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야산 산행기
(2004.8.3/대야산주차장-용추폭포-월영대-떡바위-밀재-대야산정상-피아골-용추폭-주차장/일산 한뫼산악회 따라)


*. 용추 폭포 가는 길

대야산 주차장에서 내려 멋진 통나무로 된 문을 통하여 통나무 층계길 따라 등산로를 올라 용추폭포로 가고 있다.
야산 오솔길을 지나 다시 통나무 층계로 내려서니 상가와 민박 촌이 있고 거기서 다시 통나무 길이 나타나 곳이 대야산 등반이 시작되는 용추계곡 길이다.
대야산은 속리산국립공원에 속한 산이지만 경북 문경시와 충북 괴산면의 경계에 있는 산이다. 우리 나라 주능선인 백두대간이 지나는 곳이며. 깎아지른 암봉과 온갖 형상의 기암괴석 등의 천혜의 비경이 울창한 수림에 덮여 서울의 명산 북한산과 도봉산을 합친 것에 비유되기도 하는 그런 멋스런 산이다.
대동여지도에 의하면 괴산으로 흐르는 물이 만든 계곡이 외선유동(外仙遊洞)이고 우리가 올라온 쪽의 문경시 가은 쪽으로 흐르는 10km의 계곡이 내선유동(內外仙遊洞)의 용추계곡이다. 용추계곡은 내선유동 상류에 있는 계곡이다.

용추계곡의 절경이 시작되는 곳에 '무당소'가 있다. 이 곳은 아무리 가문 때라도 물이 마르지 않아 기우제를 지내던 곳이다. 옛날에 그 기우제를 주관하던 사람이 신과 접하고 통하여 굿을 통하여 하늘에 소원을 비는 이가 무당이라서 그래서 이름을 '무당소'라 한 것 같다.

촛대봉 가는 길을 우측에 두고 요란한 리본 따라 오르니 여기가 대야산의 최고 경승지인 문경8경의 하나라는 용추폭포다.  
수만 년 동안 흐르는 물에 연마된 거대한 하얀 화강암 너럭바위 위를 맑은 물이 흐르면서 골을 파고 폭포가 떨어진 곳은 녹색 빛을 띤 신기한 모습의 깊은 소(沼)가 되어 아아, 하는 탄성을 발하게 한다.


수만 년 세월 빌어
꾸며놓은  하트(heart)형 소(沼)에
한 쌍의 용의 꿈이  
용트림하며 오를 적에
용 비늘
바위에 수놓고
승천한 용추폭포
-용추폭포



여기가 문경8경의 하나라는 용추폭포다. 길이가 10m, 폭 4.5m에 깊이 1.5m의 폭포로 윗용추폭포의 소(沼)를 이루었다가 다시 미끄러지듯이 흘러내려 1m 깊이의 아랫용추폭포를 만들었는데 천하에 보기 드문 신비스런 하트(heart)형 장관이야말로 명소 중의 명소이다. 암수 두 마리의 용이 하늘로 오른 곳이라는 전설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용추 양쪽 거대한 화강암 바위에는 두 마리의 용이 승천을 할 때 용트림하다 남긴 용 비늘 흔적이 신비롭게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고 안내판은 극찬을 하고 있다.
이 곳은  신라 말 신승(神僧)으로 유명한 도선대사가 고려태조 왕건에게 도선비기(道詵秘記)를 전수하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도선비기란 도선대사가 지은 책으로 고려 건국을 예언하였다는 책이다.

길은 계곡 물 소리가 가득하고, 나무가 하늘을 온통 가힌 완만한 산죽의 오름길이다.

*. 월영정의 여정

용추폭포를 지나면 널찍한 반석에 우거진 숲이 너무 아름다워서 속세의 근심 걱정을 잊게 한다는 망속대(忘俗臺)가 있다는데 거기가 여긴가, 여기가 거긴가 하면서 계곡을 왔다갔다 건너다보니 어느 사이 월영대(月影臺)에 이르렀다.

달은 하늘에 달려 있어 '달'이라고 한다는데, '월영(月影)'은 달그림자나 달을 운치 있게 표현하는 말이니, 이곳은 대야산 하산 길에 휘영청 밝은 달빛 밟고 오다 눈같이 하얀 바위에 앉아 그 녹색 소(沼)에 담긴 달을 바라보는 월영대(月影臺)란 말인가.

