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산 산행기/ 진잘래가 필 무렵  

고려산(436.5m) 산행기/ 진달래 꽃 필 무렵
(2005. 4.18/강화 국화저수지 청소년 수련원-부대 앞 헬기장-억세군락-삼거리- 고인돌군-고인돌군-삼거리-낙조봉-미구지고개(산화 휴게소) /산하사랑 따라)
**(가는 길: 강화터미널에서 고려산 가는 길을 물으시라.)**

*. 고려자기가 왜 비취색일까
경기도 지도를 자세히 보면 강화도는 경기도를 똑 닮았다. 경기도는 옛날 강화도에 얽힌 역사의 아픔을 현대에 안고 있다.  
유달리 많은 외침에 시달리던 주무대가 강화도의 역사요, 골육상쟁으로 이마가 잘려나간 아픔의 역사가 경기도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산하사랑' 산악회를 따라 2005년의 진달래꽃을 보러 인천 동암역(銅岩驛)에서 모여  강화도의 고려산을 향하여 가고 있다. 봄에는 진달래로 가을에는 억새 군락 단지로 수도권 경기 일원에서 유명한 산이다.
그보다 더 이 산을 더 유명하게 만든 것이 고려산(高麗山)이란 이름이었다.


 

 

 

 

 

 
국화리 청소년 야영장에서 300m를 오른 지점에 능이 하나 있다.

나는 왕릉치고는 너무 초라한 홍릉(洪陵) 앞에 서서 먼 옛날의 서글픈 역사를 뒤돌아보고 있다. 홍릉(洪陵)이란 고려 23대 고종(高宗)의 능이다.


 고려의 역사 또한 외우내환(內憂外患)으로 얼룩진 수난의 역사였다.
개경(송도, 개성)의 이자겸의 난, 서경의 묘청의 난, 정중부의 난 등은 최충헌의 무인전단정치(武人專斷政治)로 이어졌고, 그 무단 정치는 최충헌에서부터 아들 우, 손자 황, 손자의 아들 의까지 무려 4대 60년 동안이나 이어졌다.  
그뿐인가 그 동안 남으로는 왜구의 침입이 잦았고, 북으로는 거란족의 침입, 몽고족의 침입으로 이어져서 당시 고려 백성들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불행한 시절을 살아야만 하였다.
이렇게 하도 난리가 심해서 백성들은 하늘을 보면서 '이 놈의 세상 언제나 전쟁 없이 살게 되나' 하고 탄식을 하였고, 전쟁이 없는 산속으로나 깊이 들어가 살기를 원하기까지  하였다. 그래서 고려자기 색깔이 파랗고, ‘살어리 살어리랏다. 청산에 살어리랏다.’라고  현실 도피를 노래하는 고려속요 청산별곡(靑山別曲)이  탄생한 것이라고도 한다.
 그 불행한 역사의 한가운데에 고려 23대왕 고종(高宗)이 있었다.
고종(高宗)은 몽고의 침략으로 송도에서 강화도로 천도(遷都)까지 하였고, 몽고에게 사랑하는  태자를 볼모로 보내는 수모까지 겪은 불행한 나라님이었다. 그 강화도에서 한 많은 생을 마감한 고종의 능이 바로 홍릉(洪陵)인 것이다.

*. 지리산 천왕봉보다 더 어렵게 오른 고려산
강화도의 진산(鎭山)인 고려산(高麗山, 436m)은 산세가 사방으로 뻗어나간 웅장한 산이다. 강화 읍지(邑誌)에 의하면 고려 건국까지는 이 산을 오련산(五蓮山)이라 하였는데 발음이 와전(訛傳)되어 고려산이 되었다 한다.
고려산에는 이런 전설도 전한다.

 "중국에 살던 5형제 산이 있었는데 어느 날 심한 폭풍에 밀려 이곳에 떠 내려왔다.
그중 마니(摩尼)는 맏이므로 강화에서 제일 높은 마니산(摩尼山, 468m)이 되었고,  나머지 형제인 혈구산(穴口山, 466m), 진강산(443m), 고려산(高麗山, 436m), 능주산( ? m)들도 각각 강화(江華)의 산이 되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오늘도 산행이 시작하면서부터 맨 꼴찌로 뒤처져서 고려산을 오르고 있다.  

