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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 취한 빗속 대둔산에서의 하루

 

                                                                                                                      관담    양 승 근

  

大屯山, 이름부터가 예사롭지 않은 산, 변경에 놓인 산이라는 뜻인데 이는 소백산 줄기와 노령산 줄기에서 갈라져 나와 남서쪽으로 뻗어가다가 불현듯 솟아오른 탓에 그 뜻을 지닌 듯하다. 게다가 도솔산(兜率山)과 대둔산(大芚山), 대둔산(大屯山) 등 세 가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니 그 또한 비중 있는 의미를 지닌다. 도솔산이란 원래 불교에서 말하는 욕계욕천(欲界六天) 가운데 정토(淨土)로서, 부처님이 생전에 수양하고 교화했다는 하늘나라를 가리킴이니 그만한 높이를 가리키는 말일 터이고, 도솔천의 ‘兜’자가 원래 ‘투구 두’이나 범어의 ‘兜率’에 한하여 음이 ‘도’로 되고 있으니 그 의미 또한 생각 아니 해 볼 수 없으며, 대둔산의 ‘둔’자 역시 ‘곡식을 담는 대그릇’란 뜻을 지니고 있으나 여기에서는 ‘나무 싹 날 둔’자, 즉 싹이 대지에서 어렵게 싹이 나고 있음을 가리킴인데 요즘에 쓰이는 초두머리 없는 ‘둔’자는 안심사의 사적비에 그리 적혀 있고 윤두서의 동국여지지도에도 그리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본디 나중에 초두를 얹었다가 떼어냈을 터인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어찌 되었든 이런 저런 뜻이 서려 있는 대둔산, 2년 전에 등산이라기 보다는 관광에 가까운 산행을 해본 터라 그리 낯설지도 않은데 알람 소리도 못 듣고 그냥 내쳐 자면 어찌하나 내심 걱정도 했다. 이유인즉 요즘 아이들 학교 등교시간 때문에 아침마다 울리는 알람 소리를 못들을 때가 많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기우에 불과한 것일까. 어깨동무들과 관광이 아닌 제대로 된 등산을 할 수 있는 기회여서 그럴까, 아니면 식전 댓바람에 산행을 떠나는 필자로 인해 곁에서 곤히 자고 있던 아내가 뜬금없이 잠을 깨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일까, 알람이 울리기가 무섭게 휴대폰으로 손이 갔다. 05시 10분. 필자 하나로 인해 많은 어깨동무들의 산행 출발을 지연시킬 수는 없는 일이고 임원진 고생시킬 수도 없는 노릇, 집합시각(07시)까는 여유가 있게 일어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준비를 마치고 집합 장소인 영등포 경방필백화점에 도착하니 예정시각보다 30여분 이른 시각이다. 이 시각이면 적어도 필자가 제일 먼저 도착되었으리라는 지레짐작을 앞세워 만나기로 한 후문을 찾아 두리번거리는데 느닷없이 ‘승근아!’ 하는 낯익은 목소리가 필자의 이름을 부른다. 돌아보니 웬걸 석화가 맥주 캔을 앞에 놓고 육각형 벤치에 앉아 있다. 곁에는 기수가 방금 도착한 듯한 표정으로 수인사를 청한다. 석화는 ‘노숙했노라’는 우스개 소리로 필자보다 30여분 먼저 왔음을 드러냈다. 뒤이어 회장 칠회를 비롯해 재임이 먼저 나와 총무인 은희를 대신해 속속 도착하는 친구들을 인원 점검한 끝에...... 드디어 07시 10분 경, 우리의 든든한 친구 규승이가 수고하는 대형버스에 승차, 대둔산을 향해 출발했다.        

  

  

차는 양재에서 총무 은희를 비롯한 다른 친구들을 더 승차시킨 뒤 고속국도로 들어섰다. 그리고 잠시 후 특별한 이벤트가 차내에서 펼쳐진다. 결혼 26주년을 맞이했다는 김덕수 친구가 아내와 함께 나왔기 때문이다. 필자보다 자그마치 6년 먼저다. 필자가 늦은 걸까, 친구가 빠른 걸까. 아무튼 결혼 기념 케익 커팅이 있었고 친구들이 축하 송을 불러준다. 그 어느 결혼 기념일 보다 더욱 오랫동안 기억되고 값진 날이 되기를 기원하며 옛날 문구대로 검은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항상 오늘 같은 기분으로 살기를 바라며 친구들이 불러주는 노래다. 한데 필자의 기념일은? 불행하게도 필자의 결혼 기념일과 어깨동무 산악회의 산행 일정과는 5일을 비켜간다. 친구들이 함께 기원해 주는 필자의 결혼 기념일 福도 꼭 그만큼의 시차를 두고 비켜 가는 셈이다. 어쨌든 덕수야 26주년 결혼 진심으로 축하한다.

