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길따라, 구름따라 160(지리산 남고리봉)

일시: 2013년 6월 21일(금)

코스: 지리산 KT수련원->성삼재->남고리봉

 

성삼재는 지리산 산행의 중요 들머리중 하나이다. 해발 1000고지가 넘는 이곳까지 차로 쉽게 올 수 있기 때문이다. 주말이면 관광버스와 자가용으로 몸살을 앓는 곳이기도 하다. 지리산 운해의 절정을 맛보는 노고단이 가까이 있어 많은 산객들이 찾는 이유도 그중 하나이다.

 

또한 지리산 주능선을 따라 천왕봉 까지 유유자적하며 갈 수 있는 시발점이 바로 이 성삼재이다. 이곳에서 산청의 대원사까지가 지리산 종주코스라고 하니 구미가 당길 만하다. 중간 중간 체력에 맞게 하산하는 코스도 다양하니 함 도전해 보시기 바란다.

 

구례에서 성삼재 까지 가는 군내버스가 약 한 시간 간격으로 있다고 하니 산객들에겐 얼마나 좋은 일인가! 다만 천은사 입구에서 도로를 막고 문화재 관람료를 징수하는 자체가 기분 상하지만....

 

노고단의 명성에 가려 외롭게 서 있는 봉우리가 하나 있는데 그게 바로 남고리봉이다. 고리봉은 두 곳이 있는데 성삼재쪽 남고리봉과 남원 정령치 지나 북고리봉이 있다. 해발고도도 약 1200~1300M로 비슷하다. 이 능선코스는 지리산 주능선에서 비켜나 운봉의 바래봉까지 연결된다.

 

남고리봉 정상에 서니 운무가 낮게 깔려 마치 비행기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처럼 아름답다. 속도 시원시원하다. 정상에서 부는 바람은 여인의 속살같이 부드럽다. 이 맛에 산객들은 꼭 정상을 만나 뵙고자 하는 것 아니겠는가!

 

성삼재 고개에서 함양쪽 도로를 잠시 걷다보면 바로 좌측으로 만복대 코스 이정표가 서 있다. 이곳을 들머리로 잡으면 고리봉으로 바로 갈 수 있다.

 

지리산 소개(민족문화대백과서전)

 

지리산 소개(민족문화 대 백과사전)

 

높이 1,915.4m. 국립공원 제1호.

지리산의 산세는 유순하나 산역(山域)의 둘레가 800여 리에 달한다. 동경 127°27′∼127°49′, 북위 35°13′∼35°27′에 위치한 거대한 이 산은 총면적이 440.4㎢이며, 전라북도에 107.7㎢, 전라남도에 87.9㎢, 경상남도에 244.7㎢ 분포한다.

주능선 방향은 서남서∼동북동으로, 최고봉인 천왕봉(天王峰, 1,915m)을 중심으로 서쪽으로는 칠선봉(七仙峰, 1,576m)·덕평봉(德坪峰, 1,522m)·명선봉(明善峰, 1,586m)·토끼봉(1,534m)·반야봉(般若峰, 1,732m)·노고단(老姑壇, 1,507m) 등이, 동쪽으로는 중봉(1,875m)·하봉(1,781m)·싸리봉(1,640m) 등이 이어진다.

또 주능선과 거의 수직 방향으로 발달한 가지능선은 700∼1,300m의 고도를 나타내며, 종석대(鐘石臺, 1,356m)에서 북으로 고리봉(1,248m)·만복대(萬福臺, 1,433m) 등의 연봉이 나타난다.

이 산에서 발원한 낙동강과 섬진강 지류들의 강력한 침식작용으로 계곡은 깊은 협곡으로 되고 산지 정상부는 둥근 모양을 나타내는 험준한 산세를 나타낸다.

그래서 이들 계곡이 교통로로 이용되고 있으며, 산지의 주변에는 동쪽에 산청, 남쪽에 하동·광양, 서쪽에 구례, 북쪽에 남원·함양 등의 도시와 계곡에 마을이 발달하고 있어 원상(圓狀)을 이룬다.

지리산에는 이칭(異稱)과 별칭(別稱)이 많다. 한자로는 지이산(智異山)이라 쓰지만 읽기는 지리산이라고 한다. 실제로 지리산을 그 음대로 지리산(地理山)이라 쓴 기록도 많다. 원래 ‘智異’는 지리라는 우리말의 음사(音寫)일 뿐이며 지리는 산을 뜻하는 ‘두래’에서 나온 이름이다.

두래는 (달)의 분음(分音)으로서 ‘두리’·‘두류’ 등으로 변음하여 ‘頭流’·‘豆流’·‘頭留’·‘斗星’·‘斗流’ 등으로 한자를 붙여 지명이 된 것이 많다. 이 중 두류(頭流)는 백두산의 맥세(脈勢)가 흘러내려서 이루어진 산이라는 설명도 있다. 이러한 지리산(地理山)·두류산(頭流山) 등이 지리산의 이칭이다.

삼신산(三神山)의 하나로 삼신산은 중국 전설의 발해만(渤海彎) 동쪽에 있다는 봉래산(蓬萊山)·방장산(方丈山)·영주산(瀛州山)으로, 이곳에 신선(神仙)과 불사약(不死藥)과 황금(黃金)·백은(白銀)으로 만든 궁궐이 있다는 ≪사기 史記≫의 기록이 있는데 지리산은 이 중 방장산에 대비가 된다. 그 밖에 봉래가 금강산, 영주가 한라산이다.

