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덕산(문경 功德山, 912.9m) 산행 Photo 에세이

(2007.10.4/문경 산북면 공덕산/대승사입구-안장바위 바윗길-정상-대승사-대승사입구/고양시우정산악회 따라/ 산악회 홈 http://cafe.daum.net/rhdiddnwjd)
*. 천주산(天柱山)에 가다가
일산 우정 산악회에서 이름도 평생 처음 듣는 '천주산(天柱山)'에 간다는 소식을 듣고 얼씨구나 하고 등산회에 신청을 하고 집을 나서니 아스팔트가 촉촉히 젖어 있다. 집으로 되돌아가 우장을 단단히 준비하고 꼭두새벽 5시 30분에 관광버스에 몸을 실었다.
멀리서 산 봉우리를 보면 큰 붕어가 입을 벌리고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형상이라하여 '붕어산'이라고도 하고, 그 산 봉우리가 하늘[天]을 떠 받칠 정도의 큰 기둥[柱] 같다 해서 하늘의 기둥 '天柱山(천주산)'이라 한다니 그렇지 않아도 산에 미친 나 같은 사람이 어찌 혹하지 않으랴.
그렇다고 오해하지 마시라. 내가 말하는 '미친'이란 뜻은 '美親(미친)'으로 일반적으로 말하는 미칠 '狂(광)' 자와는 엄연히 다른 한자이니.
오늘 산행은 공덕산으로 해서 천주산까지 종주한다 하니 고생은 되겠지만 보람있는 하루를 처음 가보는 낯선 산에 푹- 안겨서 즐겁게 보낼 것 같다.
고양시 일산에서 공덕산이 있는 문경시 산북면 전두리까지는  
편도 6백리 232km 로 5시간 이상이 걸렸다.
우리들의 들머리는 10시 경에 '대승사(大乘寺) 주변 소개' 안내판이 서 있는 주차장이었다.
'가라고' 그러는지 가랑비가 오고 있어서 고아텍스에 비옷까지 입고 가방도 젖지 않도록 가리개를 하였다. 그러다가 묘적암, 윤필암 갈림길을 지나 가고 있다.
대개의 산꾼들은 산에만 관심이 있고 그 산의 살아있는 역사가 되는 절에는 관심이 별로 없는 분들이다. 그런 것보다는 산이 몇 m나 되는, 얼마나 높은 산이지, 어떤 모양의 산인지. 그 산을 얼마나 빨리 올라가는가에 관심이 더 많은 사람들이다.
'윤필암, 묘적암'의 갈림길을 지나면서도, 그걸 그냥 지나치기를 안타까워 하거나 아쉬워하지 않는 그런 면에서는 조금은 무감각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런 사람 틈에 끼인 나 같은 사람은 언제나 뒤쳐져서 그걸 하나하나 챙기느라고 맨 후미도 보이지 않는 후미에서 낙오자처럼 혼자 헤매게 된다. 이런 일이 되풀이 되다 보니 산악회를 따라 왔으나 단독 등반의 재미가 오히려 쏠쏠하다. 이런 말은 그러느라고 늦는 나를 변명하는 말이니 부디 구박하여 주시고 이해하여 주시라.
그래서 묘적암(妙寂庵)과 윤필암 중에서 '윤필암(閏筆庵)'만이라도 짚고 넘어가야겠다.

