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 국망봉에서 바라본 가섭산

충북 음성군 음성읍 용산리

특징/볼거리
가섭산(해발710m)은 음성군과 충주시 신니면을 경계로 짓고 북면과 남동을 축으로 좌우로 넓게 발달한 산세를 보이고 있다. 서쪽으로는 음성읍 용산리와 용산 저수지를 거쳐 숯고개에 이르러 부용산과 접하고 있고 동쪽으로는 충주시 신니면 송암리의 저수지를 비롯하여 용원리, 마수리 및 화안리의 농경지역에 연결되면서 완만한 구릉을 형성하고 있다.




산 정상에는 봉화대 설치되어 있어 충주 마산의 봉수와 통하고 북으로는 삼성면 마이산 봉수와 통하였다고 하나 지금은 통신시설이 설치되어 보이지 않는 무선통신시설들이 봉화대를 대신하고 있다.




가섭산을 오르다 보면 산마루터에 있는 가섭사라는 절이 있는데 이절은 고려 공민왕때 창건된 절로 상당히 오래된 사찰로 추정되며 사찰을 구경한후 가섭사 돌사이에서 솟아나오는 차고 감미로운 물이 있는데 물맛이 너무좋아 감로정이라고 한다.

산행은 음성군청에서 1km정도 북쪽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 걷다보면 가섭사 입구표지판이 나오는데 이곳에서부터 산행이 시작된다. 마을길을 걸어 가섭사를 거쳐 정상에 오르면 되지만, 정상부는 중계탑으로 가득하기 때문에 쉬기에 부적합하다.

이 코스에 비해 봉화골산림욕장이 자리잡은 봉화골계곡으로의 산행은 가섭사코스에 비해 매우 깨끗하고 쉬기에 적절하다. 삼림욕장에서의 휴식과 산행을 함께 즐길수 있으며, 삼림욕장을 기점으로 좌측 보현봉에 올랐다가 우측 수리봉을 거쳐 능선이나 길마재로 내려서면 된다. 이 코스는 비교적 완만한 소나무 능선길이고 위험한 구간이 없어서 가족 산행지로 적격이다.

산정에는 옛날 봉화대가 설치되어 동으로는 충주 마산(馬山) 봉수와 통하고, 북으로는 삼성면 망이산(望夷山) 혹은 마이산(馬耳山) 봉수와 통하였으나 현재는 이 지점에 통신 중계소가 있다. 또 산정에는 석정(石井)이 있는데 수질이 좋아 감미로운 약수라 한다.
(한국의 산하 발췌)
12월 13일 일요일 동서울에서 6시반 음성행버슬 타고
가섭산을 구경하러 간다(8000냥)
처음가보는 음성에 내리니 8시
식당에서 백반으로 요길하고택시를 타고
봉학골 입구에 내리니 8시반이다 (6100냥)

잘 정비된 골자기를 따라 올라간다


삼거리에서 우회전 능선에 올라서고 소나무숲길을 올라서니

수리봉이다

수리봉에서 바라본 가섭산정상

길마재로 내려서며 바라본 가섭산

길마재의 이정표

올라서서 통신시설에 접근하고 뒤돌아본다
뒤에 봉우리가 두호1봉같고

앞에 보용산이 구름위로 솟아 있다

멀리 좌 국망봉 우 보련산
요정도라도 보이니 다행이다




아래로 들리는 확성기의 염불소리를 따라서
공구리길로 내려서 가섭사를 찾아간다
대웅전

1000년사찰이라는 고찰 답게  느티나무 고목이 서있다

감로수 한잔 들이키고  다시올라간다
엠비시 통신시설 입구에서 좌로 계단 을 올라가니


2등 삼각점과

봉수대와  

안내판이 서있다
음성 망이산봉수대로 해서 용인 광주봉수대로 해서리
목멱산(서울 남산)봉수대로 연결 댄다는 표다

다시내려가 엠비시 통신시설 우측으로 돌으니 잠시가서 끝이 나온다(11시)
구름의 봉우리가 몇개 솟았다
좌 국망산 보련산 우측 이 원주 십자봉 일대 산 군같고
날시가 좋으면  소백산 월악산 속리산의 백두대간도 보일탠데
오늘은 꽝이다

