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 노추산

'05. 9. 10. 토, 맑음

산행경로 : 구절리(중동)~이성대~노추산~아리랑산~폐광터~종량동~중동

산행시간 : 13:20 - 19:00(5시간 40분)

  

- 산행지 결정하기

오늘도 정처 없이 산으로 가기위해서 집을 나선다.

차를 출발 시켜서 강원도 방향으로 가면서 이산 저산들을 떠 올린다.

만만한 설악으로 스며들까, 아니면 가까운 한강 기맥 길로 달려갈까...

문득 오래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던 노추산이 떠오른다.

바로 결정을 내린다 노추산으로 가자고.

내일이 일요일이라 늦은 시간에 산행이 끝나도 부담이 없기에 드라이브를

겸해서 느긋하게 정선을 향한다.


 - 아리랑의 고장으로

점심 먹을 시간에야 정선 아리랑의 발원지, 아우라지의 여량에 도착한다.

그런데 아직은 배꼽시계가 작동을 하지 않고 있다. 김밥을 사서 산으로

들 요량으로 김밥집을 찾는다.

어렵지 않게 분식집을 찾아서 들어가니 꼬마 손님들이 홀 가득히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데 테이블마다에는 떡볶기, 김밥 등이 접시마다 수북하게

차려져 있고 주방에서는 케잌에 초를 꽂고 있다.

어느 꼬마 친구의 생일 파티를 하려나 보다. 소박한 생일 파티에 미소가

지어지기도 하고 마음이 짠하기도 하다.

부모님의 따스한 사랑에 무슨 차이가 있으랴 만은 요즈음 도시에서는

분에 넘치도록 아이들 생일 파티를 해주는 집들이 많다고 하는데

그것을 생각하면 그 소박함에 그저 따스함을 보내고 싶다.


김밥 두 줄을 사고 가게에 들러서 음료수를 준비하여 구절리로 들어간다.

어제 내린 비로 싯누런 황토물이 물살을 일으키며 유유히 흐르고 있는

송천을 따라서 구절리 노추산 들머리에 도착하니 시간은 한 시가 넘어서고 있다.

길옆으로 흐르는 중동계곡에는 투명한 옥수가 암반 사이로 요란한 소리를 내며

시원스럽게 흘러내리고 있다. 문득 물에 첨벙 뛰어 들고픈 유혹이 인다.

산행을 끝내고 저 물에 알탕을 해보리라.

 

- 아리랑을 찾아서

배낭을 챙겨서 임도를 따라 산행이 시작되는 들머리로 들어간다.

늘진 넓은 길은 산행을 한결 수월하게 하고 상쾌한 기분으로 걸음을 옮긴다.

얼마 후 대승사 갈림길 삼거리가 나타나고, 이정표가 가리키고 있는

오른쪽 길을 따라 올라가는데 파랗게 잘 자란 배추들이 무성한 고랭지

배추밭이 보인다. 배추밭과 산 능선이 어우러진 그림이 퍽이나 서정적이다.

그리고 조금 더 올라가니 설치되어 있는 파이프로 맑고 시원한 물줄기가 

뿜어져 나오는데 그 물로 땀으로 흥건해진 얼굴을 씻으니 시원하기가 그지없다.


들머리를 출발한지 40분이 지난 후, 임도가 끝이 나고 오솔길이 시작되는

지점에 도착한다. 한쪽에는 다듬질 하지 않은 투박한 긴 통나무 의자가

설치되어 있다. 그곳에는 샘터가 있고 그 옆의 작은 골짜기에는 물이 흐르고 있다.

배낭을 내리고 잠시 쉬어 가기로 한다.

그런데 오후 두시가 넘었는데 이상하게도 배가 고프지 않다.

하지만 먹어야 힘을 잃지 않기에 김밥 두 줄을 천천히 꾸역꾸역 입안으로 밀어 넣는다.

그렇게 간단히 요기를 하고 다시 정상을 향하여 오솔길로 들어가는데 넓은

오솔길은 오름 짓을 편하게 해준다.


20여분 후, 옹달샘 쉼터에 도착한다. 안내판에는 이곳이 해발 1030m라고 되어있다.

배낭을 내리고 물맛을 보니 마치 냉장고에서 금방 꺼낸 물 같다.

물병에 물을 받아서 다시 올라가기 시작한다.


