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원산






                               *산행일자:2009. 11. 26일(목)

                               *소재지 :경남거창/함양

                               *산높이 :금원산1,353m, 기백산1,331m

                               *산행코스:장수사일주문-도주골-기백산-누룩덤-금원산

                                              -유안청계곡-주차장

                               *산행시간:10시43분-16시33분(5시간50분)

                               *동행 :은하수산악회 회원




  7년 전에 한 번 오른 경남 거창/함양의 금원산과 기백산을 이번에 다시 찾아 오르는 중 새삼 저의 눈을 끈 것은 금원산-기백산의 주능선에 자리하고 있는 책바위였습니다. 이 바위가 수많은 책을 쌓아 놓은 것 같다하여 책바위로 명명된 데는 저토록 많은 책을 집에 들여 놓고 싶어 하는 이 지방 선비들의 간절한 염원도 한 몫 했을 것입니다. 경상좌도 예안현(경북안동)에서 퇴계 이황 선생이 태어나신 1501년 같은 해에 남명 조식 선생께서도 경상우도 삼가현(경남합천)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경(敬)과 의(義)를 학문의 신조로 삼은 조식 선생은 관직에 나가지 않고 처사의 삶을 살면서 후학들을 키웠으니 정구, 곽재우, 정인홍, 김효원, 노진, 하항들이 그들로, 대부분 은둔하면서 학문에 몰두했고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키거나 가담하신 분들입니다. 여기 경남 거창과 함양도 조식 선생의 제자들이 주로 활동했던 경상우도였기에 그들 중 누구라도 이산에 올라 책바위를 보았다면 엄청 저 바위를 탐했을 것입니다.






  제가 이 바위를 지나면서 떠 올린 분은 바로 저의 어머니였습니다.
1918년에 파주에서 태어나신 어머니가 살아가기가 어려워 민며느리로 시집온 것이 14살 때였으니 학교문턱을 한 번도 넘지 못했음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저희 시골에서 한글을 깨우친 아낙은 제 어머니가 유일하셨습니다. 장날이면 머릿짐을 이고 장에 가시는 목적 중의 하나가 육전소설을 빌려오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도 깨우치지 못한 한글을 어머니가 깨우친 것은 순전히 어깨 너머로 혼자서 배운 것이기에 잘 쓰시지는 못했지만 소설책을 읽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으셨습니다. 농한기 때는 동네 아주머니들이 저의 집에 모여들어 어머니가 소설을 읽으시는 것을 함께 듣곤 하셨습니다. 저는 이런 어머니가 참으로 자랑스러웠고 특히 어머니의 유별난 책 사랑이 제 몸에 유전인자로 그대로 전해졌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제가 책을 본격적으로 사서 읽은 것은 나이 서른이 훨씬 지난 1980년대 초반의 일이었고 그 후 여러 차례 이사를 다니느라 수많은 책들을 버리곤 해 그리 많은 책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내버린 책속에 어머니가 아끼셨던 육전소설도 끼어 있었으니  불효막심한 짓을 저질렀다 싶어 후회되고 한이 됩니다. 지난 가을 산행사고로 한동안 산을 오르지 못했습니다. 덕분에  올 2월 짬을 내어 남아 있는 책들을 모두 장르별로 분류해 제 블로그에 올려놓았습니다. 이 바위를 지나면서 살아계셔서 정리된 제 책 목록들을 다 보셨더라면 엄청 흐뭇해 하셨을 것 같아 돌아가산 어머니가 더욱 간절히 생각났습니다.