*. 윤필암(閏筆庵)에 얽힌 사불산(四佛山= 공덕산)의 유래
출처: 불교신문 이지누 그림
경북 문경 공덕산에 있는 윤필암은 (閏筆庵)은 고려 우왕6년 (1380년) 각관(覺寬)이 창건하였다는 암자다. 꽃보다 고운 절로 알려져 오다가 지금은 비구니들의 참선 도량으로 우리나라 근대 3대 비구니 선원의 하나이다.
공덕산(功德山)을 옛날에는 사불산(四佛山)이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이 윤필암 암자 뒤에 있는 사불암(四佛岩)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그 내력이 일연(一然) 스님이 지은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사불산조'에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죽령의 동쪽 100리쯤 되는 곳에 높이 솟은 산이 있는데 진평왕 9년에 홀연히 사면방장(四面方丈)의 한 큰 골에 사방여래(四方如來)를 새기고 붉은 비단으로 싼 돌이 하늘에서 그 산꼭대기에 떨어졌다. 왕이 듣고 거기에 가서 쳐다보고 경건한 예를 갖춘 후 그 곳에 절을 창건하여 절이름을 '대승사(大乘寺)'라 하고 연경(蓮經)을 외는 중(이름 전하지 않음)을 청하여 이 절을 맡게 하여 깨끗이 쓸고 돌을 공양하며 향불을
꺼뜨리지 못하게 하였다. 그 산을 역덕산(亦德山, 功德山)이라 하고 사불산(四佛山) 이라고도 한다. 중이 열반하여 장사를 지냈더니 그 무덤 위에서 연(蓮)이 났었다.
  그 윤필암은 가보지 못하였지만 문헌을 찾아보니 연못이 있고, 암자 뒤 200여 m 위 바위 위에 사불암(四佛岩)이 있었다.
우리는 무심결에 '대승사, 사불산 입구'라는 안내판을 지나쳤지만 그 옆에 있는 '알림'을 통하여 1,400여 년에 걸쳐 수많은 고승대덕을 배출한 이 절의 자부심을 보고 경배하는데에 시간을 할애하여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기 사불산 일대는 대승사 경내로 부처님 성지입니다. 경내 대승선원 사불선원은 용맹정진하는 참선수행 도량이며 성보(聖寶) 도난 방지 및 마을 주민의 상수원인 관계로 등산객 및 행략객들의 출입을 통제하오며, 참배객들은 경건한 마음으로 조용히 참배하시고 짧은 치마, 소매없는옷, 반바지 차림을 삼가해 주십시요 -대승사 주지, 선원장 백
이런 유서 깊은 공덕산을 산행 코스로 선택하였다면 우리 같이 굳이 산길을 택할 것이 아니라, 위 지도와 같이 바위 능선 가는 길에서 벗어나 있는 윤필암(閏筆庵)까지는 못 간다 하더라도 가는 길에 있는 마애미륵불도 보고, 나옹화상이 출가했다는 묘적암(妙寂庵)도 보고 대승사로 내려 오든지, 아니면 천주산으로의 종주 코스를 생각하여 보았으면 한다.
 묘적암은 사불암이 마주 보이는 곳에 있는 암자로 고려 말의 고승 나옹 화상(懶翁禪師,320∼1376)이 요연선사를 찾아가 출가한 곳이기도 하다.
 나옹화상(懶翁禪師)은 다음 시로 우리에게 더 잘 알려진 공민왕의 왕사(王師)였던 스님이었다.