여기에 묘향산을 더하여 4대 신산(四大神山)이라 하고, 그에 구월산을 합하여 5대 신산이라 부르기도 한다. 어떤 경우에나 지리산을 신산(神山)으로 꼽는 데는 이론(異論)이 없다.

서산대사 휴정(休靜)은 지리산을 웅장하나 수려함은 떨어진다(壯而不秀)고 표현하였다. 또 ≪팔역지 八域志≫의 저자 이중환(李重煥)은 그의 산수론(山水論)에서 지리산을 조선의 12대 명산 중의 하나로 꼽기도 하였다.

오악(五嶽) 중 남악(南嶽)에 해당되며 12종산(宗山)의 하나이기도 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호남읍지≫, 신경준(申景濬)의 ≪산수고 山水考≫, ≪대동지지 大東地志≫ 등에도 모두 지이산(智異山)이라 표기되어 있다.

특히,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두류산·방장산·지리산(地理山)·남악 등의 이칭이 소개되어 있고, 두류의 류(流)자는 백두산의 맥이 잠시 정류(停留)하였다 하여 류(留)로 씀이 옳다는 제안도 제시되어 있다. 따라서, 두류산(頭留山)이라는 이칭이 하나 더 추가된다.

자연환경

산 일대는 선캄브리아기 중기에 넓은 바다였으며, 여기에 뻘·모래·석회분 등이 퇴적 및 침전되어 셰일·사암·석회암 등의 퇴적암류가 처음으로 형성되었다. 선캄브리아기 중기에서 말기에 이르기까지 세 번 이상의 지각변동과 변성작용이 일어났으며, 이 결과로 이들 퇴적 지층들은 편마암 또는 편암으로 변성되었다.

또한, 선캄브리아기 말기에는 산청·운봉·하동 일대에 어느 정도 규모가 큰 화성활동이 일어나 염기성화성암류(鹽基性火成岩類)가 관입하였다.

고생대 초기부터 중기에 이르기까지 이 일대는 다시 바다로 뒤덮여 투박한 퇴적 지층이 쌓였다. 고생대 말기에는 이 일대가 점점 넓은 호수로 변하기 시작하였고, 식물의 잔해인 석탄층이 셰일·사암 등의 퇴적 지층과 함께 두껍게 쌓이기도 하였다.

이들 고생대 지층은 그 뒤 침식작용과 삭박작용을 받아 대부분 소멸되어 버렸고 호남탄전 지대인 화순탄광(和順炭鑛) 일대에 소규모로 남아 있다. 중생대 초기와 중기에 걸쳐 우리 나라에서는 격렬한 지각운동·화성활동·변성작용이 일어났는데 이를 대보조산운동(大寶造山運動)이라 부르며 이 지역도 예외 없이 이 운동의 영향권 안에 들어갔다.

이 운동의 영향으로 우리 나라의 대부분 지역이 솟아올라 육지로 되었고 지리산 일대도 이때 높은 산지로 변하였다. 대보조산운동 이후 현재까지 약 1억 5000만년 동안 계속하여 침식·풍화·융기작용을 받아 젊은 고생대 지층들은 다 씻겨 없어졌고 나이 많은 선캄브리아기 암층들이 노출되어 있다.

지리산을 형성하는 암석은 대부분이 변성암류로서 편마암과 편암이 나타나며 이 중 편마암이 거의 전부 덮고 있다고 할 정도로 많이 분포되어 있다. 편암은 소규모 렌즈상으로 편마암 중에 포위되어 나타나는데 흑운모편암·석영편암·클로리토이드편암 등으로 분류된다.

그 밖에 변성화성암류가 산청·하동·운봉 일대에 남북 방향으로 넓게 분포되어 있고, 화성암류도 형제봉(1,115m)과 산청 일부에 소규모로 분포되어 있다.

또는 쥐라기의 습곡운동이 있은 뒤 간헐적인 융기작용과 이에 따른 침식 및 삭박에 의하여 고도가 서로 다른 평탄면이 나타난다.

대체로 1,000∼1,100m 고도에서 평정봉(平頂峰)으로 나타나는 고위침식면은 백악기말에 지형면이 형성된 뒤 제3기 중신세(中新世) 이래의 신기구조운동(新期構造運動)으로 현재의 고도에 분포하며, 중신세 후기 이래의 신기삭박면은 산간분지와 고원을 이루고 있다.

특히, 세석평전(細石平田)은 고기삭박면으로 제4기 빙기의 한랭기후에서 주빙하지형형성작용을 받아 비대칭 산릉을 이루며, 유상구조토(瘤狀構造土)가 발달하였다.

이 밖에도 600m 고도에는 중위평탄면이 각 사면을 따라 분포하며, 200m 내외의 저위평탄면은 선상지와 복합된 형태를 띤다.

산의 북부와 동부의 하천은 낙동강의 지류로서 덕천강(德川江)·주천(朱川)·남천(藍川) 등이며, 남부와 서부의 하천은 섬진강의 지류로서 화개천(花開川)·서시천(西施川) 등이다. 이 산지는 대부분이 산악지역으로 농경지는 1.3%에 불과하며 임목 축적량은 12.2㎥/㏊(1978년 현재)이다.

일반적으로 산 일대는 해양성기후와 대륙성기후로 분리시키는 중간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으며 고도에서 오는 산악성 기후가 뚜렷이 나타난다. 남동쪽 지역에는 빈번한 저기압의 통과와 여름철의 고온다습한 남동계절풍이 남동 사면에 부딪쳐 상승됨으로써 발생하는 지형성 강우로 인하여 많은 비가 내린다.

