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산 산행 Photo 에세이
(2009. 11. 25/上加里주차장→남연군묘옆→관음사→옥양봉→석문봉→암봉→가사봉→상가저수지→남연군묘소→주차장/ '우리산내음 산악회' 따라)

*. 가야산 명칭 이야기

  그 동안 별러오던 가야산을 가고 있다.
합천 가야산(伽倻山)이 아니라 충남 예산 가야산(伽倻山)으로 가는 길이다.
가야산이란 이름이 같은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면 그 어원(語源)은 무엇일까.
가야(伽倻)의 어원을 알기 위해서 우선 인도에 있는 불교의 사대 성지(四大聖地)를 살펴보아야겠다.
  불교의 성지 네 곳은 네팔과 인도에 있다.
부처님이 탄생(誕生)하신 네팔에 있는 룸비니(Lumbini) 동산과 인도에 있는 가비라성을 나와 35세에 성도(成道)하신 붓다가야(Buddha Gaya), 다섯 제자에게 불법을 가르치신 곳 사르나트(Sarnath)와 80세에 열반에 드신 곳이라는 쿠시나가라(Kusinagara)다.
그중 부처님이 득도하신 '붓다가야(Buddha Gaya)'에서 '가야산'이란 이름은 유래하였다.
Gaya(가야)란 말의 산스크리트어(Sanskrit. 옛 인도어, 梵語)의 뜻은 힌두교 교도들이 숭상하는 '소'(牛)다.
합천 가야산의 정상을 올라 보면 정상석에 '伽倻山 牛頭峰'(상왕봉)’이라 쓰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상왕봉’이란 또 무슨 의미인가.

  -불교사전에 ‘象頭山’이란 말이 나오는데 이는 가야산(伽倻山)을 뜻하는 말이다. 象迦葉(상가섭)에서의 '象('상)은 석가모니를 뜻하는 말이요 迦葉(가섭)은 부처님 제자의 이름이다.
 가야산의 한 줄기 선상에 있는 ‘상왕산 개심사(象王山開心寺)’의 '象'은 이를 증명하고 있다. 이렇듯 가야산은 불교와 연관된 이름이다.

  가야산은 백제 때에는 중국에서 바다를 건너 불교가 정착한 곳이요, 신라 때에는 매년 신하를 보내 가야산에서 제(祭)를 지냈다는 명산이다.
불교 전성기에는 이 산에 99개의 암자를 거느린 가야사((伽倻寺)가 있었다고 한다.
그 가야산을 벼르다 가고 있는데 호사다마(好事多魔)라더니 오전 중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대로 비가 오고 있어 걱정이다.

*. 가야산 등반길

  가야산 상가주차장에 이르니 비줄기는 약해졌지만 우장을 하고 산행길을 나섰다가 도중에 우장을 다행히 벗을 수 있었다.
가야산 가는 길은 서산 방면의 일락산(日落山, 516m) 등에서도 시작할 수도 있으나 우리는 예산의 상가리(上加里) 주차장에서 ‘上加里주차장→관음사→옥양봉→석문봉→암봉→가사봉→상가저수지→남연군묘소→주차장’의 원점회귀 산행을 한다.
원효봉(605m)을 뺀 것은 남연군 묘소를 들르기 위해서였고 수도권에서 먼 곳에서 온 우리들이라 귀가하는 길에 바다 속에 있는 절 간월암(看月庵)도 보고 싶어서다.
주차장에서 옥양봉(玉洋峰, 621m)을 향하다 길이 두 길로 나오면 비석이 있는 왼쪽 길로 갈 일이다.
가는 길에 ‘←3.0km 가야산,2.5km 원효봉’ 갈림길도 있지만 우리는 옥양봉을 향한다. 거기서 얼마 올라 아스팔트가 끝난 곳이 이 산의 들머리였다.
관음암 갈림길에서 나는 일행과 떨어져서 옥양봉을 향하는데 길은 계속 오름길이다.
사람들은 가야산이 6776.6km로 낮은 산이라 하지만 그렇게 만만히 얕볼 산이 아니었다.
  이 산은 바다 가에 서 있는 산이어서 아까 상가리 주차장이 해발 130m인데다가 여기서부터는 계속 오름길이니 산의 중턱에서 오르는 내륙의 산보다 더 힘들었다.
게다가 일행보다 넉넉한 시간에 오르려고 우회하는 관음암 길을 생략하였는데 벌써 떠드는 소리가 내 머리 위에서 들리고 있다.
관음암은 내가 오르는 길에서 50m 아래에 있었던 것이다.
들어보니 관음암은 개인이 경영하는 암자라 하니 그걸 지나친 것이 서운하지만은 않았다.


