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산 산행 Photo 에세이
(2006. 4. 20/함미성-광대봉-고금당- 전망대- 봉두봉-암마이봉-탑사-탑영제-매표소-남부주차장/ Daum 고양시늘푸른산악회 따라)

*. 비슬산을 가다가

  비슬산 진달래꽃이 보고 싶어 몇 년을 두고 벼르다 벼르다 마침내 그 축제일에 맞추어 예약을 하였는데, 지금은 4월 하순인데도 겨울 같은 날씨에 비슬산 진달래는 봉우리만 져 있다는 소식이다. 갈까 말까 하고 망설이기도 하였지만 약속은 약속이라서 어둠을 밟고 약속 장소에 갔더니, 지금 벚꽃 축제가 한창인 진안 마이산(馬耳山)으로 일정을 바꾸었다 한다. 잘 되었다. 비슬산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이지만 꽃을 빼 놓고 산으로만 따져서야 마이산과 비슬산은 격이 다르지 않은가.

*. 마이산(馬耳山) 유래
출처:진안군청 홈피
마이산(馬耳山)의 산 이름은 신라 때는 서다산(西多山), 고려 때는 용출산(湧出山), 이조 초에는 속금산(束金山)이었다. 그러다가 조선태종이 남행하여 진안 성묘산에서 제을 올리다가 이 산을 보고 말의 귀와 같다 하여 마이산(馬耳山)이라 이름지었다는 이야기가 '신증여지승람'에 전하여 온다.

태조 이성계와 마이산(馬耳山)과의 전설도 있다.
-대망을 가진 이성계는 지리산, 금산 등 전국의 명산을 찾아서 기도를 올렸는데 어느 날 밤에 꿈에 산신이 나타나서 금척(金尺)을 주면서 '이 금척으로 삼한 강토를 마음대로 헤아리도록 하라.'고 하더란다. 그 후 고려 우왕 때 장군이 되어 전라도 운봉 땅 황산에서 왜구를 무찌르고 개선하여 가는 도중 마이산을 보고 놀랐다. 꿈에 금척을 받은 장소가 마이산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태조 무렵에는 속금산(束金山)이라 부르기도 했다.
이성계가 등극 전에 임실 성수산에서 100일 기도를 마치고 이 산에 들어올 때 말을 매어 두었다는 곳이 탑사 아래에 이산묘(이山廟)란 사당으로 위 이야기가 사실이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 마이산 종주 길

  산악회는 건강한 젊은 사람들의 모임이라서 우리 같은 늙다리가 끼어 함께 하기엔 여간 부담이 되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산악회의 저렴한 산행비는 입장료를 아끼어야 하여서 들머리는 대개는 매표소가 아닌 험난한 코스를 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무리해서라도 함께 하다 보면 덕분에 오늘 같은 마이산 종주 코스를 경험하게도 한다. 혼자 와서야 종주를 엄두라도 낼 수가 있겠는가. 1990년 대 초에 마이산에 왔을 때도 달랑 암마이산 하나 오르고 탑사 구경을 마치고 갔다. 그때는 지금처럼 대웅전 자리에 양철 지붕의 당우만 있었던 시절이었다.
마이산 등산 코스는 11 개의 다양한 코스가 있다. 좋은 경치는 끝에 보아야 한다는 원칙에 따른다면 마이산 종주는 전주에서 오다가 덕천교에서 태자굴로 향하거나, 그보다 쉬운 길로 강정교에서 북수골 따라 오르는 보흥사 코스도 있다.


오늘 우리들의 마이산 종주코스는 강정리 함미산성 입구에서 시작하여 고대봉으로 해서 암마이산을 거쳐 탑사에 이르는 약 9km가 넘는 능선 종주 길이다.
이 코스는 마이산 종주코스에서 가장 난이한 코스지만 진안읍을 왼쪽으로, 탑사를 우측으로 한 전망을 즐기며 마이산을 바라보며 점점 가까이 가는 등산이기 때문에 너무나 좋다.
산행 들머리의 무덤 있는 곳서부터는 한동안 완만히 계속되는 오름길이었다. 강풍에 떨어진 진달래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는 산길 가에는 4월을 알리는 흑싸리 꽃이 화투에서 밖으로 나와 하얗게 피어 있었다.