 

 

차안에서 아침 요깃거리가 지급된다. 물과 김밥. 이어 산행 중 먹게 될 개인 보급품(?)이 지급된다. 누군가 건빵을 달라 한다. 군대 시절을 떠올린 사람이리라. 아마도 군대에 갔다온 사람들만이 더듬어 볼 수 있는 특권이요, 추억의 산물이다. 남자들이 군대 삼 년 이야기 한번 퍼대기 시작하면 삼일 밤 낯으로 퍼대도 바닥을 볼 수 없는 게 군대 이야기라 하지 않던가. 필자도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속 중대공방 훈련 도중 전투식량에 물을 부었다가 불린 다음 판쵸 우의를 뒤집어쓰고 먹던 시절이 생각나 농담 삼아 전투식량을 달라 해본다. 그러나 30년이 훌쩍 지난 그 시절 그 전투식량이 있을 턱이 없을 터이다. 대신 준비된 닭튀김에 일인용 떡, 사과, 귤 등등 산행하러 가는 게 아니라 마치 먹으러 가는 것 같다. 준비하느라 고생한 임원진, 그 노고에 감사한다.


  

청주 어디쯤의 고속국도 갓길에서 이교선 부부를 태우고, 목적지 가까이 가서는 영훈 종순의 동창 부부를 비롯해 대전 친구들을 더 승차시킨 뒤 용문골 등산로 입구에 도착, 승용차로 먼저 가 있던 친구들과도 조우한다.


 

10시 30분, 막 산행을 시작하는데 작은 빗방울이 필자의 팔뚝에 감지된다. 산행에는 불편하겠지만 참으로 반가운 비다. 대체 몇 달만의 단비인가. 이 가을에 과연 비가 오기는 왔었던가. 기억에 없다. 채 단풍이 들기도 전에 말라버린 나뭇잎이 필자의 기억이 틀리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필자는 그것을 진작에 눈으로 확인했었다. 10월 1일 성주산 소래산 두 산을 동시에 종주하면서 보았고, 15일 마니산에서 바위를 타고 넘으며 확인했으며, 17일 경북 청량산을 8자를 그리며 등산하는 내내 기암절벽에 감탄하기에 앞서 안타까워해야 했다. 마치 방금 태어난 아기의 손같이 예쁘게 생긴 가을 단풍의 대표적인 붉은 단풍이 마치 가스 불 위에 놓인 오징어 다리인 양 오그라들어 떨어지고 그래도 아쉬운 듯 아직도 가지에 붙어 있는 모습이 안스럽기 그지없다. 아름다운 킬러 본능을 가진 단풍이어서 ‘너 혼 좀 나 보라’라는 뜻에서 그리 된 것일까. 붉은 단풍이 여느 나뭇잎보다 더욱 붉은 것은 주변에 다른 종의 나무가 자라지 못하도록 독(毒)을 분비하기 때문이라 하지 않은가. 과학자들이 ‘타감(他感)작용’이라고도 부르는 이 독은 다른 종을 죽일 만큼 강하다하니 친구들아, 혹 산행 중에 예쁜 붉은 단풍을 만나더라도 소나무 밑에 다른 잡풀들이 자라지 못하는 원인도 그와 같은 이치인데 솔잎은 먹지 않느냐, 며 입에 넣고 잘근잘근 씹는 우를 범하지 말기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도란도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너 나 할 것 없이 비를 반긴다. 산행에 추적거려 불편할 텐데 누구하나 비를 탓하는 사람은 없다. 50mm 안팎 정도까지 내리리라는 일기예보를 접한 바 있음에도 산행에 나선 자기 자신들에 대한 스스로의 감내인가. 웬만해선 우의조차 입으려 하지 않는다. 그만큼 사랑하는 이를 그리워하듯 비를 그리워했다는 뜻일 게다. 대신 순간의 멈춤으로 영원을 기대하는 일은 일단 접어야 할 판이다. 필자 역시 산행 후기를 쓰기 위해 찍어오려던 사진을 제대로 찍을 수 없었다. 이정표조차도 3개밖에 담아오지 못했다. 그래도 스산하게, 아니 달콤하게 내리는 우중 속에서 디카 셔터를 누르는 친구가 있다. 윤상이와 교선이, 그리고 재임이 등. 산행 후기를 올릴 때 친구들이 찍은 사진 몇 컷을 스리슬쩍(친구들의 지루함을 덜기 위함이니 저작권 시비는 걸어오지 않으리. ㅋㅋ) 해다가 올릴 생각으로 사진기는 아예 꺼내지도 않았다.