노인의 나라에 사는 사람이라서 행동이 느린데다가 설상가산(雪上加霜)으로 나이답지 않게 어제 저녁에 조심 없이 마구 먹은 음식에 체한 것이다.
밤새 계속 트림이 나더니 설사가 나고 아침에 일어났더니 춥고 온몸이 천근이다.
그래도 약속은 약속이라서, 모이기로한 장소인 동암역(銅岩驛)에 가서 인사만 하고 되돌아오거나, 약을 사먹고 목적지에 가서 일행과 떨어져서 버스나 타고 기다리다 보면 낫겠지-  하고 온 것인데, 반가운 사람들을 만난 것도 그렇지만 처음 오는 산을 두고, 그것도 진달래가 한창이라는 산을 어찌 마다고 할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나를 붙잡는 것은 시도 때도 없이 주책없는 화장실이니 이를 어쩌랴.
그래서 아침도 굶고 지리산 천왕보다 더 어렵게 고려산(高麗山)에 오르고 있다.
산길은 처음에는 계곡길이더니 리본도 없는 가파른 바윗길이 시작된다. 가끔가다가 바위 위에 화살표 표시가 있어 안심하다가 다시 제 길을 가고 있나 하는 걱정하는 그런 길이 계속 되었다. 맨 뒤에 가는 사람이 주의할 일은 자기보다 앞선 사람을 놓쳐서는 안 되는 법인데, 수런수런 하던 인적마저 놓친지 오래다.
그래서 마음에 맞추어 몸을 부리고, 몸에 맞추어 마음을 부리는  그런 단독 산행을 나는 좋아한다. 그러나 그러한 때에도 정상을 향한 욕심으로 항상 바삐 서두르게 되어서 준비해간 먹을거리를 잊고 되가져오는 경우가 일수이었다.

 

 

 

 

 

 

 

 

 

 

 

 

 

 

 

 

 

 

 

 

 

 

 

 

 

 

 

 

 

 

 

몇 차례인가 쉬엄쉬엄 오르다 보니 능선 길이다. 시원한 4월 훈풍이 위로 하듯 땀을 씻어주고,  비로소 보이기 시작하는 전망이 그 동안의 애씀의 보람을 갚아준다.


드디어 정상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정상 촬영금지라는 푯말이 분단의 비극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직진하면 정상이지만 부대가 정상을 차지하고 있어 낙조대 가는 길로 우회한다. 그 정상에 이 산의 옛이름 오련산(五蓮山)이라는  전설과 관계되는 못이 있다는데-.



다시 능선인가 싶더니 올라가보니 싱겁게도 부대 올라가는 아스팔트 차길이었다.  부대 정문 앞은 찻길이 끝나는 지점르로 거기가  헬기장이어서 화장실과 고맙게도 식수를 위한 수도 시설까지 마련해 놓았다. 비로소 진달래 군락 단지가 보이기 시작한다.
우리 일행은 정상주로 우리를 다지고 있었지만 그 좋아하던 술과 식사를 뒤로 하고 서쪽 8부 능선의 20여만 평에서 시작되는  진달래 군락지로 내려간다. 아침을 굶었지만 밥 생각도 별로 없어 점심도 굶기로 하였다.

*. 경기 일원 제일의 진달래와 억세 군락지 고려산

금년 3차 진달래 축제는 꽃피는 시기가 늦어서 오는 4월 23~24일에 거행되는 모양이다. 오늘은 19일, 산의 벚꽃은 한 구루도 피지 않았고 양지 이외에는 진달래도 뾰족한 봉오리뿐이다. 그러나 양지쪽 고려산의 진달래는 훨훨 불타는 신화(神火)로 꽃 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 세계문화 유산 강화고인돌

  고인돌이란 선사시대 돌무덤으로 지석묘(支石墓)라고도 하는 것이다. 추장이나 부족장 같은 한 사람을 묻기도 한다지만 집단 무덤인 경우도 많다.
고인돌에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는데 네 개의 판석 위에 장방형의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큰 돌을 얹는 것을 북방식이라 한다.

우리가 보통으로 알고 있는 고인돌을 말하는 것이다.
  남방식은 한강 이하에 있던 고인돌로 돌방을 지하에 만들어 놓고 그 위에 큰 돌을 얹어 놓은 것이다.
전 세계에 이런 고인돌 수가 약 55,000 가량인데 그 중 우리나라에 그 중 지석묘의 50% 이상인 26,000 여기가  분포되어 있어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유네스코가 2001년 12월2일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 되었다.
이 고인돌에서 나온 유물을 껴묻거리라고 하는데 화살촉, 돌검 돌도끼, 토기류, 옥으로 된 장식이다. 박물관에 가면 유심히 볼 일이다.