잠시 후, 너덜지대가 나타나는데 탁 트인 시야에 앞에는 덩치 큰 가리왕산이

거대한 모습으로 길게 누워있다. 그리고 서쪽으로 산기슭에 이성대가 보이고

사람들의 두런두런 이야기 소리가 들려온다. 위로 올려다 보이는 능선은

푸른색 하늘과 맞닿아 선명함이 더한다.

여느 산과 마찬가지로 이곳 너덜지대에도 많은 돌탑들이 군데군데 쌓여져 있고

한쪽에는 키가 큰 푸른색의 구상나무와 고사목 한 그루가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너덜지대를 지나 조금 더 올라서 등산로에서 왼쪽으로 비켜나 있는 이성대에

들어선다. 이성대는 공자와 맹자를 흠모하여 이름 지었고 신라 시대의 설총 선생과

조선 시대의 율곡 선생이 이곳에서 공부하였다고 한다.

입구 오른쪽에는 작은 돌탑을 쌓아 놓았고, 뒤편의 이끼가 낀 암벽에는

마치 폭포수처럼 물이 떨어지고 있으며, 그 옆에는 샘터가 있고 보랏빛 선명한

쑥부쟁이 몇 송이가 소담스레 피어있어서 멋스러운 정취를 풍긴다.

깔끔한 모습을 기대하고 들어선 이성대는 보수공사를 하는지 건축 자재들이

쌓여있고 불에 그을린 식기류들과 쓰레기들이 여기저기 널려있다.

건물 뒤로 올라가니 암벽 아래에 돌로 만든 위패 두개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가까이 다가서지 않아서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공자와 맹자를 기리는 위패가

아니었을까 싶었다.


이성대를 빠져나와서 정상으로 올라가는데 정상까지는 그리 멀지가 않다.

20분 후, 정상 바로 아래의 헬기장을 거쳐서 정상에 도착한다.

헬기장에는 산 이름이‘노추산’으로 명명된 유래가 간단하게 적힌 빛바랜

안내판이 서 있는데 내용인즉, 신라시대의 설총 선생이 노나라에서 태어난

공자와 추나라에서 태어난 맹자를 기려서 노추산이라고 이름 지었다고 하며

설총 선생과 율곡 선생이 입산수도를 했다고 적혀있다.


정상에서 펼쳐지는 사방의 조망은 가히 막힌 가슴을 시원하게 해 줄 정도로

거침이 없다. 북쪽의 발왕산은 낮게 내려앉은 구름에 덮여있고, 파노라마가

펼쳐지는 동쪽 멀리로 아득히 하늘에 닿아 있는 백두대간 큰 줄기,

남쪽에는 마치 백두대간 자락을 굽어보고 있는 듯 성벽처럼 우뚝 솟은

가리왕산이 하늘금을 이루고 있다. 서쪽으로는 혹시 노추산 정상석이

이곳에 잘못 설치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의심이 될 정도로 이곳 보다

조금 더 높아 보이는  봉우리가 완전한 조망을 가로 막고 있다.

잠시 후 그 곳에 오르면 서쪽으로의 완전한 전망을 볼 수가 있을 듯하여

스스로 위로를 하며 휴식을 한다.


호젓한 산상의 시간을 보내고는 정상을 내려선다. 정상 바로 아래 헬기장에

내려서니 정상에서는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서북 방향의 전망이 펼쳐져 있다.

상원산에서 박지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시야에 들어오고, 멀지 않은 곳에는

산정 일대가 마치 고원의 분지처럼 넓은 형태의 지형을 이루고 있는데 그곳에는

고랭지 밭으로 일구어 놓은 것이 특이한 풍경을 자아내고 있다. 아마도 발왕산

자락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 뒤로 아득히 황병산 자락의 삼양 목장이 마치

신기루처럼 보인다.


다시 서쪽의 능선을 따라서 진행을 하여 노추산 정상보다 더 높아 보였던 봉우리에

올라서는데 숲으로 둘러싸인 좁은 정상 한쪽에 오래된 듯한 깨어진 표석과 바로 옆에

나란히 서 있는 표목에 ‘아리랑 山 1342m’라고 새겨져 있다. 역시나 고도는

1322m의 노추산 정상보다 더 높았고 한편으로는 산 이름이 따로 있다는 것이 이상하였다.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노추산과 이곳은 하나의 산이라고 보아야 할 정도로

가까이 있는데다가 두 개의 산으로 가를 만한 경계도 뚜렷하지가 않다.