겨울에 산지의 북서쪽은 한랭건조한 북서계절풍의 영향으로 기온이 낮은 데 반하여, 남동쪽은 산지에 의하여 계절풍이 저지되므로 추위에서 보호되고 남해를 흐르는 동한난류의 영향으로 겨울에도 비교적 온화하다.

이 지역의 연강수량은 1,200∼1,600㎜이며, 6∼8월에 50∼60%가 내리고 12∼2월에는 10%도 못 되어 여름철에 강우가 집중한다.

연평균기온은 12∼14℃로서 삼림대로 보아 온대남부형에 속한다. 온량지수(溫量指數)는 105∼115로서 난온대(暖溫帶)에 속하며, 1월 평균기온과 높은 상관관계를 가지는 한랭지수는 -14.5∼-7.8이다. 세석은 평지보다 6∼7℃가 낮아 한랭하며, 600∼700m 고지에서는 첫서리가 10월 1일경에 내리는데 다른 지역보다 13일 내외가 빠른 편이다.

또한 1,500m 고도의 만복대에서는 6월초까지 얼음을 볼 수가 있다. 산지의 영향으로 운천일수(雲天日數)가 130일을 기록하고 있어 연중 흐린 날씨가 많은 편이고, 산곡풍(山谷風) 등 국지풍이 탁월하며 안개가 많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지형이 복잡하고 산정에 걸치는 낮은 구름과 계곡에 자주 끼는 짙은 안개 때문에 일조시간(日照時間)도 짧은 편이다.

한여름 기온의 차는 15∼20℃를 나타내는데 표고가 높아짐에 따라 기온이 낮아져서 7월 중순 산록에서는 36∼37℃인 데 비하여 산정에서는 19∼20℃를 나타낸다.

식생은 137과 536속 1,369종이며, 이 중 희귀 및 멸종 위기 식물은 32과 56종으로 섬말나리·새우난초·약난초·천마·사철란·구름송이풀·솜다리·삼백초·모데미풀·백부자·세뿔투구꽃·지리바꽃·금강제비꽃 등이 있다. 또한, 한국 특산 식물 407종류 중 46종류가 있고 지리산특산식물은 19종류이다.

지리산 특산식물은 갓대·왕개서나무·지리개별꽃·지리바꽃·얼룩함박꽃나무·지리말발도리·히어리·지리터리풀·늦싸리·지리산싸리·지리강활·물들메나무·긴잎물들메나무·긴잎쇠물푸레·정향나무·지리오리방풀·둥근오리방풀·어리병풍·지리고들빼기가 있다.

야생동물은 포유류 16과 46종, 조류 111종, 어류 30종, 양서류 2목 5과 11종, 파충류 2목 5과 16종, 곤충 23목 271과 2,697종으로 되어 있다.

동물 중 희귀 및 멸종 위기 동물로는 포유류가 붉은박쥐·하늘다람쥐·여우·곰·대륙목도리담비·수달·삵·늑대·표범·호랑이·사향노루 등 11종, 조류가 고니·말똥가리·붉은배새매·새매·조롱이·황조롱이·재두루미·검은등뻐꾸기·소쩍새·올빼미·큰소쩍새·청호반새·아물쇠딱따구리·큰오색딱따구리·뿔종다리·돼지빠귀 등 16종, 어류가 꼬치동자개 1종 등이다.

또한 파충류는 자라·구렁이·능구렁이·대륙유혈목이·무자치·실뱀·까치살모사·살모사 8종, 양서류는 도룡뇽·꼬리치레도룡농·물두꺼비·북방산개구리·아므르산개구리 6종, 곤충류는 붉은점모시나무·상제나비·바둑돌부전나비·대왕팔랑나비·유리창나비·비단벌레·반날개하늘소·알락수염산꽃하늘소·범하늘소·알락수염하늘소·우산하늘소·큰풍뎅이·장수풍뎅이·사슴풍뎅이·톱사습벌레 15종이 있다.

역사와 문화유적

구석기·신석기 및 청동기시대의 유물·유적은 아직 발견된 것이 없다. 지금까지의 고고학적 발굴 성과에 의하면 본격적으로 이 지역에 거주하기 시작하였던 인간은 무늬없는 토기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이 산악지대에 거주하였던 것 같지는 않고 대체로 주변의 낮은 구릉에서 원시적인 농경을 행하면서 수렵과 어로 활동도 병행하였을 것이다.

남원시 이백면 초촌리 등지에서는 앞에 짧은 돌출부가 달린 진주식(晉州式) 장방형 석곽고분이 분포하고 있어 가야 지방으로부터의 영향을 말해 주고 있다. 산청에는 원삼국 시대의 유적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뒤 고대국가가 형성되면서부터는 지리산은 산신신앙의 대상으로 부각이 된다. 신라 때에는 삼산오악신(三山五嶽神)을 제사하였다.

삼산은 봉래·방장·영주로 이 중 방장이 지리산에 비견된다. 오악은 동의 토함산, 남의 지리산, 서의 계룡산, 북의 태백산, 중의 부악(父嶽)으로, 나라에서 제사하며 국가와 백성의 행복을 빌었다. 고려시대에도 계속 지리산을 남악으로 삼아 중사(中祀)에 올렸다고 하는데 이때 많은 사찰과 산신당이 세워지게 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지리산은 삼각산(三角山)·송악산(松嶽山)·비백산(鼻白山)과 함께 사악신(四嶽神)으로 정하여져 나라의 제사를 받았다고 한다.

