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기백산 심설 산행을 위해 거창행 완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이른 시각인지라 동네마다 들르는 완행임에도 손님이 드물어 기사나
객이나 많이 무료하다.
봉산 소재지를 두어마디 남겼을 무렵, 보퉁이 두었으로 짐을 삼아 할머니
한분이 오르신다.   
기사분은 구면인듯 반갑게 인사를 하고 할머니도 맞장구로 답례를 하신다.
문득 객의 유년의 기억이 떠올라 행복한 추억에 잠긴다.

  

  

객의 본가가 있는 질밭골은 대암산에서 뻗어내린 두갈래 능선이 팔을
벌려 포근히 안은 곳에 자리해 안온하고 마을을 나서면  향골의 마터호른
오도산이 칼날 같은 기상을 뿜어내며 아래로 소월이 노래한 금모래 은모래가
도란거리는 황강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좋은 시절에는 한때 100여호를 헤아리는 대촌이였고 쥐똥 만한 눈꼽과
누런 콧물을 한발이나 달고 다니는 빡빡머리 기계충들이 마을이 좁다고
개싸대듯 설치고 다녔으나 지금은 모다들 대처로 스며들어 종적이 묘연하다.

  

이제는 허리 굽고 신경통이 곧 일기예보인 어르신들만이 남아 별로 소득도
없는 농사를 자식들의 살림 두량을 살피신다며  논밭 몇 뙤기에 수고를
아끼지 않으며 생활하시는 겄이다.
그나마 대암산 자락에 위치한 심산궁곡이고 보니 자발없는 멧톧이란 놈이
산중 제왕의 위세를 차린 답시고 무시로 내려와 세금을 징발하니 혹서우풍에
고생하여 애써 일궈 놓은 곡식을 하룻밤새 도적 맞기가 일쑤라 깊어가는
주름살에 근심이 떠날 날이 없더라.

  

혹 일요일에 닷새에 한번 서는 장날이래두 될라치면 그 놈의 짜장면 한그릇을
얻어 먹기 위해 기를 쓰고 따라 나섰다.
아무래도 추수 후의 가을장이 한결 수월했는데 광속에 가득 쟁여 넣은 곡식
에서 선심이 나오는 것은 불문가지,,
어쨋거나 모친과 모친 연갑의 동네 아주머니들이 한무리로 이고지고 남부여대
하여 돈을 사러 나서는데  버스가 다니는 한길 까지는 한참이나 발품을
팔아야 한다.

  

버스가 다니는 신작로는 (기실 국도 24호선) 객이 중학교 다닐 때까지 비포장
이였는데  도로 가장자리엔 두어 아름은 실한 버드나무가 구불 구불한 길을
따라 끝간데 없이 늘어섰고 가을이면 코스모스가 지천으로 피어 어린 마음에도
참으로 볼만 했었다.
소월의 노래가 아니더래도 하이얀 모래는 파도치듯 밀려오고 맑은 물에는
은어가 흔천이라  한여름 아이들의 발길에 쫓긴 은어떼가 제풀에 나자빠져
흰모시 같은 배때기를 하늘 향해 자반 뒤집기를 하였다.

  

결혼전 곁이 본가 어른들께 인사를 왔을때의 일이다.
그때만 해도 난테가 없어 버스를 이용했는데 질밭골에 내려서는 시리도록
하얀 백사장과 푸른 미류나무 숲을 한참이나 쳐다보며 말을 잃더라.
속없는 객은 어른들 뵙기가 부담스러워 그러려니 했는데, 10년이나 지나
털어 놓은 곁의 회고담,,
"솔직히 그때까지도 마음을 정하기가 주저 되었는데 티없는 백사장과 푸른
 미류나무 바람을 타고 성장한 사람이라면 최소한 맘 고생은 시키지 않을
 겄이랴 여겨 마음을 다잡았지요."

  

시간에  구애받지 않은 대중 없는 버스는 향골의 갈피 갈피에서 쏟아지는
장꾼들을 모두 태우고 시각에 겨워서야 느릿느릿 나타난다.
위아래도 없는 무소불위의 버스 기사는 한사람 이래두 더 태우기 위해
불량한 목자에 더욱 인상을 그으며,
"아지매요!  아  그 안에꺼정  쪼매마 더 들어가뿌소."
"보소,보소  아재요 ! 짐을 뒤로 더 땡기라 안카요.  폼만 잡지 말고."
저승 야차 같이 당당한 기사 아저씨의 등쌀에도 장꾼들은 아무런 불평도
없이 고분고분하다.

  

읍내 정류장에 도착해서도 위풍당당한 아저씨는 후렴 한마디를 잊지 않는다.
"아지매 그 올때  묵을꺼 쬐매마 사오소."
"하모 ,하모  사와야제 .  퍼뜩 갔다 올끼요."
당시 객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앗다.
제돈 주고 타는데 와 기사 눈치를 봐야 하며 싸래기 밥만 쳐 먹었는지 반말
투성이인데도 설설 기기만 하시니 도대체가 켯속을 알 수가 없더라.
글구도 모자라 먹거리까지 사오래니 저런 무지막지한 날강도가 어디 있을꼬.

