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잡히지 않는 그리움을 찾아
             헤맨 100km의 힘겨운 방황

  

□ 산행일시 : 2004. 10. 14. 04:00 ~ 10. 15. 21:00 (41시간)


□ 산 행 지 : 지리산 동부능선과 주능선 왕복종주(약 100여km)


□ 날    씨 : 최고의 쾌청한 날씨


□ 참 가 자 : 늘빈자리


□ 준 비 물 :


   ◎ 의류


      ▷ 산행복장
         상위 : 모자, 긴팔짚티, 장갑
         하위 : 마라톤용 팬티, 산악마라톤용 스판바지, 발가락양말, 발목싸개, 부릎보호대,스패츠


      ▷ 휴대복장 : 
         상위 : 고어자켓, 동계짚티1, 방수용긴장갑1, 보온장갑1
         하위 : 추동바지1, 스판팬티1, 양말2켤레, 깔창1조, 발목싸개1조.
     
   ◎ 장비 및 기타


      ▷ 장비 : 헤드렌턴, 비상전등, 스틱2
      ▷ 기타 : 건전지AAA 4개, 디카
      ▷ 물통 : 1리터1개, 0.5리터 2개, 컵.
      ▷ 개스버너 및 코펠1, 개스1통, 수저.

  

   ◎ 상비약 : 소화제, 지사제, 소형밴드, 후시딘, 소염제파스. 붕대.

  

   ◎ 먹거리 :


       김치1통, 육포2봉, 사탕2봉지, 행동식6, 햇반4개, 봉지육계장2, 라면2, 소새지10,
       방울빵1봉지, 햄1통, 기타.........

  

□ 산행구간 및 시간 :


   ▶ 왕로 : 어천(04:00) → 웅석봉(05:50) → 밤머리재(07:10) → 왕등재습지(10:05) →
                  새봉(11:00) → 국골사거리(13:00) → 천왕봉(15:10) → 영신봉(18:00) →
                  연하천(20:20) → 노고단(23:50)

  

   ▶ 복로 : 노고단(24:00) → 연하천(03:30) → 벽소령(05:00/06:00) →
                  장터목산장(10:05/10:55) → 천왕봉(11:37) → 국골사거리(13:53) →
                  새봉(15:20) → 새재(16:20) → 동왕등재(19:15) → 밤머리재(21:00)

  

   ▶ 소요시간 : 왕로 20:00 + 복로 21:00 = 41시간
 

< 산행기 >

  

◎  잡히지 않는 그리움이 묻힌 곳 지리나라

  

만산홍엽의 설악산 소식이 방송과 언론매체들을 통해 귓전에 들려온다.
10월 중순경이 단풍의 절정기라고 ..........

  

그러나 마음은 지난 추석연후 때 실패한 무박태극왕복종주에 대한 깊은 반성과 성찰로
가득 차 있어서 설악산의 유혹스런 소식도 내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다.

  

겉으로는 설악 단풍을 다녀와야 하는데..... 하면서도 속으로는 더 추워지기 전에
지리의 품에 다녀와야 한다는 짙은 열망으로 가득하다.

  

결국, 지리에 떨구고 온 미련과 잡히지 않는 그리움을 찾아 나서기로 정하고 몸을 추스르는데,
무박태극을 다녀 온지 10일 밖에 안되어서 그런 것인가 몸 구석구석이 아직도 삐걱삐걱이다.

  

겨우 런닝 10여 키로미터를 준비운동이랍시고 하고 10월 13일 19:20분 경 천안IC에
애마를 올려놓고는 잡히지도 않을 그리움을 찾아 지리의 품을 향해 애마를 채찍하며
마음의 창을 열고 달리면서 산행의 밑그림 속으로 몰입되어 간다.

  

내게 준비된 것은 64시간(14일. 04:00~16일. 20:00)과 8끼의 먹거리, 15kg은 족히 될 듯한 배낭,
그리고 근래에 2번의 무박태극종주를 무사히 완주한 체력과 장거리 산행의 경험,
더 있다면 -10kg은 될 듯한 열정(?)이 아닐까?

  

어천에서 출발하여 어디까지 갔다가 올 것인가?

  

덕두봉을 찍고 오기에는 주어진 시간이 좀 부족한 것 같기도 하고,
또한 단독으로 무박태극왕복종주를 한다는 것이 만용을 부리는 것 같기도 하고,
........고민 고민에 헤매고 있는 사이 휴게소로 접어든다..