靑山兮要我以無語(청산혜요아이무어):청산는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蒼空兮要我以無垢(창공혜요아이무구):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聊無愛而無惜兮(료무애이무석혜):사랑도 벗어 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如水如風而終我(여수여풍이종아):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 '안장바위'에서의 조난
  길가 작은 주차장 옆에서 아스팔트 길을 버리고 리본이 매어 있는 좌측 산길 오름길로 들어서 본격적인 등산을 시작한다.  
이런 때 나의 등산은 옷을 하나하나 벗어 던지는 스트립 쇼를 하는 것 같다.
산이 오름 길에다가 우장으로 무장한 산행이라서 전신에 땀이 비오듯이 흐르고 있다.
비가 오지만 가랑비였고 산길 주위의 잡목이 비를 막아주어서 먼저 비옷을 벗었다. 얼마 더 올라서 이번에는 고어텍스를 벗고 반소매로 간다. 더 올라가서는 바지 가랑이를 떼어낼 수 있는 바지라서 반 바지가 되었고, 모자도 너무 더워 벗어 넣었다.
그러니까 시원한 가을 맛을 느낄 수는 있었지만 앞서간 우리 산악회원들과 사이는 점점 더 멀어지기만 하였다.
이렇게 아무도 없는 후미에서 홀로 처음 가는 산의 등산은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것 같다. 엉킨 실 타래를 하나하나 풀어가는 것과도 같다.
그렇게 가다가 갈림길에서 '여긴가 저긴가' 할 때 만나는 앞서 간 분이 놓아둔 '화살표 쪽지'는 등대를 만난 선장 같이 반갑다. 
30여 분 오름길은 완만한 능선길로 바뀌었으나, 능선길에서 그렇게 멋지다는 전망을 연무는 한 번 잠깐 열어주는 듯하더니 온종일 가득한 운무뿐이었다. 그러면서 나는 신선처럼 구름 속을 거닐고 있는 것이로구나 하였다.
지금까지 이정표는 하나도 없는데 대신 등산 길을 따라 하얀 비닐 줄이 로프처럼 좌우로 계속되고 있었다.
바위 능선길이 시작되어 등산의 재미를 더해 주는가 하였는데  커다란 바위가 앞 길을 꽉 막아선다.
지도에 있는 '안장바위'인가 하여 무심히 바위를 넘어가려 하였더니 너무 가파르고 그 앞이 절벽 같았다. 밧줄은 물론 초행 등산자에게 나침반 같았던 리본도 없었다.
지금까지 나의 경험으로는 이렇게 위험한 바윗길에는 어디에나 우회하는 길이 있었다. 조심조심 내려가서 보니 흰 비닐 선이 오른 쪽에서 끊겨 있었다. '그러면 그렇지!' 하고 우회로를 몇 번을 다시 가보아도 길이 아니다. 요번에는 우측 바위를 안고 돌아가려 하였지만 거긴 현기증 나는 층암 절벽이었다.
좌측을 가서 보니 개구멍 같이 뚫린 곳이 있어 사람 하나가 통과할 수 있긴 하다.  나뭇가지가 걸쳐 있어 그리로 내려 가려했더니 뚝 떨어진 낭떠러지인데다가 그 아래로 길도 사람의 발바취 흔적도 안 보인다. 몇 번을 왔다 갔다 하였을까. 핸드폰도 불통지역이었다.
공덕산은 문경시에 있는 소백산맥의 황정산(1,077m), 주흘산(1,106m ) 백화산(1,063m), 조항산(957) 도장산(827m) 같은 명산에 가려 잘 알려진 산이 아니라서 안전 시설에 소홀하였던 것이다.

갈팡질팡 질팡갈팡 기진맥진 맥진기진
아무도 없는 산 중에서 왔다 갔다 갔다 왔다
진퇴가
양난한 길에서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


할 수 없이 다시 처음처럼 바위를 넘기로 하였더니 그 건너에 멋진 말안장 같은 바위가 그 너머에 있다. 그 '안장바위' 너머로 반가운 산길이 보였다.
바위를 넘어섰더니 이 번에는 내려갈 길이 몹시 가팔랐다. 2m정도의 높이에 80도 바위 경사 길인데 한 쪽은 피아노 바위 같이 아래로 길게 홈이 있고 또 한쪽은 그보다는 약간 낮은 바위이지만 잘못하면 절벽 밑으로 추락할 만한 곳이 있다.
이럴 땐 젊어서 바위 타는 법을 익히지 못한 것이 한이 되기도 한다. 그리로 해서 천신만고 끝에 무사히 내려 오고 보니 비로소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큰일 날 뻔하였다.
그 안장바위에는 나옹화상에 얽힌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하여 온다.
  -안장바위 위에 항상 나옹 (懶翁)은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이 오뉴월 땀흘려 일하는 농군의 눈에는 놀고 먹는 것 같아서 몹시 거슬렸다. 그것이 미워서 농군들은 그 바위를 깨뜨려 버렸다. 그러자 그로부터 수년 간 이 마을에는 가뭄과 흉년이 계속됐다. 그 후에야 나옹화상의 비범한 스님임을 안 농부들이 깨뜨린 바위룰 다시 이어 놓았더니 비로소 비가 왔다. 지금도 그 바위에 가면 그때 붙인 그 자국이 남아 그대로 남아 있다 한다.
그런데 큰일 났다. 남보다 항상 늦은 내가 앞선 사람과 거리를 좁힐 수 있는 유일한 길이 그 분들이 점심하는 동안의 30분뿐인데 그걸 바위를 넘다가 다 까먹어 버렸으니 이제 어찌 할 것인가.
고진감래(苦盡甘來)라, 그 후로도 바위 능선길이었지만 그러나 낙락장송이 커다란 바위와 함께 어울린 멋진 평탄한 능선길이었다.
저 앞에 우뚝 서로 마주 보고 있는 두 바위가 보인다. 지도 속에 있던 '부부바위' 같다.
거기서 얼마 더 간 거리에 있는 전망바위를 지나니 3갈래길에 비로소 나타나는 이정표가 있다.
거기가 832m봉으로 '
여우고개 180분, 묘적암(70분)/운필암(45분), 공덕산(30분) → '이란 이정표다.

