을 만들어 일년을 365일로 정하였으며

                               곰족의 딸을 황후로 받으며 혼례법을 제정하고

                               그 외 여러 가지 복식 제도등을 만들었으며 공수와 두열이라는 음악이 있었고

                               계산할 때 쓰는 算木이 있었다  

제2세 桓雄 居佛理

제3세 桓雄 右耶古

제4세 桓雄 慕士羅

제5세 桓雄 太虞義 : 黙念 淸心 調息 保精의 장수법 터득

                               아들 12명중 막내아들 太皞가 바로 伏羲씨로 天河에서 卦圖를 얻었는데

                               이것이 바로 河圖이며 洛書와 함께 桓易의 이치가 되었으며

                               八卦도 여기서 이루어졌다

제6세 桓雄 多儀發

제7세 桓雄 居  連

제8세 桓雄 安夫蓮 : 우리의 시조인 高矢씨의 후손인 小典에게

                               지금의 중국 섬서성 기산현 서쪽에 있는 姜水에서 군사를 감독하였고

                               그의 아들이 神農씨로 의약의 체계를 세웠으며

                               물물교환 제도를 만들어 생활이 편리해졌다

제 9세 桓雄 養  雲

제10세 桓雄 葛  古

제11세 桓雄 居耶發

제12세 桓雄 州武愼

제13세 桓雄 斯瓦羅

제14세 桓雄 慈烏支 : 蚩尤天皇이라고도 하며 창과 투구등 쇠병기를 만들었으며

                                 12제후의 나라를 합병하였다

                                 중국 軒轅과 전투를 하여 이겼으며

                                 도읍을 지금의 중국 절강성 항주 근방에 있는 靑丘로 옮겼다

                                 망나니인 헌원이 치우천황을 뵈러 가는 길에 사람이 되라는 말과 함께

                                 자부선인에게 삼황내문경을 받았으며 이것이 노자로 이어져

                                 도교의 기초가 되었으며 헌원은 지금도 도교의 개조로 숭배받고 있다

제15세 桓雄 蚩額特

제16세 桓雄 祝多利

제17세 桓雄 赫多世

제18세 桓雄 居弗檀 : 檀雄이라고도 하며 그의 아들 단군 왕검이 단군조선을 건국하였다

                                 이때가 BC2333년의 일이다


 

단군왕검은 배달나라 18세 거불단 환웅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곰족의 왕녀이다

BC2370년 5월2일 寅時에 태어나 성장하여 河伯의 딸과 결혼하여

扶婁 扶蘇 扶虞 夫餘 이렇게 4아들을 두었다


 

九桓의 백성들이 BC2333년 10월3일 총회를 열어 만장일치로 왕검을 임금으로 추대하였다

그래서 지금도 우리나라를 연 날을 기념하기 위해 매년 10월3일을 개천절로 정한 것이다


 

도읍을 새로운 땅이라는 뜻을 가진 지금의 중국 할빈의 완달산에 있는 아사달에 세우고 나라이름을 “檀”이라 하였으며 이 아사달을 후세 사람들이 왕검성이라고 불렀다


 

이런 단군조선은 BC2333년부터 BC238년까지 47세 역년 2096년간이다  


 