  

덕유산휴게소에 들어 저녁을 먹고는 3끼니(14일 새벽, 아침, 점심 분) 김밥을 주문하여
이미 꽉 차 버린 배낭의 틈을 비집고 밀어 넣으니 출산 직전의 모양새의 배낭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23:00시 경 어천 민박집에 도착하여 안병두 사장님께서 따끈따끈하게 만들어 놓이신

방에서 편안한 잠자리를 맞이한다.
 
◎ 무거운 배낭과의 한판승부로 쩔쩔매는 동부능선 30km
   (어천 04:00~ 천왕봉16:10, 12시간 10분 소요)

  

* 어천마을의 들머리 어린내천

  

간단한 세면 후 바로 잠자리에 들어 새벽 03:30분 핸드폰 알람소리의 도움으로 기상이다.

주섬주섬 옷을 입고 배낭을 챙기고 동시에 준비해온 김밥 한 무더기를 가볍게 해치우고는
밖으로 나오니 민박집 사장님께서 염려가 가득 찬 표정으로 손전등을 들고 나오시며
들머리까지 동행하신다고 나서신다. 넘 송구스러워 몸 둘 바를 모르겠다.

  

04:00분 문제가 발생하면 전화로 도움을 청하라는 안사장님의 작별인사를 뒤로하고
들머리에 들어서니 시원한 바람과 어린내천의 물소리가 오른쪽 귀청을 노크하며
동행을 하겠다는 싸인을 보내온다.......
(그리여, 오늘은 부드럽고도 거칠게 밀어 붙일란께 손발을 맞추어 보더라고..........쩝)

  

달콤한 새벽잠에 취해있는 주위를 살펴보노라니,
칠흑 같은 어둠에 별들이 초롱초롱 빛나고 있으니 날씨가 쾌청함을 알 수 있고,
불어오는 바람은 산뜻 하고도 시원한 느낌이 들며 마음을 차분하게 해주는 걸 보니
기온도 적당하고 몸의 컨디션도 만점인 듯하여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될 징조로다.

  

지리산에 들면서 실로 얼마 만에 맛보는 맑은 날씨인 것인가.

5월말과 9월말에 완주한 2번의 무박태극종주에서도 늘 비와 안개와 운무와 힘겨운 일전을
치르며 헤쳐 나왔기에 이번에는 제발 맑은 날 이였으면 했는데.....

  

하나님이 보우하사, 오늘의 새벽 기운으로 미루어 보아
지리산의 주인장께서 날 제대로 한번 품어 주실 요량인 모양이로다.

< 웅석봉 중턱에 임도에 있는 안내판>

  

어린내천을 오른쪽에 두고 몇 개의 건수가 된 실천을 지나 15여분을 넘어서니
등로가 왼쪽 사면쪽으로 휘어지면서 구절양장식 오르막 초입으로 진입한다.

  

다시 5분 후에 묘지 옆을 지나면서 발목이라도 잡아채면 어쩌나하는 순간적 공포가
뒤통수를 후려치는 기분을 느끼면서 뒤돌아서니 시원한 바람이 무거운 배낭에 짓눌린
어깨 위와 이마를 스쳐지나가며 청량감을 선사하는 등 제 구실을 다하고 있는 듯 하다.

  

어지럽도록 춤추는 곱창 길(?)의 진수를 보여주는 오르막길이 임도가 나올 때까지
이어진 후 9부 능선의 빡센 오르막이 나오면서 웅석봉이 호락호락 정상을 내어주는
봉우리가 아님을 알리기라도 하듯 힘겨운 숨결을 몰아쉬게 한다.

  

* 얌전해진 웅석봉

  

9부 능선을 넘어 숨을 고르는 완만한 능선이 나오면서 웅석봉의 상징인 곰돌이
그림이 그려진 정상석이 맑게 갠 새벽하늘을 지키며 낯선 방문객을 익숙한 솜씨로
맞는 듯 하다.

<웅석봉 정상석>

  

05:50분 경 동부능선 최고의 전망대 웅석봉,

  

아직은 어둠이 짙어 인근 도시와 마을의 불빛들이 질서 없이 빛나고 있을 뿐이지만.
운무가 없는 것만으로 행운인 것을, 해돋이의 붉은 기운을 덤으로 보여주려는 듯
동녘의 새아침이 청명한 하늘가에 연붉은 속살을 드러내며 미소지으려 한다.

