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남정맥12) 금성산성 – 피그말리온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키프로스의 왕은 조각가였다. 그는 필생의 역작을 남기기로 마음먹고 상아로 여인상을 조각하기로 하였다. 그는 손에 엄청난 상처를 입고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 밤낮없이 작업에 몰두하여 기어이 상아로 된 여인상 조각을 완성하였다. 자신이 조각하였음에도 완성해 놓고 보니 조각상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그는 매일 조각상을 어루만지고 보듬으며 자신의 여인인 양 정성을 다하였다. 조각가는 결국 사랑과 미의 여신인 아프로디테에게 조각상을 여인으로 만들어 달라고 간청하였고, 그의 지극 정성과 사랑에 감동한 여신은 상아 조각상을 여인으로 환생시켜 주었다. 그 조각가의 이름이 피그말리온Pygmalion이다.


일상의 복잡과 분주함을 벗어나 산으로 가는 발걸음은 언제나 가볍다. 올해 유난히 삼한사온이 뚜렷한 날씨 속에 새벽공기를 가르며 산으로 향한다. 꽤 이른 시간의 지하철에는 어제 저녁의 여운이 남아있는 젊은이들과 하루를 일찍 시작하는 사람들이 듬성듬성 앉아있다. 인자요산仁者樂山 말 그대로 보름 만에 만나는 산우들이 해맑은 얼굴과 정겨운 미소를 띠고 반겨준다. 산에 들기도 전에 마음이 유해지고 기분이 좋아진다. 호남의 너른 들판을 지나는 길에 눈발이 휘날린다. 길 주변의 야산에는 쌓인 눈이 제법 있어서 오늘 산행도 만만치 않을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오늘은 강천산 계곡을 곁에 두고 금성산성을 에둘러 가는 산길을 걸을 것이다. 길은 훤한데 몸 컨디션은 썩 좋질 못하다. 산이 알아서 해주겠지.

방축재에서 시작된 산행은 작은 눈발이 날리는 가운데 마을 한 복판을 지나며 시작되었다. 꾸밈없는 미소가 다정해 보이는 마을 할머니 몇 분이 길손에게 말을 건넨다. 다 쓰러져 가는 폐가 옆 대나무 숲으로 들며 산행은 본격적으로 치오르기 시작한다. 쌓인 눈이 많지는 않아도 습설이라서 미끄럽다. 주중에 세상 사람들과의 만남에 찌든 몸과 마음이 아직 산에 적응이 되지 않고, 눈길에 힘이 들어 길 한 켠에 서서 오늘은 일찍부터 스틱을 폈다. 잠시 뒤 다시 아이젠을 차는 사이에 산우들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고독한 산행이 시작되었다. 덕진봉 오르는 길에 땀이 쏟아지는 것을 보면 오늘 산행도 만만치 않겠구나. 예상대로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고 저 아래 마을과 논밭을 보며 산행이 진행된다. 저 멀리 눈에 익은 북바위가 보이고 소나무 잔목이 즐비한 산길은 마냥 평화롭다. 나는 다시 마음이 부자가 된다.


▼ 덕진봉을 지나 광덕산으로 가는 평화로운 길, 작은 오르내리막이 반복되어도 길은 순했다

오솔길





속이 비면 운행이 힘든 체질인 나는 차 안에서의 분위기가 부담스러워 미리 에너지 보충을 해 두지 않아 고전하고 있다. 최후미권의 산행진도와 속도가 나지 않는 이중고로 마음이 번잡하다. 가끔씩 몰아치는 바람이 나무 위의 눈을 휘날리며 눈보라를 날리고, 평화롭고 유순한 길이 끝나며 곧 광덕산의 위용을 맛보라며 산은 준엄하게 버티고 서 있다. 길 한켠에서 먼저 온 산우와 간식으로 요기를 한다. 이 순간에도 몰아치는 눈보라가 정신을 없게 만들지만, 마음은 안정을 찾고 차분해진다. 수직에 가까운 오르막을 힘겹게 치오르면서도 몸이 서서히 산에 적응해감을 느끼며 한걸음 한걸음에 충실한다. 해발 565m의 광덕산은 그저 밋밋한 하나의 봉우리이고 다시 산은 철계단으로 된 급경사 내리막으로 이어진다.

적우재고개를 지나면서 강천계곡을 넘어 온 찬 바람이 휘몰아친다. 살짝 눈 덮인 길 바닥에는 보이지 않는 얼음판이 있어 발길을 조심스럽게 한다. 북쪽에서는 바람이 휘몰아치고 있지만 능선에서 내려다 보는 저 아래 마을은 한마디로 평화의 상징이다. 언젠가 가을에 강천산 애기단풍을 구경하러 왔다가 금성산성 너럭바위에 앉아 내려다 본 저 너른 들판의 황금빛이 또렷이 기억난다. 아무 것도 먹지 않아도 괜히 배부른, 그저 바라 보기만 하여도 흐뭇한 그 정경, 내리쬐는 따스한 가을볕에 곡식도 익고 바라보는 내 마음도 익어가는 그 기분, 산은 정녕 넓은 가슴을 지녔다. 서서히 금성산성이 눈 앞으로 다가오고 푸른 하늘과 흰구름을 배경으로 멋진 광경을 그려낸다. 이제부터는 눈이 호강하는 보고 즐기는 느긋한 산행이 되리라.