혹시 정선군청에는 ‘아리랑산’으로 명명된 유래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차후에

시간이 나면 확인해보기로 하고 상상력으로 빠져 들어가 본다.


우선은 신라시대의 설총 선생이 공맹자를 흠모하여 노추산이라고 명명했다는 설이

우선은 마음을 씁쓰레하게 한다. 신라시대 때 까지만 하더라도 그 옛날 단군 시대

때의 철학과 사상이 그대로 전해져 왔고 그러한 바탕 아래 국가와 사회의 질서가

유지되어 왔던 시기가 아니었던가. 즉, ‘齋世理化’와‘弘益人間’이라는 통치철학과

인류의 자유와 평화, 인간 존엄의 가치를 구현하고 실천하는 이념. 뿐만 아니라

자기 수련과 학문연구 그리고 사회 지도이념 실현을 통해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고

국가의 단결과 번영을 이루어낸, 선대로부터 면면이 이어받은 고구려의 국선사상과

같은 화랑도가 신라에는 있지 않았던가.

설총 선생은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우리의 전통은 천시한 채 서구 사상과 학문이

마치 최고의 선진 문화로 인식되어 무조건 숭배하고 미화하여 받아들였듯, 그 시대에

벌써 학자로서 우리의 전통을 이어나가는 노력 대신에 외래 사상과 학문을 사모하여

공맹자를 추앙한 학자가 아닌가. 물론 시대적인 환경이 국가간 전쟁과 혼란이 끊임없이

이어져왔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데 뒷받침이 될 수 있는 사상이 필요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어쨌거나  우리의 국토에 외국명이 함축된 이름을 명명하였다는 것에

대해 아쉬움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노릇이다.

각설하고, ‘노추산’보다는 ‘아리랑산’이 훨씬 정겹고 보다 우리의 냄새가

훨씬 풍기는 이름이 아닌가 싶다. ‘아리랑’이라는 말의 뜻에 대해서는 뒤에서

언급해보기로 한다.


아리랑산을 뒤로하고 능선길을 따라서 하산을 시작하는데 길이 제법 까탈스럽다.

날카로운 바윗길과 경사가 험한 길이 50분 후에 다다르게 되는 광장쉼터까지 이어진다.

쉼터로 내려오는 길에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정상을 향하여 오르고 있는

산행 팀을 만나게 되는데 뒤 쳐져서 올라오고 있는 한 사람은 무척 힘에 부치는 듯

되돌아갈지에 대해서 고민을 하고 있다. 그에게 정상이 멀지 않았다고 위로를 보내고

내림짓을 계속한다.


쉼터를 지나서 10분 정도를 내려오니 샘터가 나타나고 얼마 후에는 두 번째 샘터가

또다시 나타난다. 노추산은 어느 방향에서 등산을 시작하든 샘터가 군데군데에 있어서

별도로 물을 준비하지 않아도 등산이 가능하다.

두 번째 샘터를 지나서 폐광터를 만나게 되는데 콘크리트로 공사해 놓은 넓은 수로를

따라서 계곡수가 맑게 흐르고 있다. 길은 중동 쪽에서 등산을 시작할 때처럼 다시

넓어지고 걷기가 무척 수월하다.


18:20분, 종량동 2차선 도로 옆 가게에 내려선다. 가게 옆 수도꼭지에서도 식수가

탐스럽게 쏟아져 나온다. 그 물을 한통 채우고는 도로를 따라 차를 회수하기 위해

걷기 시작한다. 길 옆 송천에서 황토 빛 우렁찬 소리로 흐르는 물과 주변 경치를 구

경하며 걷는 길은 또 다른 재미를 준다.


20분 정도를 걸었을까, 산 위에서 수직으로 떨어져 내리는 물줄기가 눈앞에 나타나며

숨을 멎게 한다. 오장폭포였다.

산 위에서 떨어지는 풍부한 수량이 그야말로 장관이다. 폭포의 수직 높이가 127m나 되고

길이는 무려 209m라고 한다. 비가 많이 내린 날 그것을 보기 위해 일부러 가지 않는

다음에야 이런 광경을 볼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엄청난 물이 쏟아져

내리는 이 광경을 볼 수 있는 것도 복이다 싶다.


19:00, 주차해 놓은 중동의 들머리에 도착하여 맑은 물이 흐르고 있는 계곡 아래로

내려가서 알탕을 하는 것으로 오늘의 산행을 마감한다.