거기서부터는 계속 내림길이었다.
산에서 애써 올라왔던 길이 정상(頂上)이 멀었는데도 내림길이 될 때는 아깝게 생각되는 법인데 832봉에서부터는 안부까지 질퍽한 미끄러운 진흙 내림길이 너무 길어서 혹시나 내가 길을 잘못 들어 하산길로 들어선 것은 아닌지 걱정이 태산 같았다.
그러더니 이 산에 와서 이정표다운 이정표을 처음 만난다.

*. 공덕산(功德山) 정상의 유감
  20분이면 간다는 정상까지는 내려온 것보다 더 긴 시간을 땀흘려 올라가야 했다. 그러더니 지금까지의 잡목이 벗겨지며 하늘이 열리며 나타난 것은 잡초 우거진 헬기장이었다.
정상에 올라와서는 실망하고 말았다.
천주산(836m)보다 77m나 더 높다는 공덕산(913m)의 정상은 잡목으로 사방의 시야를 가리었고 정상석(頂上石)은 있기는 한데 넓찍한 공터를 두고도 어린 아기 무덤에 선 비석보다 더 초라한 오석도 아닌 자연석이었다. 그것도 시가 아닌 어느 등산회에서 세운 것이었다. 그 옆에 있는 삼각점보다 별로 커 보이지도 않게 보였다.
게다가 정상에는 반드시 있어야 할 이정표도 없었다 . 그 남쪽 나무에 A4 크기로 인쇄된 구간거리 이정표와 사불산[공덕산]의 명칭 유래와 그 전설이 걸려 있을 뿐이다.
어디로 갈까? 망설이고 있는데 반가운 우리 우정사악회의 화살표 쪽지가 남쪽으로 나 있다.
내리막길은 40여분이나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때쯤이면 보여야 할 천주봉의 그 멋진 자체는 보이지가 않는다. '이러다가는 천주산 올라갈 때 또 고생하여야겠구나. 이 오름길은 천주산 정상이겠지- '하는데 전화 벨이 울린다. 우리 고양우정산악회 회장이었다.
"가던 길에서 큰 길을 찾아 대승사 쪽으로 하산하세요."
'무슨 이유에서 천주산으로 가는 코스가 바뀌었는가?' 하고 큰 길 찾아 하산하려고 더 직진하는데 아까 안장바위길보다 더 험한 길 같지도 않은 바위길이 계속된다.
산 아래에서 전기 톱 소리가 산을 울리기게 뒤돌아 보니 지나온 저 산 중턱에 옹기종기 들어선 절이 나뭇가지 사이로 보인다. 대승사와 윤필암 같다.
지도를 펴 보니 공덕산 정상에서는 동쪽으로 가야 천주산인데 나는 남쪽으로 반야봉(720m)을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하, 우리 일행 선두가 길을 잘못들어선 것이로구나.'
  절로 욕이 나온다. 공덕산에 이정표만 세워 두었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터인데. 다시는 올 수 없는 천주산을 이제는 영 못보게 되었구나. 문경시 분들에게 묻고 싶다. '우리는 공덕산과 천주산이 보고 싶어 꼭두새벽에 출발하여 600여리를 달려온 사람인데, 문경시 문화관광과는 무엇하는 곳인가. 문경시에는 산악회가 없는가. 문경시 북촌면에는 마을 자랑 청년회가 없는가?'