 


차도에서 0.5km 쯤 되는 거리에 흩어진 돌이 한 줄로 100m 정도 이어져 있어서 여기가 성(城)터인가 했더니 지나고 보니 함미산성이 맞았다. 그러니까 이 부근이 삼국시대의 격전지였던 모양이다.

비정의 전쟁터여서 그러한가 꽃샘추위치고는 지나친 강풍이 큰 소리를 내며 불어오고 있어 등산복을 여미고 시린 손을 등산 내내 장갑을 꼭 끼어야 할 정도로 추웠다. 산길은 계속 육산의 오름길이었다.

진달래꽃길, 철책길과 무성한 삼림 길을 지나니 멀리 뾰족한 광대봉이 보인다. 함미산성 터에서 마이산 가는 길에서는 제일 높다는 광대봉은 정상을 향한 가파른 철난간이 또렷한데 앞선 우리 일행이 오르고 있는 것이 멀리서 보니 신선들 같다.


세 번째 이정표가 좌측으로 1.1km에 태자굴을 가리키고 있다. 좌우로 바라보이는 산기슭이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는 것을 보면 저 아래가 해발이 400m 정도 되나 보다. 그 좌측 산록에 초라한 암자가 있다. 저것이 오는 도중 이정표에서 본 부흥사인가 그런데 사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초라하였다. 







가파른 돌비알로 올라서니 멀리 마이산 두 봉우리를 배경으로 광대봉 608.8m의 정상석이 반가이 나를 반긴다.

여기서는 전망이 사방으로 탁 트여서 좌측이 진안읍인데 앞으로는 암마이산 그 뒤에 수마이산이 조그맣게 보이기 시작하면서 우리의 마이산의 전경을 하나 하나 열어주고 있다.
광대봉에서의 하산 길은 위험 구간으로 오금을 떨며 밧줄을 붙들고 내려오는데 경사가 80도가 넘는 직벽이었다. 밧줄에 대롱대롱 매달려 내리는 길이가 300m도 넘는 것 같다. 산행 경력이 40년이 넘는 내 경험으로도 이런 긴 밧줄을 타기는 처음이다. 일행과 혼자 떨어져서이니 더욱 두려움이 앞선다. 창원에서 왔다는 앞서 가는 50대 초반의 가정주부나 뒤따라오는 사람들은 거침없이 내려가고 있는 것 같지만 마음 속으로야 얼마나 두려웠을까?
천신만고 끝에 안부에 내려서니 이정표가 다음 목적지인 2.2km 라는 '고금당'을 가리키고 있다. 그런데 마이산 종주 길의 이정표는 왜 그럴까 자기 위치를 잊은 채 방향만 가리키고 있다. 기둥에 세로에다가 여기가 어디인가를 먼저 알려 주어야 하는 것이 원칙인데.



 

 

 




565봉을 지나 555봉, 505봉으로 낮아지던 산이 다시 또 가팔라지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 길에서는 오른쪽으로 떠들썩한 마이크 소리가 요란하다. 금당사 벚꽃 10km라는 진안벚꽃놀이가 한창인 것이다.
노란 사찰이 금당사요, 꼬불꼬불 10km로 이어져 간 것이 해발 400m라서 전국에서 가장 늦게 만발한다는 진안벚꽃축제 모습인데 거기 잠깐 푸른 모습으로 얼굴을 내밀고 있는 못이 탑영제다. 제(堤)는 둑이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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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옹화상이란 누구신가
처음으로 만난 멋있는 층계를 오르니 바위 위에 멋진 진신 사리탑이 있다. 탑을  돌아 내려가 보니 거기가 바로 고금당(古金塘)이었다. 나옹선사가 수도했다는 자연암굴 나옹암(懶翁庵)은 굳게 잠겨있었다.
-외를 먹고 잉태한 가난한 여인이 나라에 세금을 바치지 못하여 관가에 잡혀 가는 도중에 핏덩이로 태어나 길가에 버려져 있던 아이가 나옹이었다. 그때 날짐승이 날아와서 날개로 덮어 주어 겨우 살아날 수 있었다. 나옹이 10살쯤 되었을 때였다. 외(瓜)를 동냥하러 온 스님을 따라 출가하였다. 득도하고 고향에 돌아왔다가 다시 자기 고향을 떠나면서 지팡이를 꽂으면서 말하기를 '이 나무가 자라 가지가 무성하면 자기가 살아있는 줄 알라' 하고  산으로 들어갔다. ‘영덕군 창수면 신기리’에 있는 반송이 바로 그 소나무라는데 요즈음에는 시들어 가고 있다고 한다.

