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순 예성산, 깃대봉 산행 후 천불천탑의 운주사 둘러보기

산행일 : 2009. 1. 2(금). 맑음 

산행코스 및 소요시간 

  ☞ 문새바위? (13:41) 

  ☞ 삼거리 (13:57) 

  ☞ 전망대 (13:59~14:04) 

  전망 좋은 곳 (14:11~14:13) 

  ☞ 예성산 (14:17~14:19. 362m) 

  전망 좋은 곳 (14:31~14:36) 

  삼거리 (14:41) 

  ☞ 깃대봉 (15:16~15:20. 381m) 

  삼거리 (15:44) 

  문새바위? (15:52)

  그린랜드 (15:57)

산행시간 : 약 2시간 11분 

구간별 거리

그린랜드주차장→(약0.3km)→문새바위?→(1.2km)→삼거리→(0.4km)→예성산→(0.4km)→삼거리→(2.6km)→깃대봉→(2.6km)→삼거리→(1.2km)→문새바위→(약0.3km?)→그린랜드

총 산행거리 : 약 9km

네비게이션 정보 : 들머리인 놀이시설 그린랜드 주소⇒전남 화순군 춘양면 용두리 126-1

산행안내도 

 

그린랜드에 세워진 등산안내도

  

산행기 

  예전부터 화순 예성산에 가보고 싶었지만 인터넷에서 예성산에 대한 정보(들머리)를 얻기가 쉽지 않아 화순군청의 단순한 안내도만 믿고 길을 떠난다.

 

  용두교를 지나자마자 (29번 국도를 따라 보성에서 화순 쪽으로 가다가)오른쪽으로 지하통로가 보인다. 이 지하통로를 통과해 윗 그림의 베틀바위 유원지(그린랜드. 휴업 중)안으로 들어가 주차장에 주차를 하면 등산로입구라는 이정표가 멋지게 서있고, 예성산 등산안내도까지 그럴듯하게 세워져있어서 별 의심을 하지 않고 산행을 시작하게 된다.

그린랜드 주차장에서 바라본 예성산
 

  그린랜드를 벗어나자마자 철길 건너에 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보인다. 산행표지기가 한개도 걸려있지 않아서 찜찜하지만 그 길로 올라갈 수밖에... 약 200여m쯤 급경사를 치고 올라가니 무덤이 나오고 길이 끊어진다. 무덤 오른쪽으로 희미한 길이 보이기에 그 길로 들어 수평으로 치고 가다보니 길은 이내 없어지고 잡목과 가시와 산죽이 앞을 가로막는다. 50여m쯤 진행하다 다시 왔던 길로 내려간다.

  각 개인의 카페나 블로그에 산을 소개하려면 후답자들을 위해 들머리만은 명쾌하게 소개해야지, 산악회나 개인의 인물사진만 몇 장 덩그러니 올려놓고 갔다 왔다고 하는 게 대부분이다.   인터넷에 검색공개를 하지를 말던지... 궁시렁 궁시렁...

철길 오른쪽 아래에 시멘트 강변도로가 있다. 그 길을 따라가다보면 강물 속에 철길쪽으로 커다란 바위(문새바위로 추정)가 있고 철길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인다. 철길을 건너면 산으로 올라가는 들머리가 보인다.

 

  철둑길 따라 100여m를 걷다보니 왼쪽에 산길이 보이고 빨랫줄이 길게 매달려있다. 이 길이 맞을 것 같아서 망설임없이 줄을 잡고 올라간다. 경사가 45°에 가까울 정도로 급경사라 줄 없이는 올라갈 수도 없을 지경이다. 군 유격훈련을 받는 것 같다. 게다가 바닥은 눈 때문에 미끄럽고...

  100여m를 올라가니 무너져 내린 작고 초라한 무덤이 나오고 그 위로 길이 이어진다. 조금 더 올라가니 또 다른 무덤이 나오고 길은 여기서 끊어진다. 으~~~. 뚜껑이 열리기 직전이다. 이런 급경사지에 무덤을 쓰다니... 그래도 조망이 좋아서, 배낭을 내려놓고 잠시 휴식을 취한다. 워낙 급경사라 아이젠을 차고 하산을 한다.

