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려산 산행기(2) -


 

‘10년간 100군데 산 찾아다니기’


 

전날 강화도내 등산 안내도 중 고려산, 상봉산, 마이산을 출력했다. 새벽에는 신촌 시외버스터미널주차장 약도를 출력했다. 그리고, 두 시간만인 7시 30에 집을 나섰다.

이어 전철 안에서 행선지를 고르기 시작했다.

가본 곳과 배를 타야 하는 곳은 피하면서, 산의 내용을 살펴 고려산을 택했다.

인터넷 검색 - 출력.

세상은 참으로 편했다.

강화도까지의 버스요금은 4,900원이고, 가는 시간은 한 시간 30분이다. 신촌 시외버스주차장에서 8시 30분 버스를 탔다. 강화도에는 10시 경에 도착했다.

고려산 입구인 적석사 가는 국화행 버스는 10시 40분에 있다. 요금은 900원.

신촌 시외버스주차장이나 강화도 버스터미널이나 모두 허름했다.

기분은 유쾌했다.

애초에는 ‘산 찾아 100군데 다녀보기 10년 계획’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 계획의 두 번째 시도라는 의미를 되새기면서 ‘시작이 반’이라는 말의 깊은 뜻을 새겼다.   

강화도 버스터미널에서는 시간이 좀 남았다. 30여분을 더 기다려야 했다. 궁리 끝에 교통카드를 파는 문방구가 눈에 띄어 그곳으로 갔다.

“국제전화카드도 파나요?”

“예”
“?”

기대를 안 하고 물었는데 의외로 팔고 있다니 내심 기뻤다.

“얼마에요?”

“어딘데요?”

“우즈베키스탄이요.”

“ 내가 팔기는 팔지만 가격이나 이런 걸 잘 모르니 살펴봐야 돼요.”

그러더니 자료를 꺼내놓고 살폈다.

“여기 있네. 150분 15,000원이에요.”

“어떻게 쓰는 거예요?”

그쪽도 잘은 모르는 것 같은데, 성의 껏 설명해 주었다.

이렇게 국제전화카드를 쉽게 구하다니.

나는, 다소 들뜬 상태였고 기뻤다.


 

지난 한 주, 나로서는 들뜬 날들을 보냈다. nastya라는 우즈베키스탄 여인 때문이다.


 

금요일인 지난 22일 나는 난생 처음 국제전화를 하게 됐다. 국제전화를 받은 적은 있지만 걸어 본 적은 없다. 내 핸드폰으로도 국제전화가 될까? 검색해 보니 1분에 1,300원하는 국제전화요금은 너무 비쌌다. 첫 통화에 10여분은 통화했다. nastya가 통화 중에 이렇게 말했다. 수만리 먼곳에 있는 사람과 통화하니 그저 신기하기만 했다.

“전에 내가 결혼한다고 말했잖아요. 그런데 안했어요. 헤어졌어요.”

그 점을 특히 강조하면서 말하는데 어딘가 자연스럽지 못했다.

 이 말을 안 하면 안 될 것 같은 염원이 담겨있는 것 같아서다. 이어 내게 물었다.

“ 이 국제전화는 어떻게 했어요?”

그때는 내가 국제전화카드를 모르고 있을 때다. 듣고 보니, 전화하게 된 사정을 묻는 것이 아니고, 방법을 묻는 거다. 

“001로 했지요.”

“그러면 비싸요. 동대문 가서 사면 카드가 12,000원이에요. 싸요.”

나는 동대문 어디에 가서 어떻게 사는지 메일로 물었다. 하지만, 답이 없다. nastya는 모레, 회사를 그만 두고 쉬니까 그 날 전화를 하라고 말했다. 그곳은 이곳보다 4시간 시간이 빨랐다. 그 말대로라면 그녀는 지금 회사를 그만 둔 상태다.

 

 국제전화카드를 사고 나서 김밥 파는 집으로 갔다. 김밥 1줄을 2,000원에 샀다(서울에서는 1,000원).

김밥 파는 아주머니가 내 배낭을 보더니 한 마디 했다.

“밤 따러 가세요?”

“아니요.”

“배낭을 보니 밤 따러가는 줄 알고.”

“어디, 밤 따는 데 있어요?”

“그럼요. 고려산 옆에 ‘고비’라는 데가 있어요.”

“그래요? 들렀다가야겠네요. 많이 따면 팔고가지 뭐.”

“따는 거라기보다는 줍는 거예요.”

