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 이야기(21) - 미륵산(彌勒山)

 익산의 진산, 미륵산

 

 

▲ 미륵사지와 미륵산 전경

미륵사지

 백제 최대의 가람인 미륵사 창건에 관한 삼국유사 기록은 미륵사 인근 오금산 (현재 익산 토성.쌍릉이 자리하고 있는 곳)에 마를 캐며 홀어머니와 살던 마동이 신라 선화공주와 혼인하는 서동설화와 미륵사 창건설화로 되어 있다. 선화공주 와 결혼한 후 왕이 된 마동 즉, 무왕(백제30대왕, 600-641)이 왕비와 용화산(현재의 미륵산)에 있는 사자사로 지명법사를 찾아가던 중 연못 속에서 미륵 삼존이 출현하여 미륵사를 창건하게 되었는데 미륵 삼존을 위하여 전(금당), 탑, 낭무(화랑)을 세웠다고 한다.
이와 달리 미륵사의 창건에는 무왕과 선화공주의 신앙만이 아니라 정치적 목적이 있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즉 백제의 국력을 확장하기 위해 마한 세력의 중심이었던 이곳 금마에 미륵사를 세웠을 거라는 추측이다,. 백제 최대의 가람인 미륵사를 세우는 데에는 당시 백제의 건축,공예 등 각종 문화수준이 최고도로 발휘됐을 것으로 짐작할 뿐만 아니라, 신라 진평왕이 백공을 보내 도와주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당시 삼국의 기술이 집결되었을 것이다.
미륵사가 백제불교에서 미륵신앙의 구심점이었음은 분명하며, 신라 최대의 가람인 황룡사가 화엄사상의 구심점이었던 것과 대비된다. 황룡사가 1탑 3금당식인 것과 달리 미륵사는 3탑 3금당식 가람 배치이다. 황룡사는 왕을 정점으로 하는 화엄사상, 미륵사는 미륵사상을 가람에 구현하고 있다. 미륵사는 일반 평민 대중까지 용화세상으로 인도하겠다는 미륵신앙이 바탕을 이루고 있다.
미륵사지 석탑은 국보 제 11호로 현재 높이 14.24m이고 우리나라 최고, 최대의 석탑이다. 석탑은 거의 전면이 붕괴되어 동북면 한 귀퉁이의 6층까지만 남아 있으나 본래는 9층으로 추정된다. 미륵사지 석탑은 1975-1976년 원광대학교 마한 백제문화 연구소 조사에 의하여 동쪽탑은 목탑이 아니라 석탑임이 밝혀져 이른바 동서 쌍탑의 배치였음을 알게 되었다. 동탑은 그 뒤 발굴조사에 의해서 9층으로 확인되어 1993년에 9층(높이 27.67m)으로 복원되었다.
이 석탑을 우리나라 최고의 석탑으로 보고 있는 이유는 이 탑의 양식이 그 이전에 성행하였던 목탑의 각부 양식을 나무 대신 돌로써 충실하게 재현하였기 때문이다.
당간 지주란 당간을 지탱하기 위하여 당간의 좌.우에 세운 기둥, 즉 지주를 말한다. 미륵사지 당간 지주는 보물 제 236호로, 높이 395cm 이며 통일신라시대 중기 이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미륵사지 석탑 남쪽에 2개의 지주가 동서로 약 90cm 간격을 두고 동서로 마주 보고 있다.

  

 


미륵산(430.2m)

  

   익산의 주산으로 원래 용화산으로 불리었으나 미륵사에 인연하여 미륵산이 되었다.전북 익산 금마면, 삼기면, 낭산면에 걸쳐 있으며, 남방에 만경강(萬頃江)을 거느리고 있고 북방에는 금강(錦江)이 흐르는 익산평야의 주산을 이루고 있으며 동으로는 천호산(天壺山) 줄기를 두르고 운장산(雲長山) 등 노령산맥(蘆嶺山脈)과 연결된다.

  

   익산 평야에 우뚝 솟아 있는 이 산의  정상 북봉에는 KBS 중계탑이 서 있고 호남평야가 시원하게 펼쳐진다. 별로 높지 않으면서 이곳 저곳의 암봉들이 소나무 숲과 어우러져 가족나들이 코스로 좋다.

