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산 산행 Photo 에세이
(2010. 1. 10/ 너나목장- 중머리재- 장불재- 입석대- 서석대- 장불재- 백마능선- 국화마을/ 우리산내음 부부산방 따라)

*. 광주와 무등산

   무등산은 광주 동쪽 10km에 있는 도시와 가까운 산이다.
소백산맥에서 서쪽으로 뻗은 호남정맥 중 장안산(1,236m, 장수)과 백운산(1,217m, 광양) 중간 지점에 있는 광주의 진산으로 그 넒이가 30.23㎢인데 광주가 27.0㎢, 화순 2.4㎢, 담양 0.8㎢에 걸쳐 있는 산이다.
무등산의 이름은 백제 이전까지는 무당산, 통일신라 때는 무진악(武珍岳) 또는 무악(武岳), 고려 때는 서석산(瑞石山) 이라는 이름과 함께 무등산(無等山)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무등(無等)'이란 반야심경에 나오는 '무유등등(無有等等)'의 준말로 부처님은 가장 높은 자리에 있어서 견줄 이가 없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이 산과 ‘겨줄 수 있는 산이 없다[無等]’하여 지어진 이름이 무등산(無等山)이다.  
무등산이란 이름이 전하는 노래로 백제의 부전가요(不傳歌謠) 무등산가(無等山歌)가 있다.

-無等山 光州之鎭山. 州在全羅道巨邑. 城此山 民束負以 安樂而歌之( 무등산은 광주의 진산으로 전라도에 있는 큰 읍이다.이 산에 성을 쌓으니 백성들이 근심없이 편안히 즐거워 하며 이를 노래하였다.) -‘고려사 악지(樂志)

 

 

  

무등산(1,187m의)은 호남평야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호남의 얼굴이 되는 어머니 같은 산이다.
동서남북 어느 쪽에서 보아도 그 모습이 한결같이 두루뭉술하여 믿음 직하고 덕이 있는 산이다. 
그래서 그 모양  때문에 광주의 고로(古老)들은 이 산을 '무덤산'이라고도 불렀다.
 이 산은 서울ㆍ부산ㆍ대구ㆍ인천에 이어 국내에서 5번 째로 큰 142만 여명이사는  호남지방(湖南) 최대의 도시 광주(光州)의 진산(鎭山)이요,호남에서는 제일 높은 산이다.

 
*. 증심사 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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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년 연초에 103년만에 최고라는 폭설로 무등산에 설화(雪花)가 만발하였다는 소식과 함께 전 이한희 화순한마음산악회 회장  초대에 따라 우리 산내음산악회는 서울서 800리 길을 달려 화순을 왔다.
안내까지 자청해 준 전 이 회장이 버스에 올라 화순(和順) 을 소개 한다.
"아시다싶이 광주의 자랑은 무등산입니다. 그 무등산의 진수인 서석대와 입석대 광석대가 우리 화순군에 있지요. 천불 천탑과 와불로 유명한 운주사(雲住寺)가 있는 고장,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고인돌과 그 채석장으로 유명한 고장에 오신 한국의 산하 '우리 산내음산악회'의 무등산 방문을 환영합니다."
  지도에서 확인해 보니 서울의 진산 북한산 백운봉(白雲峰)이 고양시에 있듯이 무등산의 '장불재, 입석대, 광석대, 규봉, 천황봉'이 화순(和順)에 있고 '서석대 인왕봉, 지왕봉'이 화순(和順)과 광주(光州)에 걸쳐 있다.
  다음은 2008년 10월 26일 화순한마음산악회가 주관한 "전국산악인 초청 등반대회"를 다녀와서 쓴 나의 졸시다.

운주사(雲住寺) 다녀오고도 화순(和順)을 몰랐다.
입석대(立石臺), 규봉(圭峰)을 올라서도 화순(和順)을 몰랐다.
화순(和順)의
인정(人情)을 만나고야
화순(和順) 것임을 알았다.