김밥 파는 집에서 나온 후 시내버스를 타고 가다가 국화리를 지나 ‘고비’인지 모르는 고개를 넘자마자 확신없이 내렸다. 운전기사도 어디에 밤 따는 사람들이 많이 내리는지 몰라서 길가에 세워 둔 차량들이 많은 곳에 무작정 내려 달라고 말했다.

 

 길가를 따라 걷다가 산 쪽을 보니 밤을 줍던 여인이 용무가 급한지 하얀 엉덩이를 까 내린 채 용무를 보다가 눈길이 마주치자 움츠렸다. 수십 년 만에 보는 생경한 광경이다. 잠시, 그 자리를 피했다가 다시 그쪽으로 갔다. 그 여자도 지금은 길가까지 내려왔다. 엉덩이를 보고나니 이제는 얼굴이 더 궁금했다. 어차피 나는 밤 줍는 곳을 물어야 했다. 아무곳에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얼굴을 보니 엉덩이를 볼 때의 엷은 흥분은 차분히 가라앉았다.

“이리로 가야 밤을 따나요?”

“산위로 가면 많다고 해요. 아래는 별로 없더라고요. 다 따갔나 봐요. 나는 그 여자가 가리키는 산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내가 길을 잃을까봐 걱정하는 말을 듣더니 한 마디 했다.

“골짜기를 따라 쭉 내려오면 돼요.”

그녀는 같이 온 남편을 잃은 모양이다. 산등성이를 향해 소리소리 지르며 찾았다.

 산등성이쪽을 향해 조금씩 올라갔다. 아줌마 말대로 밤은 별로 없다. 여자 둘을 만났다. 그들은 잘디 잔 밤톨을 담은 비닐봉지를 들고 있는데 양이 적다. 밤도 별로 없거니와 그나마 좀 있는 곳은 주인이 철조만을 쳤다고 투덜댔다.

 

 그 때 갑자기 조금 전 샀던 국제 전화카드를 사용하고 싶었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두어 차례 통화를 시도했다. 확신 없이 시도했지만 다행히 연결 됐다. 산속이라 그런지 이쪽은 잘 들리는데 그쪽은 음질이 떨어지는 듯 했다.

 전화를 거는 것도 꽤 귀찮구나.

 왼 손은 돋보기를 꺼내 쓰고, 그 손으로 국제전화카드를 쥔 상태에서 핸드폰을 들고, 오른 손은 핸드폰에 숫자를 눌러 통화를 시도했다. 겨우 연결되자, 일이 있으니 5분 뒤에 다시 하라고 말했다. 그러면, 다시, 왼 손 오른손 바꾸어 가며 , 돈보기, 국제전화카드, 핸드폰을 주머니 여기저기에 넣어야 했다.

 의미가 있다면, 난생 처음, 핸드폰으로 국제전화카드를 이용해 전화하는 방법을 익혔다는 점이다.

 

 nastya

 내가 친하게 지내려고 했으나 결혼을 전제로 사귀는 남자 친구가 있어 안 된다고 했던, 우즈베키스탄 출신의 미모의 여인이다. 그 때는 여자 나이 23세였다. 2년 전이다. 때문에 나는 그들이 ‘헤어지는 운명’ 이 되었으면 하고 바랬다. 하지만, 그들의 관계는 철옹성일거라고 생각했다. 그 후 여러 번 연락을 시도했지만 되지 않았다. 다행히, 그녀의 메일이 매개가 되어 다시 끈으로 연결됐다. 그리고는 자주 있을 수 없는 일이 느닷없이 다가온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산을 내려오는데 두세 그루가 있는 밤나무 아래에 밤이 많이 떨어져 있다. 열심히 주웠다.

아마, 두세 되는 되었다.

 그런데, 길이 어딘지 모르겠다.

당황했고, 사람들이 떠드는 곳으로 내려갔다.

 혼자 다니면 이래서 위험하구나.

 사람들은 내가 주운 밤을 보더니, 그렇게 잘아야 맛이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길을 잃고 헤맨 과정이 고려산 가는 지름길을 찾는 것과 일치했다. 결과가 그랬다.

 적석사 들어가는 입구로 가로질러 나왔기 때문이다.

 일이 잘 풀리려면 이렇게 되는구나.

 

 산속에서 나오니 통화는 잘 될 것 같다. 공기는 맑고 하늘은 푸르다. 그 하늘을 보면서 다시 통화를 시도했다.

 nastya는 2년 전보다 말을 잘했다. 어머니는 44세라고 말했고 아프다고 했다. 본인은 한국인 회사에서 번역을 했다고 말했다. 러시아어가 모국어이고 영어는 학교에서 배웠다고 했다. 내가 홈페이지에서 본대로 그 나라 한 달 월급이 평균 10만원 정도냐고 물으니 그렇다고 했다.