  

  다시 내려선 철둑길... 아까운 시간을 한 시간 가까이 낭비하였다. 기차도 안지나간다. 또 다시 하염없이 걷는다. 오늘~도~~ 걷는다 마는~ 정처없~는 이 발~~길~~~ 갑자기 왼쪽에 넓은 산길이 나타난다. 눈 위에 등산화 발자국까지 선명하게 찍혀있는 것이 들머리가 분명하다. 그 발자국은 고맙게도 예성산 정상까지 이어져서 이후로 산행 길잡이가 되어준다. 쾌재를 부르며 산길로 올라선다. 왼쪽에 무덤이 나오고 마른 계곡을 지나니 또 하나의 무덤을 지난다. 예성산 중간지점이라는 팻말이 있는 또 다른 무덤을 지나 나무계단을 올라 너덜지대를 지난다. 커다란 너럭바위들이 널브러져 있는 곳을 지나자마자 삼거리가 나온다. 왼쪽 정상 쪽으로 올라가니 곧이어 벤치가 있는 전망대다. 멀리 무등산이 머리에 하얀 눈을 이고 있다.

왼쪽 철길횡단엄금 팻말 있는 곳이 들머리 (드림랜드에서 약 5분거리)
 
들머리
 
강건너에는 축산농가가 있고, 강물 속에는 집채만한 바위(문새바위로 추정), 길 왼쪽에는 철길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는 저곳이 들머리
 
삼거리
 
전망대
 
전망대에서 바라본 무등산
 

  협곡을 지나 능선에 올라서니 전망 좋은 곳이 나온다. 쉼터로는 기가 막힌 곳이다. 잠시 서서 무등산과 용암산을 바라본다.

  정상은 커다란 너럭바위가 몇 개 모여 있다. 계속되는 능선 상에 깃대봉으로 추측되는 더 높은 봉우리가 보인다. 예성산 정상에서 능선으로 곧바로 내려가는 길은 없는 것 같아서 왔던 길을 되돌아 내려간다. 좀 전의 전망 좋은 곳에 앉아서 보온병에 가져온 뜨거운 커피에 칼로리바란스(체중조절용 조제식품. 비스킷 종류로 식사대용. 치즈, 녹차, 과일맛? 세종류가 있고, 대형할인매장에서만 판매함.) 몇 개로 점심을 때운다.

정상가는 길의 협곡

 

전망 좋은 곳에서 바라본 무등산(왼쪽)과 용암산(오른쪽 뾰족봉)

 

오른쪽 좁은 도로의 다리가 용두교. 용두교 왼쪽 끝에 지하통로가 보인다. 저기로 들어가 하얀 큰다리와 용두교 밑을 통과해 시멘트 길을 따라와 왼쪽 5시방향으로 놓여있는 작은 다리를 건너 왼쪽 아래의 그린랜드로 들어와야한다.  

 

정상에서 바라본 용암산

 

정상의 벤치

  

정상에서 바라본 깃대봉쪽 능선

  

다시 전망 좋은 곳으로 돌아와 무등산을 힘껏 당겨본다.

  

용암산도 당겨본다.

  

  다시 삼거리에서 왼쪽 가봉 방면으로 돌아가니 커다란 암봉 밑을 지난다. 그 암벽 끝이 예성산 정상인 셈이다. 예성산 정상인 암봉 밑에 이르러 암봉을 올려다보니 암봉 오른쪽으로 내려올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저곳에 로프만 매달아 놓는다면 굳이 예까지 돌아서 올 필요가 없을 것이다. 화순군에서 저곳에 로프를 설치하던가 아니면 철계단이나 나무계단을 놓는다면 예성산이 화순의 명산을 넘어 전남의 명산이 되지 않을까...

  바위투성이 능선 (길이 분명하지 않아서 헷갈리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길이 계속 이어져있다.) 을 지나니 부드러운 능선길이다.  몇 개의 작은 봉우리를 넘어서서야 깃대봉으로 보이는 초라한 봉우리에 올라선다. 근처에 더 이상의 높은 봉우리는 보이질 않는 것으로 보아 깃대봉이 틀림없다.

예성산 정상을 오른쪽으로 우회하면서 올라다본 예성산 정상부위의 거대한 암벽

 

정상 바로 밑에서 올려다본 예성산 정상. 오른쪽으로 돌아가 보면 완만한 경사가 눈에 들어온다.