쌍봉산(雙峰山) 대웅전(大雄殿) 닮은 속리산(俗離山) 팔상전(八相殿) .
고인돌 채석장(採石場)과 화순(和順)의 지석묘(支石墓)가
세계의
문화유산(文化遺産)임을
화순(和順) 와서야 알았다.

이제는 화순(和順)을 아노라 말하리라.
무등산(無等山) 참모습을 화순(和順) 와서야 만났다고.
화순군(和順郡)
그 옆에 있는 도시가
빛고을 광주(光州) 라고.
-화순 군민(和順 郡民) 에게

  오늘 우리들의 등산 일정은 화순 '너나목장'에서 출발하여 '중머리재→ 장불재→ 입석대→ 서석대→ 백마능선'으로 해서 국화마을로 하산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오늘의 산행에다가 3년 전에 찾아온 '증심사→ 약사사→ 새인봉(490m)'과 '규봉암 이야기'를 아우를 생각이다.

*. 증심사와 약사사 이야기 

 무등산에는 원효계곡·용추계곡·약사사계곡 등 3 계곡이 있다.  약사사계곡을 끼고 증심사와 약사사가 있고,원효계곡에 원효사가 있다. 무등산 절 중 제일 큰 사찰이 증심사(證心寺)다.

-증심사(證心寺)는 통일신라시대에 철감선사 도윤(澈鑑禪師 道允 798년~868)이 창건하였다고 전해 오는 절이다. 정유재란에 때 불타버리고 다시 지은 절이 안타깝게도 6.25 전쟁 때에 또 불타면서 국보급의 문화재들이 분실되었다. 그때 증심사에서 소실되지 않은 당우에 오백전(五百殿, 광주시유형문화제제13호,광해군 때 건물)이 있다.
 

이 증심사에서는 오백전 외에도 신라의 대표적인 철불인 철조비로사나불좌상(鐵造毘盧舍那佛坐, 보물131호)과 유형문화재1호인 3층 석탑이 유명하다. 
철조비로사나불좌상은 왼손 집게 손가락을 뻗치어 세우고 오른 손으로 감싸 쥐는 지권인(智拳印)을 하고 있는 불상의 모습이다.
이때 오른 손은 불계(佛界)를 왼손가락은 중생계(衆生界)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 불상의 크기가  인체 크기의 등신불(等身佛)이어서 친근감을 느끼게 하는 불상이다. 
3층석탑은 상륜부는 없어졌지만 지붕모서리의 쳐 올림한 곡선이 매우 아름다운 신라 시대의 탑이기 때문이다.
증심사 입구3거리로 다시 나오니 0.8km 거리에 약사사(藥師寺).가 있다.
 
-무등산에서 6.25의 피해를 입지 않은 오직 하나의 사찰이 약사사다.
신라 문성왕 때 철감국사가 증심사를 세우기 전에 세웠다는 절집이 약사사다. 처음 지을 때의 절 이름은 인왕사(仁王寺)라고 하였다. 이 절의 자랑은 9C 통일신라 시대에 조성되었다는 연화좌(蓮華坐)에 결가부좌한 높이 1.2m의 석조여래좌상(보물 600호)이다.

  대웅전 섬돌에 앉아 바라보니 남쪽에 커다란 봉우리가 있다. 서인봉(608m)이었다. 이 절의 일주문에서 0.6km를 오르니 우측으로 새인봉 가는 능선이 펼쳐진다.