  

지난번에 왔을 때는 곰순이를 데려 갈까봐 곰돌이가 웅석봉을 얼마나 심한 연막탄으로
위장을 했던가! 오늘은 전혀 무신경인 것으로 보아 곰순이가 집을 나간 것인가?

  

웅석봉에서 5분의 달콤한 여유를 뒤로하고 다시 출발이다.

  

웅석봉 이래 이어지는 편안한 흙 길, 그 위에 나뒹구는 낙엽
늦가을의 정취를 일깨우게 하고 발굽에 밟히어 바스락거리는 낙엽소리는 홀로 가는 길이
아니라 지리산의 가을과 함께 하고 있음을 듯 쉼 없이 속삭여 주고있는 듯 하다.

<왕재안내목>

  

06:20분 경 웅석봉을 떠난 지 30여 분을 거의 내리막길을 룰루날라 왔더니
           어느새 왕재(925m)을 가리키는 안내목이 앞으로 다가온다.

  

더불어 동녘의 붉은 기운이 막바지에 이른 듯 금방 터질 듯한 혈색으로 시선을 유혹하며
발걸음을 멈추어 뒤돌아보게 하는데.....

  

해돋이의 기운을 의식하며 전망 있는 곳을 물색하지만 무성한 나뭇가지 때문에 쉽지가 않다.
겨우 디카에 담으며 다시 밤머리재를 향한 걸음을 재촉한다.

<나뭇가지 사이로 겨우 찍은 해돋이>

  

이제는 햇살의 기운이 완연하여 숲 속 깊숙이 까지 스며들어 청량감을 더해주고 있고
비틀어 짜면 청포도 쥬스라도 쏟아 질 것 같은 푸른 하늘빛 아래 능선 좌우로 조망되는
동부능선의 그림은 행복한 산행의 진수를 맛보여 주고 있는 것이로다.

<따사로운 햇살이 숲속으로 스미어 평화로움을 선사하고 있다>

  

아침햇살에 반듯한 이목구비를 자랑하듯이 앙팡지고 늠름한 모습으로 밤머리재 한쪽 사면을
지키고 있는 도토리봉을 바라보며 제법 긴 통나무 내리막길을 조심스럽게 내려와

07:10분 경 밤머리재에 도달하나,
주위가 너무나 조용하고 한적하여 왠지 불안한 마음에 쉼 없이 토토리봉을 넘본다.

<밤머리재 계단 내림길에 바라본 도토리봉의 위용>

 

* 도토리봉의 초입은 언제나 난코스더라

  

출입금지 안내문을 미안한 곁눈으로 슬쩍 쳐다보며 갈대와 싸리나무로 범벅이 된
도토리봉 초입을 들어서는데 잡목들이 앞길을 어지간히 방해를 하는 구나.

  

25분 여 동안 빡센 오르막을 뒤도 돌아보지도 않고 쉼 없이 오르니
07:35분 경 도토리봉의 정상이로다.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준비한 김밥과 소시지로 도토리봉 정상에서의 아침식사,

노동후의 먹거리는 역시 꿀맛이로구나.............10여분의 휴식시간이 얼렁뚱땅 지난다.

  

10분의 달콤한 먹거리 시간으로 빠져나간 에너지를 보충하고 도토리봉을 나서는데
잡목제거 작업이라도 하는 것인지 등로에 잡목들을 베어 놓아 걷기가 상당히 불편하다.

  

그래도 동부의 길들은 대부분 흙 길이고 그 위에 융단 같은 낙엽이 쌓여 있어서
편하면서도 일부는 조금 미끄러운 듯 하다.

  

쾌청한 하늘을 머리에 이고 좌우를 조망하며 상쾌한 기분으로 신나는 듯 걷고 있지만
8끼 식사와 버너, 코펠, 그리고 동계 옷까지 짊어진 배낭의 무게는 몸을 어지간히 짓누르고 있다.

  

앞을 가로막을 듯 높다란 봉이 다가온다 했더니 동왕등제인 모양이다.

<동왕등재의 정상>

 

08:35분 경 경사도가 심한 정상을 올라 뒤를 돌아보니 웅석봉이 생각했던 것보다는
웅장하고 자세가 그럴 듯 하여 동부능선의 장자로써 손색이 없는 것 같다.

  

가야할 앞쪽으로는 천왕봉에서 중봉으로 이어지는 등줄기 능선이 하늘가에 닿아 있고
천왕봉엔 새벽녘에 운무가 서성거리더니 상고대가 피었는가 희긋희긋한 모습이다.