  10시43분 용추사일주문을 출발했습니다.
일주문 왼쪽으로 난 용추사 가는 큰 길을 따라 4-5분 걸어 다다른 삼거리에서 오른 쪽으로 꺾어 기백산 들머리로 들어섰습니다. 큼직한 바위들이 떼 지어 모여 있는 암괴류를 밑으로 돌아 기백산정상 3.4Km 전방의 산등성에 올라서기까지 일주문을 출발해 22분이 걸렸습니다. 등성을 넘어 북동쪽으로 이어지는 도수골 길이 이리도 한갓진 것은 주중이라 오르내리는 산객들이 별로 없어서였고 바로 아래 계곡이 말라 물 흐르는 소리가 거의 나지 않아서였는데 맨 뒤로 처져 고즈넉한 너덜 길을 저 혼자 걸으며 이 시간만이라도 동안거에 들어가는 스님처럼 마음의 평안해지기를 빌었습니다. 푸르렀던 나뭇잎들을 다 털어낸 나목들은 떨려나간 나뭇잎이 넓은 잎이든 바늘잎이든 관계없이 자식들을  출가시킨 어른들처럼 홀가분해 하는 데 “德裕山長水寺曺溪門”(덕유산 장수사 조계문)의 일주문을 지나면서 배낭 속에 넣어 가지고 온 속세의 짐을 내려놓지 못하고 그냥 메고 올라온 저는 저 나무들처럼 홀가분하지 못해 마음의 평화를 얻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산등성에서 도수골 위로 난 길을 25분가량 걸어 계곡을 건너자마자 하늘을 향해 시위라도 벌이는 듯 곧추 서있는 나목의 낙엽송림이 시작됐습니다. 십 수분을 걸어 만난 계곡을 다시 건너 푸르른 잣나무가 보이는 가파른 비알 길을 따라 올라 시흥골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는 고개 마루에 도착한 시각이 11시58분이었습니다.






  12시46분 해발1,331m의 기백산(其白山) 정상에 올랐습니다.
기백산 정상까지 1.3Km남겨 놓은 고개 마루에서 만난 후미대장께 제 걱정 말고 먼저 오르라고 말씀드려 놓고 잠시 멈춰 서서 메모를 하면서 숨을 돌렸습니다. 오른 쪽으로 이어지는 능선 길을 따라 오르는 중 참나무들 사이에 홀로 선 수피가 하얀 자작나무를 보고 참으로 “독야백백(獨也白白)”하다 했습니다. 정상을 200m남긴 지점에서 왼쪽으로 꺾어 오르며 용추계곡 건너 5년 전에 한번 걸었던 황석산과 거망산을 잇는 산줄기와 그 뒤로 높게 솟은 남덕유산을 함께 카메라에 옮겨 담았습니다. 돌탑이 세워진 정상에 올라 백두대간의 남덕유산에서 분기해 이번에 오르는 금원산과 기백산을 지나 진양호에 이르는 진양기맥의 산줄기를 확인한 후 정상석 바로 아래에서 점심을 들면서 10분 가까이 쉬었습니다.