*.새인봉(璽印峰) 이야기

  무등산에 있는 주요 산봉우리를 높이 순서대로 들어보면 '천왕봉(1,187m), 중봉(915m), 원효봉(561m),의상봉(546m),낙타봉(546m),새인봉(490m)' 등이다.
새인봉(璽印峰, 490m)은 그 높이로는 서울 남산보다도 낮은 산봉우리로 약사사 남서쪽에  우뚝 솟아 있는 두 개의 바위덩이 봉이다.
그 정상의 바위 모습을 멀리서 보면 나라님의 도장인 옥새(玉璽)와 같다 하여 새인봉(璽印峯) 또는 인괘봉(印掛峯)이라 하는 봉우리다.    새인봉에서는 굽어보는 광주시의 전망도 일품이지만 남동쪽의 투구봉[감투바위]과  바로 아래 배 머리 모양의 10여 m 높이 직벽의 선두암(船頭岩)이 특히 아름답다. 
선두암은 금강산의 총석정 같은 절리의 기둥을 하늘로 뽑아 올리고 있는데, 기묘하게도 능선이 작은 쇠 층계로 연결되어 있다.
  새인봉의 절경 속에 하나의 흠이 있다면 새인봉 정상에 있는 두 개의 무덤이다.
여행을 다니면서 간혹 보게 되는 밭 가운데 있는 무덤이나, 등산길을 막는 무덤은 우리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사유지에다 쓴 묘야 어쩔 수가 없겠지만, 여기는 광주가 자랑하는 도립공원이요, 국립공원 선정을 꿈꾸는 무등산이기에 하는 말이다.

*. 장불재 가는 길의 설화(雪花) 

화순 '너와나의 목장'이 있는 수만리4구에서 중머리재로 가는 오늘의 무등산 산행 길은 중봉을 바라보며 산을 우회하는 평탄한 눈길의 산길이었다.
우측으로 장불재의 멋진 송신탑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드디어 중머리재다.
무등산의 설화(雪花) 때문이었을까. 게다가 마침 점심시간이라서 많은 사람들이 식사하는 이, 쉬는 이들로 떠들 법석하다.
  
  
  
  
  
중머리재(586m)의 어원은 무엇일까.
여기서 '머리'는 끝이나 꼭대기를 뜻하는 말인데 그 앞에 ‘중’은 무슨 의미일까.
지리산 천황봉 다음으로 높은 산이 중봉이듯이, 무등산 천황봉 다음으로 높은 산이라서 중봉(中峰)이라 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중머리재의 ‘중’은 중봉에서 왔을 것이라고 유추할 수 있겠다.
그도 아니라면 새인봉(490m)과 중봉(915m)의 각각의 중간 1km 내외에 있어서 '중'자가 붙은 것이라고도 생각되지만 전자가 알맞는 말 같다. 중머리재에 있는 '중봉1km'라는 이정표가 이 나의 생각을 뒷바침해 준다.
  

 

장불재를 향하다 보니 찬란한 눈꽃길이 시작된다.
나무란 나무는 흰눈을 이고 있고, 가지란 가지마다 하얀 눈이 꽃처럼 피어있다. 눈 없이 그냥 서있는 초목은 하나도 없다.
"저 나뭇가지 봐! 루돌프 사슴 뿔 같아!"
"저 것 봐. 솜사탕도 같고 눈 소시지도 같아. 아냐 눈 열매야!"
중머리재에서 용추3거리를 지나 장불재까지 1.5km나 그 설경에 그 감탄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 광경 하나하나를 어찌 필설로 다 말할 수 있으랴. 보시라 저 모습을,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라니.

 

 


그러나 옛날 내가 태백산과 소백산 가는 길에서 보던 파란 하늘 아래 펼쳐진 설화 만발한 세상이 아닌 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때 감흥을 다음과 같이 시화(詩化)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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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이 산을 그려 눈으로 내려왔나.
나무가 겨울 그려 겨울 꽃을 피웠는가.
바람이
파란 하늘 아래
눈꽃 잔치 벌였다.
-눈꽃

  금년에 이상 기온으로 기상대 창설 이래 최대의 폭설이 내렸다.
농산물 수산물은 값이 급등하고 출퇴근에 직장인들은 교통체증으로 아우성을 치고 있지만 산꾼들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마음이 산을 향하고 있다. 눈다운 눈이 내린 눈 덥힌 산을 마음껏 밟아 보며 설화를 보고 싶어서다.
그런데 기 많은 분들이 상고대와 설화를 혼동하여 말하고 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상고대란 '서리(frost)'와 설화는 '눈(snow)'과 관계 되는 말이다.
다음은 사전을 소개하는 것이니 참고하여 상고대와 설화를 구별하여 사용할 일이다.

