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봉




                          *산행일자:2009. 11. 15일(일)

                          *소재지 :경기동두천/포천

                          *산높이 :국사봉745m, 왕방산737m

                          *산행코스:오지재고개-왕방산-국사봉-693봉-가마골고개-칠월리고개

                          *산행시간:10시7분-16시24분(6시간17분)

                          *동행 :경동동문산악회원11명

                           (24기이규성, 서중원, 김주홍, 이기후, 우명길, 27기송기훈,

                            29기오창환, 유한준, 43기서석범, 김동희, 45기김영준)







   한북왕방지맥의 두 번째 종주 길에 이 지맥 최고봉인 국사봉(國師峰)을 올랐습니다.

서울 근교 청계산의 국사봉은 국왕을 연모하는 국사봉(國思峰)이고, 이번에 오른 포천의 국사봉은 국왕의 사부를 그리는 국사봉(國師峰)이어서 그 둘의 한글은 같지만 한자표기가 다릅니다. 임금을 그리는 국사봉(國思峰)이 연주대(戀主臺)의 범칭이라면, 임금의 사부를 그리는 국사봉(國師峰)은 왕사봉(王師峰)으로 바꿔 불러도 좋을 것입니다. 국사봉(國師峰)은 국사봉(國思峰)과 달라서 왕이 머무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해야 하는 것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면 국사(國師)의 역할을 제대로 해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봉우리는 조선조의 태조께서 친히 다녀갔다는 포천의 진산 왕방산(王訪山)과 붙어 있으면서 임금의 스승 봉우리답게 산 높이도 조금 더 높아 과연 국사봉(國師峰)으로 불릴만하다는 생각입니다. 왕방산을 찾아 오른 임금은 조선조의 태조만이 아니랍니다. 그보다 훨씬 전인 신라의 헌강왕도 왕방산을 올랐다 합니다. 그렇다면 여기 국사봉에 정좌한 국사(國師)가 꼭 조선조의 무학대사 한 사람만이 아닐 것입니다. 헌강왕의 스승이 어느 분인지는 몰라도 그분도 이 봉우리에 한자리 잡고 나중에 오른 무학대사와 한담을 나누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정작 국사봉의 정수리에 똬리를 튼 것은 이들 왕의 국사들이 아니었습니다.

가파른 된비알 길을 치고 올라 만난 본 것은 미군부대였습니다. 언제 미군들이 태평양 건너 한반도 중앙의 이 산에 올라와 먼저 자리 잡은 국사들을 하산시켰는지 잘 모르지만, 왕방산의 임금들도 그들의 위력에 어찌할 수 없었나봅니다. 왕방산의 임금들이야 그렇다 해도 인근 소요산의 원효대사나 의상대사라면 부처님의 힘을 빌려 얼마든지 미군부대의 국사봉 주둔을 막을 수 있었을 텐데 왜 그리하지 않았는지 그 이유가 궁금했습니다. 아무려면 영어만 아는 이들이 미처 영어를 배우지 못한 우리나라 임금들의 스승 감으로 문제없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을 텐데 말입니다.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를 영토로 삼은 대한민국이 비록 지금은 휴전선 남쪽만 실효적으로 점하고 있지만 경제적 부와 평화가 충만한 이 나라가 한반도를 대표하는 국가임을 굳게 믿은 이분들의 영혼이 오랜 고민 끝에 나라의 안위가 국사들의 자리보다 더 중요하다고 결론을 내린 것이 분명한 것이, 그렇지 않고서야 그분들이 그리 쉽게 국사봉을 내주지 않았을 것이기에 말입니다. 우리나라 국민들이 전쟁의 폐허 위에 대한민국을 전 세계가 부러워할만한 자유민주국가로 우뚝 세운 것은 여기 국사봉에 군대를 주둔시킨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은 것이기에 이들 영혼들의 판단은 역시 옳았습니다. 역사적 사실이 이러함에도 휴전선 북쪽의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에서는 국사봉을 왜 서둘러 되돌려 받지 않느냐고 성화입니다. 때가 되면 대한민국이 어련히 알아서 돌려받아 국사봉에다 국사들을 다시 모실 터인데, 당사자도 아니면서 성화를 부리는 그 나라 지도자나 제대로 따져보지도 않고 매번 지당하신 말씀이라고 머리 조아리며 거리 투쟁에 나서는 이들에 진정한 국사(國師)는 왕과 그 세력의 안위가 아니라 국가와 국민들의 국리민복을 위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습니다.