땡겨본 국망산

내려간다 소나무 길로 내려서니 채석장이보이고

군사시설입석을 지나


요즘보기힘든 고무줄을 잡고 가파르게 내려선다

한참을 내려서니 부대철조망과 망루에서 보초를 서고 있다
미타사 얼루가냐니 모른됀다
뒤돌아본 가섭산과 내려온 길

길도 흐미해지고 뭉실해진 길을 오르니 바위가 나온다
배가벌싸  고프다 뭐 한거 있다고
도시락면으로 요길 하고

둔덕봉에 오르니 리본이 우측능선으로 내려간다
쫓아가니 저아래 거대 불상이 보인다
게속가면 너무 내려가는거 같아 뒤로돌아서  
둔덕봉사면에서 대충 잡목을 뚫고 미타사로 내려선다
깔끔한 비구니절 미타사를 돌아본다
탑은 다보탑 비스므리 하고
식당을 기웃거리나  조용하다

내려가면서 구경 한다
마애불

동양최대라는 지장보살불상
무쟈게 크다  한 사오십메다는 돼겠다
법주사 불상보다 더크다한다






내려가니 납골당이다  
깨끗하고 깔끔한거이 보기 좋다

남향 양지바른곳 햋빛이 따스하고

종류가 여러가지인거이  가격이 다른거 같다


저 공터가 다 차면 장관이겠구나

입구로 내려오니 1시40분이다
마침 충주에서 오신분의 차를 얻어타니 고맙게도 음성 까지 태워주신다
음성으로 돌아와  짜장면으로 요길하고
터미널에서 바라본 가섭산

2시20분 장호원행 버슬 탄다(3000냥)
[당신이 안 가봤을 경기도 좋은 산 60] 58 백족산
봄이면 복숭아꽃 만개… 가벼운 산행에 적당
이천의 동쪽 끝에 자리한 백족산은
우리 전설에 자주 등장하는 100개의 발을 가진 지네가 살았다는 산이다.
정상 남쪽에 있는 굴바위가 바로 지네굴이라 한다.
가벼운 산행을 즐길 수 있는 산으로
봄이면 꽃이 만개한 복숭아나무가 아름다우며(장호원은 복숭아 주생산지로 장호원 황도는 전국 으뜸이다),
굴바위 쪽은 바위도 꽤 있어 어렵지 않은 암반 등산도 가능하다.
전체가 이어지지는 않지만 산을 둘러싸고 임도가 조성되어 있고 등산로와 연결되므로 편리하다.

진암리 쪽 산행이 시작되는 무량사(031-641-4026)는 오래된 절은 아니지만
깨끗하고 아름다운 사찰이며,
어석2리 마을회관 뒤편에선 높이 5m에 달하는 석불입상(도 유형문화재 제107호, 고려 초기)이 자애로운 모습으로 반긴다.
남이 장군의 탄생과 관련된 설화를 가진 산이기도 하다.

장호원에 내리니 3시10분
물한통사고 택시타고 백족산 무량사에 내리니 3시30분이다 (3100냥)
작지만 오밀조밀한데 태고종이라 분위기가 좀 다른것 같다




한바퀴돌고 오른쪽으로 백족산을 올라간다
동네 뒷산답게 길은 반들반들하다
기암



주능에 올라 좌회전 잠시오르니 정상헬기장이다
한 30여분 걸렸나

4등삼각점

백족산 청미봉


내려다본 장호원
지네굴을 찾느라고 왔다갔다 헤매다
올라오신 어르신한테 물어서 간다

좌석양의 좌 오갑산     우 원통산

헬기장을 지나니 굴바위우측이라는 안내판이서 있고
우측으로 내려가 지네굴을 구경한다

지네와 남이 장군의 전설(1)

   옛날 백족산 밑에 자리잡은 마을에서는 일년에 한번씩 일정한 날을 택하여 굴바위 앞에 재물을 차려놓고
제사를 올리는 풍습이 있었다.  제사도 그냥 제사가 아니라 아릿다운 처녀 하나를 골라 산채로 제물로 바치는 인신공양(人身供養)의 끔찍한 풍습이었다.