영한사전: 상고대: a heavy frost on treetops 나무 위의 강설(降霜)/ 설화(雪花‧雪華) :
『눈송이』 snowflakes, 『나뭇가지의』 snow on the branches; sil-ver thaw
민중서관 국어사진(이희승): 상고대: 나무나 풀에 내려 눈같이 된 서리./1. 눈송이.
2. 나뭇가지에 꽃처럼 붙은 눈발.
우리말큰사전(한글학회): 상고대: 서리가 나무에 내려 눈처럼 된 것/설화(雪花, 雪華)=눈송이, 나뭇가지에 붙은 눈발
표준국어사전(이숭녕): 상고대: 초목에 내려 눈같이 된 서리/설화(雪花, 雪華)=눈송이, 나뭇가지에 내린 눈발 snow on the
branches

*. 장불재 이야기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듯이 무등산 등반은 장불재로 통한다.
그 정상 밑의 요란한 송신철탑이 솟아있는 곳이 장불재다.
오른쪽 것이 KBS통신 탑이요,왼쪽에 있는 두 탑이 MBC, SBS 송신탑이다. 
옛날에는 이 장불재 일대가 군사보호지역으로 묶여 민간인의 출입금지 지역이었다가 81년에야 풀린 곳이다.
90년에야 정상 일부인 서석대(해발 1천100m), 입석대(1천17m)에 오를 수 있게 되었다.
중봉에도 군부대가 주둔해 오다가 1999년에야 부대가 철수하였지만 천황봉 일대만은 지금도 그대로 묶여 있다.
군부대가 물러난 그 자리를 복원하면서 자연스레 억새가 장불재까지 이어져 가을의 백마능선은 억새밭으로도 유명하게 되었다.
'장불재'의 어원은 무엇일까.

나는 '국문학(國文學)의 봉우리를 넘은 국문학도라서 지명이나 산명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버릇이 있다.
한국의 산 이름은 산악숭배 사상과 함께 불교적인 것이 많아서 불교사전을 찾아보았더니 장불이란 말은 없고 대신 '長佛寺(장불사): 전라남도 화순군 서석산에 있던 절.'란 말이 나온다. 그러니까 장불재란 장불사가 있던 절 근처의 고개란 말이겠다.
그 장불(長佛)을 길게 누운 불상 즉 와불(臥佛)로 설명하는 사람들이 있다.
장불재는 평전(平田)이다. 평전이란 지리산의 세석평전처럼 높은 곳에 있는 평지(平地)를 뜻하는 말이다.

