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 고리봉 산행기

ㅇ 일시 : 2004. 12. 18(토)
ㅇ 위치 : 전북 남원 고리봉(709m)
ㅇ 찾아간 길 : 대진고속도로-장수 I.C-장수시내-남장수 I.C-88고속도로-남원 I.C-남원시내-순창방향-비홍재(A코스)-송강재(B코스)
ㅇ 산행코스 : A코스=비홍재-문덕봉-고정봉-555고지-삿갓봉-고리봉-신기철교
                   B코스=송강재-고럭재-555고지-삿갓봉-고리봉-신기철교(14km,  6시간)
  

    드디어 아내도 토요일에 시간을 낼 수 있게 되었다. 혼자서만 산에 다닐 때는 미안하기도 하고, 가끔씩 궂은 날씨처럼 몰려드는 아내의 투덜댐이 신경 쓰이곤 하였는데, 아내와 함께 산행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만들어지니 마음이 가볍고 기쁘다. 아직은 초보중의 초보인 아내를 위하여 산행에 대한 즐거움도 느끼고, 체력 부담도 적은 산행지를 골라보지만, 겨울 산행지 중에는 아내에게  맞는 산을 고르기가 힘이 든다. 하는 수 없이 광고지에 나온 산악회 중 하나를 골라 산행지를 정한다.

  

   'ㅅ' 산악회 버스를 타고 8시20분 남대전I.C를 빠져나가 목적지에 도착하니 10시30분. 흐릿하던 날씨가 차츰 개이기는 하였지만 먼 곳의 산이 운무 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다. 지리산 능선을 한 눈에 볼 수 있다고 하였는데 잘못하면 볼 수 없으리라는 불안감이 슬쩍 드리운다. 목적지에 가까워지자 산악회장님이 오늘 산행코스에 대하여 설명을 해준다. 그런데 전화로 문의 할 때와는 달리 코스가 상당히 힘들고 가파르니 초보자는 A코스 탈 꿈도 꾸지 말란다. 그리고 B코스도 상당히 힘드니 주의하란다. 전화로 문의 할 때는 분명히 산이 험하지 않다고 하였는데, 그래서 아내를 데려왔는데---은근히 배신감을 느낀다. 그리고 아내가 잘 해낼 수 있을까 걱정이 되기 시작한다.

 

     A코스 탈 사람들을 비홍재에서 내려주고, 약 10분 더 진행하여 송강재 송내마을 입구에서 B코스 탈 사람들을 내려준다. 평이한 농로 길을 20분 정도 오르자 본격적인 산행길로 접어든다. 그런데 아내가 처음부터 뒤쳐지기 시작한다. 함께한 산님들을 모두다 보내고 아내와 둘이 천천히 산을 오르기 시작한다.

 

     약 1시간에 걸쳐 그럭재를 지나 555고지에 오르자 조망이 시작된다. 앞쪽을 보자 가야할 삿갓봉과 고리봉이 결코 예사롭지 않는 산세를 드러낸다. 연속하여 이어지는 높고 낮은 봉우리들. 깎아지른 절벽들. 전북의 용아라더니 과연 거짓말이 아니었구나. 저 능선을 아내가 잘 해낼 수 있을까? 또다시 걱정이 앞선다. 힘들어하는 아내를 가만가만 달래고 쉬게 하며, 이제 눈이 즐거워지기 시작하는 능선길을 타고 가만히 삿갓봉에 오른다.

 

   삿갓봉에 오르자 A코스 길의 문덕봉과 고정봉이 한눈에 들어온다. 암릉길이 참 좋았을 것 같아 보인다. 아내와 함께 하지 않았다면 지금 저 능선을 좋아라 오르내리고 있었을텐데--- 내내 군침을 삼키게 한다. 그러나 그런 아쉬움도 잠시, 앞의 능선을 보니 험준하게 솟아 있는 고리봉의 위용이 대단하다. 설사 그 험준했던 조령산의 능선을 보는 느낌이다. A코스를 타지 못한 아쉬움보다 아내에 대한 미안함이 훨씬 앞선다. 정말 편안하고, 아기자기 하고, 아름다운 산을 골라, 오순도순 이야기하며 산행을 하고 싶었는데---나의 세심하지 못한 산행지 선택에 후회가 된다. 그런 나의 마음을 '산좋네, 산에 오니 좋아' 라고 위로하며 열심히 오르는 아내의 마음이 한없이 고맙다. 삿갓봉에서 간단한 점심으로 힘을 보충한 후 고리봉으로 향한다.

  

    고리봉 오르는 길. 곳곳의 암벽과 암릉들이 산행의 재미를 솔솔 느끼게 해준다. 뒤돌아보면 지나온 삿갓봉의 암벽들도 눈을 즐겁게 해준다. 무엇보다도 산행길 내내 따라오는 소나무 숲. 계절의 감각을 잊게 해주고 따뜻한 바람막이가 되어주어 고맙다. 솔잎소리, 바람소리, 새소리, 아내의 웃음소리, 겨울답지 않은 따뜻한 햇살, 바위와 암벽. 이만하면 산행의 재미는 다 갖춘 것이 아닐까! 이것이다 하는 압권은 없지만 기분 좋게 생긴 사람의 준수한 모습을 보는 듯한 보기 좋은 산이다.

