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도 망금산~금골산~연산, 무참하게 파헤쳐진 진도지맥의 일부

 

Mt. 1204 / 섬(島)산 060~061 望金山(△111.5m) * 金骨山(×198m) - 전남 진도군

 

산 행 일 : 2012년 2월 5일 일요일

산의날씨 : 흐리고 한때 약한 눈비

동 행 인 : 모 산우회 버스 합승, 홀로 산행

 

산행(도상)거리 : 약 7.4km

               진도대교 <0.4> 망금산 <1.9> 18번국도 <2.0> 금골산 <1.2 +0.8> 연산 버스정류장 <1.1> 군내 파출소 옆

 

산행시간 : 4시간 15분 (식사 휴식 39분포함)

      진도대교 · 진도대교준공기념탑 뒤로 오름 <0:15> 금골산(△111.5m) · 이순신 명량대첩승전광장조성공사 중 <0:23> 18번국도 · 신설도로 금성교 <0:29> 74봉 <0:34> 147봉 · 금골산 전위봉 <0:19> 금골산(×198m) <0:23> 마애여래좌상(金骨山 磨崖如來坐像) 등 둘러봄 <0:10> 해언사 <0:19> 금골산 오층석탑(金骨山五層石塔 보물 제529호) · 금성초등학교 <0:12> 63봉 · SK 진도 둔전기지국 <0:21> 연산 버스정류장 <0:21> 군내파출소 옆 정자

 

참 고 : 국토지리정보원 1:50,000 화원(2009년 편집 본)지형도

 



 

망금산에서 본 진도대교

 


 

 

금골산에서 본 둔전들과 남해

 



 

오늘 산행 구간도

 

섬 산행의 으뜸은 뭐니 뭐니 해도 거침없는 조망이다.

그런데 날씨가 잔뜩 찌푸리고 있더니 2번국도, 보성 녹차골금강휴게소에 들어가기 전부터 함박눈이 쏟아지고 금세 하얗게 쌓인다.

눈이 쌓여서 얼어붙는다면 바위로 이뤄진 금골산 산행이 염려되는데 강진을 지나면서 서서히 개기 시작한다.

버스가 곧장 운림산방 주차장으로 갈 예정이라면 진도대교 앞에서 세워주라고 부탁하자 대교휴게소에 들린다고 한다.

 

 



 

출발하기 전에

 



 

진도대교준공기념탑과 진도대교

 



 

잡목과 가시덤불 속으로

 

 

10 : 58 진도대교휴게소 출발

운림산방 주차장을 향해 떠나는 버스와 거의 동시에 나 홀로 ‘진도대교준공기념탑’을 거슬러 진도지맥을 따라 길도 없는 잡목과 가시덤불로 들어간다.

박성태 님의 <신 산경표>에서 말하는 진도지맥은 진도대교를 출발하여 금골산(198m)~수리봉(389m)~여귀산(458.7m)~한복산(232m) 등을 지나 백미도 앞 갯바위에 이르는 도상거리 약 47km의 산줄기이다.

 



 

이순신 장군 동상이 보인다.

 



 

능선에는 길이 있었다.

 



 

파헤쳐지고 있는 망금산

 

 

교통호를 뛰어 넘어 맹감가시를 피한다고 하지만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지고 찔러대기 시작한다.

그런 와중에 박성태 님과 같이 진도지맥을 종주하신 남해 정병훈 님의 눈에 익은 표지기가 힘을 보태준다.

우측으로 이어진 능선에 이르자 길이 있고 중장비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처참하게 뭉개지고 있는 정상이 보인다.

‘이순신 명량대첩승전광장조성공사’를 하는 중이라고 한다.

 



 

공사 안내판

 



 

암반 폭파 준비 중인 인부

 



 

금골산을 바라보고

 

11 : 13~18 망금산(△111.5m)

삼각점은커녕 정자도 없어져 버렸고 한 여인은 암반 폭파용 화약을 가느다란 봉지에 담아 넣느라 불청객을 향해 고개도 돌리지 않는다.

진도대교와 급한 물살을 이용하여 왜군을 물리친 이순신 장군 동상이 내려다보이고 건너편으로는 화원지맥의 높고 낮은 산들이, 우측 멀리로는 땅끝기맥이 아스라이 보인다.

<신 산경표>의 화원지맥은 땅끝기맥의 바람봉분기점으로부터 85.1km를 남진한 첨봉(352m 해남군 옥천면·도암면)에서 분기하여 만대산(493m)~금강산(488m_~운거산(318m)~해남군 화원면 매월리 수류미등대(?)로 이어지는 도상거리 83.5km를 말한다.

 



 

신설중인 도로

 



 

파헤쳐진 진도지맥

 



 

금성교

 

오늘의 목적지인 금골산과 지맥에서 살짝 벗어난 첨찰산과 기상대 등을 잠시 둘러보고 깬 돌을 실어 나르는 덤프트럭을 피해 아스팔트 도로 가장자리를 따라 진도대교에서 일직선으로 뻗은 신설도로공사 현장으로 내려선다.

