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무에 쌓여 누워있는 龍을 깨우러간 고리봉

2006-4-2

비홍재- 문덕봉- 고정봉- 그럭재- 삿갓봉- 고리봉
천만리장군묘- 택촌 약 16km (7시간) 종주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잘 잊게 해주는 눈 으로 대지를 덮고
마른 구근(球根)으로 약간의 목숨을 대어 주었다...중략

  

황무지라는 시에서는 4월은 가장잔인한 달이라고 했는데
황폐한 잔인함을 깨우려는지 봄비가 내려
새로은 생명을 잉태시킨다.


 

(문덕봉.고리봉 안내도)

 

산행기를 쓰려 어제의 산행을 생각하니 비홍산성에서
문덕봉. 고리봉. 천만리장군묘 까지는 용의 꼬리에서부터 입 까지고.
섬진강을 바라보며 승천을 꿈꾸는 누워있는 용이 연상된다.

오늘 산행기는 한마리의 용으로 그려보려 한다.

  

비홍재부터 문덕봉밑은 용의 꼬리요
문덕봉.고정봉 부터 그럭재까지는 용의 등줄기와 목줄기고
그럭재부터 고리봉까지는 용의 뒷목줄기부터 이마이고
고리봉부터 천만리장군묘까지는 용의 입에 해당하니
천만리장군묘는 용의 코 자리가 아닌가 나름대로 생각해본다.

  

비홍재에서 시작하는 산행은 안개자욱한 소나무숲길로 이어지는
부드러운 육산으로 능선위에 쌓인 솔잎에 발을 밟는 순간
양탄자위를 겉듯이 푹신한게 걸음을 사뿐이 해준다.
비홍산성부터 문덕봉 밑까지 이어지는 4km의 등로는
꼭 성곽위를 도는것처럼 능선으로만 길게이어저 있다

  

용아름를 오르려니 신비감을 더하기위해
안개가 더욱 짙게 깔린다.
명당중에 명당이라는 문덕봉은 안개에 쌓여
아무조망도 볼수가 없고 바람만 모질게분다.
맑은 날에는 지리산과 무등산까지도 지척으로 보인다는데 아쉽다.

  
 

(고정봉 가는길)

 

아쉬움 달래주듯 걸어온 비홍재와 비홍산성에
내력을 송황제님이 말씀하신다.
임진왜란때 일본군이 적세를 살피고 있던중
기러기떼가 이 고개를 넘어가는 것을 보고
산성에 사람이 많지 않음을 깨닫고 진격하여
성을 다 쌓기도 전에 빼앗겻다해서
비홍재(飛鴻재)날비자에 기러기홍자를써 비홍재라 부른단다.

  

아픈역사의 한끝을 놓으며 고정봉을 향한다 .
이제부터는 부드러운 육산은 끝이나고 골산(骨山)의 전형을
보여주는 용의 등줄기를 오르기 시작한다.
산들머리님의 안내를 받으며 암봉 두세개를 넘으니
거북바위가 나오고 고정봉이다.

  

그러고 보니 어제 산행에서는 거북바위를 4개나 보았다
산행중에 흔하지 않는 일인데
울횐님들게 복이 전해지면 좋겠다.


 
아무 조망도 못본체 고정봉을 내려서니
마치 산 밑으로 곤두박질치듯 급경사 내리막 암릉인데
로프라고 매여있는게 전기줄 만 하니
잡고 안내려갈 수 도 없고 낭감하다.
그렇지만 오늘 첫 산행이신 김순옥님은 무서움도 없이
너무나 용감하게 내려가신다.
겁이 없으신지 경험이 많으신지.! 


고정봉에서 그럭재까지는 계속되는
안개속에 암봉과로프의 연속이다.

힘들어하는 나에게 산들머리님이 좋은 바위를 보여준단다.
처다보는 바위는 힘차게 서있는 남근석 이다.
무엇에 들킨놈 처럼 바지 가랭이를 훔치고 기죽어 돌아서는데
억세풀님이 거북바위를 내려오고있어 남근바위를 가르처 주었는데
나처럼 기나 죽지 않으셨는지 궁금하다
 
 
오늘은 억세풀님이 흥이 조금 늦게 시작된다.
음악소리에 점심시간을 정리하고. 1진과2진 를 나누는데
오늘따라 1진 하산 하시는 회원님들이 많은게
안개속에 용의 등줄기를 타는게 힘드셨나보다.
1진과 2진종주로 나뉘어 14명이 출발한다.
 
그럭재에서 고리봉까지는 용의 뒷목줄기부터
머리까지이니 시작 하자마자 된비알이다.
된비알 길에서도 울 멋쟁이 억세풀님 음악소리 크게 울리며
흥겹게 올라오시고 우리 장비님은
1진으로 내려가셨는데 어찌된 일인지
2진종주팀에 합류하시여 힘들게 올라오신다.

  

이제부터 안개가 그치고 맑은 날씨와 함께
그렇게 보고싶던 조망을 볼 수 있다.
우측의 곡성 동악산이 보이고 섬진강이 유유히 흐르며
좌측에 지리산과 금지평야를 보면서
시원한 조망속에 걸으니 계속되는 비탈길 이지만 힘이 덜든다.