*. 유서 깊은 대승사(大乘寺) 이야기
공덕산 정상에는 길이 두 갈래가 있다.
동쪽으로는 천주산 가는 길요, 남쪽으로는 반야봉 가는 길이다. 나는 반야봉(720m) 바로 아래까지 왔던 것이다. 왔던 길을 되돌아 20분 거리에 대승사로 내려가는 방광재가 있었다.   거기서부터는 대승사까지는 편하고 큰 길이지만 먼 길이었다. 

'비도 오는 날이고 해서 공덕산이나 천주산 하나만이라도 자세히 보고 갔으면-' 하던 마음이 있기도 하였다. 그냥 지나치게 되는 대승사를 아쉬워하던 것도 사실이었다. 건너 산에 벌목하는 것을 바라보며 대승사(大乘寺)를 향하고 있다.
 대승사(大乘寺)의 대승(大乘)은 소승불교에 대하여 생긴 말일 텐데 '대승(大乘)'이란 무슨 뜻일까?
대승은 범어로 '마하야나'를 번역한 말이다.'마하'는 크다[大]는 뜻이요, '야나'는 탄[乘]는 말이다. 우리나라 불교는 소승불교인 미얀마, 타이, 스리랑카 등의 남방불교와 달리 대승불교이다. 중생을 제도하여 불타의 경지에 이르게 함을 이상으로 하는 그 교리와 이상과 목적이 모두 크고 깊다 하여 소승불교에 대하여 일컫는 말이다.
예정대로 천주산을 향하였으면 다시는 못보았을 대승사를 길을 잘못 들어서 보게 된 것도 불연(佛緣)인가 하는데 처음보는 대승사 암자가 있다. 그 건물보다 그 마당을 고인 돌들이 더 고색창연하여 막아놓은 줄을 넘어 사진 한 장 찍으러 들어섰다가 내친 김에 절의 구내에 들어섰더니 스님 한 분이 저리로 빨리 나가라고 호통을 친다.
내 차림이 이 절에서 금하는 반소매에 반바지 차림이라서도 그러한가 하였지만 이곳은 외인출입 금지의 스님들만의 참선 선원 구역이었던 것이다.
 곱지 않은 눈총을 등뒤에 맞아가며  수통에 물을 가득 담았다. 언제나 산에 왔다가 하산 길에는 가능한 한 절에 들려 수통에 물을 가득 채워 가지고 가서 마시다가 그 물이 떨어지면 다시 산행을 위해 베낭을 꾸리곤 하는 것이 나의 습관이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시조(時調)을 쓴 일도 있다.

 

 

절마다 물[水]열어
중생(衆生)을 적시는 건
언제나 열려 있는 산사(山寺)의 부름이고,
누구나
청정수(淸淨水) 같은
삼보 귀의(三寶歸依) 원함이니-.

삼십삼천(三十三天) 이십팔수(二十八宿)
화두(話頭)로 두드려도
백팔 염주(百八簾珠) 알알이 돌아가는 세상살이,
부처님
미소로 하여
하나하나 열리니.