<새벽부터 해돋이까지 운무에 쌓인 천왕봉 부근.....아마 저구름이 상고대를 만들었을 듯>

  

천왕봉을 깃점으로 일사분란하게 그어지는 능선들은
밝은 햇살아래 졸음에서 벗어나 기지개를 펴며 양지와 음지의 조화 속에
청포도 즙이 떨어질 듯한 하늘빛을 받으며 평온한 아침을 맞는 생기가 넘치는 모습이로다.

<청명한 하늘아래 동부능선의 아침이 점점 무르익어 가고 있다>

  

동왕등제의 전망감에서 벗어나 몇 개의 크고 작은 봉들을 넘고 오르며 내려왔을까...

왕등제의 능선을 벗어나 왼쪽사면으로 난 등로를 따라 내리막을 내려오노라니
목판다리가 쉬어가라 손짓하며 평온한 습지의 평화로움을 선사한다.

<왕등재습지를 건너는 다리>

 

10:05분 왕등재습지에 도착하며 잠시 숨을 돌린다.

  

습지에는 근간에 비가 뜸했던지 물 흐름이 아주 적다.
썩 내키지는 않지만 물을 쉽게 보충할 수 있는 조개골 지천까지 가기 위해 500미리을
보충하여 하늘빛에 비추어 보니 제법 맑은 빛을 띠고 있지 아니한가.

<왕등재습지 전경.............습지 물 맛이 괜찮더이다.....>

  

습지 주위에 물들어 가는 단풍의 흔적들을 살펴보며 배낭을 내리니 익숙해진 무게중심을
잃은 몸이 휘청거린다. 도무지 배낭이 가벼워진 흔적이 없다.

  

양지바른 곳에서 한숨 자고 싶은 충동을 겨우 달래며 10분간의 휴식을 접고 길을 나선다.

헝클어진 머릿결 같은 잡목지대를 지나 수철리로 갈리는 삼거리에서 왼쪽 오르막으로
길을 오르며 완만한 오르막과 내리막을 지난다.

  

10:30분 경 키를 훌쩍 넘는 갈대들이 길을 막고 앞길을 더디게 하는 외고개를 넘어서
완만한 능선을 올라 오른쪽으로 휘어지는 내리막을 쉼 없이 내려와 새재에 이른다.

<새재에서 바라본 경사면 마음이 넘 편안해지는 느낌>

 

* 새재의 왼쪽 사면의 전망은 평화로움의 극치이더이다.

  

10:00분 경 뭔가 정돈된 느낌의 새재안부와 오르막 산죽들의 도열된 모습이 시야에
잡히노니 푸른 하늘 속으로 투영되듯이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자연의 신비감 같은
것들이 나를 감싸 안아 주며 자연과 한 몸이 되는 듯한 착각에 빠지고 만다.

  

새재에서 한 모금 목을 축이고는 산죽들이 도열한 새재 오름 길을 넘는데, 배낭과 양팔을
잡고 늘어지는 산죽들의 방해공작을 달래며 오르려니 무척 숨이 차다.
 
11:00분 경 가파른 산봉우리들을 몇 개 넘고 마지막으로 20여 미터의 밧줄을 잡고 오르니
제법 널따란 새봉의 정상바위가 확 트인 전망을 선사하며 휴식의 공간을 제공한다.

<새봉 정상바위와 그 앞>

  

마지막 남은 김밥을 점심으로 가름하고 양말까지 벗어 던지고는 널따란 바위에 누워본다.

청명한 하늘, 바람도 솔솔, 나른함을 주는 따스함........혼자라는 생각은 온데 간데 없고
평화로운 기운만이 온 몸 속에 가득가득 차 있어 지리 품의 진수를 맛보고 있는 것 같다.

  

퍼질 듯한 몸을 다시 추스르며 30여분의 꿀맛 같은 휴식을 접고 새봉을 나선다.
저만치 11시 방향에 보이는 것이 독바위 이렷다.

<천왕봉 가는 길의 독바위>

 

11:45분 경 독바위를 곁눈으로 재보고는 산죽이 넘쳐대는 내리막길을 열심히 지나
30여분 후에 국골사거리 오름이 시작되는 안부에서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 100여 미터
를 올라 조개골 지천에서 장터목까지 필요한 1리터의 물을 보충하고 나온다.