김종직(金宗直)의 <유두류록 遊頭流錄>에는 대표적인 산신 신앙의 예가 수록되어 있다. 그가 마흔 살 되던 해 가을 종도(宗道)와 선공(鮮空)이라는 두 승려의 안내를 받아 지리산 주봉인 천왕봉에 올라 제일 먼저 성모묘(聖母廟)에 제사를 드렸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그가 당시 목격한 이 성모묘의 모습은 당집의 너비가 3칸이고 양쪽 벽에 중을 그린 그림이 걸려 있었으며, 성모상은 석상(石像)으로 분대(粉黛)로 얼굴과 머리, 눈, 눈썹이 칠하여져 있었다.

머리 부분에 칼로 벤듯한 금이 가 있어 그 연고를 물으니 태조가 등극 전에 이 근처 인월(引月)에서 왜구를 칠 때 크게 패한 왜병이 이 성모의 신조(神助)로 태조가 승첩을 거두었다 하여 보복의 뜻으로 두쪽을 내었던 것을 뒤에 모아 맞춘 것이라 하였다.

성모묘의 동쪽, 바위가 오목하게 꺼진 부분에 돌을 쌓고 그곳에 조그만 불상을 하나 세워 놓았는데 국사(國師)라 부른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민족의 성산(聖山)으로서의 지리산의 위치는 연면히 이어져 내려 오늘날까지도 변함이 없다. 영남과 호남의 양 지방에 걸쳐서 그 경계를 이루고 있다는 위치적 특성과 산세가 웅장하면서도 험하지는 않다는 지형적 특징 때문에 역사상 특이한 역할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우선 백제의 망국민 일부가 유입되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고, 섬진강 유로를 따라 연안에서 노략질을 일삼던 왜구가 그 도피처로서 지리산을 취하는 경우가 간혹 있었다는 것이다.

조선 중기 이후 특히, 임진왜란을 겪은 뒤에는 병화(兵火)와 흉년이 없는 피란·보신의 땅을 찾는 정감록신앙(鄭鑑錄信仰)이 지리산을 찾게 된다.

≪정감록≫ 감결(鑑訣)과 ≪삼한산림비기 三韓山林祕記≫·≪도선비결 道詵祕訣≫·≪남사고비결 南師古祕訣≫·≪남격암산수십승보길지지 南格庵山水十勝保吉之地≫·≪이토정가장결 李土亭家藏訣≫·≪서계이선생가장결 西溪李先生家藏訣≫ 등 도참서류(圖讖書類)에는 대부분 피란·보신의 장소로 열 군데(이름하여 十勝地라고 한다.)를 제시하고 있는데 그 중 운봉두류산(雲峰頭流山), 즉 지리산이 반드시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정감록 관념은 한말에 이르러 농민운동에 실패한 동학교인들이 유민이 되어 흘러 들어오고, 이들 일부가 신흥종교를 개창하였다.

오늘날 계곡 도처에 흩어져 있는 사찰과 산신당 이외에 이러한 민족종교의 전통을 이어받은 산간 마을이 일부 흩어져 있는데, 이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갱정유도(更正儒道) 신자들로 구성된 경상남도 하동군 청암면 묵계리 도인촌일 것이다.

그들은 묵계리를 전설상의 청학동(靑鶴洞)이라 일컬으며 댕기머리와 상투와 바지 저고리로 우리의 전통 문화관습을 유지하고 있다. 청학동은 선조 때의 문인 조여적(趙汝籍)의 ≪청학집 靑鶴集≫에 신선에 대한 기록에서 나온 말로, 우리 민족의 이상적인 길지로 구전되어 오던 곳이다.

이런 명산임에도 불구하고 현대사에서는 좌익·우익의 격전으로 뼈아픈 상처를 남기게 된다. 1948년 10월의 여순반란사건에서 패퇴한 좌익 세력의 일부가 지리산으로 입산하였으며, 1950년 6·25 때에도 북한군의 패잔병 일부가 노고단과 반야봉 일대를 거점으로 하여 양민 학살, 촌락 방화, 산림 남벌 등의 깊은 상처를 남기게 되었다.

우리 나라 31본산(本山)의 하나이며 10대 사찰 가운데 첫째인 화엄사(華嚴寺)를 비롯한 10여 개의 사찰과 국보·보물·천연기념물 등의 많은 문화재가 있어 곳곳마다 유적지이다.

주능선을 기준으로 그 남쪽 면을 겉지리(表智異 또는 外智異)라 하고 북 사면을 속지리(裏智異 또는 內智異)라 하는데, 민간신앙과 관계된 유적은 주로 속지리 쪽에, 그리고 불교 신앙 유적은 겉지리 쪽에 분포하는 특성을 보이고 있다.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에 있는 화엄사는 신라 때인 544년(진흥왕 5) 연기(緣起)가 창건하였고, 임진왜란 때 왜병에 의하여 전소된 것을 인조 때 벽암(碧巖)이 재건하였다. 일설에는 화엄종(華嚴宗)을 우리 나라에 처음 들여온 의상(義湘)이 전교하던 곳이라고도 한다.

경내에는 우리 나라 3대 목조건물 중의 으뜸인 화엄사각황전(華嚴寺覺皇殿, 국보 제67호)을 비롯하여 화엄사각황전앞석등(국보 제12호)·화엄사사사자삼층석탑(국보 제35호)·화엄사동오층석탑(보물 제132호)·화엄사서오층석탑(보물 제133호)·화엄사원통전앞사자탑(보물 제300호)·화엄사대웅전(보물 제299호) 등이 있다.

