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찾은 계룡산

 

   2008년 9월 21일 셋째 일요일, 계룡산 산행을 위해 이것저것 준비를 했다.

   하나, 은근히 마음 한구석에  걱정 하나가 자릴 잡아 개운치가 않았다.

   또 그 날씨 때문일 것이리라. 산행 때마다 날씨가 속을 끓이곤 했기 때문이었다.

   다행이 토요일 예보엔 내일 날씨 쾌청이라 해 안도의 가슴을 쓸어내렸다. 

   1960년대 중반에 여름 방학을 이용해 직장 선배 한  분과 여행 가방 하나씩

  챙겨들고 무작정 남쪽으로 여행을 떠났던 것, 뙤약볕에 구슬땀을 흘리면서

  공주를 거쳐 무작정 갑사로 길머리를 잡았다. 그 때만 해도 꽤나 고즈넉한

  고찰 경내를 둘러보다 법당으로 올라 예불하고 절을 돌아 곧장 동학사로

  넘어가기로 의논하고 산로로 접어들었다. 금잔디 고개를 거쳐 동학사로

  내려오는 길에 구둣발로 산행을 하자니 발이 부르트고 허리가 끊어지는 듯했다,

  저녁 무렵에 동학사에 다다라 아픈 다리로 천근의 무게를 견뎠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이른 시간임에도 몇몇 산우들의 반가운 얼굴들이 먼저 환한

  웃음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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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월이라 중추(中秋)되니  백로 추분  절기로다

      북두성 자(左)루 들아  서천(西天)을 가리키니 

      선선한 조석(朝夕) 기운  추의(秋意)가 완연하다 

      귀뜨라미 맑은 소리  벽간에 들리는구나 

      아침에 안개 끼고   밤이면 이슬 내려 

                                           -농가월령가- 


 

    예년보다 이른 추석으로 한 주 뒤로 미루었던 산행을 오늘 하게 된 것이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라 했던 추석이 지났건만 올해,

   절기론 중추가 분명하고 아침저녁으론 서늘하긴 하지만 낮엔 삼복더위를

   무색케 한다. 마음이 풍성하기론 중추절보다 더한 때가 있을까만, 가을의

   문턱에 들어섰지만 낮으론 삼복더위를 방불케 한다. 수직방향으로 대기가

   이동하는 대류현상이 줄어들면 하늘로 말려 올라가는 먼지의 양이 줄어들고

   비나 습기에 의해 먼지가 씻겨져 내려가 맑아지는 것이 가을 하늘 아니던가.

   쨍그랑 부서질 듯한 가을 하늘은 아니다. 뭉게뭉게 이는 여름 하늘이 아직도

   서성이고 있어 더위가 물러서지 못하나 보다. 농가월령가의 구절이 무색하다. 


 

  우릴 태운 차가 넓은 들을 가로질러 경부고속도를 시원하게 달리는 동안

  차창으로 파노라마처럼 비치는 들이나 나직한 산들에선 가을의 빛이 느껴지진

  않았다. 천안-논산 간에 새로 뚫린 고속도로가 일상에 찌든 우리들의 가슴을

  확 트이게 해 한결 가벼운 산행이 되리라 기대가 된다. 멀리 또 가까이 차창을

  스쳐지나가는 산야의 싱그러움에 젖어 있는 동안 고산의 시조가 뇌리를 울린다. 


 

         잔 들고 혼자 안자 먼 뫼흘 바라보니

         그리던 님이 오다 반가옴이 이러하랴 

         우움도 아녀도 몯내 됴하 하노라. 

                                              <고산유고> 


 

  大野東頭点点山이라 했던 들판 저 멀리, 그림처럼 펼쳐진 먼 산도 좋지만,

  그 푸근한 산속에 들어 물아일체의 경에 노니는 것 또한 산행의 맛이

  아니겠는가. 차가 어느덧 동학사 주차장에 들어섰다. 내리는 대로 앉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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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고 단체 사진 한 장. 천정골 탐방 지원 센터를 들머리로 산행을 시작한게

   10시 반을 넘어선다. 다들 앞세우고 매천과 몇몇 일행이 계곡 산행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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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발 떼지 않아 땀이 흐르기 시작한다. 남매탑을 거쳐 금잔디 고개에서

  A팀과 나누어져 신흥암 쪽으로 우리는 내려가고, A팀은 깎아지른 것 같은

  삼불봉을 지나 자연성릉을 거쳐 관음봉, 문필봉, 연천봉을 오른 다음

  대자암으로 내려와 갑사에서 만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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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길을 지나 그늘 속으로 들어서니 한결 시원했지만, 걸음이 자꾸만

  뒤쳐지기만 한다. 저만치 앞서 가던 산신령이 우릴 기다려준다. 항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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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저 앞서 달아나던 김 종인 고문이 남매탑에서 쉬고 있어, 웬 일이냐

  했더니 “이젠 힘에 부친다” 고 한다. 역시 세월을 이기는 장사는 없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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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틋한 사랑이 불심으로 오뉘가 되어 후세에 많은 불제자를 낳았다는