  

이제부터는 오르막의 진수를 맛보는 구간임에 틀림이 없다.

물을 보충 후 30여분의 힘든 오르막을 치고 오르니 국골사거리의 능선이 초라하게 다가온다.

<국골사거리 이정표......넘 현대적인감?>

  

13:00분 하봉의 원줄기 능선이라 할 수 있는 국골사거리,

주위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안내판이 어색하기 짝이 없다
.....차라리 목판으로 안내목을 만들었더라면 괜찮을 걸..........

  

오르막 힘겨움에 국골사거리에서도 10분간 휴식을 하고 오르막을 계속 치고 올라
하봉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전망바위에 올라 무념의 세계를 넘나들며 지친 몸을
달래보지만 힘겨운 것은 마찬가지다.

<하봉 전망바위에서 바라본 국골>

 

13:50분 하봉 정상을 지나며 천왕봉을 바라보니 계곡이 무너져 내리는 상처 난
부분도 보이고 북쪽사면 일부에는 상고대의 흔적이 확연하다.

  

중봉을 지나고 천왕봉을 향한 발걸음은 무거운 배낭무게에 시달려 온 탓인가
온 몸에 힘이 하나도 없는 듯 흐느적거린다. 힘이 다시 충전될지가 걱정이로다.

<중봉에서 바라본 천왕봉의 상고대>

 

 

* 상고대로 치장한 천왕봉.

  

15:10분 인적도 드문 천왕봉의 정상석을 어루만지며 산야를 둘러본다.

 

<천왕봉 정상석>                                                      <모처럼 폼 잡고 주능선 바라보는 늘빈자리>

  

지나온 능선들이 천왕봉을 향해 머리들을 조아리고 있고 가야할 반야봉, 노고단이
주능선 2, 3위 봉으로써 늠름하니 자기들의 위치를 지키고 있는 듯하다.

  

수많은 계곡과 능선으로 이어지는 지리의 심장부에서 단풍의 흔적들을 찾아보지만
수려함을 찾기가 어렵다. 이미 단풍이 저버린 것인가.....


<천왕봉 북쪽 사면에 핀 상고대>

 

야간산행의 졸음터널 지리의 주능선 왕복구간 51km
    (천왕봉 15:10 ~ 노고단 23:50 ~11:37, 20시간 27분)

 

* 15:50분 평일에도 장터목엔 비박자들이 있더이다

  

몇 점의 그림을 디카에 저장하고 청왕봉을 내려서며 배가 고파 저녁을 장터목산장에서
해결하기로 하고 장터목산장에 이르니 제법 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다.

  

취사장은 공사중이라 들어갈 수가 없어 밖에서 버너에 물을 붙이고 라면전골(라면+햇반)을
끓이기 시작한다. 요리사의 능력과는 무관하게 궁중요리보다 한 수위인 라면전골이 익어가고
마침내 김치에 말아드니 온 몸에 기운이 넘치는 듯 힘이 오르고 자신감이 배가되는 등
힘들게 짊어지고 온 보람이 있는 것 같다.

<천왕봉에서 장터목 가는 길>

  

16:30분 장터목산장을 밀치며 점점 기울어 가는 햇살을 잡고 싶은 마음으로 주능선의
길로 접어든다. 온종일 쾌청한 날씨에 적당한 골바람이 부는 행운이 계속되고 있다.

  

밤 12시 이전에 노고단 안부에 도달을 목표로 속도를 높인다.

아름다운 연하봉을 넘어서고 촛대봉의 앙상한 민머리를 넘어서니 세석산장이 보인다.

  

18:00시 경 영신봉을 지나 칠선봉에 가까우니 해가 점점 기울어 반야봉의 머리위로
식어진 열기를 숨기려한다. 이제는 해질 녘 고요의 순간이 다가오려는 듯
바람의 이동이 줄어들면서 정적을 만들고 있는 것 같다.

  

19:00시를 지나면서 햇님이 반야봉 뒤로 숨어버리니 어둠이 지리산을 삼켜버리면서
멈추었던 바람이 일고 기온이 시원함에서 싸늘함으로 변해가고 있다.

  

19:20분 경 선비샘에 이르러 열량과 물을 보충하고 쌀쌀해진 날씨에 자켓을 꺼내 입는다.
하늘엔 별들이 총총거리지만 어둠이 이미 온 세상을 점령한지 오래,
주능선 너덜길은 익숙한 길이지만 그래도 불편하기 짝이 없다.