 

예성산 정상 밑을 지나 깃대봉 능선을 지나면서 뒤돌아본 예성산 정상(왼쪽)

 

아무도 가지 않은 길(상당히 미끄럽다.)을 올라간다. 저런 봉우리를 세 개 정도 지나야만 깃대봉 정상에 도착한다.

 

깃대봉 정상으로 추정되는 봉우리, 이정표가 반쯤 기울어있어서 관리가 소홀한 것을 알 수 있다. 

 

  왔던 길을 되돌아서 내려간다. 삼거리 지나 너덜지대를 지나다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너덜지대로 일부러 올라서니 예성산성으로 추측되는 돌무더기들이 눈에 들어온다. 너덜지대가 아니고 산성이 무너져 내린 것이다. 관에서 복원을 하지 않고 이대로 계속 방치를 한다면, 오랜 세월 뒤에 산성은 역사 속으로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안타까운 현장이다.

오랜만에 운주사에 가보려고 서둘러 하산을 하였다.

  

예성산 정상 못미쳐서 산행로를 오른쪽으로 약간만 비켜나면 오른쪽의 암봉에 오를 수 있어서 예성산 최고의 절경을 맛볼 수 있다. 왼쪽 멋진 봉우리가 예성산 정상. 정상 오른쪽 뒤로 무등산. 오른쪽에 용암산
 

하산하다가 이상히 여겨서 올라선 너덜지대. 자세히 보면 그냥 너덜지대가 아니고 산성(예성산성)이 허물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시급한 복구가 요망된다.

 

지석천

 

그린랜드 앞의 베틀바위(오른쪽)와 지석천. 정자도 보인다.

 

그린랜드를 빠져나와서 뒤돌아본 그린랜드와 예성산. 오른쪽의 저 다리를 건너 그린랜드 안으로 들어가면 된다.

 

운주사 가다가 바라본 예성산(왼쪽 암봉). 깃대봉은 오른쪽 산 너머에 있어서 보이질 않는다.

 

  운주사는 예성산에서 20여분 거리에 있어서 예성산 산행 후에 들려볼만하다.

20여년 만에 다시 찾은 운주사는 많이 변해있었다. 초라한 대웅전 하나만 덩그러니 있었던 것으로 기억되고, 운주사 들아가는 비포장 시골길 양옆은 코스모스가 한들한들 피어있어서 운치가 있었는데...

  입장료(2,500원)까지 받는다. 주차비를 안받으니 그다지 비싼 요금은 아니지만, 운주사를 둘러보면 입장료가 전혀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특이한 사찰이다.


 

  천불천탑의 운주사...

매표소 앞의 운주사 안내판에는 이렇게 씌여있다.

“ 사적 제 312호.

운주사는 돌로 된 석불석탑이 각각 1천구씩 있었던 우리나라의 유일한 사찰로 유명하다.

현재는 석불 93구와 석탑 21기 밖에 남아있지 않지만 1421년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는 석불 석탑 1천기씩 있다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조선초기까지는 분명히 실재했었다고 판단된다.

현재 남아 있는 석불상은 10m의 거구에서부터 수십cm의 소불에 이르기까지 여러 종류의 불상들이 산과 들에 흩어져 있다. 이들 불상은 대게 비슷한 양식을 보여주고 있는데, 평면적이고 토속적인 얼굴모양, 돌기둥 모양의 신체, 어색하고 균형이 잡히지 않은 팔과 손, 어색하면서도 규칙적인 옷주름, 둔중한 기법 등은 운주사에 있는 불상만의 특징이다. 이러한 특징은 고려시대에 지방화된 석불상 양식과 비슷한 경향을 보여주고 있어서 흥미롭다. 아마도 석인상을 제작하던 석공들이 대거 동원되어 만든 고려 석불상이라 하겠다. 이하 생략...“

  

 

  

  

 운주사 원형다층석탑(보물 798호)과 석조불감(보물 797호)

  

 운주사 땡칠이 모자
  
 운주사와 다층석탑
  

 운주사

  

 운주사의 석불은 볼품도 없고, 모양새도 없다. 얼굴은 너무나 서민적이라 친근감까지 느껴진다.