제1세 檀君 王儉 : BC2311년 도읍을 송화강가로 정하고 이름을 平壤이라 하였다

                            BC2283년 강화도 정족산에 삼랑성을 마리산에는 塹城檀을 만들었다

                            BC2266년 도산회의에서 중국의 태평성대를 말하는

                            요순시절의 순임금이 회대의 제후를 감독하게 하였다

                            BC2241년 3월15일 세상을 뜨다

제2세 檀君 扶婁 : BC2238년 도량형의 표준을 정했으며 물건 가격을 통일시켜 모두 편리하였다    

                            BC2231년 토지제도인 정전법 시행과 토지대장을 만들어 세금의 기틀을 잡았다

                            BC2229년 신지 귀기가 七回歷과 邱井圖를 만들었다                      

                           칠회력이라 함은 일곱신에게 제사 지내는 주기로

                           천신 월신 화신 수신 목신 금신 토신을 말하며

                           요즘의 일주일인 “일월화수목금토”요일을 말하는 것이며

                           구정도는 지금의 지적도를 말한다

제3세 檀君 嘉勒 : BC2181 을보륵이 국문정음인 지금의 한글의 모태가 되는

                           “加臨土” 38자를 제정하여 소통이 잘 되도록 하였다

                           지금의 한글과 흡사하여 한글을 세종대왕이 창제했다는 뜻은

                           이 가림토를 조금 변형하여 새로 정비하였음을

                           높이 평가한 것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BC2180년 동양사학의 원조인 倍達留記를 편찬하였다

제4세 檀君 烏斯丘 : BC2137년 아우 오사달을 몽고리왕으로 봉했다

                              후에 그의 자손들이 몽고족이 되었다

                              10월 태백산에서 하느님께 제사 지내고 선약(인삼)을 얻었다

                               BC2133년 조개껍질로 만든 圓孔貝錢을 만들었다

제5세 檀君 丘乙 : BC2087년 감성관이 천체의 위치와 운행을 관측하는

                           혼천기를 만들어 천도와 맞게 하였다

제6세 檀君 達門

제7세 檀君 翰粟

제8세 檀君 于西翰

제9세 檀君 阿述 : BC1980년 매년 8월1일을 정기회의 날로 정하여 민권이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제10세 檀君 魯乙 : BC1950년 임금의 자문기관 설치