  오전10시7분 오지재고개를 출발했습니다.

동두천중앙역 인근의 버스정류장에서 9시30분 경 대진대학 가는 버스에 올라 이번 종주산행의 들머리인 오지재고개에 도착하기까지 20분가량 걸렸습니다. 삭풍이 밤새 몰고 온 냉랭한 시베리아 기단이 수은주를 0도 밑으로 끌어내리자 기다렸다는 듯이 하얀 눈이 한 송이 두 송이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곧바로 손끝이 아려오고 귀 바퀴가 시려와 겨울추위가 시작됐음을 실감했습니다. 겨울이 이렇게 가을을 밀어내고 11월 한 가운데에 자리 잡는 것이 올해만의 일이 아닌데도 등을 보이며 떠나가는 가을에 눈길이 간 것은 회갑을 막 넘기고 오래 몸담았던 일터를 떠나는 저희들처럼 그 발걸음이 마냥 무겁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관광버스 3대를 동원한 재경 경남고 동창들이 같은 시간에 산행을 시작해 들머리가 붐볐습니다. 오지재에서 북사면을 타고 돌탑이 세워진 570봉에 오르기까지 25분이 걸렸는데, 땅바닥이 축축하고 서릿발이 선 곳도 많아 미끄러질까봐 조심해 올랐습니다. 이내 눈발은 멈췄지만 나뭇가지에서 단풍들을 떨쳐 낸삭풍의 기세가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았고 그래서 햇살이 닿는 능선에 올랐어도 냉기는 여전했습니다.




  11시33분 해발737m의 왕방산을 올랐습니다.

왕방산(王訪山)은 조선의 태조 이성계 임금께서 자식들의 골육상쟁을 피해 이산 아래 왕방사에서 잠시 은거하였다하여 이름 붙여졌다 합니다. 오지재고개에서 동진해 오른 570봉에서 정북으로 뻗어나간 산줄기를 따라 걸어 왕방산 정상에 다다르기까지 딱 1시간 걸렸습니다. 가파른 길은 로프를 잡고 내려가고 커다란 암봉은 에돌아가 헬기장에 도착한 시각이 11시6분으로 오지재고개를 출발할 때 흩날렸던 눈발은 벌써 멈췄으며, 새파란 하늘이 도도하고 냉랭해 보였습니다. 헬기장에서 19년 후배 둘을 사진 찍는 동안 환희 웃는 그들에게서 세월이 앗아간 제 젊음을 다시 보는 듯해 반가웠습니다. 오른 쪽 아래로 포천 시내가 확연하게 보이는 능선 길을 따라 걸어 왕방산 정상에 올라서자 북서쪽으로 한북정맥 분기점에서 감악산으로 이어지는 한북감악지맥이 한 눈에 잡혔습니다. 이번에 걷고 있는 왕방지맥이 동두천을 관통하는 신천의 동쪽 울타리라면 감악지맥은 서쪽 울타리입니다. 한북정맥의 한강봉에서 발원한 신천은 이 두 지맥으로부터 받는 물을 전곡의 한탄강으로 실어 나릅니다.

  


  13시27분 해발745m의 국사봉 앞 헬기장에서 잠시 숨을 돌렸습니다.

왕방산을 같이 오른 경남고동문들이 다른 길로 하산 해 국사봉 가는 길은 저희들이 전세 낸 듯 아무도 지나다니지 않아 조용했습니다. 왕방산에서 북서쪽으로 내려가 다다른 왕방이고개에서 오른 쪽으로 꺾어 내려가면 깊이울 계곡을 거쳐 심곡저수지에 이르게 되는데 저희들은 직진해 국사봉으로 향했습니다. 얼룩무늬의 수피가 낯익어 보이는 물푸레나무 숲을 지나 오른 587봉의 동사면에서 바람이 미치지 못하는 곳을 잡아 점심을 든 후 13시 정각에 종주산행을 재개했습니다. 610봉을 넘어 오른 쪽 아래로 깊이울 계곡 길이 분기되는 안부로 내려갔다가 이번 산행에서 가장 가파른 깔딱 길을 올랐습니다. 왕방산에 오르는 길에 만난 수북이 쌓인 낙엽에 살짝 내려앉은 싸레기 눈은 이미 다 녹아 국사봉으로 오르는 된비알길이 미끄럽지는 않았습니다. 헬기장에 올라서자 국사봉에서 서쪽으로 갈리는 소요지맥이 한 눈에 잡혔습니다. 헬기장에서 조금 올라가 정상에 자리한 미군부대를 왼쪽으로 우회해 시멘트길로 올라섰습니다. 십 수m 걸어 내려가다 오른 쪽 능선으로 올라 지맥 길을 이어갔습니다.