고려 공민왕의 왕사(王師)가 바로 나옹화상이요, 그 유명한 보우(普愚), 무학대사(無學大師)가 바로 나옹화상의 제자였다.
우리 산꾼에게는 이런 이야기보다 '토굴가(土窟歌)'로 널리 알려진 스님인데 그 토굴(土窟)이 바로 여기인가 보다.

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
사랑도 벗어 놓고, 미움도 벗어 놓고
물처럼 바람처럼, 살다가 가라 하네.


*. 왜 수마이산이 암마이산보다 작을까

  종주 능선 길에서 수려하게 생긴 그리고 어느 산에서도 보지 못한 특이한 모습의 마이산의 두 봉을 향하여 차츰 차츰 가까이 간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광대봉에서 봉두봉까지의 능선이 말 잔등 같고 암·수 두 마이봉이 말의 귀 같다더니 그 말이 정말 같다.
동쪽에 수마이봉이 해발 667m, 서쪽에 솟아 있는 암마이봉은 673m로 등산객이나 관광객들은 암마이봉만 오를 수가 있다. 수마이봉은 너무 가파른 직벽이라서다.
그런데 멀리서 보니 수마이봉이 암마이봉보다 초라하게도 작아 보인다. 왜서일까?
나는 '남성들이 왜 여성들보다 몸집이 크고 힘이 센 것인가?' 하는 데에 나름대로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농사 일을 해야 먹고 살 수 있는 시절에 남정네가 여성들보다 체력이 우월하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남성들은 여성보다 더 활동적이고 더 충동적이다.
지난 시절을 나의 생활을 돌이켜 보면 아내가 알면 큰 일 날 번한 일이 한둘이 아니다. 친구들과 어울려 술집 아가씨들과 술을 먹는 것부터 그랬다. 쓰지 않아도 좋을 일에 돈을 펑펑 쓰고 다닌 것이 또한 그렇다. 이런 일들을 감춘다고 그 암큼한 아내가 모르겠는가. 이런 와중에서도 우리 남정네가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아내가 육체적 항거로는 맞설 수 없는 우리들의 강한 체력 때문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게 아니라면 얼마나 많은 남자가 아내 폭력에 시달렸을 것인다. 이런 구차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점점 가까와 오는  암마이봉이 수마이봉보다 더 훨씬 크기에 하는 말이다.
서쪽에 있는 암마이산을 향해서 동쪽에서 가기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가까이 가니 수마이산은 적어서 아예 보이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이름을 서로 바꿔야 하지 않을까? 이를 알기 위해서 먼저 마이산에 얽힌 전설부터 들어보자.

*. 마이산 전설
출처:www.kormt.co.kr
-등천(登天)을 꿈꾸던 네 식구 신선 가족이 이 곳에 살고 있었다. 남신선은 남들이 잠든 한밤 중 등천하자 하였고, 여신선은 밤이 두려우니 새벽에 가자고 했다. 아내의 말 따라 새벽에 등천하고 있는데 호사다마라. 새벽의 물 길러 나온 아낙네가 이를 보고 놀라 고함을 치는 바람에 부정을 타서 꿈을 이루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화가 난 남편은 홧김에 두 아이를 빼앗아 안고 그 자리에서 주저 않아 바위가 되었고, 여신은 부끄러워 등을 돌려 앉은 바위가 되어 버렸다.
수마이산을 자세히 보면 양쪽에 두 아이를 안고 있는 형상인데, 그보다 웬만한 사람이 도저히 접근할 수 없이 우뚝 선 것이 남자의 우람하고 힘 있는 남정네의 거시기 같은 모습이다.
거시기가 뭘까? 여의봉처럼 늘었다 줄었다 하는 것이 거시기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보면 여기서는 산의 크기로 암수를 나눈 것이 아니라 그 모양새로 나누었던 것이고, 옛날 어느 호사가가 그 모습에 맞추어 알맞는 전설을 만들어 낸 것이리라.
  암마이봉과 수마이봉 사이에 있는 고개를 천황문이라 한다. 여기가 금강과 섬진강의 분수령이 되는 곳이다. 천황문에서 100m쯤 수마이봉 쪽으로 동굴이 있다. 화엄굴이다. 굴속에 석간수가 있어거 이 약수를 마시고 치성을 드리면 아들을 낳는다 한다. 마시고 공부하면 과거에 알성 급제한다 하니 지나가는 나그네여, 이 물을 마실지어다.