                              BC1949년 고시제도 도입

                              BC1946년 신원함 설치 민원해결

                              BC1893년 천문대 축조 감성관을 둠

제11세 檀君 道奚 : BC1891년 종교개혁을 실시 종교의 중흥시대를 열었음

                             BC1879년 곡식을 찧는 그릇과 띠풀로 지붕을 만들었으며

                             배를 만들어 무역이 트였으며 농사를 절기에 맞추어 짓도록 하였음

                             BC1864년 만국박람회개최

                             BC1854년 기계를 만드는 작청을 설치해 현상을 걸어 

                             발명을 한사람에게 상을 주었다

                             예를 들면 자명종 진천뢰 측우기 등 26점

제12세 檀君 阿漢

제13세 檀君 屹達 : BC1767년 입법 사법 행정으로 나눈 지방자치제 실시

                              BC1763년 독서 활쏘기 등을 가르키는 법정학교를 설립해

                             학생인 國子郞을 뽑았으며 사람들은 이를 天指花郞이라 불렀다

제14세 檀君 古弗 : BC1680년 쇠로 子母錢이라는 돈을 주조했다

                              BC1670년 국립대학 설치

                              BC1666년 인구조사를 하니 1억8천만명이었다

제15세 檀君 伐音

제16대 檀君 尉那

제17세 檀君 余乙 : BC1535년 고수노가 政法原論 38질을 바침

                              BC1533년 日蝕이 있었음

제18세 檀君 冬奄 : BC1480년 고수노에게 國史 18권을 편찬하게 함

제19세 檀君 縱年 : BC1433년 국문서당을 세움

                              BC1426년 조개로 貝葉錢을 주조함

                              BC1420년 공창을 설립 종이와 옷감을 생산하였음

                              BC1410년 송화강가에 조선소를 설치했음

                              BC1391년 황운갑이 지남차와 목행마를 발명하였음

                              BC1385년 목아득이 우주원리론을 저술하였음

                              BC1382년 지이숙이 주천력과 팔괘상중론을 저술했음

제20세 檀君 古忽 : BC1341년 共工 을홀이 九桓의 지도를 만듬

제21세 檀君 蘇台

제22세 檀君 索弗婁

제23세 檀君 阿忽 : BC1206년 군관학교를 설립해 병학을 가르쳤다

                              BC1183년 토지제도인 井田法을 가르침

제24세 檀君 延那 : BC1152년 조대원이 정치원론 10권을 바쳤음

제25세 檀君 率那

제26세 檀君 鄒魯 : BC1024년 의학원을 세워 백성들에게 가르침

                              BC1005년 위문국이 정치론 28권을 저술함

제27세 檀君 豆密

제28세 檀君 奚牟

제29세 檀君 摩休 : BC925년 왕문이 예부터 있어온 神篆이 번거로워 새로운 글을 지었음

제30세 檀君 奈休 : BC880년 부분석이 정법원리론을 저술하였음

제31세 檀君 登屹

제32세 檀君 鄒密 : BC837년 3월 日蝕이 있었음

제33세 檀君 甘勿 : BC816년 황선문이 유황발사총을 발명하였음

                              BC813년 감물산 아래에 삼성사를 세우고 친히 제사를 지냈음

                              BC812년 순길이 장생불로단을 만듬

                              BC804년 고삼도에게 현인을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을 물으니 그 방법은

                              가까이 하여 그 겸손함을 보고

                              멀리하여 그 신용을 보며

                              갑자기 물어 그 말재주를 보며

                              급히 주어 어떻게 처리하는 가를 보며

                              난을 말하여 그 용맹을 보며

                              술에 취하게 하여 그 태도를 보며

                              색을 시험하여 그 몸가짐을 보며

                              재물로써 시험하여 그 청렴함을 보며

                              글을 통하여 그 학문을 보며

                              말로 물어 그 변론을 보며

                              잡사람과 같이 있게 하여 그 절개를 관찰하는

                              11가지가 구비되면 비로서 현인이라 할 수 있다 

                   

                              바로 이 박달산에 있는 감물왕국이 바로 이 단군님께서 치세를 하였던 것이며

                              안타깝게도 지워져 있으니 다시 글자를 새겨야 할 것이다

제34세 檀君 奧婁門

제35세 檀君 沙伐 : BC765년 日蝕이 있었음

제36세 檀君 買勒 : BC699년 초나라사람 오자도가 목면종자를 가지고 입국

                              BC687년 채저명이 정치형법서를 전하였음

                              BC680년 오경박사 우문충이 토지를 측량하여 지도를 만들고 遊星說을 저술했음

                              BC675년 우세숙이 성리학과 심리학을 저술함

                              BC650년 손숙문이 의학과 화학을 저술함

제37세 檀君 麻勿 : BC642년 쇠로 方孔錢을 주조함

제38세 檀君 多勿

제39세 檀君 豆忽 : BC525년 8월에 日蝕이 있었음

제40세 檀君 達音 : BC507년 윤복지가 도덕경을 저술함

                              BC500년 진개가 치국요람을 저술함

제41세 檀君 音次 : BC488년 공상의가 종교론을 저술함

제42세 檀君 乙于支 : BC469년 철인 이일선이 천리경을 저술함

                                 BC467년 백호돈이 지리학과 광물학을 저술함

제43세 檀君 勿理 : BC454년 장자학이 논리학을 저술함

제44세 檀君 丘勿 : BC423년 日蝕이 있었음

                              BC421년 최화덕이 동물학과 식물학을 저술함

                              BC416년 서백원이 태양 태음 소양 소음의 사상의학을 저술함

                              BC410년 국학박사 황운원이 백과서를 저술함

                              BC408년 유종득이 理財學을 저술함

                              BC405년 적우순이 심리학을 저술함

제45세 檀君 余婁 : BC393년 법률을 개정하여 대동률령 공포

                              BC385년 곽태원이 양생론을 저술함

                              BC382년 마자은이 이기일원론을 저술함

                              BC369년 장소부가 의학대방을 저술함

                              BC367년 홍문선이 태학조문을 저술함

                              BC357년 조문휴가 자본론을 저술함

제46세 檀君 普乙

제47세 檀君 高列加 : BC274년 소정국이 건축학을 저술함

                                 BC271년 구노선이 種樹學을 저술함

                                 BC265년 신원함 설치 민원해결

                                 BC248년 10월1일에 日蝕이 있었음

                                 BC239년 해모수가 군사를 일으켜 북부여를 세움

                                 BC238년 임금이 유약하여 제후들의 난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왕위를 버리고 산에 들어가 도를 닦아 신선이 되었다