 한국에 오고 싶은데 여비 1,100달러가 없어서 못 온다고 말했다. 의문이 있다. 2~3년간 알뜰했으면 2천만 원은 벌었을 테고, 그 정도라면 그렇게 쉽게 달아날 돈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간 벌은 돈은 뭐했느냐고 물으니 8개월 있으면서 다 쓰고 있다고 말했다. 그곳은 돈벌이는 적은데 집세며 쓰이는 지출은 이곳과 같다고 말했다. 이해가 안 갔다.

 계속 걸으면서 통화했고, 고인돌 유적지 안내판이 있는 입구를 지났다. 20분 이상의 통화였다.   

 내게 거기에 놀러 안 오느냐고 물었다.

 나는 갑자기 어떻게 가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만약 가게 된다면, nastya집으로 가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어 그건 안 되고, 호텔이나 아파트를 일주일 정도 얻어 묵게 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낮에는 함께 있게 된다고 말했다.

 아!

 이것이 한 때 신문에 떠들썩했던 일들이구나.

 일본인들이 그랬고, 한국인들이 동남아시아에 나가 물의를 빚는..., 그래서, 현지처 운운하는. 번역도 하고 관광객이 있으면 안내도 하고 통역도 하지만, 결코, 행복하지 않는 그런 사람들인가. 이런 것도 순전히 내 짐작뿐이지만.

 만약, 그렇다면 내가 생각하는 순수한 교제와는 애당초부터 거리가 먼 일이다.

 nastya는 헤어진 남자 때문에 가슴 아픈 일도 없고, 그냥, 나쁜 사람이라고만 말했다.

어쨌든 내게는 새로운 세계였다.

 

 나는 부부싸움이 잦을 때마다 처자식에게 버림받으면, 아니, 그러기 전에 먼 나라에 새로운 삶의 근거지를 마련하고 싶다고 말하곤 했다. 농담으로 끝날지 모르지만, 계속 상처받는 잔소리가 그렇게 진저리나게 이어진다면, 알아서 떠나겠노라고 내뱉은 적이 있다.

 다시, 또, 그런 말이 오가면 즉시 떠날 곳을 마련해 두고 싶다.

우즈벡이든 어디든.

 그런데, nastya의 말을 들으니 꽤 실망스럽다.

 살기가 힘든 곳으로 우리나라 70년대 인 듯 했다.

 

 날씨가 좋다.

 이 길로 가는 것이 맞는가.

 아직은 인터넷 출력물을 보는 것이 낯설다. 그 때 인라인을 타는 어린 계집애가 지나가기에 불렀다. 출력물을 보여주며 적석사 가는 길을 물었다. 귀여운 그 애는 반복해서 열심히 설명했다.

“고인돌이 잇는 이곳으로 들어가면 위험해요. 언니가 들어갔다가 돌 때문에 이마를 찢기기도 했거든요. ”

 내가 알아듣지를 못해서 그렇지, 꽤 조리 있게 설명하려고 애썼다.

‘이리로 쭉 내려가다가 큰 길이 나오기 전에 왼쪽으로 가면 돼요’ 하면 될 것을 ‘삼거리가 나오는데.......’ 듣고 나니, 오히려 더 모르겠다. 그러면서도 설명 문장 자체는 진지했다.

“아이고. 똑똑하고 예쁘구나. 너는 몇 학년이니?”

그 애는 칭찬을 듣더니 무척 기뻐했다.

 

 가파른 시멘트 포장도로를 한참 오르니 적석사가 있다. 혼자 하는 등산이라 힘든 건지, 원래 힘든 곳인지 모르나, 힘도 들고 땀도 흘렀다.

 어느새 적석사 앞이다.

낙조대 가는 길과 등산로에서 갈 길을 몰라 망설이는데, 80세가 넘는 할머니가 지팡이를 짚은 채 다가오더니 한 마디 했다.

“등산로는 이쪽으로 가야 해.”

 그러더니, 자기를 따라오라고 말했다. 할머니는 한 달 전에 교통사고를 당했다는데도 정정했다. 비실비실한 엄마가 생각났다.

“우리엄마도 할머니처럼 정정하면 좋겠는데... 척추를 다쳐서 그만...”

 그 말을 듣더니 노인 할머니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가로챘다.

“내 말 잘 들어. 내가 이야기해 줄께. 1호선 타고 가다가 경희댄지 그 다음역에 내려. 거기서 2번 마을버스를 타는 거야. 그리고, 농협, 어디에 있는 우리정형외과에 세워달라고 해. 내가 거기에 다니고 있는데 점점 좋아지거든.” 

