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2007년 12월08일(음력:10/29일) 날씨: 맑음, 영하15도

 

산행지:박달령~차돌배기

 

산행자; 백두대간 꿈의 종주대

 

산행코스: 오전약수~박달령~도래기재~구룡산~곰넘이재~참새골~월로방
 

도상거리:14.3km , 어프로치 : 6.7km , 산행거리 : 21km

(오전약수~박달령=2.7km , 곰넘이재~월로방=4km)

 

산행시간 : 10시간39분

 

개요

 

이 번 산행은 박달령에서 차돌배기까지 이다.

 

애니미즘과 토테미즘이 孕胎 되었고 단군설화의 샤머니즘을 꽃피운 聖地!

三一神誥와 格庵遺錄 .鄭鑑錄 등을 통해 배달민족의 뿌리를 내리게 한 곳!

 

그 곳에 가기 위해 兩白之間을 이어주는 烏鵲橋의 마지막 部分을 건너가는 것이다.

 

癸酉靖亂을 일으켜 왕위에 오른 세조에게 死藥을 받고  魂魄이 되어 박달령을 넘어가던 단종대왕이 사랑하는 아내 (단종비 정순황후는 1457년 사육신 사건으로 상왕(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되자 “부인”으로 강등되어 동대문 근처 정업원 암자에서 草根木皮로 延命하며 82세로 한 많은 生을 마감함 )를 이승에  홀로 남겨 두고  떠나야 하는 지아비의 恨은 박달령에서 쉬어가게 했을 것이다.

 

 옥동천 따라가는 청령포와 한양 쪽을 바라보며 떨어지지 않은 발걸음에 목 놓아 痛哭했을 그 자리(박달령)에서 옥돌봉으로 향하는 우리들 마음은 어린 조카를 毒殺시키고 王位를 찬탈한 세조의 무자비한 慾望 앞에 聖君의 뜻 펼쳐보지도 못하고 스러져간 단종의 꿈!을 떠 올리며 “權力이란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해 보면서 그가 갔던 길 따라보고자 한다. 
 

옥석산 이라 불리기도 하는 “옥돌봉“은 桓因이 “옥이 안 난 곳이 없고 선경이 아닌 곳이 없다”고 하여 “옥돌봉“이라 하고 정상에 있는 흰 바위가 “예천까지 빛이 난다“ 하여 예천바위로 불리기도 하며 6.25 激戰地로 유명한 곳이다.

 

옥돌봉에서 남쪽으로 주실령 따라 문수지맥(옥석산에서 시작되는 문수지맥은 옥돌봉과 선달산에서 발원하는 내성천 물줄기와 나란히 달려 문경의 나부山 에서 그 脈을 다한다)을 보내고 정상 아래에 있는 550년 수령의 철쭉보호수를 둘러보며 도래기재로 내려서는2km의 진달래 숲을 통과하면 朝鮮時代에 역(驛)이 있어 “도역리(道驛里)”로 부르다 이것이 變音되어 “도래기“로 부르는 마을 이름에서 빌려온 도래기재에 도착하게 된다. 
 

강원도 영월과 경북의 봉화로 나누어지는 도래기재를 境界로 하여 북쪽에는 소의 입 모양을 닮았다고 하여 “우구치”로 불리는 溪谷을 따라 옥동천의 上流인 내리계곡이 形成되고 남쪽에는 “도래기”에서 금당계곡을 따라 운곡川이 發源된다. 
 

도래기재 아래에 있는 금정굴은 日帝强占期에 자원찬탈(금정광산에서 캐어낸 금을 싫어 나르기 위해 터널을 뚫었고 해방 후 보수를 걸쳐 1987년까지 사용하다 터널위에 신설도로를 개설하고 주변에 소규모 공원을 조성하여 폐쇄하였다)을 목적으로 도래기재 8부 능선을 관통하여 우구치와 서벽리를 연결하는 7m의 터널로 광부들의 애환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도래기재를 지나 구룡산에 오르면 북쪽으로 미끈하게 누워있는 민백산과 삼동산이 어서 오라 손짖하고선달산과 구룡산에서 發源하는 물줄기가 내리계곡(신라 선덕여왕의 아들 효도왕자의 꿈같은 사랑이 전설로 남아 있는 내리계곡의 “비녀소”는 여름피서객들을 사로잡는 천혜의 비경으로 각광받고 있다)에서 만나서 옥동천 따라 남한강으로 흘러가는 溪流가 仙境을 연출한다.