*. 무등산 3대 절경
  
   장불재에 오르니 저 멀리 천황봉은 운무에 싸여 있고 ‘무등산의 3대 절경’이라는 입석대 서석대 규봉이 우리를 굽어보고 있다.
규봉 대신에 규봉암 뒤 절벽인 광석대를 더하여 ‘무등산 3대 석경’이라고 한다.
그 중 제일 처음 우리가 만나게 되는 것이 입석대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 전신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3년 전에 왔을 때는 입석대 가는 길은 질퍽한 노면 때문에 고생하였는데 오늘 와서 보니 자연형 돌깔기 방법으로 탐방로를 잘 정비하여 놓아 상쾌한 길이 되어 있다.
그뿐인가 멋진 ‘입석대 전망대’와 '立石臺해발 1017m'란 표지석도 만들어 놓아 더 가까운 위치에서 입석대를 감상하고 기념할 수 있게 하였다.
광주의 상징이 무등산이라면 무등산의 상징은 천연기념물 제465호인 서석대(瑞石臺)와 입석대(立石臺)다.
약 7천만 년 전에 화산 폭발로 인한 용암이 식으면서 수축현상에 의해 냉각면이 수직방향으로 갈라져 기둥 모양의 주상절리(柱狀節理)가 되었다.
절리(節理)란 바위의 규칙적인 틈새를 말하는 지리학 용어다. 이 절리(柱狀節理)가 빙하기를 격으며 우리나라 그 어떤 산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오각 또는 육각형의 깎아지른 돌기둥 모양의 신비로운 절경을 이룬 것이다.
입석대와 규봉은 그 풍화가 많이 진행되어 기둥 모양이지만, 서석대는 풍화가 덜 진행되어 병풍 모양이다.
 서석대를 향하여 오르다 보면 드문드문 너덜겅이 있는데 이는 위에서 말한 돌기둥이 무너져 쌓인 것이다. 그러니까 무등산이 형성된 순서는 '서석대-입석대- 너덜겅' 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니 이런 풍화과정을 우리는 눈으로 느끼고 보면서 서석대를 향할 일이다.
그런데 그 아름다운 모양이 오늘은 설화가 만발한 은빛 세계를 배경으로 펼쳐져 있으니 오늘의 무등산에 있는 사람은 신의 축복을 받은 사람이다.
옛날에는 입석대 주변에 많은 암자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 흔적이라고 할 수 있는 움푹 뚫린 주춧돌이 있는 것도 그렇지만, 조선 중기 의병장 제봉 고경명(高敬命)이 무등산을 돌아보고 쓴 견문록인 유서서석롤(遊瑞石錄)에 '입석암, 상원등암, 상일암을 비롯한 10여개의 암자들이 바위 사이사이에 자리하고 함께 어울어져 무등산 제일의 명소였다'.라는 기록에 의해서도 알 수 있다.
입석대서 0.5km의 서석대 가는 길에 옛날에 있었다는 승천암의 전설 안내 표지가 있다.

어느 날 스님의 꿈에 이무기가 나타나 '산양을 잡아먹고 승천해야 하는데 네가 훼방을 놓았다며 만약 종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너라도 잡아먹어야겠다.'고 했다. 얼마 후 난데없이 우렁찬 종소리가 들렸고 이무기는 곧장 스님을 풀어주고 승천하게 되었다는 전설이 얽힌 바위다.
  
  
  

 
  
입석대(立石臺,천연기념물 제465호)는 무등산 정상의 서쪽 해발 1,017m 지점에 주상단애(柱狀斷崖)석축으로 5~6모 또는 7~8모로 된 돌기둥이 반달 같은 모양으로 둘러서 있다. 높은 것은 15m~16m로 대개는 10m 이상 되는 것이 한 무리고  또는 3~4단으로 겹쳐 세워져 있는 것이 마치 석수가 먹줄을 튕겨 깎아 세운 듯 돌기둥이 줄줄이 열을 지어 늘어 서 있다.   
  
  
  




  그러나 입석대를 통해 서석대에 오르게 되면 우러러보는 병풍 같은 모습이 아니라 꼭대기에서 내려다보는 서석대 경치였다. 서석대의 참모습을 보려면 거기서 옛길 따라 중봉 쪽으로 내려가든지 아니면 중봉에서 1.1km를 오를 일이다.
서석대 전망대 부근의 공군부대장의 경고문이 있는 쪽이 이 무등산의 주봉 천황봉이 있는 곳인데 천황봉 일대는 연무에 가려서 보이지 않는다.
서 있는 간판을 자세히 보니 1년에 한번쯤은 개방한다는 말이 있더니 사실인 모양이다.
출처:일산 신도시산악회 도수리님
  이 천황사 지역에 있는 봉을 '삼재봉(三才峯)'이라 한다.삼재(三才)란 천지인(天地人)이  니, 천왕봉(天王峰,1,187m)을 중심으로 북쪽에 지왕봉(地王峰,1,120m), 남쪽에 인왕봉(人王峰1,140m)이 그것이다.
이 천황봉 일대가 서울의 북악산, 인왕산처럼 개방된다 해도 내 나이로는 다시 올 수 없는 곳이라서 몇 번이나 뒤돌아 보며 장불재를 향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