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산 산행 Photo 에세이(2)
(2010. 1. 10/장불재- 석불암- 지공너덜- 규봉암- 백마능선-국화마을/ 우리산내음 산악회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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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석대 서석대 같은 명승지를 둘러본 육당 최남선은 “무등산을 천연의 신전(神殿) 같다.” 하였고 또 고인들은 오대산 같은 육산(肉山)에 골산(骨山) 월출산을 얹어 놓은 산이 무등산이라고도 하였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무등산 3석대’만도 그러한데, 당시 분들은 천황봉까지 본 후의 이야기일 터이니 다시 천황봉 보지 못하고 가는 길을 아쉬워하며 다시 장불재로 원점회귀(原點回歸)를 한다. 
   입석대로 하산 지점에 커다란 제왕의 능 같은  봉분이 하나가 있다.
누구일까 해서 가서 비명에 쓰인 것을 보니 '處士崔公燦翼之墓' 라 쓰여 있다.
처사(處士)란 옛날 벼슬살이에 나서지 않고 조용히 초야(草野)에 묻혀 살던 선비를 말한다.

지체가 높지도 않은 분이 어떻게 이런 천하 명산 그것도 정상의 일부를 찾이 하고 있는 것일까 자못 신기하기만 하다.
무덤의 위치는 물론 잘 가꾼 봉분과 망주석까지 있는 것을 보니 유명한 어느 후손의 조상 무덤 같다. 그보다 그 비석 측면에 부인을 합장한 이곳의 위치를 '郡西龍鎭山土峰下'라 쓴 것이 이 산의 이름을 말하는 것 같아 그 고증이 새삼 궁금해진다.

*.규봉암 가는 길
  몇 년 전 등산회를 따라왔다가 앞만 보고 달리는 말과 같은 그분들과 떨어져서, 홀로 증심사와 약사사에다가 새인봉까지 둘러보고 장불재에 이르고 보니 일행은 벌써 하산하여 산 아래 주차장에서 뒤풀이를 하고 있다.
고양시 일산에서 860리를 달려와서 입석대와 서석대를 보지 못하고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어서 그분들게 산사에서 하루밤을 자겠다고 연락하고 규봉암을 향하였다. 설마 절에서 길 잃은 이 늙은 나그네를 내치랴 하는 마음에서였다.

'  입석대 '0.4km/ 규봉암 1.8km/' 이정표에서 보듯이  규봉암은 장불재에서 1.8km로 산허리를 돌아가야 하는 인적이 드믄 희미진 외길인데 그 중간도 가지 못하여 해드 랜턴을 켜야만 했다.
  그 어둠 속에서 제일 먼저 만난 곳이 석불암(石佛庵)이라는 마애미륵불(磨崖彌勒佛)을 모신 작은 암자였다.
이 암자는 산신기도 도량으로 불심이 두터운 선남선녀가 찾아온다는 곳이다.
석불암은 대변을 못 가리는 93세의 노모를 모신 스님 한 분이 지키는 암자라서 다시 규봉암을 찾아 가야했다.
깊어 가는 밤에 홀로 찾아가는 규봉암 길은 발자취를 확인 할 수 없는 너덜겅 길에다가 이정표도 거의 없는 산길이라서 암자 찾기가 쉽지 않았다.
노산 이은상은 규봉에 와서 그 아름다움에 취해 밤길을 헤맸다는데, 이 사람은 달도 없는 깊은 밤에 그 규봉을 찾지 못해 두려움 속에서 그 험한 지공너덜길을 헤매고 있었다.

규봉(圭峰) 높은 절에 종소리 끊어지고
밤 예불 마디마디 달은 점점 밝아 오네
삼존석(三尊石) 십대(十臺)를 돌아 밤새도록 헤맬거나.
                  - 규봉암에서/ 노산 이은상



-지공(指空)너덜: 장재불에서 규봉(圭峯)까지 사이에 무수히 깔려있는 너럭바위들이 무등산의 3대 너덜 중 대표적인 너덜인 지공너덜이다.이 너덜은 산의 정상에서 동남쪽으로 3km 남짓 되게 깔려 넓은 돌 바다를 형성하고 있다. 이곳을 지공너덜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인도의 승려 지공대사(指空大師)에게 설법을 듣던 나옹(懶翁)선사가 이곳에 수도하면서 명명한 것으로 지공대사가 여기에 석실(石室)을 만들고 좌선수도(坐禪修道)하면서 그 법력으로 억 만개의 돌을 깔았다고 전해 온다.


 지공너덜을 어둠 속에 지나다 보니 돌로 싼 담이 있다.
웬 담인가 하여 들어가 보니 크고 넓은 바위 사이로 석실이 있다. 한국불교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송광사를 창건하기 전에 좌선하였다는 보조석실(普照室,일명 은선대)이었다. 이를 보고 '이젠 규봉암'에 다 왔구나 !' 하고 반가와 했는데 아무리 살펴보아도 불빛도 인적도 없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나마 주위는 서석대 입석대 같은 바위로 둘러 싼 절경이 계속된다. 그 절리 앞에서 갑자기 겁이 난다.