*. 밀재 가는 길의 떡바위

거기 고색창연한 이정표가 있어 다래 골을 통하여 밀재로 갈 것인가, 아니면 피아골로 갈 것인가를 나에게 묻는 듯이 서 있다.
이런 때는 내가 후미 뒤에 훨씬 떨어져서 늦게 가는 것이 오히려 행복해진다.
내가 겪은 그 동안의 산행으로 봐서는 우리 한뫼산악회는 언제나 회원 관리가 편한 원점회귀 산행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나는 물론 밀재 다래 골 코스를 택하였다. 그러나 혼자 우회 길로 들어성 것이니 그만큼 속도를 내야지 하면서-.
금년은 유난히 더운 여름이라 벌써 땀은 온 몸을 적셨다. 그러나 이 코스는 완만한 오름길이어서 곳곳에 맑은 계류가 길가에 있어서 흐르는 물을 타월에 물을 적셔 가며 얼굴을 씻고 머리를 씻어 가며 오르고 또 올랐다.
오늘은 서둘러 맨 앞에 가다가 카메라로 한 컷을 찍으니 일행은 50m를 앞서 가지 않던가. 그런 사진을 100번 이상을 찍으면서 오르는 것이 나의 산행이고 보니 어찌 아니 늦을까. 그보다 산꾼을 따라 오르는 산행은 젊었을 때도 언제나 나에게는 힘에 버거웠다.
그러나 시간을 두고는 얼마든지 견뎌볼 수 있다는 생각에다가 산에 대한 욕심은 아무리 힘들어도 정상에 도전하게 하였다.

떡바위를 지나고 있다. 작년 괴산 칠보산(778m)산에 갔을 때에도, 자월도에 갔을 때에도 떡바위가 있더니 여기도 있구나 하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옛날 이 두메산골에 살던 사람들의 배고픈 심정이 이렇게 바위에도 남아있는 것이라고. 떡바위서 밀재까지는 1시간 20분이란 이정표가 있다. 이 이정표서부터는 계곡을 버리고 오름길이 시작되더니 드디어 하늘이 탁 트이기 시작하는 능선 안부가 '밀재'였다.

지금은 백두대간 능선의 등산로로 이용되고 있는 하나의 재이지만, 예전에는 방금 우리가 올라온 경북 문경시의 가은과 충북 괴산을 이어주는 중요한 고갯길이었다.

*. 암산 대야산의 수석들
여기서부터는 대야산 정상으로 향한 가장 가파른 길로 이정표에 쓰인 50분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연일 계속되는 30도를 웃도는 살인적인 삼복더위에 유난히 요란히 우는 매미 소리를 들으며 하는 등산은  벅차도록 힘든데다가 산길은 지금까지의 육산의 모습을 버리고 오름길이었지만 커다란 바위가 나타나기 시작하면서부터 나를 즐겁게 하였다.

그렇지, 저것이 거북바위지.

두 귀에 긴 코의 저 바위가 코끼리바위고,

그 왼쪽의 대문처럼 생긴 것이 대문바윈가 보다. 이런 커다란 바위는 사방이 탁 트여 있어서 곳곳마다 전망대가 되어 시야를 열어준다.
남쪽으로 889m의 고모치와 아까 이정표에서 보던 괴상한 이름의 867m의 마귀할미통시바위로 향한 백두대간 능선이 보인다.
북쪽으로는 대야산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 정상으로 가는 길 숲 사이로 멋진 바위들이 모여 만든 '동바위'가 있어 좋은 장소를 찾아 촬영을 벼르다가 그만 너무 가까이 와서 그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이렇게 한 번만 오는 기회를 맞이하기도 하고, 그것을 잃고 후회하면서 사는 것이 인생인가 보다.