 

아홉 마리의 용이 昇天하였다는 “구룡산” 頂上에서 사방으로 조망되는 산군은 산을 오르는 자만이 느낄 수 있는 포만감으로 충만할 것이다. 
 

북쪽방향의 두위봉을 시작으로 시계방향 따라서 백운산.함백산.태백산이 조망되고 연 이어 깃대배기봉과 두리봉은 물론이고 봉화의 진산인 문수산과  선달산 등, 1.000m가 넘는 高峰들이 즐비하다. 
 

  구룡산를 뒤로 하고  4시 방향의 가파른 비탈길 따라 내려오면  “높고 곧은 고개”라 하여 “고직령”에 이르는데  이 고개는 천평리와 애당리를 이어주던 역할을 하였다. 
 

고직령을 지나 곰넘이재 가는 길은 남쪽으로 참새골 과 북쪽으로 천평리를 조망하는 능선으로 끝없이 펼쳐지는 커다란 분지에 빠져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하는데 곰넘이재는 먼 옛날 천제를 지내기 위해 태백산으로 향하던 사람들이 넘던 고개요, 영남에서 강원도를 오고 가던 사람들이 넘나들던 고개이다.

  

곰넘이재에서 마루금 이탈하여 애당리로 하산하는 9km의 어프로치 구간은 태고의 신비를 간직하고 있는 곳으로 산행글에서 정리하기로 한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진행도

 

 산행글


 

癸酉靖亂(1453)으로 政權을 奪取한 세조(수양대군)의 명을 받들어 어린 단종을 “노산군” 으로 강등시켜 영월 청령포로 유배 보내는 길에 호송하고 사육신의 단종 복위운동이 “김질”의 고자질로 발각돼 서인으로 또 다시 강등 된 단종에게 사약 내리러 갈 때도 동행한 기구한 운명의 의금부도사 “왕방연”이 피를 토하는 처참한 심정으로  단종을 그리는 한 편의 詩를 이렇게 담아냈다.

........................................................................................................................................

 

천만리 머나 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

 

윗글은

아이들에 의해 노랫말로 불리다 알려진 구절이다.

/////////////////////////////////////////////////////////////

자신이 전한  사약을 마시고 승하한 단종을 그리는 마음이 뼈에 사무친 그는  官職을 팽개친 후 중량천 따라 “태릉“으로 들어가 배나무를 심고 墨客으로 生을 마쳤다. 
 

왕방연이 배나무를 심어 생계를 유지하면서 묵객으로 생을 마친 뜻은 이러하다.

세조에게 王位를 奪取당한 후 16세의 어린나이에 上王이 되어  여름날 청령포로 流配길에 오른 단종이  땡볕에 목이 말라 물 한 모금 마실 것을 要求했으나, 아무것도 건네주지 말라는 세조의 命을 받은지라 안타까움만 더 할 뿐이었다. 
 

그 때의 죄스러운 마음이 每年 단종이 昇遐한 날에는 여김없이 배 한바구니 가득 담아 영월 땅을 바라보며 祭祀 지냈다.

 

이러한 사연을 알게된 사람들은 수분이 많고 당도가 높아 목마른자의 갈증을 해소 해주는  최고의 배로 인정하여 “먹골 배”라 이름 지었다.

 

세조는 단종이 죽자 동강에 버리게 한 후 시신을 묻는 자는 삼족을 멸해 버린다고 어명을 내리니 시신을 거두는 자가 아무도  없었지만 爲善被禍吾所甘心(옳은 일을 하다가 화를 당하는 것은 달게 받겠다)고 하며 단종의 시신을 수습 해 암장을 한 의인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영월호장  “엄흥도”이다. 
 

강물에 떠다니는 단종의 시신을 몰래 수습해 영월 “동자을산”  양지바른 곳에 노루가 앉아 있다 떠나 눈 녹은 자리를 파서 시신을  매장한 지 60여년의 세월이 흘러 중종이 즉위하였다. 
 

중종11년(1516) 왕명을 받아 영월군수로 부임한 박충원의 꿈에 단종이 나타나 자신이 묻혀있는 곳을 알려주고 사라지자 잠에서 깨어난 박충원은 엄흥도의 후손들과 함께 단종의 묘를 찾고 봉분을 수축하여 제를 올리기 시작하니  그날이 바로 “단종제”를 올리는 날이 되었다. 
 

“장릉“으로 불리는 단종의 陵은 조선시대 王陵 중 유일하게 한양과 경기도권에서 벗어나 있으며 陵에는 엄흥도를 기리는 ”정려각”이 있고 안평대군과 금성대군을 위시 해 조사. 환관.군노 등 단종을 복위시키려다 극형을 당한 264인의 위패를 모셔놓고 매년 한식날 제사를 지내오고 있다.