내가 지금 규봉암을 지나친 것은 아닌가. 길을 잘못 들었다면 큰일이다. 꼬막재까지가 3.6km요, 거기서 인가가 있는 원효사까지는 3.4km를 더 가야 한다니 이 밤중에 이게 가능한 일인가 해서였다.
급히 핸드폰을 열었다. 119에 전화를 걸어서 규봉암 스님에게 절의 불이라도 켜 주어서 위치를 알게 해달라고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는 중에 무심코 옆을 보니 우측에 두 바위 사이가 길인 것 같다.

커다란 바위 둘이 있는 사이를 너덜을 딛고 올라가보니 아아, 거기에 절 지붕이 희미하게 보이지 않는가. 규봉암의 범종각이었다.  그 절 바로 옆에서 절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 규봉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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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님, 서석대 입석대를 날이 저물어 보지 못하여서 그냥 서울로 가지 못하고, 그걸 보고 가고 가려고 여기까지 오게 된 사람입니다. 하루 저녁 유할 수 있는지요?"

50대 중반 스님은 먼저 공양은 하였는가를 묻더니 급히 침실로 안내 한다.

스님의 인정처럼 심야 전기온돌의 방은 유난히 따뜻하였다.

집에서 보온 도시락에 준비하여 간 점심겸 저녁겹 먹는 밥에다가 스님이 차려 주는 절 반찬으로 편안한 요기를 할 수 있었다.

초면에 친절을 받다 보니 미안한 마음에 수다를 떨었는지 스님이 한 마디를 한다.

   "기(氣)는 쏟지 마시고 보관하셔야지요."

알고 싶은 것도 많고 묻고 싶은 것도 많은데 이 한 마디에 더 이상 물어 볼 수가 없었다.
시계를 보니 밤 7시도 안되었는데 이 암자의 밤은 절간 같이 조용한 절간이기만 하였다.  

'이 많은 시간의 밤을 어떻게 보내야 한다?' 잠을 청하다가 일어나 보니 아직도 밤 10시 경이었다.
내일 눈이나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가 걱정스러워서 몇 번이나 밖을 나가 보곤 했다.
저 아래 화순 지역의 반짝이는 인가의 전등불은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빛과 같이 아름다운 밤이었다.
규봉암은 관세음보살을 관음전(觀音殿)에 모신 관음 도량이었다
  어둠 속에 묻혀 있는 규봉암의 절경이 보고 싶어 밤새도록 기다리던 아침은 왔지만 주위는 깊은 안개에 휩싸여서, 규봉의 아름다움을 카메라에 담아가고 싶어 불원천리하고 찾아온 마음을 섭섭하게도 접어야만 하였다.

 
광주의 진산인 무등은 또 서석이라 한다. 그 산세가 웅장하게 엎드려 아무 산이나 본뜰 수가 없다. 산 동쪽에 암자가 있으니 규봉암이라 한다. 곁에 기이한 바위들이 널려 서 있기 째문이다. 위를 쳐다보는 바위, 아래를 내려다 보는 바위, 누은 바위, 일어선 바위, 총총하게 솟은 바위, 홀로선 바위 등의 높이가 가히 수백 척에 사면이 구슬을 깎아 놓은 듯하니 서석 규봉의 이름은 거시서 취한 것이다.
                                                                                                                    -동국여지승람 권 40조

규봉(圭峯)에서 '圭(규)' 는 '홀(笏)'이란 뜻이다. 규봉암의 두 문 같은 바위 모습이 벼슬아치들이 임금님을 알현할 때 조복(朝服)을 입고 오른 쪽에 들던 홀(笏)과 같다하여 이 절을 규봉암(圭峯庵)이라고 한 것이다.

이 두 기둥과 그 위에 걸린 돌로 인하여 삼존석(三尊石)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기도 한다.
이 암자 정문으로 난 돌층계를 밟고 오르다 보면 '無等山圭峰庵'이란 현판의 2층 범종각이 있어 그 아래로 암자에 들어오게 된다.

그러니까 범종각(梵鐘角)이 이 암자의 일주문인 셈이다.