 

이렇듯 우리의 역사는 단군 조선을 넘어 기원전 약7199년 이전까지로 거슬러 올라가며 바이칼호 동쪽 드넓은 지역을 다스리며 용맹을 떨쳤으며 갖가지 법과 학문 등이 꽃을 피웠으며 갖가지 기술들이 발전하여 국민들이 편리하게 살만한 그런 태평성대가 47세 단군때에 이르러 급격히 쇠약해져

 

해모수가 북부여를 세워 BC239년에서 BC58년까지 6대 역년 180년을 이어갔으며


 

그 사이 부여임금의 딸인 동신성모 파소의 아들인 박혁거세가 13살 때 왕으로 뽑혀 신라를 건국했으며


 

이후 고주몽이 북부여를 이어받아 단군조선의 북쪽에 고구려를 세웠으며 뒤를 이어 온조가 단군조선의 땅인 황하와 회하를 중심으로 한 중국대륙 동쪽에다 백제라는 나라를 세워 삼국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7천 누백년의 역사를 없애고 작금 우리의 교육은 여기서부터 역사라 하였으니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겠는가?


 

이상으로 간단하게 정리를 해보았으니 이 글을 보시는 산님들 우리 역사의 허구성을 잠시나마 한번쯤 뒤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오른 그 젊은이 자동카메라로 증명사진찍기 바쁘고 나는 메모하기 바쁘고 잠시 동안 시간을 보내고 차를 세워놓고 올라왔으니 다시 느릅재로 가야만 하는 산님과 작별 인사하고 뒤돌아서는데 “아 캔맥주 한잔하시면 힘든 것이 많이 사라질 것”이라는 말을 하며 내려가는 나를 붙잡고 레드캔맥주 한캔을 안겨준다  


 

아마도 힘이 딸려서 그렇게 느리게 올라온 줄 알고 후의를 베푸는 것인데 사실은 그것이 아니지만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캔맥주 가며가며 물대신 조금씩 잘 마셨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감사함을 전하며 앞으로 목적하신 괴산의 명산 35산을 완등하시기 바랍니다

  

박달산 : 12:35 12:40 출발(5분 휴식)


 

내려가다 ╣자길이 나오며 많은 산님들이 다녀가신 듯 많은 표시기들이 그리로도 내려갔음을 알려준다


 

╣자길 : 12:50


 

직진하는 길은 없는 듯하지만 펑퍼짐한 작은 너럭바위로 올라가면 내려가는 길이 보이며 길이 좋다 이후 급경사 바윗길을 조심스럽게 내려가면 십자안부인 동골재로 이정철주에 “온길 정상 20분 좌로 내려가면 추점리70분 우로 내려가면 무심사 증자마을35분” 이라며 좌측 추점리 쪽으로 표시기들이 많다


 

그런데 여기서 의구심이 드는 사항이 하나 있는데 도면상으로 보면 좀 전에 지나온 ╣자길이나 지금 십자안부나 마찬가지로 방곡리 쪽으로 내려가게 되며 추점리로 가는 길은 우측으로 여맥 능선을 하나 넘어야 하는데 과연 길이 그렇게 나있는 것인지 조금은 의문스럽다


 

십자안부 동골재 : 13:00


 

급경사 바윗길을 오르면 도면상 777.5봉이며 좋은 길은 좌측 동북쪽으로 이어지며 그길은 아마도 추점저수지가로 가는 능선길인 것 같다  

여기서 지맥은 오른쪽 남쪽으로 성긴 길 흔적을 따라 내려가야 하기 때문에 아무 표시도 없는 그곳에 내 표시기 두개로 표시를 하고 내려간다


 