*. 나봉암의 팔각정 비룡대(飛龍臺)

  자연이 만든 아름다움이 마이산이라면 이 마이산에서 인간이 만든 아름다운 것이 있으니, 나봉암(527m) 비룡대(飛龍臺)다. 멀리서도 뾰족하게 솟은 봉우리와 그 위의 8각정자가 그 멋을 자랑하더니, 가까이 가서 그 오르는 가파른 쇠층계가 우리를 황홀하게 한다. 모든 정자는 올라갔다가 되내려오는 층계던데 비룡대는 전망 후 그 반대로 내려가는 멋이 있다. 
아무리 바빠도 예서 정상주 한 잔을 마시면서 코앞으로 다가선 마이산의 모습을 완상하고 싶었지만, 강풍이 너무 심히 불고 추워서 전암을 탐낼 여유가 없었다.

*. 마이산의 사계(四季)

삿갓봉(532m)은 능선 길에서 벗어나 있어서 생략하고 마이봉에 이르기 전에 마지막 불끈 솟아 있는 봉을 오르니 봉두봉(540m)이란 정상석이 서 있다. 그 바로 위가 헬리콥터장이었다.
  나는 마이산을 향하여 오면서 멀리서 하늘을 찌를 듯이 우뚝 서 있는 마이산을 바라보며 저것을 어떻게 옛날에 올랐지- . 오늘은 어떻게 올라가지- 걱정하면서 드디어 도착하였더니, 마이봉은 휴식년제로 10년(2004. 10.~2014. 10) 동안 등산로가 폐쇄돼 출입을 금하고 있다. 간판에 써있기를 '무단출입할 경우에는 50만원의 과태료'라고 위협하고 있다.
그걸 보니 갑자기 장난기가 동한다. '몰래, 다녀와 볼까? 안 걸리면 50만원 버는 거 아냐?' 갑자기 여유가 생긴다.

  '막걸리가 보인다.' '통돼지 안주도 보인다. 어서 어서 하산하자.'  그 유명한 탑사로 해서 진안벚꽃축제의 봄을 만끽해야겠다.
가까이서 암마이산을 보니 하나의 거대한 수성암으로 이루어진 이 마이산은 크레인으로 자갈과 같은 큰 돌들을 모래를 시멘트로 버물러 다져서 쌓아 놓은 탑 같다.
게다가 북한산 인수봉이나 수락산 바위와는 달리 움푹움푹 작은 굴들이 파여 있는데 큰 돌들이 제 무게에 빠져나간 자리란다. 그 자연이 만든 굴속은 비둘기의 보금자리가 되고 있었다.
특이하게도 풍화작용이 표면 아닌 바위 내부에서 일어나서 표면 밖에 박힌 바위를 밀어내서 생긴 모습이다. 이를 타포니 지형이라 하고 타포니 지형으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곳의 하나가 마이산이라 한다.
이 마이봉을 금강산 같이 춘하추동으로 이름을 달리하여 말하고 있는데 그 모습을 보시라, 마이산의 4계를-.




: 돛대봉/

여름:龍角峰

 

 


가을: 馬耳峰/

겨울:文筆峰

출처: 진안홈피에서

 




  산이 품고 있는 사찰은 산의 역사를 대신하여 주는 것이다. 마이산보다 더 유명하다는 탑사(塔寺)나, 금당사(金塘寺) 이야기는 그림으로 대신하고 생략한다. 산행기가 너무 길어서다. 자고로 여자의 치마와 노인의 말은 'Shut Up,' 짧아야 하는 법이니까. 후에 답사기로 마무리 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