그 범종각 왼쪽에 우람한 돌기둥 둘이 문처럼 서 있는데 신기하게도 그 상단에 커다란 돌 하나가 걸려 있다. 그것이 내가 어제 들어온 규봉암에서는 가장 유명한 충장공 김덕령(金德齡)의병장군과 애마(愛馬)에 얽힌 전설이 전하여 오는 ‘문바위’였다

; -임진왜란 시 의병대장 김덕령 장군이 무술 연마할 때의 일이었다.지금의 규봉암에 있는  ‘문바위’라는 높은 돌기둥 앞에서 자기의 애마 백마에게 말하였다. ‘내가 큰일을 하려면 너부터 잘 달려야 할 것인즉 이제 내가 활을 쏠 터인데 화살이 건너편 5리 밖에 있는 마실리에 이르기 전에 네가 먼저 거기에 당도해야지 그렇지 못하면 네 목을 치겠노라.‘ 백마도 주인의 말을 알아들은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윽고 화살이 활시위를 떠나자마자 백마도 김 장군을 태운 채 쏜살같이 달렸다. 목적지에 도착한 김장군은 화살이 보이지 않자 화살이 말보다 먼저 날아와 어딘가에 박혀있는 줄 알고 칼을 뽑아 애마의 목을 치려고 하였다. 순간 허공에서 “위잉-”하는 소리와 함께 그때서야 화살이 날아오는 것이 아닌가.                                               -무등산도립공원 홈페이지


규봉암의 진면목을 보고 싶어 오전 8새 30분까지 날씨가 맑기를 기다려 보았으나 무등산 최고의 절경이라는 규봉은 짙은 안개가 그 모습을 감싸고 드러내지 않아서 하릴 없이 작별을 고할 수밖에 없었다.

  "스님, 일기 예보가 비나 눈이 몰려온다는데 서둘러 입석대 서석대로 가 봐야겠습니다."
밤 늦게 불쑥 나타나서 아침 공양까지 얻어먹은 이 무뢰한이 스님께 하직인사를 하고 암자를 나서는데 반갑지 않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스님은 우장없이 떠나는 나에게 걱정스런 마음으로 공양하던 과일 몇 개를 건넨다. 불자가 아닌 나의 마음에도 진심으로 ‘나무아미타불’ 마음 속으로 염하고 있었다.
  입석대 서석대를 비를 맞고 가다 보니 문득 깨닫는 바가 있다.

그렇구나. 어제 내가 헤매다 만난 절리가 광석대(廣石臺)였구나.

 내가 어둠 속에 찾아 들어온 문이 문바위였구, 오늘 아침 세수를 한 차디찬 물이 의상조사를 감동시켜 규봉암을 짓게 한, 가물 때도 마르지 않는다는 석간수였어. 내가 잠들던 여기가 바로 보조(普照), 진각(眞覺), 양진(養眞) 대사들이 거닐며 득도한 곳이었던 거야.
이것이 이름을 감추고 똥그랑 땡 스님이라 말하던 스님이 가르쳐주신 이심전심(以心傳心)이요 교외별전(敎外別傳)의 말씀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규봉을 가보지 않고는 무등산을 말하지 말라’ 라는 규봉을 나는 마음으로 보고 마음으로 만났다.

*. 백마능선 이야기 
   무등산에서 내려다보면 장불재에서 남동쪽으로 길게 뻗어가는 능선이 있다.

장불재는 꼬리요 저 끝 낙타봉이나 안양산은 짐승의 머리 같다. 백마능선이었다.

가을이면 바람 따라 능선의 하얀 억새가 파도치면 "장불재(900m)~낙타봉(920m)"까지  7km의 억새 길이 마치 백마의 갈기처럼 보인다하여 '백마능선'이라 부르는 호남정맥의 길이다.

그 길을 한 줄로 앞서가는 모습과 도중 도중의 절리의 멋진 모습이 황홀할 정도로 아름답다. 뒤돌아보면 오늘 하루 우리를 즐겁게 하던 설산 무등산이 시선을 준다.
그 무등산 중간에 호피를 펴놓은 듯한 모습이 옛날 내가 밤 깊어 규봉암을 찾아가던 지공너덜겅이고 그 우측에 있는 절리가 무등산 3대 절경의 하나라는 규봉(圭峰)이다.
백마능선에 서서 나의 발자욱이 찍힌 무등산을 멀리 바라본다.
고희(古稀)와 망팔(望八)를 훨씬 넘긴 나이이고 보니 요즈음은 산을 오르는 길이 버겁다.
젊어서는 정상이 그렇게 반갑더니, 왜 이렇게 멀어만 보이는가. 그 자리에 주저않아 바라 보다가 가고 싶어진다.

그러나 ‘오늘 안 오르면 다시는 못오르지!’ 하는 마음에 기를 쓰고 오르는 것이 오늘은 무등산이 되었다.
아내는 젊은 분들에게 방해가 된다고 산행을 만류한다. 이런 나에게 무등산 등산에 어찌 감회가 없을까.

  

산은
무등산은
3재봉(三才峰)  3석대(三石臺)로
육산 오대산에다 골산 월출산을 머리에 인
하나의 거룩한 신전(神殿).
무등산에 오르면
우러러 보던 천국이다.
굽어보는
광주(光州)와 화순(和順)은 무릉도원이다.
부처가 무등이듯
절도 산도 무등이어야 하듯
호남 사람도 Korean도
다 무유등등(無有等等)하라고
무등산(無等山)은 설법하고 있다.
-무등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