777.5봉 : 13:15  13:30 출발(15분 휴식)


 

완만한 능선길을 시나브로 내려가 안부에 이른다


 

안부 : 13:50 13:55 출발(5분 휴식)


 

능선 왼쪽으로 길이 이어지고 묘터인 듯한 살그머니 오른 둔덕에 이른다


 

둔덕 : 14:00


 

이후 어느 봉우리가 과연 동쪽으로 뻗어내려 가는 등고선상 670봉인지 지형을 보고 잘 판단해야 한다


 

첫 번째 봉우리는 동쪽으로 급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전혀 길은 없다 고로 아니고 두 번째 봉우리는 펑퍼짐한 것이 비슷하나 동쪽으로 잠시 가면 급경사로 꼬꾸라지면서 전혀 길이 없다 그래서 아니고


 

세 번째 높은 봉우리로 오르면 전체적으로 펑퍼짐한 평지를 이루고 있는 등고선상 670봉으로 좌우로 가는 길이 명확하다


 

등고선상 670봉 : 14:30 14:40 출발(10분 휴식)


 

비는 점점 더 세차게 내리며 온몸을 적시고 안경알이 자꾸 어리어 진행하기가 심히 어렵다 오전6시에 개겠다던 날씨는 오후 중반이 되어도 그칠줄 모르고 오히려 더 퍼 붓고 있으니 믿은 내가 잘못이지 누굴 탓하랴


 

이제부터 잔능선을 조심해야지 앗차 하는 순간 엉뚱한 지능선이나 계곡으로 빠질 확률 100%다 나도 잘못 내려가는 것을 알고 오른쪽으로 트레버스해  흐린 ╠자안부로 내려섰다


 

잘 살펴보면 좌측으로 내려가는 족적이 있긴 있으나 지금 트레버스하다 보니 지금은 묵어서 아마도 길이 없어진 듯하다

 

 

╠자안부 : 15:30 15:35 출발(5분 휴식)


 

길을 따라 오르며 오름 능선상 사설 개인 안테나를 지나고 폐묘도 지나 등고선상 450봉 정상 몇m 전에 오른쪽을 내려다 볼 수 있는 바위에 걸터앉아 시장기를 느낀 배를 달래고 정상에서 오른쪽 남쪽으로 내려간다


 

등고선상 450봉 : 15:50 16:05 출발(15분 휴식)


 

능선을 잘 가늠하면서 남쪽으로 내려가던 능선이 동남으로 휘어지며 파묘서 좌측으로 길이 있으나 무시하고 직진으로 내려간다


 

파묘 : 16:15


 

오른쪽으로 트레버스해서 동쪽으로 내려간다

밭이 나오고 오른쪽으로 내려가면 거문마을삼거리 포장도로가 나오며 오른쪽 조금 떨어진 곳에 버스정류장이 있다


 

좌측으로 쳐다보면 도면상으로는 송치재인데 여기있는 안내판엔 “솔치재330m”란다 하기사 “松”을 우리말로 하면 “솔”이 됨으로 그게 그거다


 

송치재 : 16:40  16:50(10분 휴식)


 

좌측으로 보이는 커다란마을이 장연면인데 시간도 잘잘하고 더구나 물빨래가 된 몸으로 힛치도 염치가 있지 그래서 힛치도 포기하고 장연면으로 휘적거리며 내려간다


 

오가저수지를 지나 도로는 목하 확포장공사중이라 개판이 되어 있다

동네 한가운데 슈퍼에 들러 수안보를 가는 교통편을 물어보니 한마디로 없단다


 

장연면 : 17:10


 

그후 


 

방법은 단하나 택시를 부르는 수밖에 별다른 뾰족한 방법이 없으니 공터 왼쪽 팔각정으로 가 젖은 옷 갈아입고 짓무른 사타구니에 분바르고 수안보 택시를 부르고 모처럼 한가한 시간을 갖는다

