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산 새인봉. 규봉암 산행

2006, 4, 12  나홀로

날씨: 맑은후 흐림

새인봉 : 새인봉은 정상의 바위덩어리가 임금의 옥새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무등 천제등을 향해 업드려 있는 사인의 모습을 닮았다 하여
사인암 이라고도 한답니다.


(새인봉의 선두암)

투구봉과 선두암(船頭岩)의 아름다운 절벽도 내려다 볼 수 있지요.
선두암은 그 모습이 뱃머리와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 이구요.
이 선두암의 절벽은 10여m 높이에 한칼로 자른듯 직각의 벼랑을 이루고 있어
무등산에서 가장 아슬아슬한 절벽 으로
산악인들이 암벽등반 훈련장으로. 젊은 알파니스트 들이 찾고 있답니다..
새인봉에서 보는 증심사.약사사가 포근해 보입니다.


규봉암 : 절 입구에 우뚝솟은 세개의 돌기둥(石柱)을 규봉이라 했는데
이바위를 삼존석(三尊石)이라고 한답니다.
삼존석은 여래존석. 관음존석.미륵존석 이며 도선국사가 이름을 지었다네요.
그중 관음존석은 끊겨져 누워있고 여래존석과 미륵존석 만이 서있답니다.
규봉암의 뒤편에 솟아 있는 총석은 그대로 한폭의 한국화를 보는듯 합니다.
옥을 깍아 세운 듯한 선돌이며 바위의 사이사이에 위태롭게 자라난 소나무와
잡목 숲은 형언하기 어려운 절경을 이루고 있습니다

(규봉암 여래존석과 미륵존석)

 

 

(규봉암)

보조석굴 위쪽 규봉암 입구에 문바위가 있습니다.
문바위의 기사(驥射)전설을 적어봅니다.

화순군 동면 마산리(馬山里)와 청궁(靑弓)이란 마을의 중간지점에
"살밭골"이라는 골짜기가 있는데.
산등을 향해 올라가면 무성한 소나무 사이에 큰 바위 하나가 있어
이 바위를 살바위라 한답니다.

이바위에는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김덕령 장군에 얽힌 이야기가 전하는데
김덕령 장군은 어려서부터 위엄 있는 용모에 힘이 장사였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좋아해 무등산을 자유자재로 오르내리며
무술을 연마했지만 간신의 모함으로 비명의 옥사를 면치 못했지요.

 

청년 김덕령은 무등산을 중심으로 상봉과 서석.입석.규봉.지장암
쪽을 뛰어다니며 무예을 닦는데 전념했고.
그가 이곳에서 말달리기를 익히던 때의 일입니다.

준마로서 아껴오던 백마를 타고 문바위에 올라와서 백마에게
"내가 큰 일을 하려면 말부터 잘나야 하는 법이다.
내가 이제 활을 쏘고 저 청궁마을 건너 바위까지 달리겠다.
이 화살보다 네가 먼저 당도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네목을 치겠다."
고 말하니 백마 또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이곳에서 화순의 살바위까지는 20리쯤 되는데 청년 김덕령이
활를 쏘자마자 백마는 네 발굽을 모아 번개치듯 눈 깜짝할 순간에
청궁의 살바위까지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도착해보니 화살은 보이지 않아
화살이 먼저와 땅에 떨어져 없어진 것으로 생각한 김덕령은
약속한 대로 칼을 뽑아 백마의 목을 쳤습니다.
순간.뒤에서 윙~하는 소리가 나더니 그제야 화살이 날아와 바위에 맞고
말 머리와 함께 땅에 툭 떨어지니
김덕령은 화살과 백마의 머리를 들고 자기의 경망과 조급함을
후회하며 한없이 안타까워했다고 합니다.
그 뒤 말의 무덤을 만들어주고 .그때부터 이 바위를
화살이 떨어진 곳이라 하여 "살바위"라 했고
이 곳 마을을 말이 죽었다고 하여 마살리 라 했다고 합니다.


이 바위에는 지금까지 말발굽의 흔적이 남아있고
후일 이곳에서 노산은 한 수의 시로 김덕령 장군과 백마의
한을 달래주었다 전합니다.

 

덕령이 어디 갔나 백마야 어디 갔나
어허 덕령이 어디 갔나
백마 데리고 어디 갔나
오늘은 청궁 마살리로
말 달릴 이 없구나!

 

천하의 충장공 김덕령 장군을 기리며.....

 

(천연 보조석굴)

지공너덜 : 지공너덜은 지공대사가 그 법력으로 수많은 돌을 깔아
만들었다는 전설이있어 이곳 돌은 어느것을 밟아도
덜컥 거리는 것이 없다고 합니다.
지공너덜에 있는 천연석굴 은신대는 바위가 저절로 지붕을 이루어 굴이 되었는데
기둥을 세우고 문을 달아 암자를 만들어 보조국사가 좌선수도후
순천 송광사를 창건했다고 전해지며 이름하여 보조석굴이라 한답니다.

(장불재에서 바라본 서석대-왼쪽 입석대-오른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