- 후기

정선읍내의 한 식당에서 늦은 저녁 식사를 하고 돌아오는 내내 머리를 떠나지

않는 것이 있었다. 노추산과 아리랑산 때문이었다. 불과 500여 미터 정도 밖에

되지 않을 거리의 한줄기 능선 상에서 더 높으면서도 이름이 잊혀지고 있는 산,

숲에 갇혀서 허리가 잘리고 옆구리가 깨어져 나간 채 돌무더기 위에 서있는

표석과 썩어가는 표목에 새겨진 우리의 정서가 가득 담긴 이름이 세월 속에

묻혀가고 있다는 것이 마음을 아리게 한다.

아리랑산이라는 이름은 추측컨대 조선시대가 되었든 그 이전이 되었든 간에

‘정선 아리랑’노래가 생겨난 이후에 붙여진 것 같은데 언제 명명되었는지의

시간적인 역사성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우리 민족의 얼과 정서를 대표할 수

있다는 ‘아리랑’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산이 최소한 산객들에게도

알려져 있지 있다는 것이 또한 마음을 아리게 한다.

오랜 역사 속의 저명한 학자가 붙인 이름이든지 간에 외국을 추모하여 그 나라의

이름이 붙여진 산 이름이 우리에게 더욱 유명하다는 것이, 아니 오로지 그 이름만이

알려져 있다는 사실이 안타깝기도 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리랑’이 우리의 슬픈 정서를 담고 있는 노래로만 알고 있다는

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그 말의 뜻과 역사성을 정확히 모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한 단학 동호회에서 그 뜻을 풀이해놓은 것을 소개해볼까 한다.


『우리 민족의 정서를 대변 할 수 있는 우리 민족의 노래, 남북 공동 가요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아리랑입니다. 아리랑을 모르는 한민족은 없습니다.

우리나라 어디를 가든 아리랑 음악이 있습니다. 그러면 아리랑 노래는 무슨 뜻을

가지고 있기에 이처럼 우리 민족의 의식을 대표할 수 있을까요?

보통 우리는 아리랑을 한 맺힌 여인의 슬픔과 하소연을 하는 노래라고 생각합니다.

아리랑 참뜻은 그게 아닙니다. 발로 채인 여자의 한풀이 같은 노래가 어떻게 수천 년

동안 한민족의 대표적인 노래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아리랑의 참뜻은 무엇일까요?

실제로 아리랑에는 커다란 참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본성이,

우리의 정신이 솟아나는 즐거움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 아리랑입니다.

아리랑의 ‘아’자는 한자로 ‘我’로서, 진아(眞我), 혼, 본성, 신성(神性)을

의미합니다.

‘리(理)’자는 ‘이치, 안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랑(朗)’은 즐겁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아리랑 노래를 풀이하면 이렇게 됩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 나를 아는 즐거움이여, 나를 아는 즐거움이여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 나를 찾는 즐거움의 고개를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 나를 버리고 욕망만 좇아가는 사람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 완성을 이루지 못하고 타락한다.

※십(十)은 완성, 조화를 의미합니다.

즉, 아리랑은 욕망의 기쁨을 위한 삶에서 벗어나 널리 사람을 유익하게 하는

홍익인간의 기쁨을 위한 삶, 참나의 기쁨을 위한 삶을 노래한 것입니다.

리는 이러한 큰 뜻을 가진 노래의 참의미를 몰랐습니다. 아리랑이 노래하는 것은

우리의 건국이념인 홍익인간 정신이고, 우리민족은 그 정신을 실현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아리랑이 우리 민족을 대표하는 가요가 된 것입니다. 가장 오염되지 않은 정신,

우리 민족 모두의 가슴 속에 순수한 눈물으 자아내게 할 수 있는 정신과 문화는

아리랑 문화 밖에 없습니다. 아리랑 노래르 더욱 사랑하고 열심히 부르게 되면

우리의 가슴이 열립니다. 그러면 가슴이 아픈 사람은 마음이, 몸이 아픈 사람은

몸이 나을 것입니다. 아리랑은 잠들어 있는 우리의 정신을 불러일으킵니다.

아리랑 속에는 우리 민족의 얼이 있고 숨결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리랑 문화를

이 시대에 재현 시켜 민족의 의식과 정신에 다시 한번 불이 붙는다면, 시인 타고르의

말처럼 우리나라는 동방의 큰 등불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