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속의 단상 9 >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검단-용마산 2)  

 

 

↗ 고추봉과 용마산 산길에 서있는 서자(?)나무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걸까? 번뇌 망상이 머릿속을 꽉 채우고 좀처럼 떠나질 않는다. 첩첩이 둘러쳐진 가깝고도 먼 산 봉오리위에 두둥실 떠가는 한 조각 구름아, 너는 어디서 흘러와서 어디로 가느뇨?  나는 또한 세월에 떠밀려 어디로 가고 있는가?  산(山)은 알고 있을까?  늘 허탕 치면서도 오늘도 해답을 구하러 정처 없이 배낭을 꾸려 집을 나선다.


 발걸음이 나도 모르게 검단산 안창모루 앞으로 인도했구나. 유길준 묘소를 지나 바위 능선을 탄다. 검단산 산행 길 중에서 한강을 조망하며 오르는 이 길은 언제 올라도 기분이 좋은 코스다. 매서운 바람이 목덜미를 스치지만 얼굴엔 땀이 흐른다.

 

 번뇌 망상이 어디로 숨어 버렸나. 산객이 되어 묵묵히 그져 오를 뿐이다. 검단산 정상에서 다산 정약용 선생의 생가를 내려다보며 다산 선생의 강진 유배시절 18년을 회상한다. 유배지에서 두 아들에게 편지로 간곡하게 이른 말은 독서 많이 하라는 말씀 한마디였다.


 다시 안개에 가린 용마산을 바라본다. 고추봉을 지나 능선 오솔길을 오르락 내리락 하기를 몇 번하니 어느 사이에 용마산 정상에 섰다. 강 건너 분원 마을이 옹기종기 앉아 있다. 마을 뒷산 금봉산 산자락이 아련하게 보인다.

 

 갑자기 천상병님의 <귀천>(歸天)이란 시가 생각난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 빛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 빛 함께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 짓 하면은 /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님의 <귀천>(歸天)이란 시는 이렇게 시작된다.

 

 세월이 참 빠르다. 어느 사이 동지를 지나 세모가 다가온다. 2004년도 아름다운 소풍을 끝내고 귀천하는 중이다. 세월이 유수 같다더니 세단이 미끄러지듯 잘도 흐른다. 며칠 전 아파트 통 유리창 밖 대모산 봉오리에 아내 눈 섶처럼 생긴 초승달이 대롱대롱 메 달려 있었는데 벌써 보름달로 커 버렸다.조금 지나면 다시 하현달로 스러져가겠지. 


 개미 쳇 바퀴 도는 출퇴근을 떠나보낸 지 1년이 훌쩍 지났다. 주변을 정리하고 나니 이렇게 마음이 홀가분하다. 책 속으로 헤집고 다니는 여행이 나를 구름 속으로 떠밀어낸다. 그리고 산(山)이 세속을 떠나 멀리멀리 구름 따라  바람처럼 다녀가라고 손짓을 해 댄다. 나도 시인처럼 아름다운 소풍을 찾아 지금 귀천을 준비 중이다.

 

*안빈낙도(安貧樂道) 생활을 염원하며

 

 과거의 아픔과 미래의 꿈보다도 현재의 안빈낙도하는 삶이 천국과 극락의 삶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 것 같다. 마음의 평화로움이 육신을 나태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더불어 사는 사회라고 이제까지 남에게 보이려는 삶을 살아 온 것을 후회한다. 이것은 분명 나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었다. 체면치례 때문에 허비한 시간들이 아깝다. “우리네 인생은 사사로운 일상으로 낭비하고 있다”는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말이 실감난다.

 

 이젠 체면 치례 걷어치우고 진정으로 내 마음을 살피면서 내 삶을 풍요롭게 살고 싶다. 좌회전 깜빡이를 넣고 서해안도 돌아보고, 우회전 신호 넣고 강원도 오지여행도 하고, U-턴하여 남도여행도 가끔 하며 내 자신을  찾고 싶다.


*긍정적 사고와 행동으로

 

 인생을 살아가면서 좋은 일도 체험하고 나쁘고 슬픈 일도 겪는다. 어떤 한 가지 사안을 두고도 긍정적인 면으로 볼 수도 있고 부정적으로 느낄 수도 있다. 나이 40이 되었을 때 인생의 절반이 지났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앞으로 살아 가야할 날이 인생의 반이나 남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에버랜드 장미정원에 들어섰을 때 가시에 찔릴까봐 멈칫거리며 뒷걸음 칠 수도 있고, 꽃의 아름다움과 향기에 마음을 흠뻑 빼앗길 수도 있지 않은가!  지금까지 나는 어느 쪽으로 생각하였는가? 앞으론 긍정적 사고와 행동을 습관화해야겠다.