한 때는 장릉과 사릉을 한 곳에 합치는 방안이 추진되기도 했으나 지방자치단체 간의 이해가 엇갈려 무산되자 두 분의 애절한 뜻을 기리기 위한 사람들의 노력으로 정순황후가 잠들어 있는 사릉에 있는 소나무(精靈松이라 부른다)한 그루 가져다 단종의 무덤앞에 식목하여 두 분의 정을 이어주니 이 또한 아름다운 일이다.

  

 (죽어서도 함께 하지 못하는 한 많은 부부의 원한을 풀어주기 위해서 노력하는 국민들을 본 받아 한 곳이 양보하여  합장묘를 해 준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 오전약수에서 박달령 오름길에 음미 해 본다 ★

/////////////////////////////////////////////////////////////////////////////////////////////////////////////////


03:30

오전약수를 출발하는 새벽의 차가운 空氣는 깊은 深呼吸과 함께 폐속까지 파고들어 어깨를 움 추리게 한다.

 

지난 번 산행 때 예기치 않은 일로 도래기재와 박달령으로 나누어져 산행을 종료 했기 때문에 오늘 산행은 박달령팀과 도래기재팀으로 나누어 산행을 하여야 한다.

  

금요일에 내린 눈 때문에 차량이 주실령을 넘지 못하고 춘양으로 우회하여 도래기재 가야하는 불편함이 따르기는 하지만 선뜻 승락하여 주신 고선배님의 배려로 스틱 두개만 들고 박달령으로 향하는 마음이 한 시름 놓게 한다.

  

요즘 기름값 비싸다고 하여 조금만 돌아가자고 하여도 짜증내고 하는 세상이고 보면 고선배님과 함께 하는 여행길이 고맙기만 할 뿐이다......


03:57

얼어 붙어 물 한모금 마실 수 없는 오전약수를 지나서 제법 넓다란 임도를 따라 박달령 오르는 길은 상당히 가파른데 눈 덮힌 落葉잎 길따라 오르기 더욱 힘들게 한다.


03:48

미끄러지는 발걸음 조심스럽게 50여분의 어프로치 끝에 지난 번 어쩔 수 없이 탈출하여야 했던 박달령으로 차량이동 가능한 임도에 도착하니 눈 덮힌 도로는 너무도 깨끗하여 마음까지 밝아오는  것 같다..

  오늘은 꿈의 종주대 안나푸르나 회장님의 회갑날이라 출발 때부터 잔치집 분위여서 순백의 땅 위에 엽서한 장 띄워 본다.  

만수무강 하시라고.....  


  

산령각

  

어프로치 구간 동안   상상 해 보았던 단종의 비애에 답답했던 마음은 사라지고 순백의 세상으로 접어든다.

이제는 太白山의 山神이 되어 산길을 걷는 우리들 굽어 살피는 단종대왕께 조용히 삼배를 올린다.   


05:00

아직은 사위가 어둠속이라 주변은 조망할 수 없지만 주간에 걸어가는 대간 길도 때로는 迷路를 헤매듯 雜木에 가려 景觀을 조망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라 옥돌봉 가는 길은 기다랗게 늘어선 대원들의 랜턴빛 따라 曲線을 그리는

마루금의 夜景을 느껴보는 것 만으로도 야간에 홀로 산행할 때 적막감을 생각해 보면 대 만족이다.  

06;00

옥돌봉.주실령. 박달령으로 산줄기 나누어지는 삼거리

길 주의!(대간마루금은 10방향이며, 주실령은 3시방향이다_  

이 산줄기는 101.8km의 내성천이 발원하는  옥돌봉에서 시작하여 문수산, 갈방산, 만리산, 용두산, 복두산, 박달산, 봉수산, 학가산, 보문산, 대봉산, 검무산, 나부산 등을 거쳐 낙동강, 내성천 만남까지 도상거리 약116.2km에 이른다. 

  

내성지맥, 내성남기(지)맥, 문수기(지)맥, 옥돌기(지)맥,  등으로  불리는데 하나로 통일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논란이 될 수 있는 산줄기에다 내성지맥이라 단정지어 혼란을 가중 시키는 행위에 대해서는 심사숙고 해야 할 것이다.

 

06:08

옥동봉  

옥석산으로 불리기도 한다.

좌측 공터 아래에 예천바위로 불리는 바위가 있다.

 

박달령에서 이 곳까지 마루금은 비교적 쉬운코스로 주실령 갈림길을 제외하곤 외길이다.