  

 

케이블카가 설치된 곳까지는 비교적 까다롭지도 사람이 그다지 많지도 않아 산행하기에 아주 제격이었으나, 영옥이의 발걸음이 가장 먼저 무뎌진다. 어찌 산을 넘을까 은근히 걱정도 되었지만 영옥은 힘들어하면서 꾸준히 따라온다. 친구들은 나름대로 터득한 산행 법을 한 마디 씩 이야기해 주며 영옥이의 산행 템포에 맞춰 올라가다 보니 어느 새 케이블카가 설치된 곳에 다다른다. 11시 40분. 먼저 도착해 막걸리 추렴하는 친구도 있다. 단비 맛도 달콤하겠지만 약간의 알콜 정도 또한 달콤하리라. 필자는 원래 담배와 술에는 젬병이라 권해 오는 막걸리를 사양하고 아직 우의를 입지 않은 다른 친구들과 함께 비닐 우의를 입는다. 그 옛날 어깨동무시절 적, 책보를 비닐에 둘둘 말아 어깨에 사선으로 둘러메고 요소 비료 포대로 비옷을 만들어 입고 등교하던 시절이 새삼 떠오른다. 춥고 배고팠던 시절, 가난하게 살던 아리고 아렸던 그 어린 옛 추억, 그 기억이 가을 단비만큼이나 어깨동무 시절을 그립게 한다.


 

케이블카를 타는 곳에서부터가 문제였다. 인산인해, 해발 878m의 마천대 정상을 비롯하여 사방으로 뻗어 내린 웅장한 산세와 기암괴석이 나무들과 어우러져 ‘호남의 금강’, ‘남한의 소금강’이라 불리운데서 얻어진 이름인 듯한 금강구름다리로 접어드는 코스가 장난이 아니다. 도대체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돗떼기 시장도 이렇지는 않을 것이다. 다른 코스로 가면 어떻겠느냐는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많은 갈등을 한 끝에 이미 앞에 가 있는 친구들도 있으니 그냥 가자는 쪽이 우세해 답답증을 참기로 한다. 참는 자에게 어쩐다더라고 드디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해 한참 만에야 겨우 금강구름다리를 지날 수 있었다. 발 아래로 계곡이 아찔하게 내려다보인다. 2년 전에는 사람이 없어서 그랬는지 전혀 흔들리지 않았었는데 많은 사람 탓에 약간의 흔들림도 있다. 원래 구름다리 하면 출렁거리게 만들어 놓아야 건너가는 맛이 제격인데 그렇지 않아 아쉽다. 과거의 구름다리는 대부분 출렁거렸었다. 그러나 새로 건설될 때마다 출렁다리가 아니라 아예 튼튼한 현수교로 대체 되었다. 설악산의 구름다리가 그렇고 이곳 대둔산의 경우도 그렇다. 그리고 월출산 구름다리도 최근 튼튼한 현수교로 건설되었단다. 안전은 하겠지만 계곡을 건너지르는 아슬아슬한 맛은 떨어지리라 예상된다. 어쩌면 관광 자원의 명물이 퇴색되는 건 아닐까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금강구름다리를 건너는데 까짓 비 오는 게 무슨 대수랴!

 

금강구름다리를 건너 조금 가다 뒤돌아보니 아까 갈등을 일으키게 했던 코스에 일방통행이란 이정표가 있고 방금 지나온 다리 쪽 방향은 통행금지 표시가 되어 있다. 어쩐지 그쪽은 내려오는 사람이 많더라니. 한데 아래쪽에서는 그런 내용이 보이지 않았었다. 사람들이 하도 많아 미처 보지 못한 것일까.