급경사 오르막을 한차례 더 오르면 두바리봉이 보이고
내려섰다 다시오르면 삿갓봉이다.
삿갓봉에서 바라보는 가야할 고리봉은 너무 높게 보이고
비늘처럼 반짝이며 흐르는 섬진강은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다.


  

(삿갓봉에서 바라본 고리봉)

 

삿갓봉에서 쉬고 떠나려는데  제1구조대장님과 송황제님이 오신다.
송황제님이 무릎에 쥐가 들었다며 늦게오신다.
장비님과 복병천님 네분이서 후미그룹이되신다.


삿갓봉을지나 조금내려오니 계곡 암반이 좋다는

산들머리님이 말한 만학골계곡로 내려가는 삼거리 길이다.
샛길의 유혹을 뿌리치고 백두산지킨님과
산행기에 대해 얘기하며 천천히 걸어간다.

 

이제 마지막 용의 뒤통수를 올라 머리에
이르는 길이니 어찌 험하지 않겟는가
세번에 걸친 로프타기와 된비알을
이기니 고리봉 정상이다.

  

고리봉정상은 힘들게 힘들게 올라왔는데 처음 맞이하는 것은
둘레석까지 해놓은 묘가 지키고있고
정상석은 묘뒤통수에 서 있다.
한 개인의 욕심이 여기까지 미칠줄이야!
명당이라고 했는데 많은 사람들에게 욕을 먹으니
그게 어디 명당 이라겠는가 어리석은 후손들이
훌륭한 조상을 욕보이지나 않고 있는지 생각해볼 일이고
용의머리를 누르고 있으니 용이 승천하는날
크게 혼날 것 같아 심히 걱정이된다.

  
 

(고리봉에서 본 걸어온 능선과 문덕봉.고정봉  맨뒤희미한능선)

 

갈하고 여기서 걸어온 능선을 바라보니
아스라니 산그리메가 펼쳐지고 많이 걸어왔다는걸 느낀다.
사람 눈처럼 게으른게 없고 사람의 발 처럼 빠른게
없다는데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전망좋은 고리봉이다.

고리봉 왜 고리봉이라 했을까?  알아보니
골산의 전형을 보여주는 고리봉의 이름은
소금배를 묶어 두었던 고리(還)에서 유래한단다.
백여년 전까지만해도 하동을 출발한 소금배가 섬진강에
이어 남원요천 물줄기를 거슬러 남원성 동쪽
오수정까지 닻을 내렸다고한다.
당시 소금배가 중간 정박지로 금지평원에 머물기 위해
배 끈을 묶어두었던 쇠고리를 바로 고리봉 동쪽
절벽에 박아놓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소금배와 얽힌 전설이 전하는 고리봉은
조망도 좋지만 산세가뛰어난 산이다.
동서 양쪽 사면은 거대한 바위병풍을 연상케 할 만큼
웅장한 산세를 과시하고 능선은 소나무가 울창한 가운데
부드러운 육산과 아기자기한 암릉이 번갈아 이어져
산행의 즐거움까지 더해진다.

  

이제 고리봉에대해 많은걸 알았으니 하산하기로 한다.
말이 하산이지 내려서자마자 로프를 타니 하산길도 애사롭지않다.
하산길도 암릉에 연속이고 여기까지 비홍산성터의
석축이 남아 있으니 그 크기에 놀라울 뿐이다.

  

두개의 암릉을 넘고 내려서니 묘 한 기를 만난다.
이 묘가 천만리장군묘란다.
이름이 거창해 남원의병지를 찾아보니

" 천씨의 시조인 천만리 장군은 임진왜란 때
조선을 침략한 왜적을 몰아내기 위하여 참전한
명나라 이여송 장군 휘하의 영양사와 총독장으로,
두 아들 상, 희와 함께, 군량수송과 보급에 만전을 기해
평양과 곽산 등지에서 아군이 승리하는데 큰 공을 세웠고,
정유재란 때 또다시 두 아들과 참전해 진산, 울산 등지에서
큰 전공을 세운 다음 조선에 귀화한 인물이다.
귀화한 후 화산공, 충장공이랑 시호를 받은 천 장군은
전투 중 전사하자 고리봉 기슭 명당 자리에 안장했다 전한다.
풍수지리가들 사이에서는 천만리장군 묘자리는 아들은 없으나 많은
자손이 태어나는 '무자천손지지(無子千孫之地)'로 꼽는다."

  

그러고 보니 이 자리가 용의 코에 해당된다면
용의 콧김이 세 많은 자손을 얻을 수 있는가보다.
알고보니 아들은 없는데 어떻게 자손이 많아 지는지
과연 명당은 명당인가보다.

  

여기서 부터 시작하는 하산길은 지루한 비탈길 계곡옆이다
능선에서 벗어나니 등로찾기가 쉽지않아
선두로 잠깐의 알바도 경험한다.

  

지친 몸으로 택촌에 도착하니 우리 종주팀을 박수로 맞아주시는
회원님 들이 고마울 따름이다.

아니 그런데 후미그룹 장비님.송황제님.복병천님.구조대장님이
계시지않는가, 이런이런 샛길로 내려오셨구만!
 
암릉이 많은 산행 이었는데 안산을 해주신 님들께감사 드린다.

*龍이 있으면 여의주가 있는법 오늘 못찾은 여의주
다음에 꼭 찾으러 가야겠다.

오늘 산행기는 끝까지 龍을 그려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