  

이런 희한한 의문은 내 새끼가 예전의 내 나이 만큼이나 되어서야 겨우
풀렸다.
그때의 교통 상황은 아주 불편해 장에 가는 첫 버스를 놓치면 해가 중천에
머리를 디밀쯤 해서야 겨우 다음차가 당도하니 장꾼들은 어쨌거나 첫차를
놓치지 않으려하고 그것을 이해하는 기사 아저씨는 돈을 위해서가 아니라
장꾼들의 편리를 위해 한사람 이래두 더 태우기 위해 목에 핏대를 세우며
악을 썼던 겄이다.
그러기에 기사분의 주전부리까지도 마다 않던 인정의 절절함이 성세이던
호시절이였다.

  

  

"할배는 건강한교,어떤교?"
"뭐, 그냥 저냥 안카나"
"덕실 할배는 죽었다 카데 ?"
"글케,  비원(병원)에서 생고상 마이 했다 카더라."
소싯적 학교에서 배웠던 장유유서, 경로효친은 전무 한대도 얘기가
엇나게도 거북하게도 들리지가 않는다.
어느집의 다정한 모자간의 얘기꽃 처럼 정겹고 훈훈한 정을 담은 버스는
더욱 속력을  내고 저만치 거창이 보이기 시작 하더라.

  

거대한 싸리나무와 칡으로 세웠다는 장수사 일주문에 다다르니  아직은
한겨울의 칼바람이 써늘해 가양주 두어잔으로 한속을 들이고는 얼어붙은
눈길을 거슬러 도수골을 타고오른다.
월요일과 화요일에 내린  많은 눈으로 은근히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럿셀이 잘 되어 있어 귀찮게 스패츠를 하지 않아도 오르기엔 별 무리가 없어
방앗간에 과수댁 만나러 가는 홀애비 걸음 마냥 신이나 달린다.
도수골로 완전히 접어들자 바람은 잦아들고 매화 향기 가득한데 죽장 끄는
노옹이 차를 권하매 시름을 잊고 쉬어간다.

  

무망 법사님은 본격적인 오름길은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가마솥에 팥죽을
쑤다 왔는지 한여름을 방불케 하는 땀을 흘려 주위를 놀라게한다.
적당한 곳에 자리를 눌러  선관을 불러  배반을 갗추라 명하니 푸른 구름에
싸인 청의 동자가  백옥반에 복숭아꽃 한가지를 꺾어  내온다.
무망 법사가 한번 소매를 가볍게 떨치니 꽃가지는 순식간에  신선주와
천도 복숭아로 바뀐다.
한잔을 마시매 살을 에우던 추위가 사라지고 두잔을 채우매 근심이 사라져
신선지국에 든 것이 아닌지 의심이 들더라.

  

걸음을 재촉해 기백 오름길을 재쳐 가는데 하늘엔 선녀 여러명이 생황과
퉁소를 연주하고 난새와 봉황이 춤을추며 길을 돕는데 취흥이 도도한 발길은
이리비척 저리 비척 거리며 위태롭게 눈밭을 헤치며 갈피를 잡지 못하더라.
문득 찬바람이 거칠게 몰아치며 하늘이 열리고 구름위로 암봉이 나서는데
그 장쾌한 기상은 차마 필설로 형용이 불가 하더라.
정상에 이르러 한번 주위를 돌아보매 남덕유에서 향적봉으로 길게 꼬리를
끄는 설릉이 제일로 우람하고 우편으로 길을 나서 지봉 대봉을 거쳐 대덕산
으로 이어지는 그림자가 우람하다.

  

조금더 우편으로 시선을 멀리주매  수도, 단지, 가야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겨울 밤 하늘의 삼태성을 보는듯도 하고 망망 대해에 홀연히 솟은 삼형제
섬을 방불케도 해 한없는 상상의 나래를 자극한다.
뒤돌아 서매 지리의 웅장한 연봉이 하늘을 찌를듯 중중해 서릿발 같은 기운이
노도처럼 밀려든다.
아울러 보매 지리, 덕유, 가야의 거대한 산맥이 꽃잎인양 둥그렇게 사방을
감싸 들었고  기백 ,황석 ,금원은 수술과 암술에 해당하니 이처럼 기백은
거대한 꽃의 중심이자 삼도에 걸친 3개의 국립공원에 천혜의 조망처이니
산꾼에게는 하늘이 나린 신의 선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시리도록 맑은 하늘은 구름 한점 없이 수백리에 뻗어 가는데 햇님이 중천에
떠오르자 울울창창한 수목은 일제히 눈물을 뚝뚝 흘리며 가는 겨울을 아쉬워
하고 세나그네는 차마 기백을 떠나지 못하고 저아래 용추사의 독경 소리는
바람을 타고 고요히 울려 퍼지더라,,

  

                       2006년 2월 12일  진맹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