*. 대승사(大乘寺)의 보물들
 
 
그 동안 전쟁과 화재 등으로 아무리 1,400 여 년의 세월이 지났다고 해도 유서 깊은 이 대승사에 역사의 흔적이 어찌 없을까. 이런 고찰에서는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대웅전 앞에 있는 그 소개의 입간판들이다.
이 대승사에도 두 개의 보물을 소개하고 있었다.
대승사의 유적으로는 대성사에 있는 '대승사목각탱부와 관계문서'(보물 제575호)와 '대승사마애여래좌상'(도유형문화재 제239호)요, 윤필암에 있는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지감'(도문하재 제 300호)이다.
묘적암 약수터 오른쪽 산기슭에 있는 '나옹화상부도', 윤필암 가는 길에 있는 '우부도', 묘적암 뒤 바위 위에 있는 '오층석탑' 등이 그 유물이요 유적지였다.
이 중 가장 유명한 것이 대승사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는 '목각 탱화'다. '탱화'란 그림으로 그려서 걸어놓은 불상으로 보통의 경우에는 헝겊이나 종이인데 이곳 탱화는 조선 후기에 조성된 나무에 조각한 귀한 목각탱화로 그 크기가 280×256㎝나 된다. 절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 위 사진과 같은데 문외한인 내가 이에 대하여 어찌 중언부언(重言復言)하랴.
원래 이 탱화는 부석사 무량수전에 있던 것인데, 이 대승사가 1862년 화재로 소실되어서 법당을 새로 지을 때 부석사에서 옮겨온 것인데 반환을 요구해 오던 부석사에 거기의 '조사전'을 수리할 때 그 수리비용을 부담하여 주면서 그 소송을 마무리 지었다는 소식이다.
대승사(大乘寺)에는 그밖에도 들러볼 곳이 많다. 차집 뒤의 '대승사사적비'나 더 내려오다가 보게 되는 '대승사 비구니탑'도 그냥 무심히 지나칠 일이 아니다.
그 근처에 아름드리 큰 전나무 두 구르는 이 절로 출가했던 나옹화상이 중국에 다녀와서 기념 식수로 심었다는 것이니 유념할 일이다.
대승사 '一柱門'(일주문)은 '不貳門'(불이문)이라 쓰여 있다.
일주문은 두개의 기둥을 한자의 '一'(일) 자처럼 지은 문으로 이를 경계로 절 밖의 속계(俗界)와 절 안의 진계(眞界)를 구분하려는 뜻으로 서 있는 문이다.
'不貳門'(불이문)이란 불교 진리로 중생과 부처, 선과 악, 공(空)과 색(色) 등이 둘이 아니라 하나 이기 때문이라는 불교 용어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일주문이 남성을, 불이문이 여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남녀가 둘이 아니라 하나다 .'라는 뜻이라고 풀이하는 스님도 있다.
우리 우정 산악회 일행은 사과 과수원을 통하여 한창 내려가서 있는 주전리 마을 개울가에서 등산 뒤풀이로 전을 벌이고 있는 모양이니 절을 둘러 보았다고 큰 험이 되지 않다고 생각하니 여유가 작작하다.
사찰에서도 많은 시간을 보냈기에 급히 내려오다 보니 종각 복원공사로 불사가 한창인데 그 고갯길을 그 짐을 가득 싣고 대형 화물차가 힘들게 거북이 걸음으로 언덕 길을 오르고 있다.
그 모습을 보니 대승사(大乘寺)를 지을 때 도왔다는 소가 이제는 대형 트럭으로 바뀌었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윤필암 가는 도중 숲속에 안치되었다는 '우부도(牛浮屠) 전설'이 생각난다.
  -절을 처음 지를 때에 어디서 왔는지 한 필의 소가 아무리 무거운 짐을 실어 날라도 지치지 않으며 사람이 이끌지 않아도 스스로 오고 가고 했다. 그렇게 힘들여 일하더니 역사(役事)를 마친 후는 스스로 죽어 버리매 사람들이 이상하고 신기하게 여겨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부도를 조성하고 우부도(牛浮屠) 라 일렀다.


오늘은
깊어가는 가을의 하루.
사과와 벼가
무르 익는 계절이었다.
억새와 갈대가
꽃처럼 산과 들을 덮는 계절이었다.
술익는
천고마비(天考馬肥)

문경 산북면 전두리의 가을이 익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