 나는 그 말도 들을 수 있는 흔한 정보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워낙 자신 있게 권하는 서슬에 압도됐다.

고맙다고 생각했다.

 이번에는 다른 말을 했다.

“우리 식구들 하고 여든 둘인 남편이 저 아래에서 쉬고 있는데, 남편이 옛날에 같이 밤을 따던 일이 생각났는지, 나를 보고 밤을 주어 오라는 거야. 내가 어디 가서 밤을 따와.”

 그러더니, 이제는 여기까지 올라왔으니, 내려가겠다고 말했다.

나는 병원도 열심히 알려주던 일이 고마워서 배낭을 끄르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만 가시려구요. 제게 밤이 좀 있느니 드리지요. 팔기에는 적고 먹기에는 많아요.”

 

 그러고 보니 닮을 그릇이 없다. 할머니는 내가 가져가라고 간곡히 말하자 치마를 벌렸다. 밤을 쏟아 넣는데 내게 남은 것보다 더 흘러 들어갔다.

“어이구, 이렇게 많이. 고마워서.”

 할머니 얼굴이 20대초의 소녀처럼 빨개졌다. 물들여진 얼굴로 기뻐서 환하게 웃었다. 할머니의 오래 된 혈관 밑바닥에 가라앉았을 붉은 색소가 요동을 치는 것 같다. 기쁨이라는 것은 혈액 순환에 무척 좋구나.

 낙조봉과 고려산 사이에 있는 억새밭은 초라했다.

 그러고 보니, 할머니 말을 듣지 말았어야 했다. 왼쪽 낙조대로 해서 낙조봉, 고려사로 올라와야했다. 할머니와 등산로로 올라왔으니 낙조봉에서 다시 낙조대로 갔다가 되돌아온 다음 고려사로 향해야 했다. 억새밭에 실망했고, 고인돌 몇을 지나면서, 또, 실망했다.

 시골에서 많이 본 듯한 저 모습들이 고인돌이라고?

내가 생각했던 고인돌은 지금 생각하니 ‘얹은 돌’이다.

 고인돌은 수십 년 전 참새를 잡으려고 덥치기를 살짝 고여 놓은 것처럼 단순했다.

 저것이 고인돌이라.

 고려사 가는 길은 생각보다 길고 지루했다. 송림이 볼만했다. 양옆의 갈참나무도 좋다. 진달래 철이 제격인 산이다. 군부대 앞까지 왔다. 땀이 적은 편인데다가 매일 6km를 걷는데도, 오늘은 땀에 젖고 다리가 아팠다.

 힘들구나.

 옛날, 다섯 색깔의 연꽃이 있어 불심으로 하늘에 날려 떨어진 자리에 절을 지었다는 전설을 간직한 산이다. 흰꽃 떨어진 곳은 백련사, 붉은 꽃 떨어진 곳은 적석사 등등의 이름을 지었다는데 아름다운 전설 이면에는 또 하나의 오기와 아집과 억지가 있었다.   

 떨어진 자리가 마음에 안 들어 다시 옮겼다는 내용이 그렇다. 결국, 하늘에 날린 사람 마음이다.  

 백련사 앞에는 비구니 들이 파는 찻집이 있다. ‘명상’이라는 음악이 듣기에 그만이다.

 5천 원 하는 솔잎차 한 잔에는 알코올이 그윽했다. 양도 많고 맛과 향기도 진했다. 술 못 마시는 사람은 피해야 했다.


 

 걸어서 내려오는데 찻집에서 차 마시던 부부가 차를 몰고 내려가다가 나를 보더니 태웠다. 그리고, 고맙게도 서울에서 내려온 강화버스터미널까지 태워다 주었다. 부부가 정답게 차를 몰고 다니는 모습도 그렇고, 나처럼 딴 여자를 생각하며 혼자 다니는 모습도 그렇고, 어찌됐던 개성있게 영위하는 삶의 한 형태였다.

 아침에 갔던 김밥집에서 아주머니의 너스레를 들어가며 비빔밥을 먹었다.

 버스를 타고 신촌으로 가다가 ‘송정’이라는 곳에서 내려 5호선 전철을 탔다.

완전히 어두웠다. 찻집에서 만난 부부가 차를 태워주지 않았다면 무척 늦었을 거다.

 오늘 산행은 즐겁고 유쾌했다.

 집에 오니 9시가 다 됐다(06.09.24. cnilter@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