  

    해발 430미터인 이 산은 석존이 법화경을 설 했던 마갈타국 수도 왕사성 근처의 영취산(靈鷲山)과 매우 흡사하며, 사자사(師子寺)언덕이 영산회상과 같다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이 용화산의 남쪽 방향으로 기억해야 할 우리의 역사가 다양하게 전개된 것이다. 용화산에 기준성이 남아있고, 이것을 중심으로 마한의 도읍이 열렸다고도 하고, 백제말기인 640년경에는 왕궁이 건설되었다는 것이다.

  

   오늘의 미륵산 기슭에는 백제의 유물로 동양최대의 가람지를 자랑하는 미륵사지에 석탑과 당간 지주 등이 남아있고, 미륵사를 혈(穴, 명당)로 볼 때 내청룡 자락의 끝 머리에 해당하는 지역에 이른바 왕궁리 오층 석탑이 서있다. 이 지역이 왕궁면 왕궁리 인데, 오층 석탑을 중심으로 왕궁지가 전개되고 있다. 제석사, 사자사, 석불사, 태봉사 등 많은 절, 왕궁면 고도리(古都里) 석불입상(石佛立像)과 삼기면 연동리 석불입상 등 다수의 불상과 탑, 덕기동에 위치한 쌍릉 등의 분묘, 이 모든 지명과 유물들이 고래 이 지역의 역사적 편린을 말해준다. 풍수지리설에서는 남쪽으로 내려 뻗은 산맥, 즉 내용(來龍)은 물을 만나면 멈춘다고 한다. 멈추는 곳은 기가 뭉치는데, 그러한 곳을 감여가(堪輿家)들은 명당이라고 한다.

 

   그런데 대둔산 자락에서 휘감아 돌아온 용화산(龍華山), 즉 오늘의 미륵산(彌勒山)은 호남평야의 넓은 들가에 들어서며 멈춘 용의 기세와 같이 정기가 어려 보인다. 전국의 크고 작은 절의 위치가 한결같이 길지인 것은 두루 알려진 사실이지만,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基陽里)에 위치한 미륵사터는, 명당에다 산자락을 싸고 남쪽으로 앉은 좌향까지 형국을 갖추고 있다.

  

   미륵산을 중심한 왕궁면, 금마면, 삼기면 일대는 불교사원과 석불 등이 폭넓게 분포되어 있다. 발굴작업에 의해 출토된 토기 등의 매장 유물들은 왕족 및 세도가들의 존재와 그들이 향유했던 문화의 수준을 전해준다.

 

 


   등산 코스


 미륵사지- 약수터- 정상  ② 과학고등학교 - 사자암 - 정상   ③ 아리랑 고개 - 정상

 

 

 

 

▲ 등산지도

일 시

2005년 3월 7일(월) 12:00 - 14:19 (2시간19분)

동 행

반려와 나

날 씨

대체로 흐림

코 스

미륵사지 관람(11:00-12:00)
미륵사지 출발(12:00)
1번등산로
정상
(13:22-36)
2번등산로
미륵사지 주차장 도착(14:19)

 
 
 

미륵사(彌勒寺) 복원 조감도
미륵사는 백제 무왕 때 건립된 최대 규모의 백제 사찰이다. 『삼국유사』 무왕조(武王條)에 미륵사 창건에 관한 기록이 자세히 나타나 있는데, 이는 발굴 조사를 통해 사실임이 밝혀졌다. 언제 폐사(廢寺)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조선 시대 중기까지는 남아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북쪽에 우뚝 솟은 용화산을 주봉(主峰)으로 갖고 남향으로 자리잡은 미륵사지는 발굴 전부터 서쪽에 6층만 남은 석탑, 초석만 남은 건물지와 동쪽의 탑지와 건물로 동, 서가 대칭되는 가람(伽藍)을 가진 사찰로 추정되었다.
하지만 발굴 조사로 1개의 금당과 탑이 이루는 보통의 사찰 가람이 옆으로 나란히 3개가 놓여 3원식(院式)의 가람을 이루고 있음이 밝혀졌다. 중원(中院)에는 금당지와 목탑지, 그리고 이를 에워싼 회랑지가 있고 동서로 대칭되는 건물과 석탑이 역시 회랑지에 둘러져 있다. 동서를 둘러싼 외곽의 회랑지는 북쪽에 위치한 각각의 동, 서 승방지와 연결된다. 중원의 북쪽에는 강당지와 북승방지가 자리하고 있다. 중문 앞에는 동서 1기씩 당간 지주가 있으며, 사지(寺址) 서남쪽으로는 1997년에 건립된 미륵사지 유물 전시관이 있다. 사적 제150호이다.