▼ 금성산성으로 가는 능선에서 내려다 본 평화로운 마을, 가을이면 저 벌판이 황금색으로 물든다

마을





산행 중에 자연과 교감하며 깊은 사색을 곧잘 즐기는 나는 금성산성金城山城을 지나며 뜬금없이 금성金星을 생각했다. 사실 관계가 없었지만 그냥 발음이 같다는 데서 생각이 그리로 넘어갔을 게다. 그리고 이번에는 금성이 영어로 비너스Venus라는 생각이 떠 올랐고 비너스는 행성이기도 하지만 로마신화에 나오는 여신임을 유추하게 되었다. 참으로 묘한 것이 생각이라서 생각은 꼬리를 물고 생각을 만들어 내었고, 비너스가 로마신화에 등장하는 미와 사랑의 신이라면 그리스 신화에 대별되는 신은 바로 아프로디테Aphrodite임을 떠올렸다. 못 말리는 생각의 연결고리는 기어이 피그말리온을 찾아내게 된다. 금성산성을 거닐며 지구 반대편 그리스의 피그말리온이라니? 내가 생각해도 어처구니 없는 생각의 연쇄반응이다.


시루봉을 지나면서 성곽 위 길을 걷는다. 기억이 확실치 못한 산성의 역사를 그려보고 나에게는 맨 몸으로 오르기에도 벅찬 이 곳에 성을 쌓은 그 옛날 민초들의 고뇌를 가늠해 본다. 쌓아 놓은 돌이 유난히 정갈한 동문 쪽에서 바라보는 시루봉 앞으로 눈보라가 휘몰아치며 멋진 광경을 그려낸다. 작은 오르막으로 계속되는 산성길 하늘은 푸르고 흰구름이 두둥실 떴다. 가지를 모두 떨군 나무들의 잔 가지가 바람에 울고 계곡에는 눈이 덮여 깊은 겨울을 표현한다. 왼편 저 멀리로는 담양의 너른 들녘이 펼쳐져 있고 오른쪽 단애 아래로는 강천계곡이 모두 보인다. 흩날리는 물보라가 장관인 구장군폭포는 두텁게 얼어 멀리서 보아도 흰빛을 띠고 서있다.

북쪽으로는 가깝게 오늘 가야 할 강천산의 주봉인 왕자봉이 둥그런 정상을 내보이며 미소 짓고 있고, 그 뒤로는 저 멀리 지난 번 힘겹게 걸었던 용추봉에서 시작된 긴 능선이 보인다. 산 길에는 아직 눈이 쌓여 있지만 양지바른 곳에는 눈이 녹아 맨땅을 드러내고 있고, 바람이 적은 곳에서는 살포시 더위도 느껴진다. 오늘 산에는 사계절이 모두 있다. 산성을 따라 에둘러 가는 등산로가 부드러워 발길이 편하지만 눈 쌓인 길에서 긴장을 풀지는 않는다. 조망이 좋고 사방으로 볼거리가 많아 운행이 지연된다.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산성산을 지나고 송낙바위로 내려서는 갈림길에 다다랐다. 중도 탈출할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거리와 시간을 가늠하기 위하여 잠시 걸음을 멈추고 지도를 펼친다. 시간으로나 거리로나 이제 절반을 지났구나. 이제부터 길은 편할 터이지만 서둘러야 했다. 나는 다시 잰 걸음을 내딛는다.


▼ 동문 쪽에서 바라본 시루봉, 돌연 바람이 거세게 불며 눈보라를 휘날린다

눈보라





지나는 이 들이 적은지 유난히 눈길이 깨끗한 산길을 잠시 내려서자 금성산성 북문이 나타났다. 산성의 다른 곳과 달리 이곳은 공간이 너르고 성곽모습도 한결 깔끔하다. 몇몇 산우들과 이곳 저곳을 사진에 담는다. 건너편 추월산이 손에 닿을 듯이 가깝게 보이고, 깎아지른 절벽에 자리한 보리암도 육안으로 또렷이 보인다. 이미 걸었던 추월산에서 이어진 장쾌한 능선이 깔끔한 하늘을 배경으로 늠름한 모습을 자랑한다. 추월산 아래로는 옥빛 물빛을 자랑하는 담양호가 그윽하고 의젓한 모습으로 누워있다. 맑은 하늘과 아름다운 산, 그리고 조용한 호수까지 모두 갖춘 광경에 산우들은 탄성을 자아내고, 멋진 풍광을 사진으로 담아내려 눈에 각인시키려 모두 분주하다.