   제사를 지낼 때는 마을의 대표자격인 장로(長老)들이 모여, 제물로 간택된 처녀와, 죽을 쑤어 담은 커다란
항아리와 과일 등을 차려 놓고 제사를 지낸 후,  겁에 질려 울부짖는 처녀를 그냥 남겨둔 채 산을 내려오는
것이다.  이튿날,  사람들이 가보면 처녀는 영락없이 빈 껍데기만 남은 시체가 되어 굴바위 앞에 쓰러져 있곤
했다. 해마다 제사일이 가까워 오면 마을의 과년한 처녀들이나 그 부모들이 마음을 졸여야 했다.  
그러나, 마을사람들은 만약 제사를 거른다면 산신의 노여움을 사서 큰 재앙이 내린다고 믿었기 때문에, 해가
거듭될수록 꽃다운 처녀들의 희생만 늘어가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해 음죽현(陰竹縣)에 새 원님이 부임하여 왔다.
이 원님은 학식과 덕망을 겸비했을 뿐만 아니라 담력이 있고 무예에도 뛰어난 인물이었다.
하루는 원님이 마을을 순행하던 길에 통곡소리가 낭자한 집이 있어 그 까닭을 묻게 되었다. 그랬더니, 마을의
장로 한 사람이 나서서 말하기를, “우리 동네에서는 일년에 한번씩 처녀를 제물로 하여 제사를 지내는데,
이번에 저 집 처녀가 제물로 뽑혔기 때문에 그 처녀 가족들이 슬퍼서 저러는 것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노인들에게서 일의 자초지종을 들은 원님은  여기에서 필시 어떤 곡절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산 사람을 제물로 바치다니 참으로 해괴한 일도 다 있구나” 하고 중얼거린 원님이 드디어 영을 내렸다.

“여봐라,  멀쩡한 산 처녀를 제물로 한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니,  저 집처녀를 그냥 집에 있도록
하여라.”

   원님의 영이 떨어지자 마을 사람들의 얼굴은 모두 사색이 되고 말았다.  
장로 한 사람이 머리를 조아리면서, “안됩니다.  사또,  지금까지 제물을 한번도 거른 일이 없는데,  이번에
그 일을 중단하면 우리 마을에는 큰 재앙이 내릴 것입니다.”  하고 말하자,  마을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장로의 말이 옳다고  했다.
“그건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제물로는 내가 대신 갈 것이다.”
원님의 대답에 이번에는 그를 수행하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고 말았다.  모든 사람들이 나서서 만류했으나
원님은 입을 굳게 다물고는 머리를 흔들었다.
드디어 제삿날이 되자 원님은 새색씨의 옷으로 변장을 하고 마을 사람들에게 에워싸여 굴바위로 올라갔다.
제사가 끝나자 사람들은 원님을 장례를 치르게 되었노라고 수군 대는 것이었다.
한편 굴바위 앞에 혼자 남은 원님은 몸을 웅크리고 숨을 죽인 채로 무엇인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까,  별안간 “쏴아” 하는 바람소리가 들리더니 굴바위 안으로부터 뽀얀 안개 같은
연기가 흘러나와 주변을 감싸는 것이었다.  
순간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찌르며 거대한 뱀과 같은 시커먼 괴물이 안개 속에서 나타나더니, 제물로 차린
커다란 죽항아리를 순식간에 비우고 이번에는 처녀로 변장한 원님을 향해 덮쳐 들었다.
원님은 옷자락 속에 숨겨 두었던 장검을 뽑아 덮쳐오는 괴물을 향해 힘껏 내리쳤다.  칼을 정통으로 맞은
괴물이 비명을 지르며 무섭게 날뛰기 시작하자 원님은 계속 칼을 휘둘렀다.