거기서부터는 더 힘든 오름길이 계속되었지만 굽어보는 산하의 경치는 운무에 싸인 내 눈을 놀라게 하였다.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운해가 우리를 반기고 있는 것이다.
밧줄 지대가 나타난다.
산행을 할 때 제일 기다려지는 것이 능선길인데 이 산은 옥양봉을 올라서야 능선 길을 내주었지만 그렇게 힘들게 오른 보람 없이 옥양봉이란 푯말하나 볼 수 없었다.
옥양봉에서 우측으로 가면 수정봉(456m)이 있고 거기서 더 내려가면 '백제의 미소'로 명명하는 용현마애삼존불상(국보 제84호)이 있는 곳이지만 다음으로 기약하고 석문봉을 향한다.
전망바위에 서니 아직도 가야산 운해는 계속되고 있었다. 그 운해 속에 잠긴 마을이 인간이 그리던 천국 같이 아름답다.


*. 석문봉(石門峰, 653m)에서

지금까지 내가 오른 가야산은 육산이었는데 능선부터는 암릉이 계속된다.
암릉 길로 넘어야 할 봉도 560봉에 이어 험산 602봉으로 이어지며 갈수록 태산이더니 드디어 약 2km의 석문봉(石門峰, 653m)에 이르렀다.
가야산 등정은 가야산의 최고봉이라는 정상인 가사봉(177.6m)이 TV중계소로 출입금지 지역이 되어서 이 그 정상을 대신하고 있는 것이 석문봉이서인지 정상에는 태극기도 휘날리고 있고, 정상석도 그리고 해미산악회에서 세운 백두대간 기념 돌탑도 요란하다.
거기서부터의 가야산 정상을 가는 길은 오밀조밀 아슬아슬한 암릉길 등산인데 그중 609m 암봉이 제일 가파른 것이 가사봉 가는 길이 수도하러 입산하는 고행길 같았다.
그 암봉을 넘어 바라보는 석문봉과 옥양문은 애써 지나온 길이라서인가 아름다웠다.
그러다 보니 시흥이 절로 인다.


산을 바라 우러르다 산길에 오르면
고운 님 발자국이 열어주는 산길.
정상이
언제나 앞에 있어
후회 없는 고행의 길.

능선에 올라 굽어보는 세상처럼
능선 길에서 돌아보는 산길처럼
돌아본
                                                              내 인생길도
                                                           후회 없는 아름다움이었으면-.
                                                                                        -산에는 왜 가나


*. 남연군묘 하산길
 
  가야산 정상인 가사봉도 한자로 스님의 옷 ‘袈裟’(가사)로 불교를 뜻하는 말 같다.
정상은 TV중계탑으로 출입금지 지역이라서 이젠 예정대로 좌측 남연군묘 쪽으로 하산하여야 한다. 그러나 우측에 우뚝 선 원효봉(元曉峰, 605m)이 자꾸 눈에 밟힌다.
그 원효봉 쪽으로는 차도(車道)가 있을 정도로 하산 길도 편하다는데 남연군묘 쪽 하산 길은 1km도 안 되는 길이었지만 아침에 비가 온 뒤끝이라 미끄러운 길에다가 너무 가팔라서 나 같이 고희(古稀)를 넘긴 사람에게는 생명을 건 모험의 길 같기도 하였다.
그러다 보니 나의 하산 길은 더욱 더 늦어져서 우리 산내음의 최 회장, 청파 님의 눈물겨운 고마운 동행이 있었다.