예상대로 눈감고도 가는 평화의 길이 시작되었다. 고도 차이가 전혀 없는 평지 길에 산은 부드러운 흙산이어서 발걸음이 편하다. 더구나 작은 구릉조차도 정상을 지나지 않고 팔분능선쯤으로 에둘러가니, 정맥길 마루금이 이래서 되겠느냐고 호기도 부려본다. 오늘 산행은 광덕산 이후로 오메가 글자 모양으로 빙 둘러가는 길이다 보니 지나온 길이나 가야 할 길이 모두 시야 안에 있어서 길 잃을 염려가 전혀 없다. 시간상으로 한참 전에 지나온 광덕산이나 방금 전의 산성산이 모두 코 앞의 지척에 같은 거리감으로 존재한다. 이제 산에 완전하게 적응한 다리가 편한 산길에 편승하여 꽤 빠른 속도로 운행을 지속한다.


▼ 금성산성 북문에서 바라본 추월산 능선, 단애 위에 선 보리암과 물빛 고운 담양호도 보인다

추월산





원래 날씨가 좋고 산길이 부드러우면 자연 속에 몸을 의탁하고 무념무상의 경지에서 산을 즐기는 법인데, 지난 번 강천산과 아울러 오늘 초반의 산행이 힘이 드니 생각이 많아진다. 역경과 고난이 닥치니 그제서야 돌아가신 어머님을 찾고 관계도 없는 신을 불어내어 힘을 얻으려 한다. 시대도 지리적인 위치도 걸맞지 않는데, 금성산성에서 신화에 등장하는 신을 찾게 된다. 긍정의 힘을 믿고 간절히 바라면 상대방이 기대에 부응하며 바라는 바를 얻을 수 있다는 그리스 신화에서 유래된 것을 피그말리온 효과라고 하던가? 깊은 겨울, 오늘 함께 산행하는 산우들에게 피그말리온 효과를 불어넣어 본다. 안전하고 행복한 아름다운 산행이 되라고… 그리고 나도 피그말리온처럼 자신에게 자기최면을 걸어 힘든 산행을 이겨내려 애쓴다.


형제봉 오르막을 앞에 두고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이제 남은 거리가 얼마 남지 않았고 시간도 여유가 있었다. 산우들과 물도 마시고 과일을 먹는다. 겨울 산행에서는 찬 날씨와 함께 귀찮게 여겨 운행 중 물을 적게 마시는 편인데, 물 마시는 방식의 개선과 습관을 바꾸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갖는다. 잠시 휴식과 에너지 보충으로 심기일전하여 다시 길을 나선다. 형제봉 오르는 길은 길지는 않았지만 이미 체력소모가 있어서인지 힘이 들었다. 늘 하던 대로 보속을 늦추고 보폭을 작게 하며 한걸음 한걸음에 충실한다. 긴 오르막도 작은 걸음이 모여서 다 오르게 되는 것이다. 곧 능선에 다다르고 지난 번에 지나간 갈림길이 눈에 익어 무척이나 반갑다. 보름 만에 다시 보는 왕자봉은 조망도 없이 여전히 볼품없는 그런 봉우리였다.

아는 길이 더 무서운 법인데 역시 보기에도 험악한 급경사 내리막이 발디딤을 힘들게 한다. 보름의 시간은 산길에도 변화를 주어 지난 번 보다 눈과 얼음이 사뭇 적어졌음을 느낀다. 강천산 계곡에는 여전히 얼음이 얼어 있지만 군데 군데 봄기운이 서리며 졸졸 물 흐르는 소리를 낸다. 병풍폭포의 빙벽은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세월의 흐름과 자연의 섭리를 누가 거스르겠는가. 걷는 느낌이 좋지 않아 기분이 별로 내키지 않는 아스팔트 길 위의 얼음판은 여전하다. 아이를 대동한 행락객의 비료포대 썰매가 길을 뒤덮고 있다. 산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추위를 주차장으로 향하는 길모퉁이의 강한 바람에서 맞는다. 산은 역시 수시로 그 얼굴을 바꾸고 있다. 오십 리 길, 꼬박 여섯 시간이 걸린 산길에서 오늘도 진한 행복감을 느껴본다.


▼ 강천산 계곡의 고즈넉한 모습, 겉모습은 겨울이지만 봄기운이 느껴진다

계곡





늘 갖는 생각이지만 산에서 갖는 마음의 평화가 산에 들 때마다 새삼스럽고 고맙다. 그 너른 가슴으로 언제나 안아주고 받아주는 후덕함, 내게 있어서 산은 바로 신이다. 신체적인 단련과 함께 성숙해지며 매번 수련을 거듭하는 정신, 산은 늘 그렇게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산을 매개체로 만난 산우들이 나의 삶을 기름지게 하고 풍요롭게 해준다. 출중한 산행 능력과 경험에도 불구하고 드러내지 않는 겸손과 여유, 자신보다 같이 산행하는 산우를 먼저 배려하고 베푸는 넓은 마음이 가슴을 따뜻하게 한다. 늘 받기만 하는 산우들에게 피그말리온을 부르며 기원했던 오늘의 산행, 산우들의 안전하고 행복한 산행을 신화 속의 인물을 찾아 빌어 보지만, 정작 그 효과를 본 것은 내 자신이 아닐까? 오늘도 빚지는 산행이었구나. ¶ 2012. 2. 18. [언마청]




언마청 블로그에 바로가기 ☞☞☞ “언마청의 유유자적” 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