   이윽고,  주변을 감쌌던 안개가 서서히 걷히고 나자 그 자리에는 거대한 지네 한 마리가 몸이 몇 개의
토막으로 잘려진 채 죽어 있었다.  결국 해마다 마을처녀 한 명씩을 잡아먹은 괴물은 천년 묵은 지네였던 것
이다.

그러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죽은 지네의 몸뚱이에서 새파란 기운이 뻗쳐 나오더니 곧장 청미천
건너에 있는 개미실(지금의 忠北 陰城郡 甘谷面 嶺山里)로 날아 가서는 마을에 있는 한 농가로 들어가는 것
이었다.  그 집이 남(南)씨댁이었는데 남씨댁의 부인이 그 달부터 태기가 있더니 열 달 후에 귀여운 사내
아이를 낳았다.
아이는 자라면서 남달리 영민하고 비범한 자질을 나타냈다. 하루는 선비차림의 길손이 이 마을을 지나가다가
남씨 아이가 노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더니,  아이를 앞세우고 부모를 만나 자신이 아이를 가르치겠노라고
자청했다.  아이의 부모도 쾌히 승낙하여 아이를 집으로 데리고 돌아온 선비는,  그날부터 아이에게 글공부와
무예를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하나를 가르치면 둘을 깨우칠 만큼 자질이 뛰어났다.
아이가 선비에게 글공부를 배우기 시작한 지도 수년이 지난 어느 날 밤의 일이다. 선비가 자는 사랑방 앞에
작은 그림자 하나가 나타났다.  손에 비수를 든 작은 그림자는 깊이 잠든 선비에게로 조심스럽게 다가가더니
선비의 가슴을 사정없이 찌르는 것이 아닌가?.  이때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병풍 뒤로부터 깊이 잠든
줄 알았던 선비가 나타났다.  그리고, 놀랍게 선비를 죽이려 한 괴한은 선비가 가르치던 아이였던 것이다.
선비는 아이를 처음 본 순간, 아이가 비범한 상을 타고 났으면서도 그 미간에 깊은 살기를 지니고 있어 이런
일이 있을 줄을 미리 알았다.  그래서 자신의 이부자리 속에 짚으로 만든 인형을 넣어 잠든 것처럼 가장하고는
아이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던 것이다.

   “너는 천년 묵은 지네의 정을 타고났기 때문에 지네의 원한이 깃든 살기를 너도 모르게 지니게 된 것이다.
이것으로 지네의 살기도 없어졌으니,  앞으로는 더욱 열심히 공부하여 나라를 위해 큰인물이 되도록 하여라.”
선비의 말에 아이는 깊이 머리를 숙였다.  이 소년이 자라서 나중에 27세의 젊은 나이로 병조판서에 올라
이름을 떨친,  유명한 남이(南怡) 장군이라고 한다.


지네와 남이 장군의 전설(2)

백족산 굴바위 전설에는 같은 유형이면서도 인물이나 내용이 다른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채집되고 있다.  