  

20:20분 경 연하천산장에 이르니 오픈 된 취사장에서 두서너 명이 저녁을 해결하고 있는 듯
버너불꽃이 예쁘게 보인다.

  

어천을 떠나 산행을 시작한지 18시간째....꽤나 긴 시간이 흘렀다.


체력의 회복속도는 점점 느려지고 반대로 지치는 속도는 점점 빨라지는 현장이
어느 시점에선가부터 이어지고 있다.

  

쓸데없는 시간낭비를 줄이고 서둘지 않고 꾸준히 가는 길만이 목표한 산행을 완성시키는
방법이라 생각하며 연하천산장을 그냥 지나치고 힘겨운 토끼봉의 오르막을 맞이한다.

  

이제는 다리만 무거워진 것이 아니라 눈도 점점 무거워지기 시작하는데....

일단은 졸음의 회피방편으로 화개재 계단을 오르며 작은 기합소리를 지르며 힘을 내어
졸음을 물리치고 삼도봉을 돌아 임걸령 샘터에서 물로 목을 축이며 졸음을 쫓아 본다.

  

무박태극종주를 하면서 늘 힘들었던 구간이 임걸령에서 노고단간 마의 졸음구간 이었는데....
이번에는 그렇게 힘겹게 졸리는 것은 아니지만 점점 세어진 바람이 차갑고 추위가 제법이다.

  

노고단 안부 가까이에 이르면서 덕두봉까지 가리라는 마음을 접고 노고단 안부에서 회차
하기로 하고 거센 바람이 불고 한기가 맴도는 노고단 안부에 오른다.

  

23:50분 노고단 안부에 도달하여 산불감시초소 문을 슬쩍 열어보니 `워라‘ 문이 열린다.
쉬고도 싶고, 배도 고파 산불감시초소를 잠시 전세 내어 버너에 불을 붙이고 온기를 쏘이며
찬 행동식과 소시지로 요기를 한다.

  

* 노고단 안부를 찍고 돌아서다.

  

24:00정각 이제는 바람도 상당히 세게 불고 있고 기온도 엄청 떨어져 방한 모자와 방한장갑,
그리고 두꺼운 보온 조끼까지 입고 노고단 산불초소를 나선다.

  

날씨가 추워지니 물도 먹히지 않고 졸음도 어느 정도 가신 듯 체력이 좀 회복되어

01:00경 임걸령샘터를 지나고 50여분 후에 삼도봉의 먹통골 거센 바람을 온 몸으로
저지하며 연하천산장에 이른다. 

  

03:30분 경 연하천산장 취사장
갈 때는 지나쳤지만 이번에는 잠시 들러 용변도 해결하고 굳어 있는 허리운동도 하며
잠시 여유를 갖고 옷매무새를 추스르며 나선다.

  

연하천을 출발하여 시간이 흐를수록 찬바람은 세어지고 기온이 더 떨어지는 듯 추워지며
졸음이 온 몸으로 퍼지면서 졸음이 제집인양 아우성이다.

벽소령산장을 그냥 지나기가 어렵다.

  

* 벽소령의 취사장에서 졸음과 한판승부

  

05:00 경 아직은 어둠 속에 고요히 잠들어 있는 벽소령산장 취사장문을 열고 들어서니
아무도 없다. 순간의 새우잠으로 졸음을 쫓을 요량으로 긴 의자에 동계 티를 깔고 몸을
움츠리며 배낭을 베개삼아 잠을 청해본다.

  

그러나 그냥 누워있기에는 날씨가 너무 추우니 졸리지만 잠은 오지 않고 몸만
피곤해지고 있는 듯하다.

  

다시 몸을 앉은 자세로 바꾸어 식탁에 몸을 엎드리고 배낭을 안은 채 잠을 청한다.
한기가 엄습해와 졸음은 해결 안되면서 체력만 소모되는 것 같다

산장 안으로 들어가면 훨씬 편하게 새우잠을 청할 수 있겠지만 무박을 지키기 위한
생각에 견뎌 보자고 마음을 먹는다.

  

20여분간 졸음과 대치하고 있노라니 한 분이 취사장 안으로 전등을 켜고 들어오신다.
이분은 벽소령에서 주무신 분인데 옆 사람이 코를 너무나 고는 바람에 견디지 못하고
날이 밝기 전에 미리 나왔다한다.