  

잠시 뒤에 나타나는 택시가 흑탕물을 뒤집어쓰고 나타난다

아니 벌건 대낮에 어딜 갔길레 차가 흑탕물이라니.....이상 이상


 

그러나 그 이후는 잠시 뒤에 밝혀진다


 

또 잠시 뒤에 택시는 진흑탕길을 터덜거리며 지나가는데 갑자기 하체가 땅에 긁히는 소름끼치는 소리가 들려 기름통이 빵꾸가 난 경력이 있는 나는 걱정스러운데 막상 이 기사아저씨는 태평 무사다


 

그리구서 한다는 말씀이 이 장연면은 아까 타신곳이 면소재지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콘크리트 포장 1차선도로였는데 이제사 2차선으로 공사한다고 벌써 언제부터인가 시작은 했는데 돈이 없는지 진도가 지지부진하다며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공사가 진행이 되고 있으나 정작 난리를 치고 극성을 부려야할 면민들은 조용하다는 것이다


 

지금이 어느땐데 세상에 면소재지가 1차선 임도라는 것이 말이 되느냐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대드는 이장이나 부녀회등 방구께나 뀌는 인간들이 그저 얌전만 피우며 감 떨어질 날만 기다리니 이꼴이라며 장연면 사람들은 좋은 말로 너무 얌전해서 탈이란다


 

이 장연면은 괴산군에 속하지만 괴산권이 아니라 생활이 충주권이라며 지금도 하루 세 번 충주시내버스가 들어온다고 한다


 

그리고 내륙고속도로를 내며 인터첸지 이름을 다른 곳은 대부분 제일 가까운 면이름을 사용하는데 유독 이 장연면으로 빠져나오는 인터첸지는 이름이 괴산인터첸지란다


 

말이 나왔으니까 망정이지 똑같은 괴산군인데도 연풍면을 나가는 인터첸지는 괴산인터첸지가 아니고 연풍인터첸지인 점을 감안해서라도 괄호치고라도 장연면이라는 표기를 해주는 것이 도리가 아닌지 모르겠다며 시종일관 장연면이 안됐다는 이야기다  


 

그렇게 터덜거리며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도면상 기룡목재를 넘어 수안보로 가는 지름길인데 깨끗하게 2차선으로 포장이 잘되었다


 

올라가 고갯마루엔 “김용목재”란다 어느게 맞는 것인지는 몰라도 현지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김용목재라고 부르기로 한다


 

구불거리며 내려가 상록호텔을 끼고 있는 황산고개를 넘어 원래는 12000원을 받아야 하지만 10000원만 내시라며 인심을 잔뜩쓰고 밀라노호텔 앞에 내려준다


 

“아니 아저씨 호텔말고 여관말입니다?”

“말이 호텔이지 모텔입니다 모텔”

“아 그래요” 긁적긁적


 

방문열고 들어가니 괜찮은 모텔급이 맞고

젖은 옷가지 물건들을 몽창 쏟아붓고 빨래 빨아 여기저기 걸쳐놓고 선풍기 틀어놓고 밖으로 나가니 비는 어느새 그쳤고 온 시내는 휴가철이 지나서 그런지 조금은 한산한 편인데도 모든 업소들은 불야성을 이루고


 

거리마다 가로지르는 휘황찬란한 갖가지 기하학적인 또는 사실적으로 표현한 등불이 빨주노초파남보 형형색색 몇m 마다 거리를 가로지르며 수도없이 많이 설치되어 있어 이곳이 한국인지 중국 상하이인지 홍콩인지 분간이 안될 정도로 빙빙 돌아가고 있어 에너지절약하고는 거리가 먼 나라에 온 것만 같은 낮선 느낌뿐이다


 

괴산보다는 조금 못 미치지만 맛난 김치찌개에 청풍명월주 한잔으로 수안보의 밤은 그렇게 깊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