  기백산의 옛 이름이 지우산(智雨山)인 것은 설마하니 제우스신이 그리스에서 이 먼 곳으로 옮겨와 구름을 가지고 조화를 부려서 얻어진 것은 아닐 것이고 저 아래 주민들이 이산 위에 걸쳐 있는 구름을 보고 비가 올지 안 올지를 판단할 수 있어서였을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산의 해발고도가 1, 300m가 더 되고 금원산까지 이어지는 산 능선도 그 높이가 해발1,200m를 상회하기에 웬만한 구름은 온전하게 이산줄기를 넘지 못하고 이쪽저쪽으로 비를 뿌릴 테니 말입니다. 이처럼 고산과 산줄기는 물줄기만 가르는 것이 아니고 빗줄기도 가르고 생활풍속도 가르기에 우리 선조들은 눈에 보이는 산줄기인 산경(山經)을 눈에 보이지 않는 지하의 광맥 줄기인 산맥(山脈)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했으며, 그 결과로 영조 때 지리학자인 여암 신경준선생께서 공들여 산경표(山經表)를 작성했고, 저희들은 그 것을 기초로 해 대간과 정맥을 이어가는 종주산행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13시57분 수망령으로 길이 이어지는 임도로 내려섰습니다.
용추사일주문에서 9백m가량 고도를 높여 다다른 기백산에서 북서쪽의 금원산으로 이어지는 능선 길은 고도차가 별로 없어 산행이 편했고 중간에 책을 쌓아 놓은 것 같은 누룩덤 암봉과 억새 풀숲을 지나 볼거리 또한 솔솔 했습니다. 작년 10월 용추산에서 허리를 다친 후 가능하면 암봉을 우회하고 있어 이번에도 누룩덤 바위를 오르지 않고 옆으로 지났지만 과연 책바위로 불릴 만하다 싶어 사진 찍어왔습니다. 두 곳의 누룩덤바위를 모두 우회한 후 왼쪽으로 시흥골 길이 갈리는 갈림길에서 그대로 직진해 임도로 내려서자 누룩덤바위를 같이 우회한 한 어르신이 먼저 도착해 팔각정에서 쉬고 계셨습니다. 8년 연하인 저를 앞지르실 정도로 건장하신 분이다 했는데 역시 힘드셨던지 버스가 대기하고 있는 주차장으로 바로 가는 탈출로를 제게 물어오셨습니다. 길이 분명치 않은 탈출로보다는 그냥 능선 길을 따라가다 금원산 조금 못 미친 곳의 삼거리에서 하산하는 것이 맞겠다 싶어 그리 말씀 드리고 얼마간 동행했습니다. 능선 길을 걷는 동안 거의 바람이 불지 않아 윈드자켓을 꺼내 입지 않았는데도 목덜미를 내리 쬐는 햇살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훗훗해 전혀 겨울 산을 오르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14시35분 해발1353m의 금원산(金猿山)에 올라섰습니다.
임도에서 꾸준히 올라 다다른 1315봉과 바로 앞에 보이는 동봉사이 한 가운데 억새풀숲의 넓은 안부가 있어 작은 평원처럼 편하게 느껴졌습니다. 헬기장이 들어선 이 안부에서 힘들어 하신 어르신께서 바로 오른 쪽 주차장으로 내려가셨고 저는 그대로 직진해 동봉으로 올랐습니다. 돌탑이 세워진 동봉보다 18m높은 금원산 정상은 동봉에서 서쪽으로 5분을 더 걸어 올랐습니다. 거창군 위학면 원학동심회에서 세운 정상석의 후면에 잔잔한 글씨로 이 산의 유래가 새겨져 있어 그 전문을 옮겨놓는 것으로 금원산 소개를 가름하고자 합니다.






  “금원산의 본디 이름은「검은 산」이다. 옛 고현의 서쪽에 자리하여 산이 검게 보인데서 이름하였다. 이 산은 금원암을 비롯하여 일암(一岩), 일봉(一峰), 일곡(一谷)이 모두 전설이 묶여 있는 산이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옛날 금원숭이가 하도 날뛰는 바람에 한 도승이 그를 바위 속에 가두었다 하며, 그 바위는 마치 원숭이 얼굴처럼 생겨 낯바위라 하는데 음의 바꿈으로 납바위라 부르고 있는 바위이다. 금원산에는 크게 이름난 두 골 짜기가 있다. 성인골(聖人谷) 유안청(儒案廳)계곡과 지장암에서 와전된 지재미골이다. 유안청계곡은 조선 중기 이 고장 선비들이 공부하던 유안청이 자리한 골짜기로 유안청폭포를 비롯한 자운폭포와 소담이 주변 숲과 어우러져 산악경관이 빼어난다. 지재미골은 서문씨의 전설을 안은 서문가 바위와 옛날 원나라에서 온 공민왕비 노국대장공주를 따라서 감음현을 식읍으로 받아 살았던 이정공 서문기(理政公 西門記)의 유허지로 그 자손들이 공부하던 곳으로 전한다. 지재미골 초입에는 문바위와 차문화을 꽃피웠던 가섭암지 마애삼존불이 있다.”