  

 

미륵산으로 가는 길

 

    군에 간 아들이 100일 휴가 온다기에 휴가를 냈는데  폭설로 휴가가 순연되어 우리에게는 또 다른 휴일이 되었다. 반려의 타박상은 별 차도가  없지만 오래만에 가벼운 산행을 해보기로 하고 산행지를 물색 중 우리의 눈길은 마한과 백제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익산의 미륵산에 이른다. 익산시 금마면에서 북쪽으로 5km쯤 떨어진 미륵산(430.2m)은 미륵사지를 품은 익산의 진산이다. 봉우리가 사자 모양처럼 생겼다고 해서 일명 사자봉이라고도 불린다.

 

   계룡 (10:15)→ 계룡IC(10:21) → (호남고속국도) → 익산IC(10:48) → 익산방면 722번 지방도→금마면 입구 사거리에서 우회전→ 면사무소 앞 삼거리 지방도 722번 진입→ 미륵사지(11:00)

  

 
 
▲ 미륵사지 동원 9층석탑과 미륵산 전경

 

 
 
▲ 미륵사지 동원 9층 석탑과 복원을 위한 서원 9층 석탑 공사장

 

 
 
▲ 동원 9층 석탑과 당간 지주

 

 
 
 ▲ 공사장 내부

 

 
 
 ▲ 동원 9층 석탑과 미륵사지

 

 

 미륵신앙을 생각하며 오르는 미륵산

 

    미륵신앙의 메카답게 넉넉하고도 여유로운 미륵사지를 한 시간 가량 둘러보고 미륵산으로 오른다. 약 20분 정도 걸으면 1번 등산로 입구 치성 기도처를 지난다. 삼국시대 이후 이땅의 토속신앙과 융합된 미륵신앙은 이상적인 복지사회를 염원하며 우리들의 생활 속에 스며들어 있기에 지금도 이런 저런 모습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초입의 평탄한 오름길은 중간부터 조금씩 가팔라지는데 바위길 등산로 양쪽에 설치한 쇠파이프 난간은 훌륭한 손잡이 역할을 해준다. 이렇게 10여분 오르면 정상 방향 중턱에는 거대한 바위가 보이는데 이름을 붙인다면 아마도 미륵바위 정도가 어울리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미륵사의 3탑 3금당식 가람 배치가 한 사람을 위한 것보다는 일반 평민 대중까지 용화세상으로 인도하겠다는 미륵신앙이 바탕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이 바위는 여러 개의 기둥들이 모여 상부를 이루고 있다.

  

    이름이 있을 법한 이 바위에 관하여 이야기하며 10여분 오르면 전망바위들이 있는 능선에 이르는데, 주위에 넓게 펼쳐진 평야를 바라보면 이 지방의 넉넉한 인심을 떠올리게 된다.

  

   이 능선에서 정상부를 바라보며 10여분 오르면 2번 등산로와 만나는 삼거리에 이르는데 조금더 오르면  바위들이 있는 정상부이다. 여기에서 이 산의 남쪽으로 얕으막한 구릉위에 펼쳐진 미륵사지를 바라보면서 부여, 공주, 익산 지방을 중심으로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을 그 옛날 백제시대를 상상해 본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 보다 훨씬 더 웅혼하고 화려했으리라 짐작되는 잃어 버린 왕국 백제의 문화와 백제인들의 생활상을 어림해 본다.

  

 조금더 가면 정상인데 표지석은 없고 미륵산성 안내판과 산불감시초소가 있다. 정상에서 넓은 익산 평야, KBS 중계탑, 산성을 조망해 본다. 산성을 한 바퀴 둘러 보는 것도 좋다는 등산객(논산경찰서에 근무하시는 경찰관 부부)의 권유를 받았지만 아직 반려는 걸음이 불편한 터라 다음 기회로 미루고 간단하게 기념을 부탁하고 우리는 먼저 하산을 시작했다. 그분들의 친절한 설명과 함께 건네 받은 한 잔의 커피 향이 따뜻한 여운으로 남는다.

