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 한담 51

구슬픈 으악새 노랫소리가 울려 퍼지는 무등산 장불재에서 - - -  


 


 

 늦더위에 지쳐 청량(淸凉)한 가을을 한껏 기대했는데 쓰잘데기 없이 가을비가 보름 내내 오락가락하여 튼실한 갈걷이를 기대했던 농심(農心)이 무너져 걱정거리가 생겨났다. 그러나 며칠째 추적추적 내리던 비가 멈추고 맑은 가을하늘이 언뜻언뜻 내비치니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어 다행스러울 뿐이다.
 

 그토록 기세등등했던 막바지 더위도 이번 가을비에 슬그머니 꼬리를 감춰 서늘한 기운이 감돈다. 넌더리나가 났던 한여름 폭염도 내년을 기약할 수밖에 없으니 왠지 서운함이 밀려든다. 이렇게 세월이 덧없이 흘러가니 인생무상(人生無常)을 탓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속절없이 지나치는 세월을 탓해서 뭐하랴. 지나간 시간들을 다시 되돌릴 수 없다는 삶의 이치를 터득할 나잇살에 이르렀음에도 철부지한건지 어수룩한 것인지 아직도 가는 세월을 붙잡으려고 발버둥치고 있으니 어찌 한심스럽지 않다고 얘기할 수 있겠는가.
 

 가을빛이 감도니 불현듯 으악새 소리에 취해 숨 가쁘게 살아온 지난날을 반추(反芻)하면서 다가오는 늘그막을 어떻게 꾸려갈 것인지 곰곰이 생각하는 시간을 갖고 싶다. 그래서 한동안 다가가지 못했던 무등산으로 간다. 오랜만에 고향을 찾아가는 기분에 들떠 발걸음이 가뿐하다.
 

 오르막으로 이어지는 토끼등을 거쳐 동화사터에 올라서서 설익은 추정(秋情)을 음미하면서 숨을 고른다. 중봉에 들렸다가 장불재에 다가서니 으악새가 가을의 소리를 내려고 채비를 서두르고 있다. 감칠맛은 덜하지만 그런대로 느낄만한 억새의 향연에 취해 여유로움을 만끽한다.

 

 번듯하게 내놓을만한 삶을 일궈나가려고 무던히도 애써봤지만 허공에 자화상(自畵像)을 그려보려고 안간힘을 쏟다가 주저앉은 꼴이 돼버렸으니 어찌 무상한 세월을 곱씹지 않겠는가. 뭣 때문에 별것도 아닌 기득권의 굴레를 벗어던지지 못하고 헛되고 헛된 것을 움켜쥐려고 이쪽저쪽을 기웃거리면서 고단하게 살아왔을까?
 

 단재 신채호 선생의「조선상고사」에 “개인이나 민족에게는 두 가지 속성이 있으니 첫째는 항성(恒性) - 시대와 환경이 변하더라도 변하지 않는 성질이고, 둘째는 변성(變性) - 시대와 환경에 다라 변하는 성질이다. 항성은 제1의 자성(自性)이고 변성은 제2의 자성이다. 항성이 많고 변성이 적으면 환경에 순응하지 못하여 멸절(滅絶)할 것이며, 항성이 적고 변성이 많으면 항성이 더 우수한 자의 정복을 받아 열패(劣敗)할 것이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변덕이 죽 끊듯 하는 사람을 일컬어 바람결에 흔들리는 억새에 비유한다. 그러나 으악새는 흐느적거리지만 억척스럽게 뿌리를 내리려 쉽게 뽑히거나 꺾어지거나 부러지지 않는다. 상황에 따라 하루에도 수십 번 변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이를 빌미로 지나치게 자신의 실익을 쫒는 우매함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지 않는 균형 잡힌 삶을 일궈나가려고 부단하게 노력하련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