  

   그러나 전북의 용아란 이름처럼 고리봉까지 오르는 길이 만만치가 않다. 작은 봉우리를 오르면 다시 내리막이고 또 오르면 또다시 내리막이다. 처음엔 힘을 내어 잘 따라 나서던 아내도 이제는 어지간히 지치는 모양이다. 괜찮겠어라고 물으면 억지로 괜찮아 하며 웃어 보이는 아내가 안쓰럽기까지 하다. 그런 아내를 천천히 이끌고 얼마쯤 갔을까? A코스를 탔던 산행대장과 산님 한 분이 우리를 앞지른다. 정말 대단하신 분들이다. 결코 만만하지 않았을 문덕봉, 고정봉의 암릉을 지나 벌써 이곳까지 오다니! 먼저 가시라는 인사말을 건네고 간신히 말 그대로 온 몸으로 산을 타며 오르고 또 오른다.

  

   산행을 시작한지 3시간 30분. 드디어 고리봉에 오른다. 탁 트이는 시야. 시원한 바람. 환희가 몰려온다. 아내도 활짝 웃는다. 드디어 해냈다는 뿌듯함의 웃음일 것이다. 사실 몇 달 전까지 만해도 아내의 몸은 말이 아니었다. 동네 뒷산도 오르지 못하여 중간에서 포기하였던 몸이다. 그런 아내가 운동을 시작하고 이제 이런 험한 산까지 오르게 되었으니 내심 얼마나 기뻤을까! 정상비를 끌어안고 감격의 포즈를 취하는 아내를 찰-칵 순간 속에 영원히 가둔다.

  

    정상에 서서 이제 천천히 사방을 둘러본다. 지리산의 능선은 운무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 지나온 능선은 선연하게 들어온다. 참 많이도 걸어왔다. 까마득하게 멀리 있는 저 능선을 다 돌아서 언제 이곳까지 왔을까? 믿겨지지가 않는다. 오름의 고통은 어디다 다 날려버리고 아름다운 산줄기 하나로만 고스란히 남아 있는 능선. 삶이란 지나고 나면 다 저렇게 아름다운 것이구나! 고개를 끄덕이다 이내 고개를 젖는다. 아닐 것이다. 저 능선이 아름다운 것은 저 능선 곳곳에 지나온 고통과 땀이 숨어 있기 때문이리라. 만약 공중에서 뚝 떨어져 이곳에 서 있다면 저 능선길에 무슨 아름다움이 있고 무슨 추억이 있으랴! 아내와 함께 오르는 길, 아내와 함께 지금 걸어가는 길이 가파른 오르막이라 하여도 먼 훗날 뒤돌아볼 때 저렇게 아름다운 능선으로 남아 있을 수 있다면, 이 또한 아름답고 훌륭한 산행이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능선길을 바라보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땀에 범벅이 되어 있는 아내가 더욱 소중하고 사랑스럽게 느껴진다.  아내의 어깨를 다독이며, 고리봉에서 늘어지기 시작하는 생각들을 배낭에 추스려 이제 천천히 하산길로 접어든다. 

  

    하산길. 하산길도 오르고 내림의 반복이다. 지칠대로 지친 아내가 더욱 힘들어하더니 드디어 무릎까지 삐걱이기 시작한다. 얼른 스프레이 파스를 뿌려주지만 별 소용이 없다. A코스를 탔던 사람들도 이제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우리를 앞질러 갔다. 비탈길을 한 발 한 발 정말 고통스럽게 내딛는 아내. 주위를 둘러보면 때때로 우리가 벗어나고 싶었던 지상의 평지가 바로 저 밑인데, 다시 그 곳에 다다르기까지는 왜이리 힘이 드는지. 한번 길 떠났던 자가 다시 세상으로 돌아오기까지의 고통이 이와 같은 것일까? 2시간 30분의 긴 하산길 동안 얼른 지상에 내려앉고 싶은 욕구가 극에 달한다.
  
   하산지점에 도착하자 많은 산님들이 우리를 기다린다. 다행히 꼴지는 아니라 미안함이 덜하다. 얼큰한 찌개에 막걸리를 한 잔 거하게 들이키자 피로가 확 풀리는 듯 하다.

  

    그리 높지는 않지만 생각보다는 훨씬 험하였던 산. 화려하거나 빼어나지는 않았지만 오밀조밀하고 준수하였던 산. 꽉찬 당일코스를 원하는 산님들에게는 적극 권하여주고 싶은 산. 아내에게 있어서는 더없이 힘들어 기억에 남을 산. 귀가 길 차안에서 아내에게 묻는다. 또 산에 갈래? 그럼, 또 가야지! 흔쾌히 대답하는 아내. 성공이다. 아내를 산사람으로 만드는 첫 번째 시도는----

  
 
(555고지에서 본 삿갓봉과 고리봉)


 

(고리봉과 능선)



  

(고리봉에서 본 능선-멀리서부터 문덕봉, 고정봉, 555고지, 삿갓봉)



  

(고리봉 용아 )


 

(고리봉과 계곡)


 

(고리봉 - 하산길)


 

(고리봉 암봉)


 

(하산길 -바위와 소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