  

 와불

  

  
 칠성바위(북두칠성의 모양새와 흡사하다고 함)와 칠층석탑
 
  또한 산 정상에 있는 와불에 대한 안내판의 내용은 이러하다.

“ 운주사 와불은 도선국사가 하루낮 하룻밤 사이에 새로운 세상을 염원하며 천불천탑을 조성하던 중, 마지막 때에 이르러 닭소리가 나는 바람에 날이 샌 줄 알고 천상의 석공들이 모두 하늘로 가버려 와불만 누운 상태로 남아있다.” 라고 전해져 오고 있으며,


 

  마지막으로 황석영의 대하소설 “장길산”의 말미에는 천불천탑에 대한 상세한 전설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전라도는 옛적 백제의 땅이며 견훤이 일어났던 곳이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를 평정하게 되자 백제인의 저항을 미워한 나머지 차령 이남의 물이 모두 배주(背走 : 등을 돌리고 달린다)한다고 하여 차령 이남의 사람은 채용하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호남 전도는 토지가 비옥하고 바다를 끼고 있어 해산이 풍부한 고장이다. 특히 남해안에는 수백의 섬이 있어 예로부터 극변의 유배지로 널리 알려졌다.

  전라도는 평야가 광대하고 관개가 훌륭하여 이곳에 풍년이 들면 팔도를 먹인다 하였으나, 예로부터 중앙에서 멀고 현달한 이가 적어 부임하는 수령들은 마음 놓고 조세를 과하여 부역과 작료가 가혹하였으며 지방 서리배들의 농간이 극심한 고장이라 민란이 잦았던 곳이다.

 

‘청천 하늘엔 잔별도 많고

우리네 살림엔 수심도 많다

아리 아리랑 스리 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  이하 생략

 

   노래는 끝이 없고 정은 샘처럼 깊다. 남도로 가는 들판 가운데 영산강과 월출산이 있으니, 영산강은 담양 추월산에서 시작하여 장성 백암산, 능주 여함산, 장성 황룡강, 담양의 관방천, 화순의 지석강이 합수하여 나주벌을 거느리고 서남해로 흘러나가는데, 영암 월출산은 들판의 끝에 기이하고 아리따운 봉우리를 불꽃처럼 쳐들고 국토의 마지막 수문장처럼 서 있다. 영조조 삼 년에는 변산반도와 월출산을 근거로 하여 유민들이 난을 일으켰고, 이어서 육 년 뒤에는 전라도 인근해역의 섬들과 진도 나주 일대에서 노비들이 들고 일어났다. 절도의 노비들이야말로 역률에 따라 내쳐진 죄인들 중의 생존자들이었으니 그들이 어찌 새 세상에 대한 희망을 저버렸을 것인가. 인근의 능주 땅에는 먼 옛날 후백제 시절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설이 있었으니 대게 이러하였다.

  능주는 야산과 산줄기가 겹쳐서 오불꼬불한 비산비야(非山非野, 산도 아니고 들판도 아닌 곳)를 이루어 들판 가에 쑥 빠져 물러난 곳이라 예전부터 의외로 귀 빠진 골이다. 화순 남방에서 시작된 산줄기가 울타리처럼 싸고 흘러 보성 유치에까지 닿는다. 또한 맥은 남평 동남방에서 뻗어내려 능주와 두 겹의 산줄기를 이루어 곰재에서 만나고 장흥 쪽으로 빠진다. 두 겹의 산줄기 안에 천불산 협곡이 있으니 옛글에 나오는 대로 염택곡부(掩澤曲部, 움푹 꺼진 분지)가 분명하다.

  월출산을 근거로 하여 관군에 맞서 싸워오던 노비들은 들판 가운데 우뚝 솟은 바위산에서 포위된 채로 굶주리며 죽어가다가 가까스로 살아남은 자들이 천불산 계곡으로 빠져 스며들었다. 그들은 손바닥만한 야산과 야산 사이의 황토에 밭을 일구어 보리와 조를 심고 숨어 살면서 때를 기다렸다. 그들은 자신의 고향이 어디인지 부모형제가 어떤 이들인지도 알지 못하였다. 다만 기억하는 것은 나라에 대적한 죄를 지은 혈족의 잘못으로 남해의 섬 가운데서 노비로 태어났다는 것뿐이었다.  그들은 어머니나 누이가 일에 지쳐 돌아와 거적 위에 쓰러져 잠들기 전에 속삭이며 해주던 이야기로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옛적 후백제의 유민들은 협곡 속에 숨어 살면서 미륵님의 계시를 들었다. 이 골짜기 안에 천불천탑을 하룻밤 사이에 세우면 수도가 이곳으로 옮겨온다는 것이었다. 도읍지가 바뀌는 새로운 세상, 그들이 나라의 중심이 되는 세상이 하룻밤 사이에 이루어진다는 것이었다. 유민들은 새벽에 깨어 일어나 보성만에서 떠오르는 아침 해를 보았다.