새로 뚫리는 도로는 진도지맥을 무참하게 파헤쳐 버렸다.

 



 

18번국도 - 위가 금성교

 


 

 

뒤돌아 절개지로 올라서서




 

70봉

 

11 : 41 18번국도 · 금성교

18번 국도위로 가로지른 금성교 조금 못 미친 지점에서 인근 주택의 하얀 강아지 두 마리의 영접을 받으며 도로로 내려서 거스른 후 다시 신설도로로 올라선다.

마주 보이는 봉우리를 향해 가는데 좌측으로 저수지가, 우측으로는 산줄기가 형성되었다.

마루금을 잘라버린 도로를 따르다보니 맥을 이탈한 것을 알아차리고 뒤돌아 걸어 절개지를 타고 올라 산속으로 들어가자 길도 없는 곳에 안내산악회 표기기 한 개가 걸려있다.

모르긴 해도 금골산만 둘러보는 산행거리가 너무 짧은 탓에 지맥을 택한 것 같다.

 



 

배추밭을 거슬러 올랐다.


 


 

대야제와 도암산

 



 

송전탑에서 본 망금산

 

70봉을 넘어 조금 가자 넓은 배추밭이 나오면서 짐승 출입을 막는 검은 그물을 둘러놓았다.

밑자락을 조심스럽게 들추어 배추밭으로 들어간 뒤 다시 같은 방법으로 벗어났는데 좌측으로 빙 돌아오는 것이 오해를 살 염려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측의 대야제와 암봉인 도암산(×122m)을 바라보며 가자 좌측 금성에서 올라오는 삼거리가 나타나면서 한전 표지기가 고압송전탑으로 인도하는 좋은 길이 펼쳐진다.

‘NO 110’ 송전탑 바로 좌측의 114봉을 지나면 또 다른 삼거리가 나오는데 좋은 한전 길은 우사면으로 비껴가고 지맥은 좌측 능선이다.

 



 

147봉으로 가면서 본 금골산

 



 

147봉

 



 

길다운 길이 없다.

 

12 : 34~40 금골산 전위봉인 147봉

망금산에서부터 금골산을 마주보며 걸어왔다.

147봉에 이르자 금골산은 바로 앞에 있고 주변 조망이 시원스럽게 전개된다.

하지만 금골산으로 이어지는 길다운 길이 보이지 않는 것은 사철나무와 키가 작고 드센 잡목 그리고 맹감가시가 웃자라 흐릿한 길마저 덮어버린 때문이다.

요령껏 요리조리 피한다고 하지만 옷을 뚫어 찌르고 활키는 탓에 정강이가 몹시 따갑다.

삼거리가 나온다.

직진하는 길은 해언사와 지맥으로 이어지는 길이고 좌측 벼랑으로 오르는 길은 금골산 정상과 마애여래좌상으로 이어진다.

 



 

금골산의 운동기구

 



 

금골산 정상

 


 

 

벼랑 틈의 움막

 



 

마애여래좌상이 있는 굴과 해언사

 

12 : 59 금골산(×198m)

거침없는 조망이 트이는 암봉, 운동기구 두 개와 벤치가 놓였고 몇 발자국 더 진행한 정상에 올라보니 수십 길 절벽이 아찔하다.

마애여래좌상을 찾아 바위틈으로 빠져 내려가 주변을 둘러보니 벼랑 틈 사이에 움막이 보이고 그 움막 밑의 작은 공간에 마애여래좌상이 있는 것 같아 다시 암벽을 기어오른다.

지난 삼거리 부근에 안내판이라도 세워두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운동기구가 있는 곳에 이르자 암벽을 다듬어 만든 계단 길과 안전장치가 설치되었다.

 



 

마애여래좌상을 찾아가는 길


 

 

 

마애여래좌상




 

측면에서 본 모습

 

13 : 17~45 마애여래좌상 · 점심식사

진도를 한 눈에 아우를 수 있는 자연동굴 안에 새겨진 높이 3.8m의 부처상으로, 1498년 정언 벼슬을 한 이주가 무오사화로 이곳에 유배되어 쓴 <금골산록 金骨山錄>에 당시 진도군수를 지낸 유호지가 시주하여 1469년부터 3년 동안에 만들어 졌다는 기록이 있다.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10호’로 지정 된 마애여래좌상의 안내문 하나 없고 바닥 한 귀퉁이에 절구 대용인 듯싶은 작은 구덩이가 있다.

가슴부분에 패인 사각형 홈은 단순한 조각이 아닌 부처의 실제 모습을 나타내기 위한 복장유물을 설치한 곳(복장감실)으로 여겨지며 전설속의 쌀 구멍이다.

 



 

진도지맥과 첨찰산

 



 

금골산에서 본 지나온 산줄기

 



마애여래좌상 안내표지

 

이 굴속에 노승과 상좌 한 사람이 살았는데 바위 구멍에서 매일 두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쌀만 나왔고 식객이 늘더라도 절대 욕심을 버리고 그 나오는 쌀만으로 먹고 살아야 한다는 불문율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많은 손님들이 찾아오자 노승이 화를 내며 “이놈의 구멍은 인정사정도 없더란 말이냐”하면서 더 많은 쌀이 나오길 기대하며 쌀 구멍을 쑤셨다.