 

옥돌봉에서 도래기까지 내려가는 구간은 약간의 지루함을 동반한다.

06:24

550년 된 철쭉나무(보호수)

 

높이 5m에 둘레 105cm인 이 나무는 경북 봉화군 춘양면 우구치리 산1-1번지에 있는세계적으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가장 오래 된 철쭉나무로 고유번호2006-1호로 지정받아 영주국유린 관리소장이 관리하고 있으며 옥돌봉 정상에서 도래기재 방향 1km지점 마루금에서 50여미터 왼쪽으로 벗어나 있다.  

벌목 되어진 금강부부송(춘양목)

 

철쭉 보호수 바로 옆 인데

운명이 이렇게 틀려서야...

쯧쯧~

밝아오는 여명은 참새골을 불바다로 만들어 놓았다.

잡목에 가려 앵글에 제대로 담을 수 없는 아쉬움이 지금도 남아 있는 멋진 모습이었다.

07:09 도래기재

 

오전약수에서 출발 하면서 베낭을 차에다 두었기에 여기까지 편하게 올 수 있었다.

 

여기서 베낭 찾아서 구룡산 오름길은 영하15도의 추위와 전쟁이 시작 되었다.

 

편서풍으로 불어 오는 바람은 왼쪽뺨을 얼얼하게 만들어 주었고

손톱사이를 파고 드는 추위는 손가락을 마비시켜 버린다.

금강송(춘양목)

50여 전 벌목이 한창일 때 이 놈들은 어린 나무라 베어지는 것을 피할 수 있었을게다.

 

지금은 보호되고 있기는 하지만 괴상하게 자란 모습에서 한 시대의 아픔을 보는 것 같다.

08:14

첫 번 째 만나는 임도 옆에 서 있는 늠름한 금강송.

그 아래 대원들의 모습 역시......

신선봉

먹구름 사이로 태양의 움직임이 현란하다.

곰넘이재로 이어지는 임도 

09:13

상금정으로 가는 임도와 무인 휴게소

우리는 여기에서 꽁꽁얼은 손을 불어가며 식사를 하였다.  

구룡산의 남사면

 

구룡산 가는 길

구룡산 가는 길  

  

구룡산 가는 길 

구룡산 가는 길  

  

구룡산 가는 길  

  

구룡산 가는 길 

구룡산 가는 길  

11:11

물동이를 이고 가던 아낙이 승천하는 용을 보고 “뱀봐라”하면서 용의 꼬리를 잡아당기자용이 떨어져 뱀이 되었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구룡산에서 정상에 오르다.

 

정상석 옆에 안내판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해발1345m의 구룡산일대는 1980년 중반까지는 산불확산을 저지하기 위한 방화선이었던 지역이다.

 

현재 지역을 우점하고 있는 신갈나무는 벌채한 구르터기에서 돋아난 새싹(일명;맹아)으로 이루어진 숲이다.

-이하생략-

  

위 내용대로라면 좋은데....

일제 강점기에 벌목한 춘양목을 싫어 나르기 위해 만들어진 흉물스러웠던 임도를 방화선으로 위장하기 위한

것이라면 문제가 될 것이다. 

  

임도로 이어지는 곰넘이재와 신선봉  

참새골

 

9km에 달하는 계곡으로 운곡천의 발원지다.  

삼동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  

용이 승천할 때 하늘의 날씨는 어땠을까?

  

천평

태백산 아래  

문헌에 기록 되기를 天坪이라 하였는데 이 것은 하늘 아래 넓다란 평지를 일컬어 말한 듯 하다.

 

태백산을 천산으로 보아 천령이라 하였고 장군봉에 하늘에 제사 지내는 천제단이 있으니 그 아래

있는 넓은 평야를 천평이라 하였을 것이다. 

지금은 활주로로 활용되고 있는 천혜의 군사요새이지만...

※ 군사시설물인 관계로 천평에 있는 시설물은 감추었다.

  

구룡산의 미끈한 곡선을 따라 태백산이 잠시 동안 웅장한 모습을 보여 준다. 

 

974.1봉  

신선봉

삼동산과 민백산

 

삼동산은 고냉지 채소(배추와 무우 등)와 우량감자종자를 개발하기 위한  재경지가 있는 산으로 그 크기는 평창의 육백마지기 (청옥산에 있는 감자밭 육백마지기를 말한다)에 버금가는 곳으로 이 곳에 정착한 火田民들에 의해 재배되고 있다.  

 

문수산은 구름에 가려 형태만 보여 준다.