  우리는 이곳에 서울을 세우리라고 미륵님께 서원합니다. 여기가 염부제가 되리라고 믿습니다.

  그들은 황토뿐인 야산에서 바위를 찾으려고 산등성이를 넘어가고 들판을 달리고 강을 건넜다. 바위를 굴려오고 끌어오고 떠메고 오면서 그들은 북을 두드렸다. 집채만한 북을 골짜기 어귀에 걸어두고 산천이 떠나가라고 두드리면서 미륵상과 탑을 쪼아 세우고 노고를 온 세상에 알렸다.

  세상의 모든 천민이여 모여라, 모여서 천불천탑을 세우자.

  그들은 보리밭 밭고랑에 돌을 눕혀놓고 새기기도 하고, 산비탈에서 쪼기도 하고, 암벽 중간에 매달려서 정과 망치를 두드리기도 하였다. 고수는 망치 소리를 모두 뒤덮을 만치 우렁차게 북을 때리고 또 때렸다.

  천불천탑을 모시고 새로운 세상을 이루는 부처님을 좌정시키려면 새 절도 세워야만 한다.

  늙은 백성이 일러서 계곡이 끝나는 곳에 새 절을 세웠으니 운주사(運舟寺)라 하였다. 젊은이가 물었다.

  할아버지, 절 이름이 어째서 운주사요?

  배를 부린다는 뜻이란다. 배가 물에 떠서 움직이게 된다는 뜻이니라.

  젊은이는 더욱 궁금해졌다.

  이 깊은 산골에서 배는 무엇이고 물은 또 무어요. 우리가 이제는 다시 죽지 못해 살던 섬으로 쫓겨 간다는 뜻이우?

  늙은 백성은 햇볕에 그은 주름살 많은 눈을 감을 듯이 가늘게 뜨고 웃으면서 말했다.

  그게 아니란다 얘야. 새로운 세상이 바로 배가 되는 게야. 미륵님 세상이 배가 된다. 배는 물이 없으면 뜰 수가 없지 않느냐?

  그럼 물은 또 무엇이우?

  물은 우리 같은 천것들이고 만백성이란다. 우리 중생이 물이 되어 고이면 배가 떠서 나아가게 되는 게야. 이제야 배가 되어 움직이는 절의 의미를 알겠느냐.

  백성들은 다시 정신없이 돌을 쪼아 미륵상을 세웠다.

  미륵님이 어떻게 생기셨는지 본 적이 있어야지. 몸집이 얼마나 큰지 작은지, 잘생기셨는지 못생기셨는지 어찌 알고 미륵님을 감히 새긴단 말인고.

  석수질을 하던 사람들은 거기에 생각이 닿자 모두 낙망하여 일손을 멈추고 주저앉았다. 늙은 백성이 다시 나서서 그들에게 말했다.

  여보게 미륵님을 못 보았다고? 이런 어리석은 사람 같으니, 미륵님이란 자네 아닌가. 자네 모양과 똑같은 이가 미륵님일세.

  어이구 그런 말씀 마시우. 저는 어릴 제 관차배(관료)에게 매를 맞아 콧대가 부러져서 이렇게 납작합니다. 다리는 절름발이구요.

  저는 못 먹고 살아 그런지 키가 안 커요. 보시우, 항아리처럼 작달막합지요.

  늙은이가 껄걸 웃었다.

  하룻밤 사이에 천도되고 거기에 오시는 미륵님이란 모두 자네들 모습일세. 안심하고 꼭 그렇게 새겨드리게.