 길은 갈대 군락지를  양쪽으로 두고 낙조봉(落照峰)으로 이어지고 있다.
생각해 보니 우리나라에서 무심결에 갈대가 유명하다는 산들을 지나치기는 했지만 그것을 보러 일부러 찾아 나선 경험이 없다. 가을엔 다시 와야겠다, 꼭 여기가 아니라도. 여자의 마음이 같이 바람에 날리며 항상 변하는가도 보러.
낙조봉(落照峰)이 멀리 바라보이는 곳 바위 위에 앉아 지나온 까마득한 고려산 능선을 바라보니 감개가 무량하다. 그동안의 내 산행 역사로 보아서 아무것도 아닌 거리와 높이의 산을 이렇게 고생하다니.
그렇게 펄펄 뛰던 젊음이 가면 환절기를 넘기지 못할 정도로 약해져서 가버리고 마는 것이 인생이라 생각하니 앞으로 사소한 일에도 건강에 유념해야겠다는 생각이 새삼 새로워지는데 누군가가 나의 모습을 찍는 사람이 있다 누구일까.

 

산하사랑 청파 윤도균 원장님이었다.
항상 활동적이고 부지런하며 붙임성 있는 성격으로, 그런 아름다운 성격을 우리를 만드는데 쓰는 사람이다. 우리를 굳게 다지는데 꼭 있어야 할 사람이다. 그의 앞에 서면 누구나 친형제보다 더 정겨운 형제가 된다.
 학위 없는 선비요, 등단하지 않은 작가로서 회갑을 넘기고도 젊은이보다 더 활동적이고 그리고 다정다감한 사람이다. 부디 절장보단(截長補短)으로 그의 아름다운 장점으로 단점을 덮으며 사는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늦복이 있는 사람이 가장 복 있고 행복한 사람이라더니 나에게 그런 기쁨을 하나 더하여 주는 그런 사람이다. 우리는 너무 늦게 만난 것 같다.
일행은 적석사(積石寺)를 들러 저기 저 낙조봉으로 온다고 내려갔고, 나는 만사가 귀찮아서 직접 낙조봉을 가겠다고 하니 갑자기 몰리던 시간에 비로소 여유가 생긴다.

*. 강화 낙조(落照) 조망지
 강화 낙조대에는 적석사 낙조대 이외에도 여럿 곳이 더 있다.
마니산 , 장하리 주변 일대, 석모도 보문사, 석모도 장구너머, 분오리 돈대 등이다.
지금은 늦은 2시경이지만 적석사 낙조대는 가히 환성적인 모양으로 강화인들의 자화자찬(自畵自讚)의 말을 들어보자.

청파 사진 참조
 "낙조대는 해발 343m로 산세가 아름답고 경관이 빼어나 서해 낙조를 관망할 수 있는 명산으로 주변 2,000여 평의 갈대밭과 어우러진 해질녘의 낙조는 대단히 아름다워 강도팔경(江都八景) 중 한 곳으로 점점이 깔린 섬들 사이로 떨어지는 태양은 가히 선경이다."

적석사(積石寺)는 낙조대(落照臺) 바로 아래에 있는 절로 고려산의 옛 이름 오련사(五蓮寺)와 그 유래를 같이 한다.

" 인도에서 오신 천축조사(天竺祖士)가 고려산 산록에 절을 짓고자 했다. 고려산 정상의 오련지(五蓮池)라는 연못에 5색의 연꽃이 피어 있었다. 정상에서  다섯송이의 연꽃을 공중에 날려서 그 꽃잎이 낙하하여 떨어진 자리에 절을 각각 세웠다.
좌 청룡 청련사(靑蓮寺)요,  우 백호 백련사(白蓮寺)라. 북 현무 흑련사黑蓮寺, 남 주작 적련사(赤蓮寺)그 그 가운데가 황룡사(黃蓮寺)였다. "
그러나 지금은 흑련사와 황련사는 폐사(弊寺)가 되고 나머지 절만 남아 있다.


 하산 길은 내가저수지를 바라보며 미꾸지고개라는 산화휴게소로 발길을 재촉하였다. 4월 5월은 밴댕이회가 한철이기 때문이다.
이제 아침보다는 건강도 많이 좋아져서 강화도 인삼막걸리에 밴댕이회 몇 점은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산을 탐내다가 몸에 무리를 한 것 같다. 입술이 부르트고 코와 눈의 눈언저리가 싸운듯이 부풀어 오를 것이다. 그러나, 그러나, 나는 이렇게 산을 욕심내는 나를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