 

*작은 선행이라도 실천하며 살아야

 

 세상을 사랑과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면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도 아름답다. 그리고 소박하고 단순한 것이 더 아름답다. 작은 실천이 백 마디 말 보다 낫다. 비싼 돈을 들여 꼭 포장해서 주는 선물만이 선물이 아니다. 길가다 버려진 쓰레기 조각 하나 줍는 것도 선행이고, 무거운 가방이나 짐을 들고 가는 노약자의 짐을 들어 주는 것도 하나의 작은 선행이 될 것이다.

 

*집착과 욕망을 버려야

 

 전반생을 살아오면서 집착과 욕망을 가장 크게 갖고 살아 온 것 같다. 지천명의 나이가 되어서야 집착과 욕망을 버려야 작은 것으로부터도 만족을 얻을 수 있음을 깨닫는다.  또한 그 구속으로부터도 자유스러워질 수 있음을 알았다. 세상에 존재하는 물건들은 처음부터 주인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다. 처음부터 영원한 내 것이 어디 있던가! 내 집, 내 아내, 내 자식들이 내 소유물인가? 잠시 인연이 닿아 내 곁에 함께 하다가 어느 날 어떤 이유로 나와 모두 이별하지 않는가. 잠시 각자에게 잠시 맡겨져 있을 뿐, 영원히 내 것은 없다.

 

 위탁된 권리나 재물을 잘 관리하면 위탁기간이 좀 길어질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눈에 쌍 심지를 켜고 보다 많은 재물과, 권력을 원하며 스트레스와 싸운다. 이제부턴 집착과 욕망을 버리자. 아니 버리는 연습이라도 하자.


*말을 적게 해야

 

 가정과 직장생활하며 업무상 또는 업무 외의 많은 말을 하며 살았음을 후회한다. “말이 많으면 쓸 말이 적다”는 우리 격언처럼 말을 많이 하다 보면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기 보다는 상처를 주는 경우가 많다. 생텍쥐베리도 <어린왕자>에서 “말은 오해를 낳으므로 주의해야한다”고 말하고 있다. 역시 법정 스님도 그의 수필집 여러 곳에서 이 말을 반복하고 있다.

 

 가정, 직장에서 자기변명, 자기 합리화를 위해 많은 거짓말과 남의 허물을 들춘 일 그리고 분노의 말을 무의식적으로 했던 것을 반성한다. 구업(口業)은 한이 없는 것 같다. 유가 경전에도 구시화문(口是禍門)이라고, ‘입이 곧 화를 부르는 문’이라고 경각심을 주는 경구가 있다. 원불교 교전에도 구시화복문(口是禍福門)이라고 설법하고 있다.

 

 자신이 한 말에 속박을 당하고 싶은가? 말을 적게 할수록 속박에서 벗어나고, 침묵이 오히려 금이라는 격언이 이제야 실감이 나니 나는 지각 인생인가.  묵언 속에서 영적인 교감이 이루어짐을 이제야 느낀다.

 

*고독을 즐길 줄 알아야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고 말했지만 그 말은 다분히 정치적인 수사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태어 날 때부터 홀로였고 고독한 존재다. 따라서 사람은 고독을 즐길 줄 알아야 한다. 자기성찰은 고독으로부터 나온다.

 

 우리는 자주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즐거움을 즐긴다. 마약, 화투, 카지노 게임, 전자오락 등에 한번 빠지면 헤어나기가 쉽지 않음을 주위에서  자주 목격한다. 앞만 보고 달리는 기차처럼 우리 인생도 여간해서 뒤 돌아보며 살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다. 어느 날 문득 뒤 돌아서 후회의 시간을 가질 때는 이미 늦은 후회의 시간이다.

 

 한번쯤 혼자 산(山)길을 걸어보자. 그리고 고독하고 친해보자. 또 혼자 단 며칠만이라도 여행을 떠나보자. 여럿이 갈 때보다 더 많은 사물이 보이고, 느끼고, 자기 마음이 적나라하게 보이기도 한다.  여러 상념들이 머릿속을 주마등처럼 흐른다. 벌써 발길이 인동 장씨 묘지원을 지나 엄미리 날머리에 닿는다. 오늘 산행길이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고 교훈을 주는구나.  (2004.1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