  일손을 놓았던 천민들은 다시 용기가 나서 이번에는 자기 모습대로 각기 미륵님의 모양을 만들어나갔다. 골짜기 안에는 자기네처럼 성도 없고 이름도 없는 제멋대로 생긴 백성들이 꽉 들어차고 있었다. 고수는 다시 힘차게 북을 두드렸다. 황혼녘이 되자 이 소문을 들은 월출산, 해남 대둔산, 완도, 진도, 흑산 추자도의 바위들까지도 모두들 스스로 미륵상이 되기 위하여 우뚝우뚝 서서 골짜기를 바라고 몰려오기 시작했다.

  온 산의 바위가 밀려온다!

  북소리는 더욱 우렁차게 곳곳에 울려 퍼졌다. 그들은 캄캄한 밤이 되었어도 횃불을 밝히고 일을 계속하였다. 구백구십구의 미륵상과 탑을 세웠다.

  마지막 미륵님을 만들자.

  백성들은 새로운 세상을 눈앞에 그리면서 산정으로 올라갔다.

산정에는 남도의 어느 곳에서 달려왔는지 집채보다 더 큰 바위가 땀을 뻘뻘 흘리며 누워 있었다. 바위는 비탈에 누워 있어서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었다.

  상수하족(上首下足)일세. 비탈 위에 미륵님 머리를 새겨두고 아래쪽에 다리를 새겨야지.

  하루 종일 가장 열심히 일하였던 사람이 아는 척하였다.

  아닐세. 그렇지 않아.

  늙은이가 또 나서서 일러주었다.

  우리가 세상의 밑바닥에 처박힌 것처럼 미륵님도 처박혀 있는 게야. 세상이 거꾸로 되었으니 상수하족은커녕 상족하수(上足下首)가 맞네. 그래야만 우리가 힘을 합쳐 바로 일으켜 세울 것이 아닌가.

  모두들 그 말에 따라서 머리와 다리를 정하고 와불(臥佛)을 새겨나갔다. 어떤 사람은 머리를 코를 눈을 또 어떤 사람은 몸을 배를 어떤 이는 팔다리를 새겼다. 미륵님의 형상이 이루어졌다.

  자, 이 미륵님만 일으켜 세워드리면 세상이 바뀐다네.

  그들은 머리와 어깨와 몸에 달라붙어 힘을 썼다. 북은 그들의 힘쓰는 앞소리와 뒷소리에 장단을 맞추었다. 미륵의 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금만 조금만 더, 하다가 미륵은 다시 넘어졌다. 사람들은 지칠 줄 모르고 미륵님을 밀어 올렸다. 그때에 도저히 이 캄캄한 밤의 노고를 참지 못한 사람 하나이 있어, 손을 떼고 혼자 떨어져 나가며 거짓말로 외쳐버렸다.

  닭이 울었다!

  고수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라서 북채를 내던졌다. 미륵을 밀어 올리던 사람들도 힘을 잃고 주저앉아버렸다. 미륵상은 비탈 저 밑에 쳐 박혀서 다시는 움직이지 않았다. 서로 미륵상이 되기 위하여 우뚝우뚝 새까맣게 몰려오던 사방의 바위들도 소문을 듣고는 그 자리에 넘어져버렸다. 그렇지만 넘어지면서도 머리를 계곡 쪽을 향하였으니 먼 훗날에라도 와불이 바로 일어서면 다시 미륵이 되기 위해서였다. 바위들은 민병의 쓰러진 시체처럼 들판과 야산의 곳곳에 넘어져서 오랜 비바람에 씻겼다. 그 뒤부터 이상한 일이 있었으니 운주사의 대문을 여닫을 적마다 서울 장안에서 우지끈대는 우렛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서울이 옮겨지지 않은 것을 한하여 그런 소리가 들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문을 떼어서 영산강으로 떠나보냈다고 한다. 운주사는 그 뒤로부터 운주사(雲住寺)가 되고 말았으며 이는 물이 차오르지 않아 세상이 머물러버렸던 까닭이라 하였다. 중생의 물이 차올라 세상인 배를 띄울 때까지 와불은 구렁에 처박힌 채 기다림의 장소에 머물게 되었다.“  

 

누군가 이런 말을 하였다.

“신앙과 예술, 그리고 생활이 결합된 신성한 곳”

운주사의 아름다움을 한 마디로 표현한 명언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