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광인(狂人)의 행적을 밟고파 - 계룡산

 

 

따스한 햇볕이 깊은 골물을 깨우고 물은 바윌 비벼대다가 돌멩이들을 보

 

듬고 구르며 이름 모를 새들과 봄을 합창한다. 골짝물길 따라 노래를 들으

 

며 1킬로 남짓 걸으면 동학사에 이르는데 557년 전 갓 스무 살을 넘긴 미

 

청년이 목숨 건 잽싼 걸음으로 이 길을 오른 후 몇 수십 번을 내왕했을까?

 

청년은 전날 밤에 마포나루에 능지처참당한 채 효수 된 시신 여섯 구를 노

 

량진에 가묘하고 곧장 여기로 달려왔었다.

 

역적의 시신을 수습함은 곧 사형인데 간덩이가 커서라기보다는 미쳐야만

 

해낼 수가 있는 광인의 담대한 짓이 아니겠는가.

 

 

 

청년은 2년 후 다시 단종의 위패도 모셔와 사육신과 초혼합제를 올렸으니

 

광적인 절의와 기상이 아니곤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인 것이다.

 

다시 몇 년 후 세조가 속리산에서 온양온천엘 가다 이곳에 들려 초혼각을

 

발견하곤 대노한 게 아니라 계유반정 때 자신이 죽인 사육신을 비롯한 280

 

명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명단을 손수 써서 내리고 초혼제를 지냈으니 그

 

또한 미친 짓이 아니었겠나?

 

죽여 놓고 진혼제를 벌리는 패륜 또한 광인이 아니곤 상상을 절한다.

 

굳건한 왕실 틀을 다잡기 위함이었다지만 미친 세조만이 해 낼 수 있었던

 

감당키 어려운 미친 짓이었던 것이다.

 

 

 

 

미치지 않곤 해낼 수가 없었던(不狂不及) 두 광인(?)의 행적을 밟고 싶어

 

오늘 나는 사슴들의 잔치[鹿鳴 ; 어질고 착한 이들을 불러 벌린 잔치

 

(시경). 호호의 시산제]에 끼어들었다.

 

세조도 초혼제에 몇 번 참례했던지 환궁 길에 원혼들 생각에 마음이 울적

 

하여 아그적대다 멈춰 되돌아보곤 했는데 그곳이 버스정류장 아랫마을이

 

름인 ‘자작마을’이고 거기 큰 바위에서 세조가 멈춰 울먹었데서 지금도

 

‘울바위’라 칭한다.

 

 

 

 

광인 중에 광인인 매월당 김시습을 난 흠모한다. 탄생 여덟달 만에 천자문

 

을 읽어 세종으로부터 비단선물도 챙겼던 천재소년, 그가 벼슬길을

 

팽게치고 정의의 화신으로 산 일생을 요즘 고관자리 탐하는 자들이 귀감

 

삼았으면 싶단 생각을 해본다.

 

그런 위인 두 광인의 족적이 수 없이 찍혔을 길을 밟으며 초혼각(숭모제)에

 

들러 간단히 읍하고 남매탑을 향한다.

 

 

 

남매탑 오르는 1.6키로 길도 여간 빡세서 땀으로 멱 감았다. 더구나 난 코

 

감기가 한참이라 땀 훔치랴 코풀랴 그 때마다 지팡이 챙기랴 사진도 간간

 

이 찍으랴 헐떡대는 숨통 진정시키랴 산행초장에 녹초가 되다시피 했다.

 

남매탑은 휴식처였다.

 

미친넘의 호랑이가 신부에겐 웬수짓을 했을망정 오늘날 산님들껜 빡센 오

 

름길에 맛갈 나는 스토리텔링의 휴식처를 제공했기로 가상한 거다.

 

 

 

명승지를 찾아 유람하다가 이곳에 움막치고 정진하던 상원스님이 이빨에

 

박힌 가시로 사경을 헤매던 호랑이의 입에서 가시를 빼줬다고 미친 호랑인

 

신부를 엎치기 해 스님 앞에 내려놓았겠다. 금욕생활 땡 치라는 건가?

 

아님 처녀 보길 돌같이 하면 처녀는 평생을 살맛도 못보고 처녀귀신이 되

 

란 건가?

 

암튼 둘은 살을 섞던 안 섞었던 간에 성불했단다. 대단한 정진이었던 모

 

양이다. 그 생각으로 땀을 날리고 깔딱 고갤 넘는다.

 

 

 

 

갑사를 외면하고 삼불봉을 올랐다. 시장기를 참으며 삼불봉 아래 바위마실

 

에 들자 손창호님이 반겼다. 얼마나 반가웠던지!

 

홀로산행에 동학사를 에둘렀기에 사슴무리들의 행적이 궁금하고 내가 얼

 

마나 뒤처졌는지 맘 조였던 참이었다. 12시 반이었다.