1203.5봉

갈곡리 북쪽에 있는 산  

12:11

고직령

 

서벽리와 애당리를 이어주는 고개로 "높고 곧은 고개"하여 고직령이라 한다.

김정호의 대동지리 "산천조"에는 "고석령"으로 기록되어 있고 예배령(예배령)의 북쪽이라 했으며'영가지"에는 "고적현"으로 또 다른 문헌에는 "곶적령"이라 기록하였던 것으로 곰넘이재와 함께 영남과 강원을 이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고개로 보인다.  

구룡산

방화선 따라 내려서는 등로는 비교적 쉽게 내려올 수 있었고.....

화방재에서 새벽2시에 출발하여 도래기재까지 남진하고 있는 서울의 동호인 산악팀과 격려를 주고 받으며 스위치 한다.

안전산행 하시라고...

12:45

곰넘이재  

애당리와 천평을 이어주는 고개이다.

백두대간은 여기에서 신선봉으로 이어지는데 우리는 오늘 여기에서 참새골로 하산 하기로 한다.

  

태백산으로 천제를 지내려 가던 사람들이 넘나들던 고개로 "영가지"에는 웅현(熊峴)으로 기록 하였다.

 

곰재.검재 곰님이재로 불리다 곰넘이재로 통일되어 부르고 있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곰님이는 "고개넘이"의 준말이다.  

겨우살이  

1071봉(백두대간의 마루금)

참새골  

동이정.장부골.석문동.참새골 등 4개의 자연부락으로 이우러진 애당2리를 통칭하여 "참새골"이라 하는데 참새가 날아가는 형세를 갖춘 산이 북쪽에 있다고 하여 "참새골",또는 약수가 나오는 "참샘"이 있다고 하여"참새골"로 불리는데  "정감록"에 의하면 십승지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다.

  

이 계곡은 구룡산에서 가지 내리는 서쪽 능선의 시루봉과 차돌배기1142봉에서 가지 내리는 각화산의 ㄷ자  형세의  산줄기 사이에 있으며 아직은 외부에 알려지지 않아 원시적인 자연경관을 간직하고 있다.

외딴집  

땅 파고 씨 뿌리며 노년을 보내고 싶은 생각을 해 보고 싶은 곳!  

그 곳에 외 딴집이 있었다.  

애당리 가는 길

14;19

이제는 무용지물이 되었는가!

30톤의 트럭이 지나도 끔적하지 않을 것 같은 다리가 이 깊은 산골에 왜 설치 되었는지????

풀 수 없는 숙제를 안고  여기에서 도착하여 산행을 종료한다.

 

산행 후  

빙판길 마다 않고 좁은 달려와 주신 고선배님의 베품에 5km의 도보거리를 단축하여 수진식당에

도착 하였다.

 

이 곳에서

안나푸르나 대장님의 회갑연 베풀어지고 끝 없이 이어진 산 사랑에 대한 대원들의 열정은

토종닭에서 매운탕으로 메뉴가 바뀐 연유도 모른 채 축하를 하였다.

 

돌아오는 길...

 버스 안에서 처음으로 우리는 축가를 불렀고....

그래도 많은 아쉬움이 남아 ....

 

장릉지(莊陵誌)에 전하는 16세 어린나이의 단종의 애 끊는 詩 !

두 수를 여기에 싣는다.

 

     1      

月白夜蜀魂

    달 밝은 밤 두견새 울 제    


 

 含愁情依樓頭

       추 시름 못 잊어 누 머리에 기대어라  

     

 爾啼悲我聞苦

          네 울음 슬프니 내 듣기 괴롭구나         


 

  無爾聲無我愁

            네 소리 없었던들 내 시름 없을 것을       


 

  寄語世苦榮人

         세상에 근심 많은 이들에게 일으노니   


 

  愼莫登子規樓

부디  자규루에는 오르지 마오

     

       2     

  一自寃禽出帝宮

          원통한 새가 되어 궁궐을 나온 후로       


 

   孤身隻影碧山中

       외로운 그림자 산중에 홀로 섰네        

  

   假眠夜夜眠無假

          밤이 가고 밤이 와도 잠 못 이루고         

 

    窮恨年年恨不窮

         해가 가고 해가 와도 한은 끝이 없어라  

   

                                                                                斷聲曉岑殘月白

       두견새 소리 그치고 조각달은 밝은데   


 

    血流春谷落花紅

    피눈물 흘러서 지는 꽃이 붉구나     

   

    天聾尙未聞哀訴

          하늘도 저 하소연 듣지 못하는데            


 

    何奈愁人耳獨聽

       어찌 시름 젖은 내게만 들리는 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