또 입구에는 천연기념물 제38호인 수령 300여 년의 올벚나무[彼岸櫻]가 있는데 인조가 병자호란 이후 무기 재료로 쓰기 위하여 심게 한 것이라 한다.

연곡사(鷰谷寺) 역시 연기에 의하여 화엄사와 같은 해에 창건된 사찰로 구례군 토지면 내동리 피아골 남쪽에 위치하여 있다.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중건하였으나 한국전쟁 당시 완전히 소실되었고, 지금은 일부만이 중건되어 남아 있다.

경내에는 고려 초의 석조 예술을 대표하는 연곡사동부도(국보 제53호)·연곡사북부도(국보 제54호)·연곡사서부도(보물 제154호)·연곡사동부도비(보물 제153호)·연곡사현각선사탑비(鷰谷寺玄覺禪師塔碑, 보물 제152호)·연곡사삼층석탑(보물 제151호) 등이 있다. 천은사(泉隱寺)는 구례군 광의면 방광리 차일봉(遮日峰) 남쪽에 있는 사찰로, 829년(흥덕왕 4) 덕운(德雲)이 창건하였다.

천은사는 본래 감로사(甘露寺) 또는 천언사(天彦寺)라 불리던 것을 임진왜란 때 불탄 이후 1678년(숙종 4)에 다시 세우면서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지방문화재 두 점이 있으며 작설차(雀舌茶)의 산지로 이름이 높다.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에 있는 쌍계사(雙磎寺)는 723년(성덕왕 22)에 삼법이 창건하였다. 처음에는 이름을 옥천사(玉泉寺)라 하다가 정강왕 때 쌍계사라 이름 지어 하사하였다고 한다.

경내에는 최치원(崔致遠)의 친필 비문으로 된 쌍계사진감선사대공탑비(雙磎寺眞鑑禪師大空塔碑, 국보 제47호)·쌍계사부도(보물 제380호) 등이 있다. 쌍계사 북쪽 8㎞, 화개면 범왕리에는 103년(파사왕 24) 가야국의 김수로왕이 일곱 왕자를 위하여 지었다는 칠불암(七佛庵)이 있다.

이 절에는 신라 효공왕 때 운공(雲空)이 만든 아자방(亞字房)이 유명하다. 아(亞)자형의 온돌방으로 한 아궁이에서 불을 때면 방 전체가 데워지도록 되어 있다고 한다.

천왕봉 동쪽 기슭 경상남도 산청군 삼장면 유평리에는 548년 연기가 창건한 대원사(大源寺)가 있다. 현재의 것은 1948년에 소실된 것을 1963년에 재건한 것이다.

법계사(法界寺)도 544년 연기가 창건한 가람으로 천왕봉 남쪽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에 있다. 경내에는 자연석을 기단으로 이용하여 만든 법계사3층석탑(보물 제473호)이 있다.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 지리산 서북쪽 기슭 만수천(萬壽川) 강변에는 828년(흥덕왕 3) 증각(證覺)이 창건하였다는 실상사(實相寺)가 있다.

경내에는 실상사수철화상능가보월탑(實相寺秀澈和尙楞伽寶月塔, 보물 제33호)·실상사수철화상능가보월탑비(보물 제34호)·실상사석등(보물 제35호)·실상사부도(보물 제36호)·실상사삼층석탑(보물 제37호) 등의 문화재가 있고, 인근 산내면 대정리 백장암(百丈庵) 삼층석탑은 국보 제10호로 지정되어 있다. 특히, 실상사에는 풍수사상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이 전하고 있다.

이 밖에도 경상남도 산청군 삼장면의 내원사(內院寺), 산청군 신동면 율현리에 보물 제374호인 대웅전이 있는 율곡사(栗谷寺), 거기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의상이 창건하였다는 정취암(淨趣庵), 산청군 마천면에 보물 제474호인 삼층석탑이 있는 벽송사(碧松寺) 등이 있다.

율곡사 대웅전은 가구수법(架構手法)이 특이하여 못을 전혀 쓰지 않고 조립한 것으로 일명 몽침절이라고도 불린다. 몽침이란 베고 자는 목침의 다른 이름인데, 목공(木工)이 목침을 쌓아 절을 만들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은 것이다.

문화 행사로 지리산약수제(智異山藥水祭)가 있는데 곡우절(穀雨節)을 전후하여 열린다. 이것은 신라 때부터 행하여지던 제천행사의 하나로 지리산신사(智異山神祠)라 하였으며, 고려와 조선 시대에는 남악사(南嶽祠)라 하였다.

현재의 약수제라는 명칭은 곡우 무렵에 거자목(距杍木)에 상처를 내서 나오는 물이 만병통치에 유효하다고 한 데서 유래한다. 이 약수제는 일제 침략과 한국전쟁을 전후로 중단되었다가 1962년부터 노고단을 중심으로 다시 열리면서 지역 주민의 공동체의식의 함양에 기여하고 있다.

문학·예술 속에 나타난 모습

우리 나라의 기본 골격이 백두산으로부터 지리산에 이르는 산맥계가 중추가 된다는 인식에는 예나 지금이나 변화가 없다. 그래서 지리산을 백두산이 흘러내린 산이라 하여 두류산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것은 우리 나라 전래의 지리 사상인 풍수지리설에서도 받아들인 바이거니와, 실학자들에 이르기까지 전혀 이의 없이 전수되어온 땅에 대한 우리 민족의 기초적인 관념인 것이다.

이것을 가장 극명하게 밝힌 이가 신경준이다. 신경준은 그의 <산수고>에서 산의 족보라고 할 수 있는 산맥세의 흐름을 상세하게 파악한 바 있는데, 뒤에 이것을 기초로 ≪산경표 山經表≫가 만들어졌다.