이후로는 쌀은 한 톨도 나오지 않았고 놀라움과 후회에 잠긴 노승은 상좌와 함께 더 이상 먹을 것이 없는 이곳을 떠나고 말았다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해언사 대웅전




생활용수 탱크가 있는 봉우리

 



 

이곳에서 오층석탑을 찾아 좌측으로

 

14 : 00 해언사(海堰寺)

다시 운동기구가 있는 곳으로 올라간 다음 삼거리에서 좌측으로 내려가자 또 다른 삼거리가 나와 밧줄이 늘여진 좌측으로 내려가자 흰 개 한 마리가 나를 발견하고 쏜살같이 내뺀다.

마애여래좌상 표지를 발견하고 해언사 종각으로 내려가자 방금 만난 개가 시끄럽게 군다.

마당을 거쳐 빙 돌아간 삼거리에 이주 선생 비와 마애여래좌상 안내문 그리고 금골산 등산안내판이 세워졌다.

지맥을 따르기 위해 다시 오르자 불이문이 나오고 이어 좌측으로 희미한 길이 보인다.

농업 생활용수 배수지 탱크가 있는 봉우리를 지나 콘크리트 고갯길에 이르러 보니 오층석탑을 안보고 온 것이 생각이 나 그것을 찾아 좌측으로 내려간다.

 



 

금골산과 오층석탑

 


 

 

억새밭


 

14 : 19 금골산오층석탑(보물 제529호)

 

금성초등학교 교정에 있는 탑으로 원래 이 자리에 고려시대부터 해월사(海月寺) 또는 해원사(海院寺)라고 하는 절이 있었으며 1973년 학교터를 정리하던 중에 웅장한 석재며 초석, 온돌 등의 흔적이 나왔다.

석탑의 높이는 5.4m로, 1층부터 5층까지 몸돌에 모두 우주가 새겨져 있고 지붕돌은 넓고 두꺼우며 지붕돌 층급받침이 1·2·4층의 경우에는 5단인데 3층은 4단이고 5층은 3단으로 되어 있으며 형식과 만들어진 수법으로 보아 고려 시대 말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콘크리트길 고갯마루로 다시 올라 배추밭 가장자리로 걸어 억새밭을 헤집고 나아간다.

 



 

63봉

 

 


 

대파 밭

 

14 : 31 63봉

‘SK 진도둔전기지국’이 자리 잡고 있다.

63봉을 넘어 대충 치고 내려가 밀양 박공 무덤을 거슬러 좌측의 축사 쪽만 포장이 된 농로 고개를 지나 과수원을 스쳐 오르는 낮은 봉우리 부근도 가시덤불 등이 진행을 간섭한다.

통정대부 벼슬을 살았던 O공 부부 합장묘는 손보는 후손이 없는지 묵혀졌고, 더 이상 진행이 불가한 마루금 까지 올라온 대파 밭 가장자리를 따를 수밖에 없다.


 


 

연산 버스정류장


 


 

군내파출소 방향으로 가면서 본 금골산

 

14 : 52 연산 버스정류장

키 높이 까지 자라 방치된 잡초 밭을 헤쳐 내려가자 연사버스정류장 삼거리가 나온다.

챙재 까지는 길이 없어 고생을 많이 했다는 글을 읽었다.

그런데다 첨찰산 산행 거리도 비교적 짧은 편이어서 일행들이 하산할 무렵에 운림산방 주차장에 닿기가 무리일 것 같아 지맥 살펴보기를 마치고 포장도로를 따라 군내 파출소까지 걸어가기로 한다.

 

15 : 13 군내파출소 옆 정자

녹진 방향을 오가는 군내 버스는 하루 10회도 채 안되고 직행버스는 서지 않는 곳이다.

얼마나 지났을까? 용달차 한 대가 내 앞에 와서 멈춰 선다.

“진도읍을 찾아 가려고 하는데요?”

“아~ 그래요. 제가 그쪽으로 가니 좀 태워주시겠어요?”

덕분에 진도 시외버스터미널 앞까지 가서 내린 후 대기 중인 택시를 타고(요금 7,000원) 운림산방 주차장에 도착하니 박태수 님이 막 하산했다며 반가이 맞아주신다.

 



 

운림산방

 



 

쌍계사 일주문

 

 


 

산행대장님, 박태수 님과 함께

 

진도 지맥을 완주하려고 나선 것은 아직은 아니었다.

산이 낮은데다 코스마저 너무 짧고 순천에서 멀리 떨어져있다는 하찮은 이유로 한 번도 오르지 못했던 섬 산을 찾아보고자 안내 산악회의 양해를 얻어 따라나섰으며, 비록 잡목과 가시덤불로 인하여 정강이와 허벅지에 많은 생채기를 입었지만 나로서는 의미 있고 보람된 산행이었다고 자부한다.

그렇지만 전국 어디를 가든 볼 수 있는, 개발에 의한 마루금이 잘리고 뭉개지는 모습을 볼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