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상산 산행기

 

ㅇ 일시 : 2004. 10. 31(일)
ㅇ 위치 : 전북 무주군 적상면
ㅇ 코스 : 서창매표소-장도바위-서문-안부-향로봉-서창매표소(약7km. 3시간30분)
ㅇ 찾아가는길 : 대진고속도로-무주I.C-좌회전(무주리조트쪽)-약5분진행-좌회전(쌍용자동차간판)- 서창매표소

   

   낙엽비 소리를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 가요? 우수수 낙엽이 비처럼 쏟아져 내리는 숲 속의 한가운데에 서 계셔 본 적이 있으신 가요? 떨리는 듯한 그 소리와 그 흔들림과 그 바람과 그 햇살과 그 가슴 아픔을, 깊어 가는 이 가을 느껴 보신 적이 있으신 가요? 만일 아직도 일상에 얽매어 눈 끝으로만 가을을 느끼고 계시다면, 떠나보시라! 떠나서 저 깊어 가는 가을 숲 속에 앉아 낙엽비를 맞아 보시라! 흥건히  젖어 가는 그대 몸으로 몰려드는 가을을 느껴보시라!
  
   적상산 한적한 등산로를 아내와 함께 손잡고 오른다. 이른 새벽 나지막하게 번지는 솔냄새가 코를 즐겁게 해주는 등산로다. 아내는 아직 완전하지 못한 몸이지만 가만가만 잘도 오른다. 오랜만이다. 아내와 단둘이 산행을 하기는. 어쩜 아이들이 생긴 후로는 처음인 것 같은데---더 자주 함께 하는 시간을 가져야겠다며 아내 손을 꼬옥 잡는다. 대전에서 이곳까지 오는데 채 30분도 걸리지 않았는데, 아내와 단둘이 산 속에서 손을 잡기까지는 10여년이 넘게 걸리다니!! 무심하였던 것인지, 어쩔 수 없었던 것인지--- 
  

   산행 길은 산책로처럼 넓고도 완만하다. 토질도 흙과 낙엽뿐이어서 아내와 함께 하는 오붓한 산행에는 더없이 적당하다. 커다란 갈지 자로 나 있는 호젓하고 넉넉한 산길. 산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데이트를 하는 기분이 난다. 그 길을 아내와 함께 이런 얘기 저런 얘기 나누며 오르다 보니 어느새 장도바위다. 최영 장군이 단칼에 바위를 치어 길을 내었다는 장도바위다. 나무와 숲뿐인 산길에서 장도바위는 마치 다른 세상으로 통하는 동굴처럼 모습을 드러낸다. 바위 반대편에서 스며드는 햇살은 무슨 구원의 불빛처럼 눈이 부시다. 전설이라고는 하지만 영락없이 칼에 맞은 모습 그대로인 장도바위. 어떻게 저 커다란 바위가 균일하게 절단된 모습으로 서 있을 수 있을까. 볼수록 신기롭기까지 하다. 또한, 산을 오를 때는 모르고 스쳐갔지만 내려오는 길에 장도바위를 통과하여 내려다본 절벽과 단풍은 적상산 풍경의 제일 으뜸이 아니었나 싶다. 장엄하게 깎아지른 단애와 단애 밑으로 펼쳐지는 단풍이 치맛단처럼 흘러내리는 산자락을 타고 곱게도 펼쳐진다. 저 모습 때문에 적상산이란 이름이 붙여졌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장소다. 이런 절경을 보지 못하고 처음엔 그냥 스쳐 지나갔다니--- 큰일날 뻔했다.
  

   장도바위를 뒤로하고 이제 조금은 가파르게 펼쳐지기 시작하는 길을 천천히 타고 오르자 이번에는 적성산성 서문지가 나타난다. 사고지로도 쓰이고, 무기를 보관하던 장소로도 쓰이던 산성. 역사적 중요성은 제쳐두고라도 산의 8부 능선에서 만나는 돌들의 차분한 포개짐은 묘한 운치를 느끼게 해준다. 나무들이 일으키는 수직의 분할선에 수평의 분할선이 일으키는 안정성 때문일까. 곡선의 돌들이 연결되어 만들어 내는 저 부드러운 수평의 선 때문일까. 묘한 원근법 속에 펼쳐지는 선들의 미학이 운치 있고 재미있다. 그 선 속에 조각 하나를 앉히자 풍경 전체가 생기를 더한다. 찰--칵---
  