  청량사지 쌍탑에 서린 전설을 생각하며 5층,7층 석탑을 둘러보니 먼저와서

  여기저기 둘러 앉아 점심들을 하는 걸 보면서 일행이 암자로 내려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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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단을 내려서는데 암자  댓돌 아래서 점심을 마친 산행객들이 있어

  누군가 잽싸게 자릴 잡고 앉으란다. 마침 돌축대 밑에 옹달샘이 있어

  목을 축이기에 십상이었다. 젊은 아낙네 몇 사람이 물을 떠 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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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했더니 이내 비명을 지른다. 물 속에 뭔가 있었던 모양이다. 용봉탕보다

  나으니 마시면 약이 될 거라면서 농을 건너는 사람들을 보면서 금잔디

  고개를 올라 삼불봉을 올려다보니 가파른 봉우릴 오르는 산행객들이

  저 하늘에 닿아 있는 듯했다. 계곡 산행에선 조망할 수 없었던

  스카이라인이 등고선 따라 아득히 펼쳐진다.


 


 

          청산은 나의 뜻이요, 녹수는 님의 정이라.

          녹수가 흘러간들 청산의 뜻이야 변할 것인가? 

          녹수도 청산을 잊지 못해 울면서 흘러가는구나. 

                                                            -황진이- 


 

   계곡의 흐르는 물소릴 들으면서 변치 않는단 그 청산이 바로여기가 아니었을까.

   녹수만이 청산을 못 잊어 하는 걸까. 우리 오늘 여길 지나면, 그 언제 이 산하의

   포근한 품에 다시 안겨볼까. 발걸음이 무거운 건 세월의 무게 때문만은 아닐

   듯하다. 우리들의 산하 그 어딘들 사랑스럽지 않은 곳이 있으랴만, 한 고개

   한 골짝을 건널 때마다 거기 흩어져 썩어가는 나뭇잎들 만큼이라도 뒷사람들에게

   밑거름 노릇을 하고 있을까!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앞사람의 뒷모습을 보면서

   걷는다는 것 자체가 인생 공부란 생각을 한다. 내 뒷 모습은 과연 어떨까.

   늘 궁금하고 불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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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정 칠월 동동 팔월이라 했는데, 지금이 농촌에선 가장 바쁜 철이다.

   부지깽이도 모로 뛰는 철이라, 잠시도 집에 있을 틈이 없는 이 가을에,

   그래도 들판에선 농심은 과연 어떨까. 


 

          백곡(百穀)을 성실(成實)하고 만물을 재촉하니

          들구경 돌아보니  힘들인 일 공생(功生)하니 

          백곡의 이삭 패고   여물 들어 고개 숙어 


 

           참께 들께 거둔 후에   중올여 타작하고 

          담뱃줄 녹두말을   아쉬워 작전(作錢)하랴 

          장구경도 하려니와   흥정할 것 잊지 마소 

          북어 쾌 젓 조기로   추석 명일 쉬어보세 

          신도주 올여 송편   박나물 토란국을

          선산에 제물하고   이웃집 나눠 먹세 


 


 

         참께 들께 거둔 후에   중올여 타작하고

         담뱃줄 녹두말을   아쉬워 작전(作錢)하랴

         장구경도 하려니와   흥정할 것 잊지 마소 

         북어 쾌 젓 조기로   추석 명일 쉬어보세

         신도주 올여 송편   박나물 토란국을

         선산에 제물하고   이웃집 나눠 먹세


 

  그 옛날 넉넉했던 한가위가 오늘에도 우리들 마음에 자리하고 있는지.

  누렇게 물들어가는 알토란같은 결실을 보면서 풍요롭기만 할까.

  하루하루가 굽어진 허리만큼이나 휘어지진 않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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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흥암을 들리지 않고 용문폭포를 거쳐 대성암을 지나니, 어느 듯 백제 때

  고구려의 아도화상이 창건했다는 화엄종 10대 거찰의 하나인 갑사, 도량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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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이 온몸으로 다가선다. 천불전도 둘러보면서 철당간지주도 보면서

   대웅전에 올라 머리 숙여 예불했다. 20여 년 전에 찾았던 고즈넉하기만

   했던 갑사는 아니었다. 어딘지 조금은 낯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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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차장에 도착하니 대부분의 일행들이 먼저 내려와 하산주로 회포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아뿔사, 산행 내내 보이질 않던 성님 모녀가 차에 두고 온 도시락이

 없어져 주변 음식점에서 허기를 떼웠다니 공연히 미안했다. 한사코 마다는

 술 한 잔으로 위로 아닌  너스레를 떨면서, 네 시 반을 지나 귀로에 올랐다.

 매번 무사히 산행을 마칠 때마다 산신령을 잘 모신 덕이라 생각을 한다.

 언제 다시 여기 이 도량,  십승지지로 신도안이 들어설 번했던 이 계룡에 

 올 수 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