  15시15분 가마골고개에서 잠시 머물러 합동사진을 찍었습니다.

미군부대를 왼쪽 밑으로 에돌아 다시 오른 지맥 길은 북동쪽으로 뻗어나갔습니다. 곳곳에 표지기가 걸려있고 내려가는 길의 경사도 그리 심하지 않았으나 낙엽이 쌓인 길이 언 곳도 몇 곳 있어 여전히 조심스러웠습니다. 헬기장을 출발 42분 후 693봉 바로 앞의 전위봉에 올라 남은 과일을 들며 10분 넘게 쉬었습니다. 바로 앞의 693봉을 14시21분에 오른쪽으로 에돌고 나자 바람이 닿지 않아 몸에서 온기가 되살아났습니다. 430봉으로 내려가는 길에 마름병의 확산을 막고자 참나무들을 베어내 비닐로 밀봉한 것들이 자주 눈에 띄었습니다. 더할 수 없이 맑은 산 공기를 마시며 사는 참나무들도 전염병에 저토록 고전하는 데 온갖 공해에 찌든 사람들이 무슨 수로 신종 플루를 피해갈 수 있겠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430봉에서 오른 쪽으로 확 꺾인 지맥 길은 울창한 잣나무 단지를 지나 490봉으로 이어졌고 490봉에서 다시 왼 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북동쪽으로 뻗어나갔습니다. 오른 쪽 아래 심곡저수지가 아주 가깝게 보일 정도로 고도를 낮추어 왼쪽 아래 기도원 같은 단독 건물이 보이는 가마골고개로 내려섰습니다. 신북면 갈월리와 포천읍 심곡리를 이어주는 깊숙한 십자안부인 이 고개 마루의 황토 흙 맨살이 저녁 햇살을 받아 포둥포둥해 보였습니다. 5분간 걸어올라 오른 쪽으로 하늘봉 길이 갈리는 능선 삼거리에 다다랐습니다.




  16시21분 칠월리 고개에 도착했습니다.

하늘봉 갈림길에서 나지막한 봉우리를 넘어 “가마골”이라는 안내판이 세워진 꽤 넓은 임도로 내려서기까지 간벌한 나무들이 길을 막아 걷기에 불편했습니다. 15시38분에 내려선 임도에서 쉬지 않고 15분간 더 걸어 이번 산행의 마지막봉우리인 373봉에 올라섰습니다. 373봉에서 왼쪽으로 3-4분 진행하다 지맥길이 아님을 확인하고 되돌아와 오른 쪽 능선으로 들어선 알바는 작년 1월 저 혼자서 종주했을 때도 똑 같았습니다. 373봉에서 오른 쪽으로 이어지는 능선의 좌사면에 빽빽이 들어선 잣나무들로 지맥길이 어둡게 느껴졌습니다. 368번 지방도가 지나는 칠월리고개의 청산고개쉼터 앞으로 내려선 후 왼쪽으로 2-3분을 걸어 다다른 갈월리 버스정류장에서 왕방지맥 2구간 종주산행을 마무리했습니다.



   미군부대가 국사봉에서 철수한다 해도 그 자리에 다시 국사(國師)를 모시기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국사(國師)란 임금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서도 존경을 받아야 하는 데 이 혼탁한 땅에서 그런 분을 찾기도 어려울뿐더러 설사 찾았다 해도 자기 눈의 들보는 못 보면서도 남의 눈의 티끌을 찾아내는 데 이력이 난 이들이 이분을 청문회에 세우겠다고 하면 아무리 백성들이 모시고자 해도 그 자리를 맡겠다고 누가 나서겠는 가 싶어서입니다. 국사봉에다 국사를 모시지 못해온 부끄러움보다 이 나라 국사들인 훌륭하신 원로들을 존경하지 않는 핍박한 오늘날의 사회분위기가 더 부끄럽고 원로 자리를 세치 혀가 능한 인터넷 세객들이 차지할 까 두렵기도 합니다.



  천마지맥 종주 후 처음으로  지맥종주를 같이 한 송회장이 끝까지 잘 버텨주어 16시30분에 갈월리를 지나는 동두천행 버스를 놓치지 않고 오를 수 있었습니다. 길안내를 맡은 유대장과 먼 길을 마다않고 따라나선  송회장, 그리고 다른 회원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