   힘들어하는 아내를 쉬엄쉬엄 달래며 이제 향로봉으로 오른다. 생각보다는 훨씬 잘 오르는 아내. 오랜만에 가져보는 단 둘만의 산행인지라 지금 아내는 있는 힘, 없는 힘을 다하여 힘들게 오르고 있으리라. 말로는 괜찮다고 하지만 한 달이 넘게 담에 시달려온 아내의 몸이 어디 정상의 몸이랴!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아내의 사랑이 이번 산행도 가능하게 했으리라. 그러고 보면 난 참 행복한 놈이다. 세상에서 언제 어느 상황에서건 나를 따르고 이해해 줄 또 다른 내가 있다는 것. 죽는 날까지 변하지 않는 그 마음과 함께 한다는 것. 그 얼마나 행복하고 복 받은 인생이랴! 그런데 한 때는 그런 아내를 부담스러워 했던 날이 있었다니--- 그런 사랑을 무거워했던 시절이 있었다니--- 부끄럽다!! 이제 산이 날 철까지 들게 하는구나!
  

   아내의 지친 몸을 어루만지며 향로봉에 오른다. 천미터가 넘는 산이건만 조망이 별로 되지 않는다. 앞의 산들도 높이가 비슷하여 이곳이 과연 천미터급 산인가 싶다. 안렴대에 오르면 조망이 좀 나으려나? 힘들어하는 아내를 끌고 또 저 능선까지 간다는 것은 무리인데--- 잠시 망설이다가 이쯤에서 아쉬움을 접기로 한다. 산 위에는 이미 단풍이 다 지어 마른나무뿐이고 아래로는 조망이 시원찮다. 이름값을 못하는 산이군. 불만을 토로하며 하산을 시작하자 아내가 산들바람처럼 위로의 손을 내민다.
  

   주춤주춤 오르던 길을 되짚어 내려오는데 이제 본격적으로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한다. 호젓하고 한적했던 산길이 갑자기 시끌벅적 거리기 시작한다. 사람이 많다는 것은 역시 유쾌한 일은 아니다. 사람을 피하면서 내려오는 하산길이 번거롭기만 하다. 그러다 어느덧 다시 장도바위. 앗! 그런데 사람들이 장도바위를 통과하여 산행을 한다. 저 곳으로 통하는 길이 있었구나. 나도 얼른 장도바위를 빠져나가 본다. 장도바위를 빠져나가자마자 갑자기 눈앞에 펼쳐지는 아! 저 천길 단애와 단풍. 팔작지붕의 곡선 같은 저 흘러내림. 빨갛고 파란 단풍의 물결. 이곳에 적상산의 제일경이 숨어 있었다니. 사람들이 아니었으면 이 좋은 풍경을 보지 못하고 적상산을 내내 별 볼일 없는 산이라고 새겨두었을 일 아닌가. 이곳의 풍경을 보게 해 준 이름 모를 산님들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한참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향로봉에서의 아쉬움이 풀리기 시작한다. 그럼 그렇지 괜히 소문이 났으려고---
 

     조금은 가벼워진 마음으로, 조금은 더 넓어진 산길로 다시 하산을 시작한다. 얼마쯤 내려왔을까 어디선가 한줄기 바람이 몰려오더니 나무들을 뒤흔들고 지나간다. 갑자기 우수수 휘날리는 낙엽들. 낙엽들이 비처럼 쏟아져 내린다. 아--눈앞이 아찔해진다. 발길을 멈추고 낙엽비 속에 서서 비를 맞는다. 빗소리에 젖는다. 그들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묻지 않는다. 그들이 지금 어떤 단호한 이별을 하고 왔는지를 묻지 않는다. 그들이 지금 나에게 무어라 속삭이는지 듣지 않는다. 그냥 그 속에 있다. 저 엄숙한 자연의 섭리가 실현되고 있는 그 찰라 속에 있다. 그 속에서 내가 달리 무엇을 하리. 무슨 전언이 필요하리. 눈물이 핑 돈다.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저 자연의 대행로---적상산의 하산길에 한없는 생각들이 날아와 밟힌다.
  

    이제 산을 빠져 나와서 다시 가을을 본다. 산 위에도 산 아래에도 들에도 마음속에도 가을이 내려와 물들고 있다. 빨간 단풍나무 속에 아내를 세우고 사진을 찍어준다. 그것이 나의 마음인줄을 아내는 알까. 배시시 웃기만 한다. 건강해 다오. 우리가 어느 날 사소한 바람에도 흩날려버리는 낙엽이어서는 아니 되지 않겠는가!!

 

  
 
   (장도바위를 빠져나와--)