  남덕유에서 향적봉으로 이어지는 장대한 덕유산 산줄기를 조망한 후 동봉으로 되돌아가 안부삼거리로 내려서는 중 내리쬐는 오후의 햇빛을 산란시켜 넘실대는 은빛 파도를 연출한 푸르른 산죽들을 보고 저도 모르게 감탄사가 발해졌습니다. 이 뿐만이 아닌 것이 뒤돌아본 기백산과 그 산에 이르는 능선 및 이 능선이 동쪽 아래로 뻗어 내린 산줄기가 빚어낸 산그리매 또한 장관이어서 카메라에 옮겨 담아왔습니다.






  15시23분 유안청계곡으로 내려서는 임도 길로 내려섰습니다.
안부삼거리에서 동사면을 타고 내려가는 길이 그늘져 눈이 그대로 남아 있다면 많이 미끄러울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산죽 길을 지나고 여러 수종의 활엽수들이 혼재한 숲길도 지나 임도로 내려서기까지 동행한 몇 분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만큼 하산길이 편안했습니다. 3년 동안 산을 다녀 몸무게를 20Kg 넘게 줄였다는 한 분은 작년 여름 대야산을 오를 때 뵌 분이어서 반가웠습니다. 임도로 내려선 저희들은 오른 쪽으로 꺾어 굽이진 임도를 따라 걷다가 지름 길 몇 곳을 만나 질러가기도 해 15시41분에 임도를 벗어나 유안청폭포로 내려가는 계곡으로 내려갔습니다. 동봉에서 1030봉을 거쳐 유안청으로 내려가는 길과 합해지는 삼거리를 지나 만난 유안청계곡이 특이한 것은 비교적 밋밋하게 이어진 넓은 마당바위 위를 흐르는 계곡물이 낙차 크게 떨어지는 곳이 없어 폭포라 부를 만한 것과 그 아래 소를 찾아 볼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얼마 후 만난 목제 다리를 건너 간 것이 잘못이어서 금원산이 숨겨놓은 비경인 유안청폭포를 비껴가게 되어 이 폭포도 보지 못했습니다. 원래 이름은 가섭동폭(迦葉衕瀑)로 옛날 가섭사가 자리했던 곳에 지방향시 공부방인 유안청(儒案廳)이 차려져 유안청폭포로 불리는 이 폭포는 이태의 소설 남부군에 남녀 빨치산 500명이 목욕을 한 곳으로 그려질 정도로 넓으며 한 여름에도 손이 시릴 정도로 물이 차고 깨끗하다고 안내판에 적혀있어 그냥 지나친 것이 더욱 아쉬웠습니다.






  16시33분 금원교 옆 주차장에 도착해 하루 산행을 마무리했습니다.
계곡을 빠져 나와 아스팔트길로 들어선 것이 16시5분으로 이미 산악회에서 지정해준 16시주차장 집결시간보다 5분이 늦었습니다. 동행한 한 분에 대간과 정맥의 개념을 소개하는 동안 어느새 금원산 자연 휴양림을 지나서 주차장에 도착해 하루 산행을 마치고 산악회에서 준비한 저녁을 맛있게 들었습니다.






  매번 책을 가지고 산을 오르면서도 산 위에서 책을 읽은 적은 거의 없습니다.
책을 배낭에 넣어 다니는 것은 그보다는 오가는 시간과 기다리는 시간에 읽기 위해서인데 이번에는 단 한 장도 읽지 않았습니다. 흔들리는 차안에서 책을 읽는 것이 눈을 빨리 망가트린다면 아니 읽는 것만 못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습니다. 이 또한 핑계에 지나지 않는 것이 그리 망가질 눈이었다면 저는 벌써 장님이 됐을 것입니다. 산 속의 맑은 공기로 장시간 눈 속을 세척하기에 고속버스 정도라면 책읽기에 별 어려움이 없다는 판단입니다. 저의 독서습관이 두 아들에게 그대로 전해진 것을 20년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가 아신다면 엄청 기뻐하실 것입니다. 귀경길 버스 안에서 어머니가 시작하신 책 사랑이 저 책바위처럼 몇 대를 이어가기를  빌면서 잠을 청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