 

안도감이 초조감 하나를 털어냈다. 식사를 막 끝낸 그가 일어서

 

“두 숙녀분들 보디가드 노릇 해야 해 실례하겠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매주마다 산행풍경들을 담아 카페에 쏟아놔 산님들께 되새김질 시키는

 

쌈박한 멋쟁이 산꾼인 그를 난 일정 부러워한다.

 

관음봉을 향하는 2키로의 바위능선은 계룡의 극치라.

 

바위는 달아나려는 소나무를 붙들어 키우느라 애간장 타는지 딱딱한 몸

 

물 벗듯 바스러진다.

 

자길 키운 바윌 뽀개며 무너뜨리는 유일한 놈은 놈들이라.

 

 

 

 

왼쪽의 켜켜한 골엔 각시를 망부석으로 만든 박재상의 넋과 박혁거세의 혼

 

이, 또 다른 골엔 포은과 야은과 목은의 혼불이 낭창하고, 우측엔 계룡을

 

극찬한 정도전과 그가 인도한 이성계의 넋이 팽배하여 맑고 드높은 기상이

 

계룡 기슭을 만당케 함을 느끼게 한다.

 

관음봉 오르는 철계단에서 조망하는 칼바위자연능선과 연봉들은 계룡의

 

아름다움에 홀딱 미쳐 빠져들게 한다.

 

 

 

 

1919년 독립만세를 부르짖던 이맘 때(3/27) 영국의 지성파 처녀(엘레자베

 

스 키스)가 우리나랄 찾아와서 백성들의 때 묻지 않은 순박한 삶과 개발에

 

서 멀리 빗겨난 자연에 매료돼 미친 나머지 유람을 하며 캔버스에 담아 일

 

본과 서구에서 우리의 풍경그림을 최초 전시한다.

 

그녀는 그렇게 잠시 우리나랄 떠나있으면서 안달이 났다. 혹여 관에서 어

 

떤 프로젝트를 만들어 그 아름다운 자연을 훼손할까 초조하게 맘 조였다고

 

고백했다.

 

 

 

 

백 년 전에 서구여성의 눈에 비친 수려한 강산의 자연사랑을 관음봉에서

 

생각하며 오늘 우리들의 자연사랑에 대해 자문해 봐야할 것이다.

 

특히 지자체 높은 양반들의 무분별한 자연개발 말이다.

 

문필봉을 밟고 연천봉을 향하려는데 한 떼의 사슴무리들이 우왕좌왕하다

 

날머리 신원사쪽으로 죄다 빠졌다.

 

 

 

 

 

나 혼자 2백 미터쯤 지근거리인 연천봉을 오른다.

 

정상에서 맞은편의 천황봉을 디카에 담으려는데 달봉님이 어느새 셔터를

 

눌러댄다. 아까 몇 년 만에 만난 달봉님은 얼마나 반색을 하던지!

 

예의 그의 친밀감은 세월에 곱빼기 되는가싶었다. 그는 오랜만에 만난 나

 

를 혼 빼듯 사진기에 담았다.

 

모델료(?)는 없지만 누가 공짜로 늙은 나를 사진 찍으려 들겠나?

 

달봉님이니까 베푸는 게지.

 

 

 

그다 보니 우린 꼴찌였다. 먼저 하산하라고 종용해도 그는 한사코 나를 챙

 

겼다. 그런 우리가 궁금했던지 저녁노을이 기다리고 있었다.

 

좋은 사람! 은 인연들이라!

 

난 항상 그들의 친절만 왕창 받으며 산행을 즐기고 있으니 미안코 행복하

 

다.

 

신원사로 달리는 계곡물소린 한 옥타브가 쎄다.

 

바윌 건너뛰는 물폭탄에 동면에서 깨지 않은 놈은 이제 없을 테다.

 

“아가/ 아가/ 얼음 밑 개울아/ 버들 눈 떠 봄이란다/ 이제 나 원 없이 떠나

 

련다” 라고

 

‘이른 봄’을 노래한 고은시인이 생각났다.

 

골짝 바위틈에 여린 산자고가 봄 정기를 마시다 포식했던지 시들하다.

 

새도 저장한 것 죄다 털어먹고 예금통장 하나 없어도 즐겁게 노래 부르고

 

있다.

 

물과 돌멩이는 서로를 얼싸 보듬고 비벼 볶아대며 계곡을 청소한다.

 

봄은 그렇게 다가서고 있다.

 

 

 

 

그 봄을 가득 안고 오후 세시를 넘겨 신원사에 사천왕문에 섰다.

 

사슴들은 저만치서 시산제를 치룰 것이다.

 

나는 콧물 번들거리고 쇠목소리 주제여서 ‘녹명’의 자릴 부러 피했는데 귀

 

로에 회장은 버스 속에서 자찬이 한창이라 슬그머니 후회가 돋았다.

 

사슴들은 모두가 풋풋하고 의기투합해 보였다.

 

그들의 건강한 즐산이 기대된다.                                    2013. 03.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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