  

   하산길은 삼거리까지 되돌아와서 2번 등산로를 따라 내려 간다. 여기부터 중턱까지는 등산로 정비공사가 거의 완료된 상태로 꽤나 넓은 계단길이다. 조금 내려오면 사자암 가는 갈림길이 있는데 표지판이 없어 그냥 지나쳐 내려왔다. 중턱아래에는 공사자재들이 쌓여져 있고, 조금더 내려가면 모노레일이 설치되어 있는데 이 모노레일과 함께 가는 등산로는 아직 정비되지 않아 미끄러운 비탈길이었다. 조금 더 내려가면 미륵사지 동원 석탑이 보인다.

  

   동원 석탑, 당간 지주, 연못을 지나 유물전시관 앞에 이르니 월요일이라 휴관이다. 허기가 느껴져 도로를 건너 조용한 식당을 찾아 늦은 점심식사를 하고 왕궁 온천으로 향한다. 가는 길에 있는 왕궁리 5층석탑은 다음 기회로 미루었다.

 
 
▲ 1번 등산로 초입의 기도터

 

 
 
▲ 오름길

 

 
 
▲ 오름길

 

 
 
▲ 이름이 있을 법한 산 중턱의 바위

 

 

 

▲ 등로 중간에서 본 정상부

 

 
 
▲ 정상부에서 미륵사지 조망

 

 
 
▲ 정상부에서 한반도 모양의 저수지 조망

 

 
 
▲ 정상부의 바위 1

 

 
 
 정상부의 바위 2

 

 

 

▲ 미륵산 정상에서 반려와 함께

 

 
 
 ▲ 정상에서 통신중계소 조망

 

 

 

▲ 미륵산 정상에서 산성 조망

지방기념물 12호(지정일: 1973.06.23)인 미륵산성(彌勒山城)은 미륵산 정상부와 골짜기를 감싸는 포곡식(包谷式) 석성이라는 특징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문헌자료에 의하면 준왕(準王)이 쌓았다고 하여 기준성(箕準城)으로 불린다고 기록되어 있다.
성의 둘레는 1,822m로 10개소의 치(雉)와 동문지와 남문지에 옹성(甕城)이 남아 있다. 동문지의 발굴조사에서는 4차에 걸쳐 개축된 것이 확인되었는데, 백제 이후에 창건되어 최종적으로는 조선시대에 개축된 것으로 판단된다.
미륵산성(彌勒山城)은 금마면 소재지에서 약 3㎞ 지점에 솟은 표고(標高) 430m의 미륵산에 있다. 이 산성은 고조선(古朝鮮)의 준왕(準王)이 남하하여 이 곳에 도읍을 정하고 쌓았다 하여 기준성(箕準城) 이라고도 부른다. 지금은 이 산성이 미륵산에 있기 때문에 미륵산성이라고 호칭한다.
기준(箕準)이 쌓았다는 설은 성의 형태나 출토유물로 보아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 또한 백제시대(百濟時代)의 유물이 거의 출토되지 않음에 따라 백제시대까지 시기를 올려 볼 근거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지형적 이점으로 인해 여러 차례 개축되었으며 조선시대(朝鮮時代)까지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현재 일부 복원을 위한 성벽 석축 공사가 한창 진행 중에 있다.
『고려사절요』태조 19년조에 "고려 초에 전주를 근거로 할거하였던 후백제의 신검(神劍)이 부왕(父王) 견훤(甄萱)을 쫓았을 때 고려 태조가 이를 토정(討征)하여 마성(馬城)에서 신검의 항복을 받았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그 마성이 바로 이 미륵산성이다.

 

 
 
 ▲ 하산길(2번 등산로)의 계단

 

 
 
 ▲ 사자암 조망

 

 
 
 ▲ 2번 등산로 초입의 기도터

  

 
 
▲ 2번등산로 끝 미륵사지에서 미륵산 조망

 

 
 
 ▲ 분위기가 소박하면서도 멋스러운 식당에서의 정갈한 점심 식탁(순두부 백반)

 

귀가 길

 

왕궁온천(16:00-17:40) → 1번국도(연무 → 논산) → 계룡(18: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