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게 드리웠던 한 해의 그림자는 재야의 종소리를 넘어 태양 빛의 축복이 없는 새 시대의

아침에 사라져 갔다.

세월이 얼마나 빠른지

몇 번의 가슴앓이를 하고 나면 내가 주도하던 삶의 방식에 변화를 수용해야 하는 건 아닐까?

 

 

1월 1일

해가 뜨지 않을 걸 알면서 오르는 새해 벽두의 산행엔 아쉬움이 남겨진다.

아무런 준비 없이 또 새해를 맞았고 일상처럼 그저 새벽에 일어나 아이젠을 챙기고 배낭을

둘러멨다.

새벽 취객들이 웅성이는 해장국 집에서 새로운 해의 새벽공기와 걸쭉한 감자탕 한 그릇을 비웠다.

올해도 여전히 새벽을 사랑할 수 있음 좋겠다.

박정자 인근에 차를 세우고 신발을 갈아 신으려니 아뿔싸 있어야 할 등산화가 온데 간데 없다.

이럴수가

정초부터 군기가 완전 빠져 있으니 새해에 뭐라도 하나 이뤄낼 수 있을지 걱정이다.

족문이 모두 닳아버리고 발바닥 아래가 갈라져 물이 새들어오는 랜드로바에 아이젠을 찬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아직 어둠에서 깨어나지 않은 산길을 오른다.

정상부근에 반짝이는 불 빛의 행렬이 보인다.

시방타임 6시 50분 

아무리 천천히 오른다 해도 혹시라도 창졸 간에 떠 버릴 해돋이를 놓치는 일은 없겠다.

 

아직 녹지 않은 눈이 많이 쌓여 있다.

장군봉에 오르기도 전에 눈이 신발 안으로 밀고 들어와 얼음으로 맺힌다.

이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은 새해 벽두에 내 마음을 산란케 하는 제1호 걱정거리로 등극했다..

 

팔 다치고 근교 산에 칩거하면서 건강한 신체의 축복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산의 무게와 겸허함이란 먼저 배워야 할 것이었다.

떨치고 날 수 없는 부자유는 항상 해갈되지 않는 갈증처럼 내 목을 마르게 하고 풀 죽은   

가슴은 거칠게 울리던 박동의 기억을 잊었다.

산을 멀리하고 나니 답답한 일들이 더 많이 생기는 건지  

다 쏟아버리고 비워낼 수 있는 곳을 잃어버렸으니 애꿎고 해묵은 것들이 날 답답하게 만드는 것인지.

 

해뜨지 않는 장군봉에 다시 섰다.

눈덮힌 산하를 바라 보며 다시 계룡산 신령님께 다시 한 해의 소망을 말한다.

 

새해엔 회사가 번창하여 모든 직원들이 행복하게 하여 주시고 부모형제 가족 모두가 건강하고 하는 일

순조롭게 이루도록 굽어 살피소서.

욕심과 집착을 걷어가 주시고 고요하고 맑은 마음으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날의 기쁨을

오랫동안 누릴 수 있도록 지켜주소서.

새벽에 기꺼이 깨어나 먼 길에 놓여 있는 아름다움을 찾아 가는 의욕과 열정을 더 오래 간직할 수 있게

하여 주시고 그 아름다움에 취하고 감동에 떨리는 가슴을 잃지 않게 하소서

 

세월은 참으로 빠르다.

무수한 시간이 과거의 강으로 흘러 들었고 들쥐처럼 세월은 내 남은 삶의 귀퉁이를 갉아 대고 있다.

그냥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열심히 살아가고 싶다.

그래서 좀더 세월이 흘러도 후회가 남지 않은 그런 삶이었음 좋겠다.

아직 내가 가야 할 무수한 산과 찾아야 할 비경이 남아 있고 여전히 체력과 열정이 남아

있으니 팔만 무리 없이 치유된다면 올해는 또 바쁜 한 해가 되겠다.

 

 

계룡산 종주는 도저히 무리였다.

반들거리는 빙판길 위에서 닳아빠진 랜드로바로는 아이젠 조차 제 기능을 발휘 하기 어렵다.

팔 때문에 오래 고생을 하고 있지만 매년 정초 10년을 하루같이 찾았던 계룡산을 올해도

거르지 않고 눈 밭을 빠대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관음봉에서 동학사 하산 길은 거의 엉금엉금 기다시피 하면서 자꾸만 벗겨지는 아이젠과 팔에 무리가 가는

것을 신경을 쓰느라 잔뜩 긴장해서 힘들고 어렵게 내려섰다.

물 없이 산행한 갈증으로 동학사에서 뱃속까지 얼얼한 얼음물을 하염없이 들이키고 집에서 기다리던 가족

들을 데리고 온천에 가서 한 해의 묵은 때를 죄 벗겨버리고 새날을 맞았다.

 

 

1월 8일

다친 팔 때문에 새봄이 돌아 올 때 까지는 원거리 출정을 자제하려 했는데 답답함에 엉덩이가 달뜨니 잿빛

둥지에 남아 있을 수 없다.

큰 눈이 지나고 난 다음이라 눈 꽃은 사라졌겠지만 적설은 장대하게 바람에 흩날리고 있으리라.

허기사 눈 덮힌 부드러운 능선에 가까운 이동거리를 생각하면 덕유산을 먼 산의 범주에 넣지 않을 수도

있으니 둘러치면 합리화의 명분도 있다.

한동안 잠잠해서 좋았는데 자기 입으로 약속해놓고 슬며시 뒤집어 버리는 철 없는 남편의 행동에 혀를 끌끌

차던 마누라가 한마디 한다.