  

사람들에 떠밀려 삼선계단 아래 이르러 보니 2년 전 초라하게 씌어 있던 동학군에 관한 이야기가 보이지 않는다. 그 문구가 있던 자리쯤에 철 계단이 새롭게 놓여져 있다. 굳이 철 계단이 없어도 오르는데 별 무리가 없던 곳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참으로 공원 관리소 측은 꽤나 철 계단을 좋아하나 보다. 동학군 최후의 격전지, 한 명만 살아 남고 다 죽었다고 했던가. 그런데 무슨 이유로 초라한 간판마저 사라진 것일까. 나라에 반기를 든 세력에 대한 기록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좀 전처럼 필자가 미처 발견 못한 것인가? 만일 컴퓨터 Del 키를 누르듯 가볍게 삭제해 버렸다면 그때 그 죽은 영령들이 편안히 잠들지 못하고 다시 깨어날 것만 같다. 하여 이곳 대둔산 기암괴석 주변 여기 저기를 떠돌고 있을 것 같다. 기암괴석을 휘도는 저 안개가 단순한 비 탓만은 아닐지 모른다.

  

 

삼선계단, 어차피 만들어 놓았으니 아찔함을 느껴보기 위해 올라보기는 하지만 굳이 그것이 그 자리에 있을 이유가 있을까 싶다. 웅장하게 솟아 오른 바위를 올려다보고 뒤로 돌아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으로 만족하도록 자연그대로 내버려두었으면 안 되었을까. 아찔하면 아찔할수록 아쉽다는 생각도 그만큼 가중된다. 사람들에 떠밀려 잠깐 잠깐 둘러본 가깝고 먼 주변 풍경, 참으로 아름답다는 형용사만으로는 이루 표현할 수 없다. 아름답다 못해 못 견디도록 슬프기도 하다. 필자만의 감상일까. 허나 치고 올라오는 사람들 때문에 여유롭게 감상할 수도 없어 안타깝다.


 
 

앞서 간 일부 일행은 정상에 올라 뾰족하게 하늘을 찌르는 탑(왜, 이와같은 구조물이 산의 정상에 굳이 있어야만 했느지 이해가 안 간다.)을 배경으로 사진이라도 한 방 박았을까만 뒤늦게 도착한 우리는 정상 150m를 앞두고 이때까지 산행한 완주군을 뒤로하고 종주 코스인 논산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앞서 간 팀과 전화도 잘 안 되어 사전 약속 된 대로 220계단 방향을 택한 것이다. 한데 그 길이 산행 코스로는 제법 멋진 코스였다. 마치 오솔길로 가는 듯한, 어찌 보면 평범한 코스에 불과했으나 이제까지 사람에게 치이며 올라온 곳하고는 전혀 딴판이다. 지나온 곳이 양(陽)의 기운이 성한 전형적인 양산(陽山)이었다면 하산길인 논산 쪽은 음(陰)의 기운이 강한 음산(陰山)임에 분명하다. 어쩌면 이리도 한 이름의 산이 반으로 나뉘어 음과 양으로 이루어졌을까. 기이할 뿐이다. 가까스로 앞선 팀과 하산 길에 만나게 되는 너럭바위에서 우중에 요기하기로 했으나 가도 가도 너럭바위는 물론 앞서간 사람들도 보이지 않는다. 등산안내지도상으로 볼 때 사전 약속된 220계단 방향이 틀림없는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우리(칠회, 기원, 영옥, 진백, 그리고 필자)는 하는 수없이 적당한 자리를 잡아 요기를 하기로 하고 우의를 벗은 후 각자의 배낭에서 먹을 만한 것을 꺼낸다. 차안에서 각자 배급된 것 말고도 기원이의 배낭에서는 컵라면까지 4개가 나와 모두들 환호성이다. 우의를 입지 않은 회장은 온몸으로 비를 쪼록 맞고 있어 그야말로 춥고 배고픈 상태다. 이런 상황이니 따끈한 컵라면 하나로도 최상의 성찬이 될 수 있는 것은 불문가지. 뜨거운 물이 담긴 보온물병도 세 개나 있어 충분할 것 같다. 우선 컵라면에 물을 부은 후 김밥과 떡을 먼저 먹는다. 뒤이어 먹는 우중의 따끈한 컵라면 맛이 새롭다. 영옥은 이 와중에도 다이어트를 하려는지 컵라면을 먹지 않고 국물만 따라 달랜다. 남은 물로 커피까지 3잔 타서 나누어 마시며 회장이 과거 설악산 다람쥐(?) 생활할 때의 에피소드를 이야기하고 필자 또한 군대 시절 대청봉 오를 때 있었던 에피소드를 보탰다.