백두산을 시작으로 하여 지리산에서 끝나는 맥세를 백두대간(白頭大幹)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지리산은 민족의 진원지며 영산으로 추앙받는 백두산의 한반도 남부를 대변하는 산으로서의 가치를 가진다.

이것이 풍수사상에서는 민족적인 주체의식을 상징하는 의미를 띠게 되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실상사의 풍수전설이 아니겠는가 생각된다. 백두산의 기맥(氣脈)이 이곳을 지나 일본으로 연결되는데 그 지기(地氣)를 끊어 놓기 위하여 창건한 사찰이 바로 실상사라는 것이다.

예컨대 경내 약사전에 봉안된 4,000근짜리 무쇠로 제작된 약사여래철불은 높이 2.5m로 좌대 없이 땅바닥에 그대로 모셔져 있다. 이 불상은 지리산 주봉인 천왕봉과 일본 후지산(富士山)을 일직선상으로 바라보도록 좌정되어 있는데, 맨 바닥에 철불을 모신 이유가 일본으로 흘러가는 지기를 막자는 데 있다는 것이다.

보광전 범종에 그려진 일본 지도 역시 매일 종을 때릴 때 얻어맞는 위치에 일본이 그려져 있어 위의 이야기와 맥을 같이하고 있다.

이러한 이야기는 지리산 도처에서 들을 수 있는 설화들인데, 남원시 주천면 노치산 갈재의 <숯막이야기>는 고종이 그곳에 숯 수천 가마를 쌓고 불을 놓아 일본으로 가는 지맥을 막았다는 것이다. 임진왜란 때 혹은 동학운동 때 또는 의병항쟁 때 왜군을 피하여 들어간 사람들의 한맺힌 이야기들일 것이라고 여겨진다.

지리산에는 지리천왕(智異天王)과 여신(女神)숭배의 설화들이 있다. 김종직의 <유두류록>에 보면 그는 천왕봉에 발을 딛고 맨 먼저 그 천왕봉에 있는 성모묘에 제를 올리는데, 당집에 들어가 주과(酒果)를 차려놓고 성모상 앞에서 비는 일이 그것이었다.

이 성모상의 기원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전설이 있다. 첫째로 석가모니의 어머니인 마야부인(摩耶夫人)이라는 설이 그 하나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 불교에서 마야부인상을 숭배하는 전통이 없었던 것으로 미루어볼 때 이 설은 후세의 윤색이 아닌가 싶다.

둘째로 고려왕계를 성스러운 혈통으로 인식시키기 위하여 고려 왕실에서 도선선사(道詵禪師)로 하여금 이 성모상을 만들게 하였다는 설이다.

성모에 대하여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 帝王韻紀≫에서는, 지금 지리천왕은 곧 고려 태조의 비 위숙왕후(威肅王后)라 하고 고려 사람들이 선도성모(仙桃聖母)의 이야기(三國遺事 感通 第七, ‘仙桃聖母隨喜佛事’에 자세히 수록되어 있음.)를 듣고 이를 그들 임금의 핏줄로 삼고자 이를 만들어 받든다고 하였다.

셋째로 도선이 지리산에 선암(仙巖)·운암(雲巖) 등 삼암사(三巖寺)를 세우면서 이 절을 세우면 삼한을 통일할 수 있다는 성모의 계시를 받았다고 하였다. 그 뒤 고려를 세워 후삼국을 통일한 뒤 계시를 내린 성모상을 세워 받들었다는 설이다. 넷째로 중국의 여신인 마고(麻姑)가 동쪽으로 와 정착한 것으로 믿고, 그 여신 숭배가 이 성모상을 있게 하였다는 것이다.

전설에 지리산의 산정에 사는 여신의 이름이 마고 또는 마야고(麻耶姑)로 불린다는 점에서 일리가 있다. 그래서 마고성모라는 복합어를 쓰기도 한다. <마고전설>은 지리산의 능선을 형상화하고 있는 면도 있다. 마고는 반야(般若)를 사랑하였다. 어느날 반야는 돌아오겠다고 기약하고 떠났으나 오지를 않는다. 마고는 기다림의 초조로 나무를 할퀸다.

이것이 지리산 주능선 부근의 고사목(枯死木)이다. 그 올로 베를 짜던 자리가 세석평전이라는 것이다. 지금도 천왕봉의 돌무덤 위에 앉아서 서쪽 하늘을 보면 낭군봉인 반야봉이 마치 달려올 듯한 산세로 눈에 담긴다.

산 주변에서 익히 들을 수 있는 설화·전설들 외에도 음악에 있어서 민요가 주변 산촌에서 불려지고 있을 법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지리산을 주대상으로 삼은 것 같지는 않다. 예컨대 아리랑의 경우, <남원아리랑>·<하동아리랑> 등이 있으나 지리산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는 실정이다.

지리산을 소재로 혹은 배경으로 한 문학작품들을 보면 ≪고려사≫ 악지나 ≪증보문헌비고≫에 작자나 연대는 알려지지 않은 <지리산가 智異山歌>라는 백제 때의 가요가 있었다고 되어 있다. 아마도 이것이 지리산에 대한 최초의 문학·예술 작품이 아니었겠는가 여겨진다.