  

졸음이 해결이 안되니 야단이다. 궁여지책으로 아침을 먹기로 생각하고 버너를 꺼내
불을 붙이고 봉지육계장을 요리하기 시작한다.

  

맛있는 냄새가 진동을 하면서 졸음이 가시는 듯 정신이 맑아진다.
준비한 찰밥 햇반을 푹 삼듯이 덧 끊여 김치에 아침을 드노라니
이 세상이 내 세상이로세.

  

배부르고 따시고 힘이 솟는 듯한 행복감이 온 몸에 가득하니 만사가 형통 이련가.
잠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사라지고 기운이 만충되는 듯하다.

  

잠을 쫓고 아침을 해결하는데 벽소령산장에서 1시간 이상을 소비하고
06:00 정각에 벽소령산장을 나선다.

  

아침 바람은 차겁고 싸늘하지만 따끈한 국물에 몸을 덥혔으니 뭐가 문제이겠는가
새벽잠에서 깬 지리산의 곳곳에는 청량감이 가득 구름 한 점 없이 맑게 개어 있다.

해돋이가 시작되어 가는데 덕평봉 우측 능선으로 이어지는 등산로을 지나
선비샘(06:40)에 이른 사이 해돋이는 아쉽게도 지나가고 만다.

<선비샘을 돌아치며 억지로 한장......>

  

07:35분 경 아침 햇살에 밝은 미소로 화답하는 칠선봉의 언덕을 지나

08:15분에 영신봉을 통과하여 완만한 내리막 세석평전을 가로지르니 언제
불었냐는 듯 능선바람은 잦아들고 따스한 햇살이 온화한 평화로움을 선사하고 있다.

<칠선봉의 모습>

  

하늘엔 지평선 모퉁이에 흰 구름 몇 점 있을 뿐 그야말로 눈부시도록 쾌청이로다.
백무동 갈림길 계단에서 잠시 휴식으로 힘을 충전하고 촛대봉을 쉼 없이 15분만에
넘는다.

  

09:47분 크고 작은 암봉들이 모여 뭔가 다정다감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분위기 같은
연하봉을 아쉬운 마음으로 그냥 지나치며

<넘어가면 연하봉이 나오더이다>

 

10:05분 장터목산장에 도착하여 중식을 빨리 먹고 출발하기로 하고 다시 버너를 가동하여
라면전골(라면+햇반)에 햄까지 추가하여 멋들어지게 요리하여 먹고는
가면서 먹기 위해 햇반 하나를 산장에서 구입하여 버너에 데워서 담는다.

<장터목에서 천왕봉 가는 길에서>

 

◎ 되돌아 온 동부능선 밤머리재에서 걸음을 멈추다
   (천왕봉 11:45 ~ 밤머리재 21:00, 약22km, 9시간 15분) 

  

* 어두워지기 전에 밤머리재에 도착해야 하는데....

  

10:50분 중식을 해결하고 서둘러서 장터목산장을 나선다.
천왕봉을 오르는 길에 남해을 바라보니 바다가 보일 정도로 날씨가 화창하게 맑다.

  

11:37분 경 천왕봉을 하단부를 지나오는데 정상석 부근에서 어느 단체가 행사 비슷한 것을
하는 모양이라 사람들이 많고 무척 산만하여 그냥 지나치며 중봉을 향해 발을 돌린다.

  

중봉을 지나고 하봉으로 보이는 몇 개의 암봉들을 오르락내리락 거리며 지나오니 마지막에
있는 전방바위가 잠시 쉬어 가라한다.

발가락과 발바닥이 너무 아파 양말까지 벗고 안마를 20여 분 하고 나니 좀 나은 듯 하다.

  

하봉 전망바위에서 휴식을 끝내고 지루하게 얼마나 내려왔을까

금방 다가올 것 같았던 국골사거리(13:53)가 한참 만에야 나타난다.

  

계속되는 내리막길....발끝이 상당히 아파 온다. 물이 부족하여 조개골 지천에서 물을 보충해야
하는데 귀찮아서 그냥 지나친다.

<독바위를 아래에서 바라보니 제법 웅장하고 그럴싸 하더이다>

 

14:53분 독바위 근방을 지나며 독바위를 아래에서 올려다보니 원추형 받침이 상당히
웅장한 하고 앙팡져 보인다. 키가 넘도록 큰 산죽들이 등로에 진을 치고 몸싸움을 하듯
온 몸을 부딪치며 길을 방해한다.