 


어려운 하산길이 상가 저수지에 이르렀을 때는 벌써 우리 일행이 저 멀리 남연군 묘소를 오르고 있었다.

  -남연군묘는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 이구(李球)의 무덤이다. 높은 언덕에 반구형(半球形)의 봉분이 크게 자리 잡고 있으며 앞으로 석물과 비석이 서 있다.
원래 경기도 연천 남송정(南松亭)에 있던 무덤을 ‘2대에 걸쳐서 왕이 나올 자리’라는 당대의 유명한 풍수지리의 대가 정만인(鄭萬仁)의 예언에 따라 옮긴 것이다.
고종이 왕위에 등극한 뒤 그 보은(報恩)의 뜻으로 그 부근에 지금은 비구니 도량이 된 보덕사(報德寺)를 지어 주고 당시 무덤에 있었던 탑을 옮겨 세웠다.
그 묘 아래 큰 건물이 하나가 있는데 그것이 상여유물보관소였다.
대원군이 아버지의 상여를 연천서 이 고장까지 500리 길을 운반하는데 광천리 마을 사람들이 지극 정성으로 모셔서 대원군이 고마운 뜻으로 광천리 마을에 주었다는 상여다.
이 묘는 구한 말 천주교 박해 사건으로 이어지게도 하였다.
1866년 프랑스인들이 대원군 아버지의 시신을 담보로 조선과 협상을 꾀하고자 묘를 파 시신을 가져가려 하였다. 그러나 도굴을 방지하기 위한 시설로 주물로 지어붓고 양회를 발라 견고히 준비된 묘라서 도굴을 시도하던 독일의 오페르(Oper) 일당은 실패하고 그냥 돌아갔다.
이를 계기도 천주교 대탄압과 학살로 이어지고 쇄국정책을 더욱 굳건히 하는 바람에, 한창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나라를 강하게 만들어야 할 시기를 놓펴 버리는 바람에 일제 36년의 비극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예산에도 예산 8경이 있다.
수덕사, 가야산, 충의사(윤봉길 사당), 삽교평야, 추사 김정희 고택, 예당저수지, 임존성, 예산사과가 그것이다.
그중에 하나인 가야산을 우리는 답사한 것이다.
예산(禮山)이란 예절 '예(禮)' 뫼 '山(산)'이다.
예산의 진산(鎭山)이라는 가야산에 올랐는데, 그 캐릭터가 예산 8경의 하나인 예산의 특산물 사과다. 
"禮를 지킬 줄 아는 아이" 라는 뜻이다.
그래서였을까. 충남을 사시는 고운 분들이(예산산악회 송영택 회장, 이상일님) 고장의 막걸리에 돼지 머리고기로 예로써 우리를 대접하여 우리를 행복하게 하여 주었다.


  갔던 길에 천일만에 있는 바다 속의 섬이라는 간월암(看月庵)을 보기로 했더니 간월암은 그 경치에다가 서해의 낙조를 선물하고 있었다.


  - 간월암은 피안도(彼岸島) 피안사(彼岸寺)라 불린다. 하루 두 번씩 밀물 때는 섬이 됐다가 썰물 때는 자갈길로 육지와 연결된다는 섬이다. 그래서 물에 떠 있는 연꽃 같다 하여 연화대(蓮花臺)라고도 하였다. 고려 무학대사가 달을 보며 이곳에서 수도하다가 도를 깨우쳤다하여 간월암(看月庵)이라 한 것이다. 그 모습이 구름 속에 떠 있는 연꽃과도 같고 석양 노을 속에 피어난 연꽃간월도 간월암이라 하였다..
그후 후락한 이 암자를 만공대사가 1941년에 새로 절을 짓고 조국해방을 위한 천일기도를 드리고 곧 광복을 맞이하였다는 영험안 암자가 간월암(看月庵)이다.

   

  그 천수만의 횟집에서 우리는 오늘을 축하하며 하루를 닫는다.
비록 바지락 칼국수로 저녁을 대신하지만 우리들의 오늘은 가장 위대하고 아름다운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