구례의 한 여인이 지리산 밑에 살았는데, 용모가 아름답고 부덕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임금이 그 여자를 데려가고자 하나 죽기를 한하고 듣지 않으면서 이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본격적인 지리산 기록은 역시 기행문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대표적인 조선 시대의 기행문으로는 김종직의 <유두류록>(佔畢齋集 권2), 이륙(李陸)의 <유지리산록 遊智異山錄>(東文選 권21), 남효온(南孝溫)의 <지리산일과 智異山日課>(秋江文集 권6), 김일손(金馹孫)의 <속두류록 續頭流錄>(濯纓集 권5), 조식(曺植)의 <유두류록>(南冥文集 권4), 양대박(梁大樸)의 <두류산기행 頭流山紀行>(淸溪集 坤), 박장원(朴長遠)의 <유두류산기 遊頭流山記>(久堂集 권15), 정협(鄭悏)의 <유두류록 遊頭流錄>(東文選 권21), 송병선(宋秉璿)의 <두류산기 頭流山記>(淵齋文集 권21) 등이 있다.

이 중 김일손의 지리산 기행문 내용에서 몇 가지 표현을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일행은 종자(從者)를 제외하고 정여창(鄭汝昌)·임정숙(林貞淑) 등 세 사람이며, 날짜는 4월 14일이다.

“단성(丹城) 서쪽으로 15리를 지나 또 비탈을 타고 서너마장을 가니 골짜기 입구 바위에 ‘廣濟巖門(광제암문)’이라는 네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자획이 고고(高古)하여 세상에서 최치원(崔致遠)의 수적이라고 전한다.……나무를 휘어 농기구를 만들고 쇠를 달구어 연장을 만드는 것으로 생업을 삼는 마을이 있어 감탄하니, 따라온 중이 일러주기를, 이런 외진 땅에 사는 것은 이정(里正)의 박해가 없고 과중한 부역의 고통을 받지 않은 지 오래이기 때문이라 하였다.……길은 없고 다만 천길 바위 위에서 떨어지는 폭포가 마치 은하수를 거꾸로 쏟는 듯하고, 오가는 나무꾼이 작은 돌멩이를 올려놓아 길을 표시하여 두었는데 나무그늘이 하늘을 가리어 햇볕이 들지 않았다.

시내가 그치고 대숲을 헤쳐 나오니 이윽고 땅은 모두 돌인데, 칡덩굴을 더위잡고 굴면서 숨가쁘게 10여 리를 걸어서 한 높은 고개에 오르니, 철쭉꽃이 활짝 피어 별천지를 이루고 있었다. 우람한 봉우리 세존암(世尊巖)을 만나 마침 사다리가 있어 올라가 바라보니 천왕봉이 10리 정도 되어 보였다.

여기서 5리쯤 가서 법계사(法界寺)에 닿으니 중은 한 사람밖에 없고, 산꽃이 곱게 펴 저문 봄철을 수놓았다. ……저물녘에 봉우리의 절정에 오르니 바위 위에 한 칸의 판옥(板屋) 한 채가 겨우 서 있었다. 그 안에 여자의 석상이 있는데 이른바 천왕(天王)이란다. 지전(紙錢)이 어지러이 들보 위에 걸리었고, ‘김종직·유호인(兪好仁)·조위가 성화 임진(成化壬辰, 1472년)에 함께 오르다’고 쓰여 있었다. 예전에 구경 온 사람들의 성명을 훑어보니 당세의 호걸들이 많았다.”

위의 일부 인용한 글로써 당시 지리산의 모습을 가늠해볼 수 있을 정도로 그 묘사가 섬세하다. 또 알려진 한시로는 김부의(金富儀)의 <등지리산 登智異山>, 김돈중(金敦中)의 <지리산차계부운 智異山次季父韻>, 이색(李穡)의 <두류산>, 이첨(李詹)의 <두류산>, 양성지(梁誠之)의 <지리산>, 최익현(崔益鉉)의 <등두류산 登頭流山>·<천왕봉 天王峯>, 유방선(柳方善)의 <청학동 靑鶴洞> 등이 있다.

현대작품으로는 이병주(李炳注)의 ≪지리산≫, 문순태(文淳太)의 ≪달궁≫과 ≪피아골≫, 서정인(徐廷仁)의 ≪철쭉제≫ 등의 소설이 있는데, 이들은 거의가 이데올로기의 갈등과 좌우 대립에 따른 민족의 뼈아픈 과거를 묘사하고 있다. 이는 지리산이 현대사에서 차지하였던 첨예한 이념 대립의 공간적 현장성의 반영인 것으로 보여진다.

또 산을 둘러싸고 있는 전라북도·전라남도·경상남도의 작가들로부터도 시·소설·수필 등 다양한 소재의 작품들이 발표되었으나, 대부분이 서정성을 짙게 풍기는 것들이다.

이것은 아마도 직접 몸으로 그 뼈저린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 쓰라린 상처를 덮어두고 싶은 무의식의 발로에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혹은 묵중하고 푸근한 지리산의 웅자가 그 섬세한 정기로 모든 인간의 아픔을 감싸안은 것인지도 모른다.

자원과 이용

이 지역에는 고령토·규석·금·은·니켈·수연 등의 광물이 산출된다. 고령토는 산청·하동 일대에 넓게 분포하며 세계적으로 희귀한 암석인 변성아노르소사이트가 오랜 세월을 두고 풍화작용을 받아 생성되어 매우 품위가 높다.

요업의 원료 광물로 귀하게 쓰일 수 있는 양질의 고령토는 매장량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수출 위주로 없애기보다는 주요 전략 지원 광물로 비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남원시 산내면 뱀사골과 그 밖의 여러 지역에서는 반도체 원료로 쓰이는 질 좋은 규석광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편마암류를 관입한 석영맥에서 산출되고 있다. 이 밖에도 니켈과 수연광이 운봉읍에서 발견되고 있으나 경제성은 별로 없는 것으로 보인다.