  


허기를 해결한 우리는 다시 힘을 얻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한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함께 산행을 시작하지 않았던 대전에 산다는 성두가 혼자서 거슬러 올라오고 있다. 선두는 이미 만났다는 이야기를 전해 주었고 뒤늦게 내려오는 어깨동무들도 당연히 만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으로 무작정 올라와 자연스레 마중을 나온 겪이 된 친구, 반가움에 앞서 생뚱맞음이 더욱 새롭다. 우리는 함께 내려갔다. 얼마를 더 가다보니 드디어 220계단이 나온다. 그런데 영훈 부부를 비롯해 총무의 일을 특히 많이 돕곤 하던 재임이 등이 역시 220계단을 향해 마주 걸어오고 있다. 역시 우리 어깨동무들은 어떻게 헤어지더라도 반드시 만나게 되어 있는가 보다.


  

220계단은 삼선계단 뺨치는 모습으로 층계참도 없이 저 아래까지 뻗어 있다. 바로 며칠 전에 오른 바 있던 청량산에서의 자소봉 방향 계단이 떠오른다. 그것은 어쩌면 필연적인지도 모르겠다. 철 계단은 아니었지만 그 계단 역시 층계참 하나 없이 사각 나무 기둥을 눕혀 쌓아가며 만들어진 계단이었다. 거의 정상에 가까운 곳까지 계단으로 이어져 있었으니 세어보지는 않았으나 어림잡아 2천 계단도 넘지 않을까 싶다. 그 곳의 계단은 숲 속으로 이어져 올라가는데 반해 이곳은 깎아지른 절벽 사이, 그러니까 바위 협곡으로 내려가게 되어 있어 자소봉 계단보다 스릴이 있어 보인다. 게다가 이곳은 친절하게도 열 계단마다 계단의 숫자가 붙어 있다. 하지만 오르내리는 사람들이 재미삼아 세어볼 필요를 저당 잡아버린 것 좀 아쉽기는 하다.


  

계단을 거의 다 내려갈 때쯤이던가? 뒤쪽에서 뜬금맞은 소리가 들린다.


 

“야, 남자들. 누구 한 사람 조~오타! 라고 한번 해봐라.”


  

어렸을 적부터 예쁘장해서 사내아이들로부터 은근한 눈빛을 받으며 자랐을 재임의 목소리다. 듣는 사람에 따라 이중적 의미가 부여될 수 있는 단어다. 양산을 올라 음산으로 하산하다 보니 기가 충만 된 탓인가.


  

남자 입장으로서 대꾸를 아니 해줄 수도 없는 노릇, 그러나 조~오타! 라는 말 대신 다른 말로 받아준다.


  

“왜, 소방차 부르려고?”


  

무슨 뜻으로 오간 말인지 알아들은 사람치고 웃지 않을 수 없었을 게다. 이런 말이 오갈 수 있는 것도 다 물장구치고 다람쥐 쫒던 어린시절의 어깨동무 친구들이기에 가능한 것이 아니겠나.


 

잠시 뒤 군지폭포가 웅장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오랜 가뭄 탓에 폭포의 기능을 잃고 초라한 물줄기를 간신히 떨굴 뿐이다. 폭포 아래 당연히 형성되어 있어야 했을 소(웅덩이)도 없다. 생김새만 폭포인가? 바위 협곡을 지나며 사진 몇 컷을 찍는다. 주왕산 바위 협곡과 폭포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그곳의 바위와 폭포는 생김새부터 다르다. 이곳은 층층이 켜를 이루며 이루어진 바위요 절벽이지만, 그곳의 바위는 곡선의 형태가 선명하게 드러난 거대한 바위 덩어리 협곡이요 물길이 휘말려 들어가는 여성성이 강조된 소들이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금치 못하게 하는 곳이다. 더 아래쪽의 수락폭포 역시 물줄기는 초라하기는 마찬가지다. 폭포는 별 눈길을 받지 못하고 산행 인들을 내려 보낸다.