*. 무리한 정상에의 욕심
서쪽으로는 푸른 하늘을 이고 우뚝 솟은 봉이 848m의 중대봉인데, 북으로 저 멀리 대야산 정상이 보이기 시작할 무렵 나는 너무 기진맥진해 있었다.  저 아래 망속대(忘俗臺)처럼 모든 근심 떨쳐 버리고 한 숨 푹 자고도 싶고, 지름길이 있으면 그냥 내려가고도 싶은데, 점심시간이 1시간이나 지나서인가 시장기가 돈다. 준비해간 물도 거의 바닥이 나서 과일로 갈증을 식힐 수밖에 없었다. 식욕은 잠시나마 나를 행복하게 하여 주었다.
정상에 서성거리는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떠드는 소리까지 들리니 용기가 난다. 까마득하던 대야산의 정상이 가까와 진 것이다.
1960년대 초였던 젊은 시절부터 산을 좋아하여 많은 산을 다닌 즐거운 추억을 갖고 있다. 그러나 산꾼 축에 들어가는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산에 오면 이상하게도 숨이 벅차고, 땀을 누구보다 많이 흘렸다. 그래서 전문적인 산악회를 따라다니는 것을 가급적 피하였다. 그것이 모두 술의 탓이거니 했는데 종합검사를 받고 의사의 주의를 받은 후에야 몸의 탓인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 나의  지금은 그 몸과 나이로 보아서는 건강을 위하여 이런 무리한 산행은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왜 이런 고행의 산행을 하고 있는 것일까. 다시 또 나의 입술과 인중과 눈 가 등 얼굴의 약한 부분이 흉측하게 부르터 오른 얼굴로 한 동안 살게 될 것 같다.
문득 엊저녁 홀로 치킨 집에서 저녁 대신 혼자 생맥주를 마시며 끼적여 본 시 한 수가 생각난다.


염색(染色)으로 화장(化粧)하는
의치(義齒)와 돋보기 나이.
심심을 핑계하여
먼 산이 되렵니다.
산에서
구름이 되거나
바람이고 싶어서
     - 자화상


산을 좋아하며 그 속도가 자랑이 되는 산사람들 가까이에서 살다 보니 이런 욕심이 생겼다. '어디에 있는 무엇이, 어떻게, 얼마나, 왜 아름다운가. 그리고 거기에는 어떤 전설이 있는가를 해석하고 노래하는 기행문 작가가 되자. 그래서 죽기 전에 그 분야라도 나의 능력이 닿는 한 열심히 정리해 보자.'
가만히 그 동안의 나의 산행을 뒤돌아보니 초죽음이 되는 경지에서도 나의 이러한 욕심은 갸륵하게도 정상까지의 산행을 계속하게 되었다. 이럴 때 나의 몸은 한없이 고단하였지만 그 대신 이를 극복한 나의 마음은 어느 누구보다도 더 행복하였다. 그래서 나의 산행 역사 중에는 정상을 향하다가 멈춘 적이 특별한 경우 외에는 없었다.
나는 지금 '아름다움이 머문 자리'라는 제목으로 그 동안 써온 산 행기, 섬 여행기, 해외여행기, 기행시집 등을 낼 수 있는 책 10여 권의 분량의 원고를 가지고 있다.
그걸 정리할 단계에 와 있는데 무엇이 나를 이렇게 산으로 몰아오게 하는가. 모든 것에서 손을 놓고 소일하는 친구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 나이에 이렇게 도전할 수 있는 세계가 있고 아내까지 감탄할 정도로 문학에의 마지막 열정을 쏟고 있는 요즈음은  스스로 생각해도 대견하게 생각된다. 언제나 새로운 세계를 찾아 창조적인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기에 말이다.

대야산 마지막 오름길인 가파른 돌길은 천주교 신도들의 여름 산행으로 내려오는 중이어서 한참이나 기다려야 했다. 그중에는 희색 제복의 젊은 수녀도 보였다. 갑자기 우리 모임의 몬나타 수녀님이 생각난다. 우리는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으나 글로써 자주 만난 가장 가까운 이웃이다. 나는 우리 수녀님이 글로서 하나님에게 크게 쓰임이 되는 수녀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그래 그런가. 수녀를 만날 때마다 마음속으로 깊은 호감이 간다. 오른 쪽으로 돌아 올라가는 길이 있긴 했지만 그래서 나는 이렇게 기다리고 있는가 보다.

*. 대야산의 전설



백두대간 대야산 정상에 서니 천지사방이 막힘없이 한눈에 들어온다. 나의 여유의 10분의 1도 다 바쳤기에 그 결과는 남보다 이렇게 더 달콤한 것이다. 나침반을 가져오지 않아서 이름 모르는 저 웅장한 전망을 파노라마로 촬영으로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그 사진을 가지고 집에 가서 즐거운 연구를 계속할 것이다.
이럴 때 한바탕 멋진 산세와 각각의 산 이름을 말하여 주는 이가 있다면 무더위를 식혀 주는 한 줄기 바람같이 우리를 얼마나 시원하게 하여 줄까.