지리산은 남한의 총 삼림 축적량의 19%를 차지하는 방대한 임산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전나무·잣나무·가문비나무·주목 등의 경제적 가치가 있는 수종은 기존 임목을 보호함과 아울러 파괴된 식생을 완전 식생으로 복구시켜야 할 것이다.

또한 사방조림용 임목도 지리산에서 자생하고 있는 잔디·칡·오리나무 종류를 사용함으로써 생태계를 자연 상태에 가깝도록 유지하는 것이 임산자원을 확보하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지리산은 산형이 다기다양(多奇多樣)하고 고준광대(高峻廣大)하면서 중후인자(重厚仁慈)하여 아버지 같기도 하고 어머니 같기도 한 웅대한 산악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1967년 국립공원 제1호로 지정되었다.

지리산은 천왕봉·반야봉·노고단 등의 3대 주봉과 함께 해발 1,500m 이상의 큰 봉만도 십지(十指)를 보유하고 있고, 피아골·뱀사골·화엄사계곡 등 10㎞ 이상의 계곡이 10여 개나 된다. 또한 불일폭포(佛日瀑布)·구룡폭포(九龍瀑布)·칠선폭포·가내소폭포 등이 명소를 이룬다. 북동쪽으로는 남강(南江)이, 남서쪽으로는 섬진강이 흘러 강과 산의 조화가 절경을 이루고 있다.

지리산은 세석평전을 덮고 있는 철쭉나무 군락, 피아골의 원시림,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노고목(老古木)과 전설처럼 신비한 고사목(枯死木), 그리고 사향노루·산양 등 동물의 안락한 서식지로서의 가치와 함께 의미 깊은 관광자원들이 많은 곳이다.

거기에 웅대한 사찰들과 유서 깊은 암자들, 국보와 보물·사적·천연기념물들이 지리산의 정취를 한결 돋보이게 한다. 세석평전에는 매년 5월에 철쭉제가 열리고, 매년 4월에는 자작나무에서 받은 수액으로 약수제를 지낸다.

지리산10경으로 노고운해(老姑雲海)·피아골단풍·반야낙조(般若落照)·섬진청류(蟾津淸流)·벽소명월(碧沼明月)·불일폭포·세석철쭉·연하선경(烟霞仙景)·천왕일출(天王日出)·칠선계곡을 꼽는다.

웅대하고 수려한 산세로 등산객들이 많이 찾으며 다양한 등산길이 정비되어 있다. 등산로로는 화엄사에서 노고단·임걸령·반야봉·뱀사골산장·연하천·벽소령·덕평봉·세석평전·장터목·천왕봉·법계사 중산리에 이르는 지리산 종주 코스, 백무동에서 한신계곡·하동바위·장터목·천왕봉에 이르는 길, 신흥에서 대성동·세석·천왕봉에 이르는 길, 중산리에서 법계사·천왕봉에 이르는 길 등이 있다.

인근 도시에서 버스편으로 당일에 가볼 수 있는 관광지도 있다. 남원에서 16㎞ 떨어진 호경에서는 구룡폭포를 볼 수 있고, 32㎞ 떨어진 산내에서는 실상사를 볼 수 있다. 이곳에서 4㎞를 더 들어간 경상남도 마천에서는 백무동계곡과 칠선계곡을 구경할 수 있으며 다시 산내에서 8㎞를 더 들어간 반선에는 유명한 뱀사골계곡이 나온다.

화엄사는 구례에서 6㎞인데, 화엄사에서 노고단까지 10㎞밖에 안 되기 때문에 쉽게 노고단에 오를 수 있다. 구례에서 연곡을 지나 연곡천을 끼고 8㎞를 더 오르면 내동에 이르고, 여기서부터 피아골계곡이 시작된다. 진주에서 35㎞ 떨어진 중산에서 천왕봉까지는 12㎞밖에 되지 않아 이 길이 지리산 주봉을 오르는 최단 거리이다.

교통편은 경부선·호남선·전라선이 연결되어 남원·구례·진주까지 쉽게 도달할 수 있어 편리하다. 화엄사의 표고버섯탕과 구례의 은어회가 별미이다.

[참고문헌]

『삼국유사』

『고려사』

『신증동국여지승람』

『증보문헌비고』

『동문선』

『점필재집(?畢齋集)』

『택리지』

『산경표』

『족암문집(族庵文集)』

『대동지지(大東地志)』

『호남읍지(湖南邑誌)』

『한국지지』-총론-(건설부국립지리원, 1980)

『한국지명요람』(건설부국립지리원, 1982)

『한국지지』-지방편 Ⅲ-(건설부국립지리원, 1985)

『지이산지역개발에 관한 조사보고서』(지이산지역개발조사연구위원회, 1963)

『지이산국립공원식물자원조사』(건설부, 1979)

『전라북도종합개발계획』-1982∼1991-(전라북도, 1982)

『지리산국립공웜 자연생태계보전 계획』(국립공원관리공단 지리산관리사무소, 1997)

『지리산국립공원 야생동물생태계 정밀조사』(국립공원관리공단,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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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리봉 들머리(도로우측임) 직진하면 성삼재

노고단도 보이고

성삼재 운무

노고단 방향

성삼재 방향

지리산 주능선

지리산 운무

작은고리봉 정상(일명 남고리봉)

만복대 방향

 

성삼재를 당겨서

성삼재에서 고리봉 방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