   때는 조선왕조 최대의 황금시대로 찬란한 문화와 태평성대를 자랑하던 세종대왕 년간이라고 한다.
백족산 굴바위 밑으로 백족사(百足寺)라는 절이 있다.  이 절은 폐허가 되어 터만 남아 있으나,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도 나오는 유서 깊은 절이며 옛날에는 많은 승려들이 기거하고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안개가 자욱하게 끼는 밤이면 절에 기거하던 중들이 한명씩 사라지는 것이었다.  
몇 년이 지나자 많던 중들이 모두 사라지고 나중에는 주지 승 혼자만 남게 되었다.  불심이 깊은 주지승은
사라진 중들이 모두 부처님이 인도하여 극락세계로 갔거나 신선이 되었을 것으로 굳게 믿고,  자신의 차례가
되기 전에 내 건너 포기실에 사는 친구에게 마지막 작별인사나 해두려고 산을 내려오게 되었다.
주지 승의 친구인 박 진사는 학식과 덕망을 갖춘 선비로서,  오래만에 찾아온 주지 승을 반갑게 사랑방으로
맞아 들였다.  잠시 그간의 안부를 묻는 수인사가 오간 다음 주지 승이 찾아온 용건을 꺼냈다.
“진사께서도 이야기를 들으셨을 줄 압니다만,  수년 전부터 우리절의 중들이 하나 둘 신선이 되어 사라지고
이제는 소승만 남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이젠 소승의 차례가 온 것 같아 승천하기 전에 마지막 작별인사를
드리려고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박진사도 백족사의 중들이 하나 둘씩 신선이 되어 감쪽같이 사라진다는 말을 이미 듣고 있었으나,  
내심 수상쩍게 생각하고 있던 차였다.  그도 그럴 것이,  옛날 해동공자(海桐公子)로 이름을 떨친 최고운
(崔孤雲)이 가야산에 들어가 신선이 되었다는 고사(古事)는 있지만,  알려지지도 않은 작은 절의 중들이 모두
신선이 되었다는 것은 고금에 없던 일로써 여기에는 필시 무슨 곡절이 있을 것이었다.
눈을 지그시 감고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잇던 박 진사가 이윽고 눈을 뜨며 말문을 열었다.  “제 생각에는
아무래도 이상한 일이니 스님께서는 그 절을 버리고 다른 고을로 이사를 가시는 게 좋을 듯 싶습니다.”  
그러나, 주지승은 펄쩍 뛰며 박 진사의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박진사는 주지승이 승천한다고
믿고 있는 날짜가 되기 전에 다시 한번 자신을 찾아와 달라고 부탁을 하고는 그날은 서로 헤어졌다.

   그날부터 박진사는 친구인 주지승에게 줄 두루마기 한 벌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주지승이 자신이 신선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 날이 되자 그는 약속한 대로 마을의 박진사를 찾아 왔다.  박진사는 준비해 두었
던 두루마기를 주지 승에게 내어 주면서, "이 두루마기는 그간 우리들의 우정을 기념하기 위해 내가 정성껏
마련한 선물이요.  내가 마지막으로 드리는 정성이니 오늘밤에 스님의 법의(法衣) 밑에 꼭 이 두루마기를
입고 승천해 주시면 고맙겠소.”  하고 간곡히 부탁했다.
주지 승은 박진사의 마지막 정성이라는 말에 쾌히 응낙하고,  이승에서의 마지막 작별인사를 한 후 절로
돌아왔다.  주지승은 목욕 제계를 한 후 승천을 위한 모든 준비를 끝내고 친구가 준 두루마기를 꺼내어 법의
속에 받쳐 입었다.  두루마기의 빛깔이 좀 거무스름하고 역한 냄새가 나는 듯하여 마음에 내키지 않았으나
친구의 간곡한 부탁을 저버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밤이 되자,  주지승은 법당 안에 촛불을 환하게 밝혀놓고
부처님 앞에 단정하게 앉아 염불을 외우며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시간이 흘러 새벽이 가까울 무렵이었다.  갑자기 굴바위 쪽으로부터 “쏴아”하는 거센 바람소리 같은 것이
들리더니,  몸 길이가 수십 척이나 되는 거대한 지네가 나타나서 염불을 외고 있던 주지승을 덥석 물어
한 입에 삼켜버리는 것이었다.  잠시 후,  지네는 그 거대한 몸뚱아리를 뒤틀며 미친 듯이 요동을 치더니
벼락 치 듯한 굉음과 함께 굴바위 앞에 널 부러져 죽어버렸다.
박진사는 백족사의 중들이 한 명씩 감쪽같이 사라진다는 말을 듣고는 이것은 필시 어떤 요물의 짓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비상을 물에 풀어 여러 번 먹인 솜을 장만하여 그 솜으로 지은 두루마기를 친구인
주지에게 주었던 것이다.
이튿날,  아침 일찍 박진사가 산에 올라가 보니 과연 주지승은 간데 없고 커다란 지네 한 마리가 죽어 있었다.