  

경찰 승전탑을 먼발치로 바라보며 스쳐지나 또 얼마간을 걷다보니 산행 내내 맞은 비보다 많은 비를 맞는 것 같다. 등산바지 겉에서 그동안 구슬방울이 되어 구르다 떨어져 내려가던 빗방울들이 본격적으로 스며들기 시작해 무릎 위와 정강이가 축축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긴 빗속 산행 후에 이어지는 비 내리는 포도 위를 친구들과 함께 걷는 것도 새로운 맛이 절로 난다. 젊은 연인들이었다면 이 단비 속을 어떤 마음으로 걸어갈까. 통속적으로 생각해도 좋고 삐딱하게 생각해도 좋다. 친구들아, 다들 생각해 봐라. 예전 젊었을 때 자신들은 어떤 생각으로 빗속을 걸었는가를. 둘이 아닌 혼자라도 좋다. 무엇보다 비가 올 때 거닐다 보면 무슨 생각이든 깊이 빠져들 수 있어 좋지 않았니? 필자는 골똘히 빠져들 수 있는 그 자체만으로도 좋더라. 젊었을 적 어느 한 때, 비만 오면 언제나 음악이 흐르는 다방에 들어가곤 한 적이 있었지. 따끈한 커피와 대화를 나누다가 식어지면 상상 속의 어느 여인을 먼발치에서 따라 다니기 위해서였어. 비를 맞으며 걷고 있는 어느 여인을. DJ는 한번도 싫어라 하지 않고 잘도 읽어주더라. 비를 맞으며 쪽지 위(포도)를 걸어가는 상상 속 여인의 이야기를. 부평역 앞의 부평다방이 아닌 ‘서울다방’에서였지. 다 지난 일이지만 비 내리는 포도를 걷다보면 그 시절이 곧잘 떠오르곤 한다. 필자가 창조해 놓았던 그 상상 속의 여인과 함께......


  

15시 30분, 앞서 갔던 친구들이 덧달아 낸 ‘대둔산 보리밥집’ 비닐 가건물 안에서 벌써 뒤풀이를 하고 있었다. 따끈한 묵말이와 밥, 빈대떡에 막걸리, 등등의 메뉴다. 문득 봉평에 들렀다 먹어 보았던 개운한 묵말이와 메밀전병이 떠오른다. 그때는 그때대로 개운하면서도 시원한 묵말이가 좋았고 착착 감기는 전병이 별미였다. 뒤풀이 메뉴로 등장한, 생각지도 않았던 따끈한 묵말이는 달빛 속에 소금을 뿌려놓은 듯한 메밀밭 가운데로 나귀를 타고 지나가는 허생원이 생각난다. 그때의 허생원은 묵말이에 막걸리는 못 먹었으리라. 왜냐하면 주막에서 묵말이에 막걸리를 팔지 않았을 것이므로.......


 
 

뒤풀이에는 장옥이도 참석해 주었다. 모두 38명의 얼굴들. 이야기꽃을 피우느라 시간가는 줄 모른다.   


 

이어진 귀향길 차안에서의 노래방 뒤풀이, 대전 친구들이 헤어지기 아쉽다며 베풀어준 뒤풀이, 연이은 뒤풀이로 어깨동무들은 뒤풀이에 푹 취해버린다. 양산의 기암괴석에 취하고, 음산의 오솔길에 취하고, 비에 취하고, 술에 취하고, 친구의 우정에 취하고, 노래에 취하고...  필자는 또 주책맞게 전에 불렀던 노래를 또 부른다. 어깨동무들만 만나면 으레 부르고 싶은 노래다.

    

 

기역 니은 잠이 든 교정에 / 맨드라미 저 혼자 피다가 / 아이들이 그리운 날은 꽃잎을 접는다. / 계절이 오는 운동장마다 / 깃발처럼 나부끼던 동무여 / 다들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 / 옛날 다시 그리워지며 / 텅 빈 교실 내가 앉던 의자에 나 얼굴 묻는다.

한데 2009년엔 우리의 모교인 북창초등학교가 폐교될 예정이란다. 어찌 해야 할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