대야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하여 온다.
옛날 이 고장에 '노아의 방죽' 이야기를 연상하리만큼 큰 홍수가 있었다 한다. 모든 곳이 다 잠기어 버린 그 때에 대야만큼 남아 있는 봉우리 하나가 있었다. 이 봉우리였다. 그래서 대야산이라 했다는 것이다.
한자로 '大耶山'(대야산)을 풀이해 보면 큰 대(大), 움푹 들어갈 야(耶: 汙耶下池)라 하여 대야로 풀이해 보는 것은 너무 견강부회(牽强附會)한 것일까.

일행은 벌써 다 하산하여 버린 후라서 서둘러 피아골로 내려가기로 했다. 건폭(乾瀑) 반석지대는 밧줄이 아니면 안 될 정도로 경사가 만만치 않은데 '우리나라 좋은 나라'라 노래할 정도로 고맙게도 이 산은 어느 데에나 리본과 이정표가 분명하고 위험한 곳마다 밧줄이 등산길을 돕고 있었다.
지리산 피아골 단풍 구경을 벼르다가 아직 못 가보았는데 거기서 일제 시절 의병들이나, 6.25사변에 좌우익으로 갈려 피아(彼我) 간에  죽은 선혈이 산골짜기를 붉게 물들였다 해서 피아골이라 하였다는 것처럼 여기서도 수많은 젊은이들이 피 흘린 곳이란 말인가. 아니면 여기의 경사가 지리산의 피아골과 같이 험난해서 피아골이라 하였는가. 금년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피아골의 삼홍소(三紅沼)에 가서 산홍(山紅), 수홍(水紅), 인홍(人紅)이 어떻게 붉은가를 보러가야겠다. 여기와 거기가 어떻게 서로 같은가를 비교하여 보고 싶어진다.
내려가는 길 가에서 식사하고 있는 우리 일행을 만나니 비로소 마음이 놓인다. 여가는 언제나 남에게 누가 되지 않는 한도에서 누려야 하는 것이니까.
계곡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드디어 피아골에 들어선 것이다.
맑은 물이 바위를 타고 흘러내리는 곳에서 그 물을 받아 벌컥벌컥 마음껏 마시기도 하고, 수통에 물을 가득 채우고, 땀에 흠뻑 젖은 T셔스를 빨아  젖은 채로 입기도 하였지만 더위는 가시지 않았다. 앞서간 일행은 옷을 입은 채로 물에 뛰어들고 있었다.

*.용추 계곡의 남아 있는 1900년대의 부끄러운 탁족문화

그러나 월영대가 가까와 오면서부터 커다란 실망이 나를 우울하게 하였다.
취사를 금하는 대형 현수막은 그냥 형식으로만 걸려 있을 뿐 곳곳마다 텐트요, 그 옆에는 음식을 해먹은 코펠과 버너가 버젓이 놓여 있고,  물이 있는 웅덩이는 모두가 어른과 아이들이 어울린 풀장이다. 옷은 빨아 빨랫줄에 길게 널어 놓은 것이 어느 가난한 아파트의 베란다를 연상하게 한다.

게다가 한 술 더 떠서, 수십 마리도 넘는 죄 없는 손가락 만한 물고기를 잡아 여봐란 듯이 자랑삼아 바위에 말리고도 있다.



1900년대의 우리들의 부끄러운 모습이 여기에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 신기하기만 하였다.
그 아름다운 용추폭포 속에는 사람들로 가득하고,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안전이란 이름으로 밧줄까지 흉하게 가로 질러 매어 놓았다. 그 밧줄을 매 놓은 것은 들어가도 좋다는 면죄부가 아닌가. 적지 않은 산행을 해 온 눈에도 신기하기 만하다.
주차장에 돌아와서 그 용추 계곡에 대한 안내판을 읽으면서 마음이 다시 어두워지는 것은 우리 민족이 고쳐야 할 잘못된 우리들의 문화 의식 때문이었다.
계곡에서 노니는 관광객을 위해서 유사시 울리기 위한 대형 경보 마이크 탑을 우람하게 만들어 놓은 문경시 당국은, 단속에는 왜 이렇게 소홀한 것일까. 주차장 옆에 안내판은 더욱 우리를 슬프게 하였다.
"~대야산은 사시사철 변함없이 세속에 오염되지 않은 옥계수가 흐르고 있어 여름철에는 많은 등산객들이 찾고 있다."
그러나 이곳의 지금의 용추골의 물은 옥수는 커녕 탁족의 즐거움을 마저 빼앗아 간 그런 오염된 더러운 물이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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