한동안 조신하게 있나 싶더니 또 병이 도지는구먼 . 이제 팔이 좀 괜찮은 모양이지 ?

충분히 휴식하고 팔이 나아서 날씨가 따뜻해질 때 멀리 출정하면 모든 게 잘 될 텐데 몇 달을 못 참고 또

나갔다가 눈밭에 나둥그러져서 상처가 덧나기라도 하면 어쩔라고 저러는 줄 모르겠네…”

그래도 답답한 걸 어쩌나?

그 버릇 어디 가나 ? 송충이는 솔 잎을 먹고 살아야제.

하여간 마누라가 싼 보온 도시락을 배낭에 넣고 시민회관으로 가서 아침 설렁탕 한 그릇 비우고 승선하다.

어젯밤 잠도 충분히 잔 터라 딸래미가 사서 읽던 한비야 지구밖으로 행군하라책을 챙겨왔는데  몇 페이

지도 넘기지 못해 비몽사몽에 빠져든다. 

 

 

 

오길 잘했다.

도심의 하늘을 멋지게 날리던 흰 눈의 기억이 아직 남아 있지만 거리의 눈은 남김 없이 녹아 내렸는데 여긴

서슬 푸른 겨울이 당당한 모습으로 계곡을 지키고 있다.

나뭇가지의 눈들은 모두 녹아 버렸지만 지난 번 큰 눈을 증거하기라도 하 듯 계곡과 길 옆에는 여전히

소복하게 눈이 쌓여 있고 안성계곡은 눈을 찾아 모처럼 좋은 날의 겨울산행을 즐기려는 산객들로 들떠

있다.

한참을 걷다 보니 올라오는 열기에 계곡의 날씨도 그다지 차갑게 느껴지지 않아 파카도 벗어 던지고 늦가을

등산차림으로 산을 오른다.

요즘 컨디션이 안 좋은 탓인지 기침이 계속 따라 붙는 통에 마스크를 쓰고 한 번 내리면 봄까지 녹지

않는다는 설천의 산길을 오른다.

계룡산과 같은 익숙한 길에서 만나는 단조로움과 느슨한 이완 그리고 조금의 권태스러움이  따라온다

눈이 보고 싶으면 으례껏 훌쩍 떠나던 길이라 겨울 풍광이 낯설지 않다.

 

 

동엽령 능선에 가까이 가면서 멋진 상고대를 만난다.

아래에서 올려다 볼 때 안개가 능선부를 감싸고 있었는데 그 안개와 서리가 얼어 이렇듯 멋진 장관을

연출 했나 보다.

상고대가 만발한 겨울 숲을 지나는 호젓함에 남겨진다.

하늘은 티 없이 푸르고

길 위엔 바람이 눈발을 흩뿌리고 태양은 흩어진 눈발을 반짝거리게 만든다.

새로운 길에 대한 기대와 흥분은 사라졌지만

여유로움과 편안함이 새로운 감회를 남긴다.

 

 

 

 

 

 

 

 

 

 

 

 

 

봄날처럼 따사롭고 능선에 쏟아지는 태양은 눈부시다

푸른 하늘을 이고 무수한 흰 꽃을 피워내는 덕유의 겨울은 여전히 장엄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동엽령에 서서 말없이 어디론가 흘러가는 산릉들을 바라본다.

다시 여기 서서 대자연의 감동을 느끼고 다가오는 새날의 희망과 기쁨을 향해 가슴을 열고 있으니 훌쩍

떠나온 오늘도 괜찮은 날이다.

 

바람의 조화로 길 섶 적설은 위치에 따라 표고가 다르고 목측으로는 그 깊이를 가늠하기 어렵다.

덕유산에서 처음 만나는 엄청난 인파다.

등산 인구가 늘어난 것인지

아님 모두들 햇빛이 따뜻한 날의 덕유의 겨울 풍광을 수소문 하여 길을 낸 것인지

마치 가을 설악처럼 백암봉을 거쳐 중봉 가는 길엔 사람정체로 느린 걸음걸이도 유지하기 어렵다.

 

 

 

 

 

 

 

 

 

 

백암봉을 지나 바위들이 어우러진 절묘한 곳에서 식단을 풀었다.

바람을 막아주는 바위 뒤에 아늑한 그 곳에서는 꿈틀거리며 유장하게 흘러가는 덕유의 주능이 조망되고

연무를 허리에 두르고 하늘 빛으로 조화되는  먼산의 실루엣이 아련하다.

바위에 부딪히는 바람소리를 들으며 1500 고지에서 식사를 한다.

밥은 따뜻하고 국은 아직 뜨겁다.

날이 선 바람의 소리도 부드럽고 능선에 쏟아지는 겨울 햇빛이 한 없이 따뜻하게 느껴지는

멋진 날의 덕유의 겨울산책이다.

 

 

 

 

 

 

 

 

 

 

친구로부터 한라산 겨울산행 사진과 함께 짧은 메일이 왔다.

늦게 배운 도둑질 날 새는 줄 모른다고 뒤늦게 등산에 빠진 친구가  뱅기 타고 한라산 까지 날아 갔으니.

한라의 겨울이 넋이 나갔다고 했다.

그리고 한라산이 있어 우리는 행복하다고 격앙되어.

대자연의 감동은 도처에 널려 있다.

가지려 마음만 먹는다면 우리는 언제나 가슴의 울림과 그 여운을 느끼며 살아 갈 수 있다.

쓸데 없는 걱정을 몰고 다니지 않고 가슴에서 욕심과 집착을 비워낼 수 있다면

우린 세월의 향기와 원숙함을 즐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