   그 때 이상한 일이 일어났으니,  죽은 지네의 몸에서 새파란 기운이 일어나 백족산 허리를 감싸더니 서서히
허공으로 날아서 청미천을 건너서는 개미실 마을의 어떤 농가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이상하게 생각한 박진사가 지네에서 나온 파란 기운이 들어간 집을 찾아가 확인해 보니 그 마을에 사는
남씨댁이었다.  그날부터 남씨 부인의 몸에 태기가 있더니 열달 후에 귀여운 옥동자를 낳았다.  박진사는
남씨댁을 방문하여 아이에 이름을 화할 이(怡)로 짓도록 하였으니 지네의 영기가 화하여 태어난 아이라는
뜻이었다.
그후로도 박진사는 남이가 탈 없이 잘 자라도록 도와주었고,  아이가 다섯 살이 되면서 자신의 집으로 데려
다가 직접 글공부를 가르쳤다.
남이가 열 살이 되던 해,  그러니까 지네가 죽은지 십년 째 되는 날이었다.  밤이되자 박진사는 자신의 잠자리
속에 짚단을 넣고 이불을 덮어 사람이 잠든 것처럼 가장하고는, 벽장에 올라가 숨을 죽인 채로 방안의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밤이 깊어 자정이 되자,  남이가 마루로 기어오르는 기척이 들리더니 살그머니 방문을 열고
들어서서는 불문곡직하고 비수를 겨누어 스승의 잠자리를 사정없이 찔렀다.  이때 벽장 속에서 박진사가
나타나더니,   “이놈 남이야!  이젠 한이 풀렸으니 칼을 거두어라.”하고 엄하게 꾸짖었다.  
지네가 죽은지 십년 째 되는 그날 아침,  남이 소년의 얼굴에 등등한 살기를 본 박진사는 죽은 지네가 아이
에게 명하여 자신을 해한 박진사에게 보복하려는 것을 눈치챘던 것이다.

   제 정신이 돌아온 남이는 깜짝 놀라 칼을 던지고는 스승 앞에 무릎을 끓었다.  
그후 남이는 박진사의 각별한 가르침 속에 학문과 무예를 연마하는데 정진하였고, 마침내 십칠세의 어린
나이로 무과에 장원급제하여 세조임금의 극진한 총애를 받았다.  
1467년(세조13)에는 우장군(右將軍)이 되어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의산군(宜山君)에 봉해
졌으며, 27세의 젊은 나이로 병조판서에 이르는 등 촉망을 한몸에 받았으나,  간신 유자광(柳子光)일파의
모함으로 반역을 꾀했다. 하여 꽃다운 나이에 목숨을 잃었다.
일찍이, 소년 남이가 길을 가다가 여종이 이고 가는 광주리 속에 분을 바른 요괴가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따라가,  당대의 세도가인 권람(權擥)의 딸의 목숨을 구해주고 그의 사위가 되었으며,  이시애의 난을 평정
하고 세운 평란비(平亂碑)의 내용이 화근이 되어 요괴의 장난으로 모함을 받아 죽음을 당했다는 이야기는
이미 널리 알려진 일화이다.  





다시돌아와 둔덕봉을 내려서니 임도가 나오고
한참을 쫓아가니 다시 무량사로 나온다(5시30분)
다시 택시를 불러 장호원 콘테이너 터미널에서 5기50분 동서울 버슬 탄다(5800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