  

15:20분 새봉에 당도하여 저녁용으로 데워온 햇반과 소시지로 해결하고 또 출발이다.

다리의 힘은 다하여 반사적으로 걷고 반사적으로 몸이 움직이는 듯이 모든 것들이
일정한 속도와 힘으로 움직이는 기현상이 일어나는 느낌이다.

  

16:20분 발가락이 원망하는 새재 내리막 산죽길,
다리의 힘을 다 빼내는 기분이다. 날씨가 더웠던 관계로 식수가 바닥이다.

할 수 없이 새재 아래 계곡물을 받아 올라 오르라고 15분이나 소비한다.

해가 서산으로 기울어져 숨어 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서둘러서 진행을 하지만 지친 몸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고 힘만 들뿐이다.

  

17:00에 외고개를 통과하여

17:27분 경에 왕등재습지를 지난다.

<햇살을 잃어 어두워져 가는 동부능선>

  

왕등재습지 이후 지루한 오르막을 쉼 없이 오르며 부지런히 진행하지만
동왕등재에 이르기 전에 이미 어둠이 천하를 덥고 앞길을 더디게 하고 만다.

  

19:15분 경 갑자기 희미해지는 헤드랜턴을 의심하며 동왕등재에 오른다.
동왕등재 정상에서 헤드랜턴과 비상랜턴을 점검했더니 둘 다 희미하다.

헤드랜턴은 어제 밤에 새 건전지로 바꾼 것인데 벌써 방전 된 모양이다.

  

또 고민에 빠진다 희미한 헤드랜턴으로는 도저히 어천까지 가기가 힘들다.
시력까지 안 좋은 상황에서 랜턴마저 어둡다면 더욱 어려울 뿐이다.

  

하는 수 없이 어천까지 가야한다는 마음을 접고 빈박집 안병두 사장님께 핸드폰을 띄워
밤머리재로 마중을 나오십사하고 도움을 청하니 쾌히 응답하시며 호응을 해주신다.

  

어두운 내리막길을 조심스럽지만은 빠른 속도로 내리치고 다시 몇 개의 봉을 오르며
도토리봉을 향해 올빼미 눈이 되어 힘겹게 진행한다.

  

그런데 동왕등재에서 도토리봉 사이의 중간 정도에서부터 도토리봉 정상까지 능선상의
잡목을 베어 등로 주변에 놓아두는 바람에 길이 엉망이고 표지기가 달린 나무들이
거의 베어져 제대로 길을 가고 있는 것인지 자신이 없어지는 불안한 산행이 이어진다.

  

낮도 아닌 밤에 알바를 하게되면 그만큼 지연되고 고생을 하게되니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것이 아니다.

  

곳 나올 것 같은 도토리봉은 안 나오고 작은 봉우리와 내리막이 수없이 지나간다

이번에는 도토리봉 헬기장이 맞겠지 하고 올라보면 헬기장은 온데 간데 없고 잡목들뿐이다.

빠르게 진행한다고 하지만은 등산로에 베어 놓은 잡목들 때문에 생각보다 더딘 모양이다.

동왕등재 정상을 떠난 지 1시간 20분만에 도토리봉 헬기장에 도착이다....휴

  

안병두 사장님께 전화를 걸어 도토리봉 정상에 당도했음을 알리고는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도토리봉 내리막 길을 터덜터덜 내려선다.

  

몸은 먼 길에 지쳤고 마음은 어천까지 되돌아가지 못하는 어정쩡함에 지쳤는가.
도토리봉 내리막길이 한없이 길고 가파르고 지루하기 이루 말할 수 없다

  

21:00  밤머리재 아스팔트 위에 스틱을 찍으니 안병두 사장님이 차를 대기시켜
놓으시고 기다리고 계신다. 반가움과 미안한 마음이 교차하는 이중적 감정을 맛보며
차에 오른다.

  

◎  후기

 

잃어 버린줄만 알았던 것들을 찾아 나선 긴 여행길...........

어딜 가나 스스로 알아서 찾아야 하는 길이기에 서둘렀지만 아무리 찾아도 없더이다.

 

다시 되돌아와 남아 있는 것은 또 다시 지리의 품으로 가야한다는

쓸쓸한 마음뿐....인간의 끝 없는 욕망의 부질 없음을 일깨운 힘겨운 여정이었습니다.

 

그래도 그래도 또 가고싶은 마음이 한 구석에 남아 있는 것은

아직도 살아 있는 미완의 인간이기 때문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